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영토는 만주와 반도에 걸쳐 있었다

입력 2020-06-20 12:0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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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우리는 개성(開城)과 송악(松嶽)이 같다고 알고 있다. 그런데 분명히 신라 중기 때 송악과 개성이 따로 성을 쌓은 기록이 있어 다른 지역으로 보이게 기록했다. 같은 지역이었다면 굳이 송악(松嶽)과 개성이라는 다른 명칭을 붙일 리가 없다. 
 
이 시기는 고려 7대 실록이 소실되고, 다시 기록한 시기가 아니다. 또한 7대가 존재했던 시기도 아니다. 그럼으로 실록과는 상관이 없다. 이것은 고려 초기 기록이 미흡한 것과 무관치 않으며 서경의 위치가 분명히 나타나지 않은 것과도 무관 할 수가 없다. 또한 원(元)나라의 전투이전의 수도가 어디에 있었느냐? 보면 알게 된다. 
 
지나(支那)와 한국에는 같은 지명이 많음으로 고려 초기 위치를 밝히는데 어려움을 주는 것이 사실이나 우리는 역사의 사실을 추적(追跡)해 살펴보면 자연히 알게 될 수밖에 없다. 그 한 예로 윤관(尹瓘)과 오연총(吳延寵) 장군이 여진(女眞)을 평정하기 위해 출발한 지명이 반도에 없고 그 지명이 대륙 만주의 장춘(長春)이다. 
 
현재 지나(支那) 지도에서 이 장춘이라는 지명은 4곳이 있다. 그런데 조선조에는 이 지명들이 없다. 1579년에 제작된 [광여도(廣輿圖)]나 또 다른 서북계도에도 장춘은 없다. 이것은 고려도 반도에 고려역사를 말하려 하는 것임을 알 수 있다. 
 
그런데 고려 초기 요하서쪽의 송령(松嶺)에 장성(長城)을 쌓았다고 했다. 고려를 개국하고 약100년 후인 1035년 9월 “서북방 송령이동에 장성을 구축해 변방적들이 침입을 방어하는 요충으로 삼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高麗史 卷6, 世家6, 靖宗)
 
지금도 장성(長城)상에 송령문(松嶺門)이라는 지명(地名)이 있음으로 이곳 송령(松嶺)이 기록과 일치되는 것으로 의심의 여지가 없다. 또한 [중국고금지명대사전(中國古今地名大辭典)]에는 흑룡강(黑龍江) 청강현 서북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우리 교과서에는 내원성(來遠城;현심양, 본성현 경계)인 흥화진(興化鎭)으로 되어 있다고 하는데 우리 교과서는 평안도(平安道) 의주(義州) 북방으로 나와 있고, 영덕진(寧德鎭)은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에 평안도 의주 부근이라고 나와있다. 
 
오늘은 고려(高麗)의 역사도 자학반도식민사관자(自虐半島植民史觀者)들은 21세기에 와서도 왜곡(歪曲)한 역사를 우리역사로 하는데 대해 그러지 않음을 밝히려 한다.
 
공민왕(恭愍王) 이전 요동반도는 고려 땅이었다 
 
자학반도식민사관자(自虐半島植民史觀者)들은 요하서쪽의 송령(松嶺)도 고려 영토가 아니라고 가르치나 분명히 송령(松嶺)은 고려영토로 1119년 12월 장성(長城)을 석자 더 높이 쌓았다고 했다. 이곳은 공민왕(恭愍王)이전부터 고려(高麗)땅이었다. 
 
공민왕(恭愍王) 19년(1370년) 7월 이성계는 동령부(東寧府)에 출정 동년 12월에 평정했고, 그때 “요심은 원래 고려의 옛 강토이다.(遼瀋元係本國舊界)”라 하고 강계만호로 하여금 방문을 붙였으니 요양과 심양이 고려 땅이라는 것이다. (高麗史 第42券).
 
따라서 사서(史書)의 기록으로 보아 장성(長城)을 구축(構築)한 1035년 이전부터 현재 요동반도(遼東半島)를 포함한 장성(長城)의 남쪽은 고려(高麗)땅임을 알 수 있다. 
 
