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라의 태종무열왕(太宗武烈王)은 우리 백제와 고구려를 당(唐)의 힘을 빌려서 멸망하게 한 왕으로 역사적으로 높이 평가 할 수 없는 왕인데도, 일제(日帝)의 조선침략에 도움이 되기에 총독부가 설치한 ‘조선사편수회’기록이 삼국통일 했다고 높이 평가하는 신라 무열왕은 우리 한민족을 배신했기에 결코 높이 평가할 수 없는 왕이다.
당시 신라는 지나(支那)북사(北史)에서 지적한 대로 고구려, 백제, 신라, ‘삼국 중 가장 약한 신라는 백제의 제후국(諸侯國)이었다.’ 그런데 대야성에서 백제군에 죽은 딸과 사위 품석의 원수를 갚으려고 같은 동족을 외세를 끌어들여 동족의 대제국인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하게 한 것은 같은 한민족(韓民族)으로서 용납이 가지 않는다.
또한 무열왕은 백제·고구려가 망한 후 당의 문물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이는데도 한 몫을 한 왕이었다. 그 첫째로 성명을 둘 혹은 세문자로 통일했다. 원래 신라인은 4~5자 전후의 이름이 많았는데도 불구하고 백성에게 강제한 것이었다.
두 번째는 관료(官僚)를 만들기 위해서 원래 신라에서도 문관귀족과 무관귀족의 수험 자격이 주어져 인재를 등용하는 제도가 있었으나 누구라도 수험을 보게 한 당의 제도를 수용한 것은 일보진전 한 것이나, 당의 ‘과거(科擧)’제도의 수험과목까지 그대로 채용해 사마천의 사기(史記)에서 출제해 민족의 정체성을 잃게 했다.
즉 무열왕은 한민족(韓民族)의 역사를 부정한 왕으로 배달민족(倍達民族)의 자주성을 포기한 왕이 된 것이다. 이는 마치 일제시대(日帝時代) 우리역사를 일본역사로 대신한 것과 진배없는 이해 할 수가 없는 일로 높이 평가 할 수 없는 일이다.
무열왕은 우리나라 역사에는 삼국을 통일했다고 영웅으로 되어 있으나, 우리 고유의 전통을 강제적으로 고친 것은 일제(日帝)의 창씨개명(創氏改名)과 무엇이 다르냐면서 일본의 창씨개명정책(創氏改名政策)을 비난하기에 앞서 무열왕의 소행을 교육할 필요가 있는 것 아니냐고 비아냥하는 일본의 학자가 있음도 알아야 한다.
더구나 당과 결탁해 같은 한민족인 백제를 망국의 길로 이끌고 이어 고구려의 남생, 남건, 남곤 형제간의 내분의 틈을 타서 멸망하게 해 백제·고구려 사람들을 학살시킨 무열왕의 행태는 한민족을 반역한 수치로 여겨질 일이다.
오늘은 백제를 멸망으로 이끈 웅진성(熊津城)의 니식(禰植)을 위시해 고금(古今)에서 자신 안일만을 생각하는 족속들의 역적행태(逆賊行態)를 잠시 살펴보고자 한다.
의자왕을 당에 넘긴 만고역적 니식(禰植)
먼저 나당연합군이 백제로 침입해 오자 사비성(泗泌城;玆陽)에 있었던 의자왕은 성을 나와서 웅진성(熊津城)으로 옮겨 나당연합군(羅唐聯合軍)에 대항하려고 했으나 성주(城主)인 니식(禰植)의 역적행위로 볼모의 신세가 되고 만다.
당시 나당연합군의 침략을 받은 의자왕은 사비성(泗泌城)에 있다가 군대를 재정비해 나당연합군과 쟁패(爭覇)를 겨뤄 백제를 구하려 웅진성으로 갔는데 간신배인 성주 니식의 역적행위로서 당에 넘겨지는 신세가 되어버렸던 것이다. 이는 군신의 도리를 저버린 것으로 있을 수 없는 참으로 기가 막히는 패악의 극치다.
