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숙신씨(肅愼氏), 예맥조선사 바로잡아야

입력 2020-07-18 11:47: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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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우리나라 역사는 한무제(漢武帝)가 우리 민족을 정복하고 지배했다고 하나 우리 민족이 한무제의 지배를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은 수차 다뤘다. 이는 한무제가 우리민족을 정복하고 사군(四郡)을 설치했다는 지나(支那)의 위조(僞造) 역사를 그대로 번역(飜譯)해 한무제가 우리 민족을 지배했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한무제가 우리 민족을 정복하고 지배한 사실이 없음은 지나의 역사에 분명하게 명기(明記)돼 있다. 즉, ‘漢武帝伐滅朝鮮 分其他 爲四郡 自是之後 胡漢稍別’이라 했다.(三國志 第三十 東夷傳). 
 
이것은 한무제가 위만조선을 정복해 사군(四郡)을 설치하니 한민족(韓民族)과 한민족이 분리됐다고 한 것이다. 지나 민족은 사군에 예속돼 한무제의 지배를 받고 위만조선에 거류하던 한민족은 한무제의 지배를 받는 지나 민족과 분리돼 한무제의 지배를 받지 않았다고 한 것이다. 
 
이는 한무제가 우리민족을 정복하고 지배하지 못한 것을 지나 역사가 입증하는 것이다. 이상의 고찰에서 기자가 우리민족을 지배한 적이 없고, 위만이 우리 민족의 지배자가 되지 못하고 한무제가 우리 민족을 정복치 못한 것이 판명됐다. 
 
우리가 아직도 식민사관(植民史觀)을 탈피하지 못한 것은 기자조선(箕子朝鮮)을 그릇 해석한데 기인한 것이다. 기자조선은 한인(漢人)집단이요 우리 민족과 아무런 관계가 없다. 
 
이 당시 우리 민족 중에 천하를 호령하는 예맥(銳麥;濊貊)이 엄연히 존재한 사실을 고찰하면 기자조선, 위만조선(衛滿朝鮮), 한사군(漢四郡)등 한인(漢人)집단이 우리 민족의 영토를 엿볼 생각도 할 수 없는 상황임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또한 우리는 단군(檀君)을 국조(國祖)로 하고 있으나 이도 잘못된 것이다. 우리 국조는 3301년의 환국(桓國)과 1565년의 배달국(倍達國)의 환인(桓因)과 환웅(桓雄)의 우리 상고사(上古史)와 고대사(古代史)를 제대로 알고 국조도 바로잡아야 한다. 오늘은 잃어버린 숙신씨(肅愼氏), 예맥조선(銳麥朝鮮), 낙랑국(樂浪國) 등 많은 역사가 제대로 세우지 못하고 있는데 동주시대부터 1000년 이상 대륙을 정벌하고 정복해 지배한 숙신씨와 예맥조선에 관해 살펴보고자 한다.
 
진(秦)과 한(漢)도 예맥조선을 이길 수 없었다
  
지나와 일본은 우리의 숙신씨와 예맥조선도 우리 역사에서 낙랑국(樂浪國)과 같이 지웠다. 그러나 강대한 예맥조선은 유라시아를 정벌하고 정복해 지배한 역사를 숨기고 왜곡하나 사실을 숨길 수는 없다.
 
일제(日帝)는 우리역사를 위만(衛滿)을 기점(起點)으로 한국사를 엮어놓는다. 이것은 식민지사관(植民地史觀)을 탈피치 못하는 구태(舊態)임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예맥조선은 동주(東周)시대부터 한무제시대(漢武帝時代)까지 1000여년 동안 지나를 정벌, 정복, 지배한 사실은 지나 역사에 명기(明記)되어 있고,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지나를 정벌한 사실을 동이전에 기입한 것은, 흉노(匈奴)가 아니라 예맥(銳麥;濊貊)이었다.(論語券14, 淮南子券11, 高麗圖經 皁隸條參照). 
 
지나와 일본은 예맥을 흉노(匈奴)로 표기(表記)하고 있는데 모돈단우(冒頓單于)는 예맥조선의 왕(王)으로 봐야 한다. 지나와 일본이 그를 흉노로 말하는 것은 역사를 숨김에서다. 그는 동호(東胡), 월씨(月氏), 정령(丁零), 견곤(堅昆) 등을 모두 격파하며 중원(中原)을 정벌하며 정복했다. 
 
