지나(支那;中國) 역사의 그늘진 역사를 보면 주변 이민족에 대한 침략과 말살, 국내에 있어서는 왕조가 교체가 이뤄질 때마다 수천만인 단위로 반복된 대학살(大虐殺)의 참으로 전율(戰慄)을 일으키는 4000년 역사(四千年史)이다.
지나의 지난날 역사에 있어서 어떻게 이민족(異民族)을 침략하고 지배하며 약탈, 학사, 말살, 차별, 학대를 반복해 왔는가에 대해서는 자국 학생들에게는 가르치지 않는다. 즉 가해자(加害者)서의 반성은 아무것도 없다.
그러나 그들은 우리의 황제민족(黃帝民族)이라며 조작해 자기들 조상이라며 존경되고 있는 황제라는 데서 화려하게 등단시키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여기서 황제(黃帝)라는 것은, 전설상(傳說上)의 황제로서 여러 가지 도구를 만들고 제도를 정해서 지나인(支那;中國人) 문화적 생활을 향수(享受)시킨 최초의 제왕(帝王)이라고 되어 있다.
그런데 서경(書經), 시경(詩經)등의 고문헌에는 황제(黃帝)라는 이름은 볼 수 없다. 그 전설이 성립한 것은 한(漢)의 초라고 볼 수 있겠으나 신해혁명(辛亥革命(1911년)이 일어난 당초는 연호(年號)를 황제기원(黃帝紀元) 4609년이라 칭했다. 그에 의하면 황제의 즉위는 서기 2698년이 된다는 것인데 물론 이것은 아무런 근거가 없다.
오늘은 지나가 얼마나 허구(虛構)의 역사를 조작하고 날조(捏造)하며 왜곡(歪曲)하고 있는지에 대해 고대(古代)부터 지면이 허락하는 대로 살펴보고자 한다.
지나(支那;中國)민족은 어디에서 근원하는가?
지나는 우리의 선조를 조상으로 모시며 역사도 도용하고 있음은 삼황오제(三皇五帝)가 모두 우리의 선조들임에서 증거가 되고도 남는다. 한족(漢族)의 조선(祖先)중에는 어떠한 민족이나 부족이 있었는가는 은(殷)시대가 되기까지 전혀 모르는 일이다.
세계의 학자가 말하는 학설은 여러 개가 있어서 흥미가 있으나 결정적인 것은 지금까지도 알 수 없어서 불명(不明)하다는 것이 답이다. 예컨대 옥스퍼드 대학의 박스톤 교수는 한민족(漢民族)의 조선(祖先)은 다리무분지(盆地)의 주인이라 했고, 프랑스의 학자의 다크페리는 바빌로니아로부터 온 샘족의 일종(一種)왔다고 생각하고 있다.
독일학자의 리히도 포휀은 백인의 고향이라고 말하는 이란이 동시에 한족(漢族)의 발생지가 아닌가 추측하고 있다. 필자는 이미 기술한바 대로 한민족(漢民族)은 없다는 입장이다.
그리고 우리는 이웃하고 있는 중화인민공화국을 중국(中國)이라고 부르고 있으나 이 국명은 이미 김수로왕(金首露王)때 이미 중국이라는 국호를 사용했다. 중국이라 것은 지역의 중심이라는 뜻으로도 부르고 있다.
김유신(金庾信)의 구리(九藜), 백제본기(百濟本紀), 고조선(古朝鮮) 삼국사(三國史)에 나오는 것은 충청도 대전중국(中國), 경기도 수원 중국, 전라도 무안 중국이라고 하고 있었다. 필자는 그래서 이미 익숙한 명칭을 고려해 지나로 했다.
지나인들이 자칭하는 중국이란 주변의 이적(夷狄)에 대립하는 개념이다. 중국이란, ‘우수한 문화, 문명이 꽃피는 중앙(中央)의 나라’라는 의미다. 즉, 중화(中華)라는 것은 지나인이 자국을 부르는 미칭(美稱)인 것이다.
