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高麗)는 서기 918년에 왕건(王建;877~943년)이 고구려계의 영웅으로 국호를 고려라 칭하며 건국했으며 935년에는 신라 경순왕으로 부터 선양(禪讓)을 받는다. 936년에는 후백제의 견훤(甄萱)의 항복으로 후백제 병합해 후삼국을 통일했다.
당시 상황을 보면, 신라는 혜공왕(765~780년) 대를 기점으로 수많은 반란사건이 일어나가 시작했다. 이러한 혼란은 왕위 쟁탈전으로 시작해 싸움에 이긴 자가 왕이 되는 일이 다반사로 150여 년간에 임금이 20여명이 바뀌고 즉위한지 1년이 못되어서 죽는 경우도 있었다. 백제 또한 비슷한 상황이었다고 보고 있다.
9세기경이 되면 신라는 중앙귀족과 지방호족(豪族)간 싸움의 치열해져 전국적(戰國的)인 군웅할거(群雄割據)의 시대가 되었다. 고려를 건국한 왕건은 고구려 정신을 이어받아 대 북방정책에 힘을 기울이는 한편 왕실의 기틀을 튼튼히 했다.
한편 거란(契丹) 등 외적의 침입으로 어려움에 빠지기도 했으나 그 침입을 막아내고 국가적 위기를 극복한 고려는 국력과 높은 문화의 발전으로 전성기를 이룬다. 그런데 역사를 조작하고 왜곡하는 일본은 고려가 송(宋). 요(遼), 금(金)에 복속되었었다고 고려를 비하(卑下)하며 역사왜곡하나 고려가 이들 나라에 복속된 적이 없다.
잠시 만주의 역사를 살펴보면, 여진족(女眞族)의 아골타(阿骨打)는 1115년에 금(金)을 건국해서 요(遼)를 멸하고, 송(宋)을 멸해 회수(淮水)이북을 자기영토로 했다. 여진족(女眞族)은 원래 반수렵(半狩獵)·반유목민(半遊牧民)이었으나 요동반도에 700년간이나 세력을 지배하고 살고 있었다. 대륙을 호령한 고구려는 서기전 37년 건국 이후 668년까지 지배했고, 서기 698년에 건국해서 만주평야까지 지배한 발해(渤海)도 고도의 농경기술을 갖고 여진족을 그들의 지배 하에 두고 있었다.
오늘은 지나(支那)와 일본이 비하(卑下)할 나라가 아니라 정치, 경제, 문화가 당시 다른 국가에 영향을 준 우리민족의 삼국시대 후 고려 등의 나라를 살펴보고자 한다.
고려(高麗)의 강역은 반도가 아니라 장성(長城)이남이다
고려(高麗;918~1392년)는 서기 918년에 왕건(王建;877~943년)에 의해 건국된 것을 우리나라 국민이면 모두 알고 있다. 그러나 건국 시, 그 강역에 대해서는 아직도 일제(日帝) 암흑시대의 왜곡한 영역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어서 잘못되고 있다.
고려의 영토는 만주에 있는 장성(長城) 이남인데도 이를 일제(日帝)가 조작한 영역으로 현재 우리 강역(江域)에도 미치지 못하는 함경도 전체가 고려 강역에 포함도 되지 않고 있는 참으로 기가 막히고 한심한 상황이다.
고려는 장성(長城) 이남의 만주의 요양(遼陽), 심양(瀋陽)도 고려의 강역이라는 기록을 남기지 않아서 고려 말기 이성계(李成桂) 장군이 고려의 땅인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을 평정한 기록을 남겼다. 당시 이곳으로 갈 때의 지명은 장춘이었다.
고려는 요동반도는 물론 만주 일대가 본래 고려 땅으로 반도가 아님을 분명히 말하고, 그곳을 통치한 것이 고구려가 아니고 고려임을 고려사 권41~42에 기록하고 있다. 또한 고려황성(皇城)이 압록강 북쪽에 있음을 고려사권43에 기록을 남기고 있다.
우리가 노래로 부르는 황성(皇城)이 만중의 철령(鐵嶺)의 남쪽3 백리에 있다고 기록했다. 또 철령(鐵嶺)으로부터 북으로 가면서 문(文), 고(高), 화(和), 정(定), 함(咸)등 여러 고을을 지나 공험진(公嶮鎭)까지는 원래부터 고려의 땅이다.
철령(鐵嶺)으로부터 북쪽으로 공험진(公嶮鎭)까지는 여러 마을을 기록하고 있는데 화주(和州)는 쌍성에 두었다고 했는데 철령 북쪽에 지금도 쌍성이 있다. 이곳은 고려 땅이다. 그런데 자학 반도식민사관자들은 이곳이 고려 땅임을 모르고 있다.
우리는 고구려 땅에서 일어난 고려(高麗), 요(遼)는 다른 민족역사로 가르치나 요(遼), 금(金), 원(元), 청(淸)은 우리역사에 펀성되어야 할 역사인데 지나에 빼앗겼다.