그리고 한나라와의 관계도 살펴보면, 한고조(漢高祖)가 한(漢)을 건국해서 2년 후인 서기전 200년에 예맥을 정토(征討)하려고 32만의 대군을 화북(華北)에 집결해 운강(雲岡)의 석굴(石窟) 가까운 평성(平城;山西省大同縣)까지 진군했으나 모돈단우가 이끄는 예맥의 40만 기마군단(騎馬軍團)에 포위되어 격파돼 패전한다.
 
이에 한고조는 일족(一族)의 여자를 예맥에 보냄과 함께 많은 선물을 보내고서 형제의 약속을 하고 화의한다. 화의내용은 ⓵ 양국은 서로 영토를 침범하지 않을 것 ⓶ 한실(漢室)여자를 모돈단우에게 보낼 것 ⓷ 관시(關市)에 교역장(交易場) 설치 할 것 ⓸ 한(漢)으로 부터 세폐(歲幣;贈物)를 보낼 것 등이다. 
 
여기서 관시는, 주(周)이래 한(漢), 수(隨), 당(唐)을 포함해 12개 왕조(王朝)의 수도(首都)를 말하는 관중(關中)으로 이곳은 섬서성(陝西省), 위수(渭水)일대의 분지(盆地)를 이르는 말로 구체적으로는 북쪽의 소관(蕭關), 동쪽의 함곡관(函谷關), 남쪽의 무관(武關), 서쪽의 대산관(大散關) 사이를 가리키는 것이다. 
 
이와 같이 예맥조선은 한(漢)나라도 어쩔 수 없는 강대한 나라였다. 그러기에 이후, 예맥조선은 강력한 기마군단을 가지고서 고비사막과 돌판 분지(盆地), 다쿠라마칸 사막을 넘어 서역(西域) 지방에까지 원정(遠征)했다. 
 
당시 서역에는 누란(樓蘭), 우전(于闐)등 36개나 되는 오아시스 국가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예맥은 이 나라들을 군문하(軍門下)에 뒀다. 당시 예맥조선의 영토는 동(東)은 바이칼 호수, 이에니강, 오비강의 상류까지, 서(西)는 다쿠라마칸 사막을 포함한 파밀 고원까지이고, 남(南)은 곤륜산맥(崑崙山脈)으로부터 사담 분지(盆地)를 거쳐서 전한(前漢)내의 난주(蘭州), 만주(滿洲)까지 달했다고 하고 있다. 
 
이 같이 예맥은 강력했기에 한(漢)나라도 굴욕적인 관계에 있었으나 어찌 할 수가 없었다. 이 당시 부족국가(部族國家)들이 많았는데 모든 부족(部族)의 족장(族長)을 단군(檀君)이라 하던 때로 모든 부족 중 주체는 예맥조선이었다.
 
서전(書傳) 무성편(武成篇)에 ‘화하(華夏) 만맥(蠻貊)이라’ 했다. 즉, 안으로 지나와 밖으로 예맥이라 기록한 것이다. 이는 예맥조선이 극(極)히 강대해 지나 이외의 모든 민족을 대표했다고 표시(表示)한 것이다. 
 
숙신씨(肅愼氏)와 낙랑국도 역사에 편집되어야 
 
일제암흑기인 1930년 8월22일 오전9시 중추원 제5회위원회의 회의록에는 육당(六堂) 최남선(崔南善)선생의 질문이 있었는데, 그것은 조선역사의 편수범위를 신라이전(新羅以前)이라고 한 것과 숙신(肅愼)을 불명한 채로 하는 것에 관한 것이었다.
 
일제가 숙신과 발해(渤海)를 조선사에 중요함을 말하며 ‘사료(史料)는 조선에 있는 것뿐만 아니라 지나의 여러 사적(史蹟)에서도 산견(散見)되고 있음으로 조선사를 밝히기 위해서는 동방 제민족의 관계 사료를 전부 하나로 종합정리 해주기를 주문했다.’ 그러나 일제는 숙신과 예맥조선, 낙랑국(樂浪國; 서기전1237년~서기32년)까지 실존한 나라를 다 덮어버렸다.
 
지면상 숙신과 예맥을 살펴보면, 숙신은 우리민족의 본원(本源)이라 했다. 지나 고서(古書)중 가장 중요한 것이 삼국지(三國志)와 후한서(後漢書)다. 그런데 삼국지에 동이유숙신(東夷有肅愼)이라 기록했다.(三國志 魏志, 卷三十, 東夷).
 
즉, 숙신씨(肅愼氏)를 동이전(東夷傳)에 기입했는데(晉書卷九十七, 列傳六十七, 四夷) 숙신씨는 분명한 동이족(東夷族)이고 우리 시조(始祖)이기도 하다. 당시 동이족이 100여국으로 분립(分立)했다고 기록했다.(晉書斠注(卷三 帝紀第三).
 