원래는 지나라고 한 것인데 그 유래는 진왕(秦王;死後 秦始皇追敍)이 건국한 [진(秦)]에 있다. 이 국명이 주변국으로부터 구주(歐洲)에 전해져 진, 지나, 차이나등으로 되었다. 인도에서 쓰여진 산스크리트어의 불전(佛典)중에는 중국사정을 기록한 것이 있어서 여기서 지나라 한역(漢譯)되어서 지나에 역수입됐다.
현재도 거의 모든 나라가 중국(中國)이라 부르지 않고 [진(秦)]이라는 어원으로 하는 호칭을 쓰고 있다. 우리는 조선조(朝鮮朝) 500년간 중국(中國)으로 불리어 지고 있으나 세계의 모든 나라는 지나를 어원(語源)으로 하는 지나로 부르고 있다.
요(堯), 순(舜)시대 태평성대라 하나 허구역사다
우리는 지나의 요순시대(堯舜時代)는 태평성대(太平聖代)라 그 누구도 말하지만 요순(堯舜)의 태평성대는 허구이다. 그것은 부도지(符都誌) 18장~19장에 나와 있는 바대로 당시 고조선의 임금(서기전 2333~2240)이 통치시절 유호씨(有戶氏) 부자(父子-아들 유순(有舜))에게 요(堯)를 교화(敎化)하기 위해 파견된 임검씨(왕)의 특사(特使)였다.
내용인즉 부도(符都)의 뜻을 어지럽힌 요(堯)를 깨우치기 위해 단군왕검의 특사로 유인(有因氏)씨의 후손 유호씨(有戶氏) 부자(父子-아들 有舜)를 보냈는데 요(堯)가 두 딸 아황(娥皇)과 여영(女英)과 결혼하도록 유순(有舜)을 회유하니 유순이 이에 넘어갔다. 유순(有舜)은 요(堯)의 후계자로 순(舜;서기전 2284~2224)의 왕이 된다.
그런데 역사는 순(舜)임금은 재위를 이어받아 남쪽의 묘족(苗族)을 정벌하러 가다가 창오(蒼梧)에서 병사하자 아황(娥皇)과 여영(女英)은 상수에 빠져 죽었다고 한다. 이것도 열여(烈女)의 상징으로 하나 부도지부도지(符都誌)의 기록은 다르다.
즉, 유순(有舜)이 요(堯)와 손을 잡으니 유호씨(有戶氏)가 그 죄를 물어 응징해 요(堯)를 감옥에 가두니 유폐(幽閉)중에 감옥에서 병사하고, 유순(有舜)은 창오(蒼梧)지방으로 도망갔다가 원한이 있었던 우(禹)에게 죽임 당하는 것으로 되어 있다.
여기서 원한은 어떠한 원한인가 하면 요(堯)의 후계자로 순(舜)이 되자, 요(堯)의 촉탁을 받아들여 현자(賢者)를 찾아 죽이며 묘족(苗族)을 정벌했다. 이에 유호씨(有戶氏)가 마침내 참지 못해 꾸짖고 그를 토벌하니 순(舜)은 하늘을 부르며 통곡하고 요(堯)는 몸이 둘 땅이 없으니 순(舜)에게 양위하고 자폐(自閉)했던 것이다.
순(舜)의 부(父)인 유호씨(有戶氏)가 이르기를 ‘오미의 재앙이 끝나지 않았는데 또다시 오행(五行)의 화를 만들었음으로 죄는 땅에 가득하고 북두성은 하늘에서 가리어지고 수사(數事;天事)가 많이 어그러져, 인간세상이 곤란하고 고통스러워졌다.’
‘이는 불가불 바로 잡지 않을 수가 없는 것이다. 또 알지 못하고 범하는 자는 혹 용서하여 가르칠 수도 있으나, 알고 범하는 자는 비록 부자간이나 형제간(至親)이라도 용서 할 수가 없다’하고 이에 둘째 아들 유상(有象)에게 명해 권사((權士);유호씨(有戶氏)를 수행하는 수행원)를 이끌고 무리를 모아 죄를 알리고 그를 치게 하니 수년 동안 싸워서 마침내 당도(唐都)를 혁파(革罷)했다고 했다.