웅진성에 온 의자왕을 성주(城主)인 니식은 장군다운 결사항전의지는 전혀 찾아볼 수 없고, 의자왕을 볼모로 자신의 안일만을 생각해 당에 귀순(歸順)을 택한 반역의 매국노가 되어 강대한 백제를 멸망하게 한 주인공이 되었던 것이다.
백제 군사를 수습하고 나당에 항전을 하려던 의자왕은 속수무책으로 매국노인 웅진성 성주 니식에게 천추의 한(恨)을 품고 대륙을 호령하던 강대한 백제는 신하 장수를 잘못 둔 탓에 당에 항복 할 수밖에 도리가 없게 했다.
이렇게 된 것은 웅진성의 결정권자가 의자왕이 아니라 왕을 배신한 니식이 갖고 있었기에 의자왕은 믿었던 부하장군 니식의 반역에 눈물을 머금고 광대한 대제국(大帝國)을 당에게 내주게 된 것이다. 이때가 660년 7월18일이었다.
이 웅진(熊津)의 위치는 태산(太山)의 서쪽에 있고, 한성(漢城)은 하북성(河北省)에 있었다. 우리는 웅진을 충청도 공주(公州)지역으로 알고 있으나 이는 역사왜곡에 기인한 무지다. [삼국사기(三國史記)]와 <구당서(舊唐書)>에 의하면 웅진(熊津)의 동쪽에 지라성(支羅城), 윤성(尹城), 대산(大山), 사정(沙井)등이 있다고 했다. (熊津之東拔其支羅城及尹城大山沙井).
한편 당은 백제가 망한 그 땅에 웅진(熊津), 마한(馬韓), 동명(東明), 금련(金漣), 덕안(德安)등에 도독부(都督府)를 뒀다고 했다. 이곳은 반도가 아니고 대륙의 하북성(河北省), 산동성(山東省), 하남성(河南省), 안휘성(安徽省), 강서성(江西省)지역인 것이다. 이 같이 백제가 쉽게 무너진 것은 의자왕이 영토를 넓혀서 백제의 영역이 너무 광역이었던 것과 백제의 충신인 성충과 흥수의 말을 듣지 않은 것이 가장 큰 결정적인 패인으로 보고 있다.
한편 백제를 당에 팔아넘긴 니식은 그 공로로 당의 하찮은 벼슬을 받았으나 그가 죽은 후 묘비에는 백제인(百濟人)이라 하고 하찮은 벼슬의 직명이 쓰여 있고 역사는 그를 매국노 니식으로 기억하고 있을 뿐이다.
어느 때나 국가의 흥망성쇠에는 반역과 부귀영화를 위해 모반(謀叛)도 있음을 보는데 백제의 경우 너무나 엄청난 것으로 오늘날 우리역사가 잘못되는 그 시발점이 되었다.
신의(信義) 저버린 배신자들의 썩은 정신이 나라를 망하게 했다
지난 역사를 보면, 삼국시대 이후 발해(渤海)의 멸망도 대조영(大祚榮)이 대진국 건국 후 거란을 속국으로 삼아 야율아보기(耶律阿保机)를 대장군 겸 제후(諸侯)인 요왕(遼王)에 봉했는데, 거란인인 야율아보기는 926년 당시 발해의 혼란한 국정을 틈타 반란을 일으켜 10만 대군을 이끌고 상경성에 입성, 홀한성에서 요양 중인 황제 애제를 체포하고 양위를 강요함으로 애제가 양위함으로써 대진국은 망하게 된 것으로 이미 기술한바 있다.
이런 행태는 근현대사에서도 볼 수 있는데 그 참담함은 일제 강점기에도 조국광복을 위해 목숨을 내놓고 싸우는 한 편에는 밀정(密偵)들이 많았다는 것이다. 그 수가 너무나 엄청난데 놀라움을 금할 수 없고 이 기회에 그 작태를 말하게 된다.
그것은 광복군(光復軍)과 상해 임시정부에 밀정이 895명이 있었다는데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그 중에는 안중근(安重根)의사와 거사에 참여한 우덕순(禹德淳)도 복역 후 밀정으로 역적이 되어 우국지사를 죽음으로 몰고 간 비극을 자아내었다는 것이다.