소손녕(蕭遜寧)이 서희(徐熙)에게 말하기를 “당신나라는 옛 신라 땅에서 건국했고 고구려의 옛 땅은 요(遼)에 소속되었다.(遜寧語熙曰汝國興新羅地高句麗之地我所有也)” 이 같이 현재 가르치고 있는 고려 강역을 벗어난 기록들이 나타나고 있다.
1035년에 구축한 송령(松領)은 금복 개해의 서북쪽에 있다. 9월 “서북지방 송령(松領) 이동에 장성(長城)을 구축해 변방 적들의 침입을 방어하는 요충지로 삼았다.(是月築長城於西北路松領迆東以枙邊寇之衡)”고 했다.
이곳은 현재 가르치고 있는 고려 강역(疆域)을 벗어난 기록들이 나타나고 있다. 이곳은 단군조선, 고구려가 있었던 영역이다. 또한 고려의 일식관측지가 만선(滿鮮;滿洲와 朝鮮) 지역을 벗어나지 않고 있어서 장성(長城) 이남임이 입증된다. (以上은 오재성, ‘九麗系 高麗史 연구’ 8面~23面 參照, 引用하다.)
고려는 외국에 복속된 적이 없다
일본사가(史家)중에는 고려를 비하하기 위해 고려가 963년 송(宋)에 복속하고, 994년에는 요(遼)에 복속되고, 1126년에는 여진족(女眞族)의 금(金)에 복속되었다고 왜곡하고 있으나 복속된 일이 없다. 오히려 고려가 일본 등을 제압한 역사를 본다.
요사(遼史)에 보면 요제(遼帝)가 고려를 침략코자하니 소적열(蕭敵烈)이라는 신하가 고려는 소국이나 성(城)이 완고함으로 이겨낼 수 없다했다.(遼史卷88 列傳)
우리나라 고대역사상 가장 큰 전쟁은 당태종(唐太宗)의 서부 나라들을 평정한 후 당(唐)의 천하정병(天下精兵)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침략했으나 안시성(安市城)에서 패(敗)한 것은 고구려(高句麗)의 성곽(城郭)이 특이한 데 기인(基因)한 것이었다.
지봉류설(芝峯類說)에 당(唐)나라 사람이 고구려인처럼 성을 잘 지키고 성을 잘 공격하는 민족은 없다고 했다.(芝峯類說 卷之3 征伐). 고려역시 궁술(弓術)과 축성술(築城術)이 강대족(强大族)과 투쟁하는데 지대한 공적을 남긴 것이 고려였다.
고려는 세계사상 최초에 발명한 고려의 철활자(鐵活字)가 문화발전에 지대한 공헌이 있다. 다만 고려의 검차(劍車)와 철각선(鐵角船)이 거란(契丹), 여진(女眞)을 방위하는데 공헌한 것을 모르는 국내외 사람이 많은데 고려는 다른 나라보다 앞서 있었다.
이왕 말이 나온 김에 말할 것은 고려는 나약한 나라가 아니었다. 특히 고려의 병선(兵船)은 천하무적(天下無敵)이라할 만큼 몽골병이 고려침공 후 강화도에 침입을 하지 못한 것은 고려병선(高麗兵船)이 우수한 데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고려의 철각선(鐵角船)을 계승한 것이 충무공의 거북선이다. 이 거북선은 근대한국사에 있어서 가장 격렬한 민족투쟁인 임진왜란 때 크게 공헌했다. 충무공전서(忠武公全書)에 보면 대소전쟁에 거북선으로 23번 싸워 23승(勝)의 전승(全勝)을 기록해 세계해전사상(世界海戰史上) 가장 큰 성과를 올렸다. 이는 충무공의 대업(大業)이 거북선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이상과 같이 우리민족의 역사상 대사건은 농병제도(農兵制度), 특이한 궁술(弓術), 특이한 축성술(築城術), 금속활자(金屬活字), 특이한 조선술(造船術)과 철기(鐵器)등에 의해 이뤄진 것으로 고려시대에 그 꽃을 피운 것을 숨길 수 없다.
일본이 고려의 속국을 원할 만큼 고려는 훌륭했다
일본사에 [고려 11대 문왕시대(文王時代)에 일본의 승(僧)이 문왕(文王)을 축원(祝願)한 일이 있다. 그것은 일본인이 조선으로부터 도입된 문물과 사상이 일본의 정치, 경제, 문화에 미친 작용은 일본인이 상상(想像)이상으로 크다]고 했다.
그런데 일본승려(日本僧侶)가 고려문왕(高麗文王)의 수(壽)를 축원(祝願)한 것은 일본이 고려에 예속(隸屬)되고 고려가 일본을 예속시킨 것으로 해석할 수 있다.
고려사(高麗史) 공양왕(恭讓王) 3년 10월 조(條)에 [일본이 승려(僧侶)인 현교(玄敎), 도본(道本)등 40여인(餘人)을 고려에 보내어 공물(貢物)을 바치고 표문(表文)을 올리며 신(臣)을 칭해 속국(屬國) 되기를 자청했다고 했다]고 했다.