이를 요약하면 요(堯)는 갇혀 있던(幽閉) 중에 죽고, 순(舜)은 창오(蒼梧)의 들로 도망해, 도당(徒黨)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요(堯)의 무리 우(禹)가 순(舜)에게 아버지를 죽인 원한(怨恨)이 있음으로 그를 추격(追擊)해 죽여 버렸다. 순(舜)의 두 처(妻)도 역시 강물에 투신(投身)해 자결(自決)했던 것이다.
우(禹)가 곧 정의를 위해 목숨을 바쳐(正命) 공을 세운다(立功) 말하고, 상이군사(傷痍軍士)를 위로하고 돌아감으로 유호씨(有戶氏)가 물러나서 우(禹)의 소행을 관철하니 이때에 우(禹)가 도읍을 옮기고, 무리를 모아 방패(防牌)와 창을 보수(補修)하고 늘려, 유호씨(有戶氏)에게 항거(抗拒)해, 자칭 하왕(夏王)이라 했다고 한다.
지나는 요(堯)는 태평세월(太平歲月)이라 왜곡했다. 이는 태평성대(太平聖代)가 아니고 배신(背信)의 시절(時節) 강력한 단군조선(檀君朝鮮)이 있어서 응징(膺懲)해서 순(舜)이 도망가고 두 처(妻)인 아황(娥皇), 여영(女英)도 자결한 것이다.
여기서 역사는 이를 왜곡해 ‘치수를 잘하니 왕위를 순(舜)에게 양위했다’는 것은 조작으로 왜곡된 것이다. 이것을 우리나라에서는 지금도 학교에서 이 왜곡(歪曲)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이 어찌 태평성대인가! 역사를 바로 잡아야 한다.
(以上은 <우리역사교육원>송준희(宋俊熺)교수의 符都誌 講義案 參照, 引用하였음).
고조선의 기미정책(羈縻政策), 당(唐)도 모방했다
고대 우리나라는 광대한 영역에 이르기 때문에 자국민은 직접 지배했으나 동시에 주변 이민족(異民族)에게는 직접 지배하기에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고조선 때도 100여의 제후국과 부족(部族)의 장(長)이나 수장(首長)에게 고조선 관위(官位)나 작위(爵位)를 준 후에 그 민족 풍습에 따라서 통치를 인정하는 간접통치방법을 썼다.
이를 기미정책(羈縻政策)이라고 한다. 고조선으로 보면 주변 이민족(異民族)을 길들이기 위함에서 황제의 위광(威光)을 이민족(異民族)에게 미쳤음을 인민에게 알리는 것이 최대의 목적이기 때문에 이민족(異民族)이 왕조로 부터 이반(離反)이 없으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이러한 정책은 옛부터 썼는데 서(徐)나라 때도 썼다.
이 기미정책(羈縻政策)을 가장 교묘하게 쓰는 이민족(異民族)이 당(唐)으로 서역(西域) 기타 복속지(服屬地)에는 도호부(都護府)를 둬서 그 배하(配下)에 장관 등 기타 유력자를 임명해서 당(唐)의 지배감(支配感)을 주는 것 없이 통치하는데 성공했다.
왜 이러한 정책을 채택했는가를 말하자면 그것은 우리 고조선(古朝鮮)의 홍익인간(弘益人間)의 이념과 달리 지나는 자기들 황제(皇帝)가 최고의 권력자(權力者)이고, 또 자기들이 사는 지역이 중화(中華), 즉 ‘우주유일(宇宙唯一)의 문명지(文明地)’라고 믿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들의 과대망상증(誇大妄想症)이다.
지나는 이런 생각을 4000년간에 걸쳐서 계속해서 갖고 온 특이(特異)한 민족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들은 실질상(實質上)은 어떠하든 적어도 면목상(面目上)은 주변민족(周邊民族)을 지배 했던 것으로 한 것이다.