그는 허울 좋게도 조선인민회 하얼빈 책임자로 활동하며 우리 애국자를 일본에 넘긴 파렴치 역적이 된 것이다. 일제의 개가 되어 일본을 위해 역적노릇을 하는 것이었다.
일본영사관의 지도를 받으며 독립의사들을 감시, 첩보비(5000원)를 받으며(일반인은 45원) 조선인을 조선인으로 감시했다. 더 놀라운 것은 청산리전투의 영웅이신 김좌진(金佐鎭)장군의 비서 이정(李楨)도 밀정이었다. 참으로 기가 찰 일이다.
당시 895명의 조선인 밀정이 있었고 마적단(馬賊團)도 밀정이었다는데 김좌진 장군 비서(秘書)인 이정(李楨)은 광복 후 훈장도 받고 독립유공자로 국립묘지에 안장되었다. 이러한 경우가 비일비재함은 얼마나 우리의 행정이 허술함을 말해주는 것이다.
조국의 광복을 위해 온 심혈을 기울일 때 한편에서는 이 애국자들을 작살내는 밀정이 밝혀진 것만 895명이고 밝히지 못한 숫자를 합친다면 이 숫자보다 더 많은 밀정이 우리주변에 많았다는 것이다.
이 밀정들에 의해 그 수많은 애국지사가 이들 때문에 당한 각가지 수난은 상상을 초월한다. 그 수난은 일제(日帝)가 72가지 고문(拷問) 기술(技術) 가지고 우리에게 강행했는데 그 가혹함은 기름을 칠하고 인두로 지지는 고문 등이었다.
그들 밀정은 일제시대에도 고액의 보수를 받으며 임정의 요인들과 광복군의 비밀 정보를 일본에 넘겨주며 자신들은 초호화판의 삶을 영위한 것이 드러났는데 이는 조선조부터 우리사회의 부패한 상황이 오늘날까지도 반영되고 있음을 알 수 있는 비극이다.
이러한 밀정은 다 밝히지 못했으나 895명은 5만장의 보고서를 검색해서 찾은 것을 공개했는데 남은 보고서를 더 검색하면 밀정이 더 있을 것이라 하는데 놀라움을 금할 수가 없는 일이다. (이 내용은 2019년 8월13일 밤10시~53분 방영된 KBS방송 내용이다.)
1920년~1930년대 광복군의 주력이 독립군이었다. 이를 1940년 광복군을 창립하려고 새로 계획하고(9월15일) 1942년 광복군을 창립해 투쟁을 하는데 이 투쟁을 무력화시키는 밀정은 그 수가 줄지 않았던 것은 우리의 정신상황이 정상이 아님을 말해 준다.
이렇게 된 것은 우리의 교육이 없었음을 의미하는 것으로, 지금도 우리 교육부는 있으나 마나한 부서가 되고 있다. 역사교육은 말할 것도 없고 이로 인한 가치관의 변질은 국가와 사회공동체의식도, 연대의식도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박약하고 이기적이고 사회의식이 전혀 없는 국민들이 되고 있어 사회가 닫혀 있는 것이라 보고 있는 것이다.
우리사회는 열려져야 하는데 이게 없다. 개방사회(開放社會)로 옮겨져야 하는데 개방 사회의식이 없으니 민족주의도 민주주의도 말뿐 참된 민주주의는 갖지 못하고 있다.
양심의 자유 독립이 없는 사대주의, 불신감은 큰 문제다
조선조 500년 이후 권력주변에서 살아온 사대주의 사상이 임금의 주변에서 살았고, 한일합방 후 36년간은 총독의 권력주변서 양심의 자유 독립이 없는 가장 불쌍한 삶을 살아와서인지 우리사회는 ‘사회의식’이 전혀 없고 불신감만 팽배해 있다.