원(元)나라는 고려왕을 심양왕(瀋陽王)이러고도 했다. 왜 심양왕이라고 했을까? 이는 고려가 반도만이 아님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리고 황성(皇城)이 압록강 북쪽에 있다는 기록과 고려왕이 심양왕(瀋陽王)이라는 기록이 같은 의미는 바로 둘 다 압록강이라는 강의 북쪽에 있다는데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元史券 22)
 
원사(元史)에 의하면 고려왕 거(昛)를 25대 심양왕(瀋陽王)으로 봉하고 태자(太子)를 대전부마도위(大傳駙馬都尉)라 했으며 고려왕(高麗王;26대) 장(章)의 공신호(功信號)를 ‘심양왕(瀋陽王)’으로 바꿔 내려주었다는 기록이 있기 때문이다. (元史券 23)
 
이 같이 원(元)나라에서 고려왕(高麗王)을 왜 심양왕(瀋陽王)이라고 불렀을까? 서경(西京)이 심양(瀋陽)에 있었기 때문에 그렇게 불렀다고 볼 수밖에 없는 것이다. 또한 고려 황성(皇城)이 압록강 북쪽에 있었다. 국사의 동녕부(東寧府)와 고려사의 동령로(東寧路)와는 다르다. (元史券 47)
 
우리나라 교과서에는 동령부는 평양에 있었다 하고, 서경(西京)이라고 했다. 그리고 황성은 개성(開城)으로 표기했다. 자학반도식민사관자(自虐半島植民史觀者)들은 이것이 사실인지 의심을 해본 일도 없는 것 같다. 고려 황성은 황해도(黃海道)에 있는 개성(開城)으로 알고 있고 서경은 평양(平壤)이라는 것이 그들의 상식이다. 
 
그런데 아래 기록은 분명히 압록강 북쪽에 황성이 있다고 했다. 1370년 1월, 동녕부(東寧府)를 평정하고 북방사람들이 귀순해 왔는데 “동쪽은 황성(皇城)까지, 서쪽은 바다까지, 남쪽은 압록강까지의 지대에 적의 종적(蹤迹)이 없어졌다고 했다. (東至皇城北地東寧府西至于海南至鴨綠爲至一空) (高麗史 第42券 恭愍王 19年) 
 
서경(西京)은 압록강 북쪽의 철령에서 300리 거리다
 
고려의 황성과 철령(鐵嶺)과의 관계를 나타내는 기록이 1388년 2월의 기록이 있다. “사실 철령(鐵嶺)은 고려의 황성(皇城)으로부터 300리 거리에 있으며 이곳을 국경선(國境線)으로 되어 온 것이 한해 두해가 아니다.(鐵嶺之山距王京僅三百里公嶮之鎭限邊界非一二年)”라고 쓰여 있다. 황성(皇城)이 철령에서 겨우 300리라고 했는데 그 거리는 동서남북(東西南北)을 다 포함될 수 있는 것이라 했다.
 
그러나 철령에서 어느 방향인가 분명하게 나타낸 것은 바로 압록강(鴨綠江)이라는 또 하나의 이정표가 있으니, 그것은 철령이 북쪽에 있고, 압록강이 남쪽에 있으며 철령과 압록강 사이가 서경(西京)이며 동령부(東寧府)가 있어야 한다. 
 
동령부(東寧府)가 압록강 북쪽에 있다고 했으니 서경(西京)을 동령부(東寧府)를 당연히 서경(西京)을 만주에서 찾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철령 남쪽과 압록강 북쪽사이에 요(遼) 심(瀋)이 있다. 그리고 그 사이에 왕경(王京)이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려황제(高麗皇帝)를 원(元)나라에서 심양왕(瀋陽王)이라고 했으므로 왕이 심양(瀋陽)이거나 그 근처에 서경(西京)이 있었음이 분명히 나타내고 있는 것이다. 때문에 철령으로부터 북쪽으로 고려(高麗)땅을 밝혀야 한다. 
 
1388년 기록에 명(明)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려고 하니 우가 일직제학 박의중을 보내어 “철령으로부터 북으로 가면서 문(文), 고(高), 화(和), 정(定), 함(咸)등 여러 고을 지나 공험진(公嶮鎭)까지는 자래(自來)로 우리나라 땅이다”라고 했으니 철령(鐵嶺) 북쪽지역을 찾아야 고려사(高麗史)에 의한 고려 땅을 밝혀볼 수 있다. 
 