지나의 인민도 당초 주변제국(周邊諸國)과 지나제국간(支那帝國間)에 대등한 외교관계가 존재하는 것 같은 것은 꿈에도 생각한 적이 없다. 지금도 그런 태도는 변함이 없는 것을 지나의 정치인에게서 볼 수 있다.
또 그들은 조공(朝貢)이나 책봉(冊封)이라는 형태로 지나와 복속만으로서 조공을 원하는 부족이나 책봉을 받으려고 오는 국가는 모두 삼궤고두(三跪叩頭;세번 끓혀 앉아 아홉번 머리를 땅에 머리를 붙여서 사의(辭儀)를 표하는 것)를 요구 했다
.
이것은 조공관계(朝貢關係)를 인정하지 않고 반드시 모두 삼궤고두(三跪叩頭)를 강제하는 것은 평등한 우호 관계라 말할 수 없다. 우리 고조선(古朝鮮)이 왕조(王朝)로 부터 이반(離反)이 없으면 그것으로 만족했던 것과는 대조를 이루고 있는 것이다.
당(唐)의 책봉제도(冊封制度) 내용의 허구기록도 가관
당(唐)은 지금까지의 지나의 역사상 최대의 영역을 보유하는 대국이 되었다. 시베리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스탄을 거쳐 파밀고원에 이르며, 가라고루산맥으로 부터 히말리아산맥의 북록(北麓)을 따라서 현재의 미얀마의 일부와 라오스의 전부를 다스리는 외에, 베트남의 유애 부근까지 광대한 지역을 영유하기에 이른다.
그런데 668년 고구려의 멸망으로 고구려(高句麗)의 사람들은 20여만이 당(唐)으로 끌려가고 남은 사람들은 현재의 러시아 연해주(沿海州)를 중심으로 지방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698년에 고구려의 부흥을 목표로 여러 부족과 함께 진국(震國)을 건국하고, 713년에는 발해(渤海)로 개칭해서 국위(國威)떨치게 했다.
발해(渤海)는 고구려 영토였던 지역으로부터 당(唐)을 몰아내고 그 지역을 신라와 나눠 가진 강대국이었다. 그런데 당(唐)은 현종(玄宗;685~762)이 발해국왕을 발해군왕(渤海郡王)에 봉(封)해서 회유했다고 날조한다. 지나는 발해도 동이(東夷)라 하며 무서워했다. 이런 날조는 가관이다.
당시 발해(渤海)는 926년 요(遼)에 의해서 멸망될 때까지 일본과도 사절을 34회나 주고 받았다. 그것은 정치적 목적보다도 무역에 의한 이익을 목적으로 교역을 하였는데 일본은 발해사신(渤海使臣)을 부두에 가서 정중히 맞이함에도 불구하고 자기들이 형(兄)으로서 접했다고 역시 역사 조작국답게 일본도 왜곡하고 있다.
이런 날조(捏造)로 당(唐)은 최성시(最盛時)에는 800가까이 기미주(羈縻州)를 두었다고 하고 있다. 그들은 기미정책(羈縻政策)을 교묘히 잘 운영한 것은 사실이나 자기들이 살고 있는 곳을 정주(正州)로 하는 것이 첫째, 대전제(大前提)인 것이다.
둘째는, 왕이 다스린 토지로서 한족(漢族)의 중앙정부로부터 파견된 도호부의 감시 하에 각각의 민족자치를 인정한 지역을 기미주(羈縻州)인데 정주(正州)이외에 6개로 나눠 각각 도호부(都護府)를 설치했다.
셋째는, 독립국가로서 존재해 그 지배하에 우호관계를 구축하는 것을 희망하는 경우에는 왕은 지나의 관작(官爵)을 주어 군신관계를 맺고 이를 책봉국(冊封國), 혹은 외번국(外藩國)으로 불렀다. 이 경우 책봉국(冊封國)의 요청이 있으면 지나 왕조는 정치문제에 개입한다든가 원군을 보내어 돕는 경우다.