어느 정도만큼 불신감이 팽배되었는가? 법을 불신케 되었다. 이는 무서운 이야기다. 무법(無法), 파법(破法), ‘떼법’이 판을 치는 형세이다. 이것은 정부가 제대로 법을 지키지 않은데서 국민의 불신을 받고 있다고 말하는 국민이 대다수인 것을 덮고 있다.
특히 4·15선거의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부정선거를 했다는 것이 근래의 사회여론인데 모든 것을 투명성 있게 바르게 통치를 바라고 있다. 모든 분야에 공정하게 법을 제정하고 국민이 애국심이 나오도록 해야 하는데 그러지도 못하고들 있다.
일방적 굴종만을 강조하는 정책은 지양하고 선진국이 취해온 것처럼 국가를 위해 희생한 국민의 몸을 바쳐서라도 국가민족을 위해서 부담 없이 몸을 던질 수 있을 만큼 배려가 있어야 함에도 정부와 국회는 무엇을 하는지 이에 관심 없는 것은 정상이 아니다.
필자는 수차례에 걸쳐서 1950년 6·25가 터지자 이에 자원해서 참전한 소년학도병 2만9600명, 지금88~90세의 노병을 16대 국회부터 19대 까지 16년간 소년·소녀병들에 관한 법안하나도 처리 안한 국회는 국회인가, 국회는 무엇을 한 것인가 라고 개탄한 바 있다.
14~17세의 나이에 나라를 위해 싸운 ‘소년 소녀병들의 전우회’가 16년 만에 해산하며 2500여명의 전사자를 내며 싸운 2만9600명의 소망을 저버린 국회는 그 존재가치도 잃은 느낌이다. 이런 국회를 두고 국회의원이 아니라 국개의원이라 하는 오명이 붙었다.
진작에 유공자를 최우선으로 예우를 했어야 함에도 이들의 보훈보상을 6·25소년·소녀병 전우회가 16년 동안 호소해도 ‘국가유공자 예우법’은 무산돼 전우회 간판을 내리는 사진을 보며 9순이 된 윤한수 회장이 16년간 4대에 걸친 국회, 이게 대한민국 국회다. 이런 국회라면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국(개)의원이 아닌가 라는 말을 하게 되는 것이다.
이 유공자들을 우선적으로 국가유공자로 모셔야 함이 도리인데도 국회는 끝까지 외면한 것은 세계 어느 나라에도 없다. 국회의 선량들이 진정 우리나라 국민인지 한심하기 짝이 없는 처사를 이해 할 수가 없다. 이것이 오늘의 우리의 자화상 아닌가!?
어린 나이에 목숨까지 버리며 전선에 나가서 희생한 공로자를 이렇게 푸대접하는 것을 그 어느 나라에서도 볼 수가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국가의 위난이 닥치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며 국가에 헌신하고 희생한 6·25참전소년 학도병에 대한 법안처리를 않는 국회는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 것 모르고 있는 있으나 마나한 국회 아닌가?
또한 역대정부가 일제와 싸운 독립투사의 자손들을 외면하고 아무런 보상을 하지 않았던 것도 문제였다. 예를 들면 윤봉길 아들은 가난으로 무학자(無學者) 되어 끼니를 걱정하는 지경에 처했으나 제1공화국 때부터 그대로 방치해 왔었다.
자유당 시절 윤태일(尹泰一) 서울시장이 시청수위(市廳守衛)로 채용해 손자는 교육시켜 할아버지 윤봉길의사기념관 책임자 시켰는데 이도 갈아 친 사례는 이를 반증한다.
글을 맺으며
지금은 88~90세의 노병이 된 6·25 참전 소년학도병 2만9600명에 대해 국회는 무엇을 하는지 외국같이 예우를 해야 함에도 이들을 보훈보상을 미루는 저의가 어디에 있는지 안타까울 따름이다.
이 유공자들을 우선적으로 모셔야 함이 도리인데도 이를 미루는 선량이 우리나라 국회의원인지 한심하기 짝이 없다. 19대 국회는 무엇을 우선해야 하는 것도 모르고 있었다. 이에 20대 국회는 이들을 제대로 대우해 애국심을 배양하도록 법제정을 바라진다.