그런데 이 고을 문(文), 고(高), 화(和), 정(定), 함(咸)중에서 쌍성(双城)을 화주라고 표현했다고 했으니 이곳이 반도가 아니고 압록강 북쪽으로 이곳 지명을 확인된 것인데 동령부(東寧府)역시 압록강 북쪽에 있음이 확인된다.
  
동령부(東寧府)는 원(元)나라에서 만든 부(府)이나 이곳은 원래 원나라 땅이 아니라 고려(高麗)땅이었다. 그런데 1269년 역적 이연령(李延齡), 최탄(崔坦), 현원렬(玄元烈)등이 고려 땅을 들어 원에 항복함으로 2년 뒤 서경을 동령부라고 했다는 뜻이다.  
 
그리하여 동령부도 서경도 모두 압록강 북쪽에 있었다고 했으니 고려가 만주에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런데 한심한 것은 우리는 서경을 평안도 평양으로 알려온 것이다. 이는 현 평양(平壤)을 고려 서경(西京)으로 보아온 것은 역사무지인 것이다. 따라서 지금까지 평양을 고려 서경으로 보아온 상식으로는 해답이 나올 수 없다. 이는 만주를 신라와 고려 땅으로 생각해보지 못한 것과도 일맥상통하는 현상이다. 
 
고려 이성계 장군은 요(遼陽)·심양(瀋陽) 평정, 고려땅 회복했다
 
자학반도식민사관자(自虐半島植民史觀者)들이 만주가 고려시대 우리 영토가 아니라 해도 고려사는 이성계가 고려의 장군인 때, 요(遼)와 심(瀋)을 평정하는 기록이 남아 있다. 1370년 7월 동령부(東寧府)에 출정해 동년12월에 평정했다고 했다. 
 
그 때 “요양(遼陽)과 심(瀋陽)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본래 고려의 옛 강토이다.(遼瀋元係本國舊界)”라고 했고, 또 강계 만호로 하여금 방문(榜文)을 붙이는데 요양(遼陽)과 심(瀋陽)사람들에게 타이르기를 “요양은 본시 고려지경이다.(遼陽本是國界)”고 했고 원나라 말경에 고려는 옛 땅을 회복했다.(高麗史第42卷恭愍王)
 
1370년11월 정해 태조와 지룡수 등이 의주(義州)에 이르러 부교(浮橋)를 가설하고 압록강을 도하(渡河)해 기축일(己丑日)에 요성으로 급히 공격해 함락시켰다고 한다. 12월 도평의사사가 동령부(東寧府)에 보낸 자문(咨文;지나(支那)와 교환하던 문서(文書)에서 “요심(遼瀋)은 본래 우리나라 옛 강토이다”라고 되어 있는 것이다.
 
위의 기록을 보면 분명한 것은 만주가 고려 강역이었다가 원나라 땅이 되었고 다시 회복했다는 뜻이다. 그러면 언제 원나라에게 빼앗겼는가 하는 것인데 그 시기는 홍복원 최탄 등이 고려를 배반하고 땅을 들어 원에 항복한 시점이 될 수밖에 없다. 
 
그런데 이 땅을 언제 어떻게 되었기에 만주가 고려 땅으로 가르치지 않는가 하는 점이다. 그 해답은 1371년 윤3월에 북원 요양성 평장 유익과 와우승 등이 명나라에 귀순하려 했으나 그들은 명나라가 주민을 이주시킬까 근심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요양이 본시 고려 땅이었음으로 만약 우리가 청하면 이를 모면하지나 않을까 하여 공민왕(恭愍王) 20년 사신을 파견해 통보해 왔다.  
 
여기서 보면 1370년 회복했는데 1371년 관리를 하지 않아서 요동반도가 명(明)나라 땅이 되었다는 뜻이다. 즉 요동반도지역을 명(明)에게 내어준 것이다. 유익이 홍복원(洪福源), 최탄(崔坦)등과 같은 역할을 한 것이다. 
 
그런데 요동반도뿐만 아니라 요심(遼瀋)이 언제 부터 고려 관할에서 벗어났는가 하는 것이다. 평정하고 1년 뒤에 요동반도를 빼앗겼는데 이후 17년 뒤인 1388년의 기록에 의하면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명나라가 철령위를 설치하려 하니 우가 미직제학 박의중을 보내어 고려 땅임을 확인시켰다.
 