일본이 승려(僧侶)를 고려에 보내어 속국(屬國)되기를 자청했다는 고려사(高麗史)의 기록은 일본의 승려가 고려 문왕의 수(壽)를 축원 했다는 일본인의 기록과 합치된다. 즉, 고려 문왕(文王)의 수(壽)를 축원하고 그 승려가 고려에 와서 속국(屬國)되기를 자청한 사실은 고려가 일본을 지도, 지배한 것을 실증하는 것이다.
단(旦), 고려시대(高麗時代)에 왜구(倭寇)가 고려를 침범한 것은, 일본의 내정(內政)이 문란(紊亂)해 국민을 통솔치 못함으로 난민(亂民)이 정부를 배반하고 고려의 해안의 변지(邊地)를 침범하므로 고려가 왜구에 시달린 것은 사실이다. 왜구의 침범은 1223~1265의 왜구와 14세기, 1350년~1391년 경인년(庚寅年)의 왜구는 40년 동안 591회나 침입해 약탈을 일삼은 기록을 갖고 있다.
더욱이 1392년~1555년 이후의 조선조시대의 왜구(倭寇)는 40년 동안 591회의 침범함으로 이를 본 조정(朝廷)은 울릉도(鬱陵島)주민을 이주(移住)시키기까지 했다.
이후 조선과 일본관계는 임진왜란 후 통신사를 교환하며 선린관계(善隣關係)를 유지하며 12번의 조선사신(朝鮮使臣)을 상국사신으로 우대한 것은 일본이 조선을 상국으로 받들고 조선사신을 천사로 우대하던 고대전통을 계승한 것이라 볼 수 있다.
임진왜란 후 200년간은 한일관계가 우호적으로 유지했다. 특히 도쿠가와 박후(德川幕府)가 60여주(餘州)의 힘을 동원해 조선사신을 천사와 같이 성의를 다해 우대하여 그 당시 에도(江戶)의 1년 예산이라고 한 것은 그 영접규모를 말해 준다.
글을 맺으며
이같이 고대부터 우리를 상국으로 예우하던 일본이 명치유신 후 일제암흑기에 조작된 자학반도식민사관에 의한 역사를 가르치고 있는 것은 우리가 얼마나 우리역사를 연구하지 않고 정신이 섞어있는 자들에 의해 역사가 망가졌음을 말해주고 있다.
우리는 1910년 10월29일을 일제(日帝)에 의해 나라를 잃은 날을 국치일(國恥日)인데 한 달이 되는 10월 1일에 조선총독부(朝鮮總督府)가 개설되고 바로 우리가 쓰던 역사교과서(歷史敎科書)를 불법화하고 몰수하고 우리나라 역사말살을 시작했다.
그리고 다음해 1911년 8월24일에는 <조선교육령>을 발표하고 이를 시행케 했다. 조선교육령은 조선 사람을 일본에 충성을 다하는 식민지 백성으로 만드는 그 목적이 있었던 것을 오늘날까지 이를 바로 못하는 것은 우리사학계가 부패함을 입증한다.
당시 애국적인 우리나라 사람들이 저항운동이 일어나고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며 상해에서는 임시정부가 서자 1920년부터 일본역사를 우리국사라 하고 보통학교에서부터 가르치게 했다. 그들이 미리 얼마나 치밀하게 준비한 것을 알 수 있다.
그리고 1922년에는 ‘조선사편수회’라는 것을 만들어 1933년부터 38년까지 34권을 출판했는데 폐이지 수를 환산해보면 2만4409폐이지에 달하는 ‘조선역사’를 조작해 일제의 반도식민사관의 역사로 우리상고사는 아예 없애고, 단군조선도 절반을 없애며 우리역사는 1만2000년이 아니고 5000년이라 하며 단군을 국조로 하고 있다.
이를 모를 리가 없는 교육부가 일제암흑기에 조선사편수회에서 만든 국사를 지금도 그대로 가르치고 있는 것은 우리의 영혼을 팔아먹는 역적(逆賊)과 진배없다. 어느 때까지 이런 부패한 인간들에게 맡겨야 하는지 역사를 바로 세움이 지상과제이다.
(以上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再考證 韓國思想의 新發見’.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 「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 ‘校勘十八史’,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윤진영 編集 「三國史」「우리역사(東夷傳」. 반재원, ‘鴻史桓殷’. 대야발 원저 ‘단기고사’. 백지원. ‘고려왕조실록’. 정성희 ‘고려왕조사 이야기’.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황순종, ‘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송부웅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文定昌 「古代日本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編 ‘詳解.世界史史料集’. 二十一世紀出版社集團,山海經’. 各國別 [世界史の整理]. 貝塚茂樹, ‘中國の歷史’1, 2, 3. ‘西島定生 護雅夫, 木村常三郞, 猿谷 要編著,世界歷史の基礎知識’.外書冊 參照, 本文을 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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