“정치인(政治人)은 국익(國益)을 우선하고 학자(學者)는 진실을 밝혀야 한다. 언론인(言論人)은 사실(事實)을 밝혀야 한다”는 말이 있다. 국가의 위난이 닥치자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쳐서 헌신하고 희생한 6·25 참전소년 학도병에 대한 법안처리가 되지 않고 있어서 국회의 평가를 다시 20대 국회에 바라지는 것이다.
그 누가 말한 것인지는 모르나 “과거는 해석에 따라 바뀌고 미래는 결정에 따라 바뀌고, 현재는 지금 행동에 따라 바뀐다. 바뀌지 않기로 고집하면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인생의 가치는 더 많은 소유가 아니라 더 깊은 인격이고 인생의 진정한 목적은 무한한 성장이 아니라 끝없는 성숙이다. 인생의 참다운 아름다움은 성공이 아니라 성품이다”고 말한 것을 읽은 글이 인상에 깊이 남는 오늘이다.
끝으로 신라 무열왕(武烈王)과 백제웅진성(熊津城)의 성주(城主) 니식(禰植)의 의식과 안중근(安重根)의사와 거사(擧事)에 참여한 우덕순(禹德淳)과 김좌진(金佐鎭)장군의 비서(秘書) 이정(李楨)등 895명의 밀정(密偵)의 의식들은 우리가 버려야 할 패배의식과 불의(不義)에서 임을 자각하고 크게 반성하고 참회가 요구되고 있다.
지금 우리가 현실에 도전해보면 우리가 어떻게 나타나는지 잘 알 수 있다. 우리는 변해야 한다. 국가도 변해야 한다. 변화되는 사회는 남아 있다. 우리가 변천하는 사회와 같이 살 때 우리도 산다. 사회악을 막고 선을 행하며 현실에 충실해야 한다.
한편 우리나라 종교 분포를 보면 서구의 문명의 매체라 볼 수 있는 기독교인이 많은데 기독교, 신교의 원리는 잘못에 대한 ‘예언자적인 항거원리’로 어떠한 권력에서도 신성해서 잘못된 권력에는 항거해서 바른 방향으로 가도록 했다.
그런데 지금 우리나라 사회는 ‘기독교가 죽어있다’는 말을 자주 듣고 있음에 기독교도 정신근대화에 앞장서온 전통을 망각해서는 아니 되는데도 망각된 것 같은 양상은 바람직하지 않은 점 인식해야 한다. 사회의 기대치에 못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어떠한 권력체제에서도 기독교의 예언자적 원리는 신성했다. 정의감만 있으면 우리는 빛나는 승리와 새 역사창조를 할 수 있다. 기독교인은 청교도 신앙으로 문제를 풀어야 한다. 청교도에 무엇이 있었는가. 열정, 사명감, 세계의 기독화가 있었다.
2020년 5월 우리의 정신적 상황이 새 변화를 기대하게 되는 오늘, 역사는 변하는 것, 우리가 살기 위해서는 변화해야 하고 잘못된 역사도 바로 세워가야 한다. 오늘의 잘못을 후대에 넘겨주면 우리의 미래가 없음을 자각할 때라 본다.
( 以上은 최태영, ‘단군을 찾아서’.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최인, ‘한국학강의’,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 ’九黎系 倭-日本史‘.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우리역사(東夷傳」. 김부식 찬(撰) 「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九犂系 加羅史.’ ‘斯盧新羅史’.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황순종, ‘동북아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윤진영 編集 「우리역사(東夷傳」. (金東洛),‘천부경(天符經)과 문디 거시기.’ 유우찬, ‘한국사의 쟁점’. 金吉萬), ‘上古朝鮮과 古韓國史’ ‘上古朝鮮의 歷史’. 文定昌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津田秀夫外 3人, ‘ひとりで學べる 日本史’. 石井進外, ‘詳說日本史, 田邊昭三, 上田正昭. 外 5人 編著, ‘謎の五世紀’. 外 多數의 書冊을 參照하고 本文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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