즉 “철령(鐵嶺)으로부터 북으로 가면서 문(文), 고(高), 화(和), 정(定), 함(咸)등 여러 고을 지나 공험진(公嶮鎭)까지는 자래(自來)로 우리나라 땅이다”라고 했으니 철령서남쪽이 요동반도가 고려 땅이었다는 것은 그 동쪽의 요심(遼瀋)은 당연히 고려 땅인 것이다. 
 
우리나라 강단학파라는 자들은 고려인들이 만주를 차지하지 못한 것으로 알려왔으나 원사(元史), 신원사(新元史), 고려사(高麗史)에는 이연령(李延齡)등이 만주 땅을 들어 원(元)나라에 항복한 기록을 남겼기 때문인데 원(元)은 고려와 혼인을 통해 고려(高麗)를 부마국(駙馬國)으로 해 고려왕(高麗王)으로 통치하게 했다.
 
그러나 1371년에서 1388년 사이에 철령서쪽을 명(明)나라에 빼앗겼다는 것이나 철령동쪽은 고려 땅임이 밝혀진 것이다. 우리나라는 고려역사를 배우면서 고려가 반도 안에 있는 것같이 가르치나 고려는 이성계가 고려장군일 때 이미 여러 차례 전투를 하며 동쪽은 황성(皇城)까지, 북쪽은 동령부(東寧府)까지, 서쪽은 바다에 까지, 남쪽은 압록강까지 평정으로 이 지대에 적의 종적(蹤迹)이 없어졌다고 기록했다.  
 
글을 맺으며 
 
이성계 장군이 평정한 곳은 고려 땅이다. 그 내용을 보면, 이성계 장군은 공민왕(恭愍王) 5년(1370년) 봄 1월 기병 5000과 보병 1만을 거느리고 장춘(長春)에서 출발해 황초령(黃草嶺)을 넘어 1300여리를 가서 압록강 건너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이 있는 북쪽으로 진격해 이곳을 평정했다.  
 
2월에 이성계 장군은 원(元)나라의 추밀부사 배주(拜住)등 많은 관리를 포함한 300여호 수천 명을 나라에 바쳤다는 기록이 있다.(高麗史 卷42) 또한 같은 해 7월에는 동령부(東寧府)에 출정해 그해 12월에 평정했다. 그 때 요심(遼瀋;遼陽과 瀋陽)은 원래 우리나라의 옛 땅(遼瀋元係本國舊界)임을 확인시켰을 분명히 하고 있다.
 
이는 강계만호(江界萬戶)로 하여금 방문(榜文)을 붙여 요심(遼瀋) 사람들에게 “요양(遼陽)은 우리나라의 경계”라고 해 원나라 말경에 고려는 옛 땅을 회복했다는 기록이고 또 12월 도평의사사(都評議使司)가 동령부(東寧府)에 보낸 자문(咨文)에도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은 본래 우리나라 옛 강토이다”라고 해 우리영토임을 밝혔다.     
 
이것은 이성계(李成桂)장군이 1370년에 요양(遼陽)과 심양(瀋陽)이 고려(高麗)영토로 다시 회복했음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나라 역사교재는 이런 내용을 가르치기는커녕 이를 숨기며 우리영토가 반도에 국한하는 것처럼 날조한 왜곡역사만을 가르치고 있다. 자학반도식민사관자들의 그 심사를 알 수가 없다.
 
도대체 자학반도식민사관자들은 어느 나라 국민이며 지금까지 역사를 어떻게 배우고 연구했는지! 백제를 당(唐)에 넘겨준 웅진성의 성주 이식(禰植)이나, 고려 땅을 원(元)에 넘겨준 원흉 홍복원(洪福源), 최탄(崔坦), 이연녕(李延寧), 현원열(玄元烈), 조휘(趙暉), 탁청(卓靑) 등과 조선조 이완용과 무엇이 다른가 생각하게 한다.
 
‘있는 역사를 없다고 하고, 없는 역사를 있다고 하는 것은’ 국민을 기만하고 국가의 정체성을 부인하는 것으로 학자의 양식을 가진 진정한 사학자라면 역사를 제대로 바로 세워가야 할 것이 아닌가! 이는 양식의 문제이다.
 
(以上은 吳在成 九黎系 高麗史 연구, 13面~61面, 高句麗本紀」,「百濟本紀」,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吳在成 「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 ‘校勘十八史’,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윤진영 編集 「三國史」「우리역사(東夷傳」外, 많은 書冊을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다음에 계속>
이을형 필진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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