넷째는, 지나 왕조에 사자(使者)를 파견함과 함께 조공(朝貢)만을 요구하는 것을 조공국(朝貢國)으로 부르고 있다. 이 경우 이왕 왔는데 몇 번이고 삼궤고두(三跪叩頭)를 해도 좋다고 생각하는 각지의 수장(首長)은 옛 부터 근대에 이르기까지 많이 있었다. 예를 들면 한때의 ‘일본,’ 임읍(林邑), 운남(雲南)지방에 세워진 ‘남조(南詔)’등이 이에 해당한다.
다섯째는, 조공국과 같은 우호관계가 없는 만국(蠻國)으로서 지나의 왕의 권위에 불복할 뿐 아니라 지나의 군(軍)도 이길 수 없어 무시할 수 없을 때는 그 군주(君主)에게 혼인관계(婚姻關係)를 맺어 우호관계를 유지하려는 정책으로 대적국(對敵國)으로 불렀다. 당대(唐代)에는 돌궐(突厥), 토번(吐蕃)이 이에 해당한다.
여섯 번째는, 대등관계(對等關係)에서 사절(使節)을 교환하는 것으로서 이를 대등국(對等國)으로 불렀는데, 당대(唐代)에는 대식(大食)이라 부른 이슬람제국이 이에 해당한다.
일곱째는, 절역(絶域)이라고 불러서, 일체 국가 간 교섭이 없고, 지나 왕의 은혜가 미치지 않은 지역이다. 물론 유럽제국을 지칭하고 있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러한 책봉체제(冊封體制)는 20세기 까지 동아시아의 국제관계를 갖고 있었다.
글을 맺으며
지나는 자기들 한민족(漢民族)을 내세우나 이미 기술한 바대로 한족(漢族)은 존재하지 않는다. 이미 요순시대(堯舜時代)와 특히 3세기 말기(世紀末期) 몽강(蒙疆)의 제민족(諸民族)과 티베트족이 대거로서 지나 거주지에 침입해서 소위 오호십육국시대(五胡十六國時代;(4세기~5세기경)가 나오는데 이들에 의해서 이때까지의 한민족(漢民族)이라는 인종은 거의 절멸(絶滅)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이민족과의 혼혈에 의한 새로운 한민족(漢民族)이 출현된 것은 특필할 일이었다. 따라서 수(隨);581~619)부터 시작하는 현재의 지나인은 신종(新種)이라는 한민족(漢民族)인 것이다.
(以上은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42面~154面 以下,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지금은 이를 모두 긍정적으로 받아들이고 따지고 보면 한, 중, 일은 같은 조상의 피를 나눈 사람들로서 이제는 적대시(敵對視)와 대립(對立)보다 서로 화합하고 힘을 합해 성실한 신의(信義)로 성심, 성의를 가지고 이웃과 같이 협력해 세계 평화에 기여하는 한·중·일 3국이 취할 일이라 사료되며 우리가 바라고 기대해지는 상황이다.
( 以上은 최태영, ‘단군을 찾아서’.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최인, ‘한국학강의’,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 ’九黎系 倭-日本史‘.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우리역사(東夷傳」. 김부식 찬(撰) 「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九犂系 加羅史.’ ‘斯盧新羅史’.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황순종, ‘동북아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윤진영 編集 「우리역사(東夷傳」. (金東洛),‘천부경(天符經)과 문디 거시기.’ 金吉萬), ‘上古朝鮮과 古韓國史’ ‘上古朝鮮의 歷史’. 文定昌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津田秀夫外 3人, ‘ひとりで學べる 日本史’. 石井進外, ‘詳說日本史, 田邊昭三, ‘謎の女王卑彌呼-邪馬臺國とその時代’. 和歌森太郞),‘大王から天皇へ’ 近江昌司 外 5人 編著, ‘ヤマト王權の成立’. 上田正昭. 外 5人 編著, ‘謎の五世紀’.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上, 中, 下’外 多數의 書冊을 參照하고 本文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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