그런데 동이족(東夷族) 중 4300여년 전에 지나문헌(支那文獻)에 나타난 자는 오직 숙신씨뿐이다. 그러면 숙신씨는 모든 동이족의 시조라고 했다.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에 근세인류학자가 동북민족(東北民族)은 다 숙신에서 나왔다고 한다고 했다.(渤海國志長編(卷十六, 族俗考, 第三).
 
이는 동이족의 시조가 숙신씨라고 한 것이다. 그런데 숙신씨에서 분파된 동이족 중 숙신씨의 전통을 계승한 자가 바로 한민족(韓民族)이다. 숙신씨는 순(舜) 하후씨(夏后氏) 시대부터 저명한 국가요 4300여 년 전에 저명한 문화국으로 존경할 민족이요 특이한 민족이라 했다. 
 
이상의 기록을 고찰하면 동이족 중 숙신씨의 전통을 계승한 자가 한민족이요 다사 숙신씨가 합류되어 완전한 한민족으로 발전했다. 그리고 흑룡지고(黑龍江志稿 卷一, 地理志)에 [尙書傳 貊海東夷(肅愼之命, 傳原文作貌 釋文作貊)]이라 했다. 즉, 예맥은 동이(東夷)의 해상(海上)에 있다하고, 숙진지명(肅愼之命)의 원문(原文)에 모(貌)로 기록했는데 전문(篆文), 초문(草文)에 해석하는 석문(釋文)에 맥(貊)이라 풀이했다고 한 것이다.  
 
숙신지명은 지나의 고서에는 편명(篇名)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오늘날 우리나라에서는 볼 수가 없다. 그 내용이 미상(未詳)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숙신지명의 원문에 모로 기록했다고 한 것은 숙신을 모로 기록했다는 뜻이고, 석문에 맥이라 풀이했다고 한 것은, 숙신을 맥이라 풀이했다는 뜻이다. 즉, 숙신이 예맥이요, 예맥이 숙신임을 가리킨 것이다. 
 
숙신씨(肅愼氏)와 예맥조선은 동일시대 존재했다
 
지나와 일제는 한민족의 시조라는 숙신씨와 중원(中原)을 주름잡은 예맥조선과 낙랑국을 우리 역사에서 지웠다. 여기에 편승한 자학식민사관자도 아무런 연구도 않을 뿐더러 지나와 일제의 왜곡에 안주하고 있으나 고대 숙신씨와 예맥조선은 대륙을 주름잡았다. 
 
서전여오장주(서전(書傳旅獒章(注)에 주무왕(周武王)당시 예맥이 한족과 병칭(竝稱)돼 있다. 그러면 고대 숙신씨와 예맥조선이 동일 시대에 존재했다. 숙신씨는 동이족의 시조이고 예맥은 동이족의 주체였다. 
 
동이족의 시조와 예맥은 동이족의 주체가 동일시대에 존재했다는 기록은 숙신이 예맥이요, 예맥이 숙신이라는 사실을 더욱 긍정할 수 있다. 그리고 숙신씨와 그 지류(支流)가 부여(夫餘), 고구려에 합병돼 완전히 한민족으로 성장했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에 ‘숙신씨(肅愼氏)의 분파(分派)인 읍루(挹婁)가 한(漢)나라가 흥한 후에 부여(夫餘)에 합병됐다’ 하고, 진서각주(晉書斠注)에 ‘고구려가 더욱 강성해 숙신과, 읍루를 합병했다.’
 
여기서 숙신이 있었음은 ‘수양제(隋煬帝)가 고구려(高句麗)를 침략할 때에 그 24군(軍) 우익(右翼)에 숙신도(肅愼道)가 있는 것을 보면 숙신이 고구려에 합병된 지 이미 오래다’고 하고 있다.(晉書斠注 卷九十七, 列傳 第六十七, 四夷).
 
송서(宋書)에 고구려가 숙신씨의 고시(楛矢), 석족(石鏃)을 지나에 수출했다 하고 있으며, 또한 죽서기년(竹書紀年;순(舜)25년에 숙신씨가 궁시(弓矢)를 지나에 수출했다고 했다. 
 
숙신씨는 순(舜), 하후씨(夏后氏)시대부터 저명한 국가라 했다. 이 당시 지나는 군주(君主)의 제도가 없고 부락마다 추장이 있었다. 숙신씨는 하(夏), 은(殷), 주(周) 삼대(三代)이전에 지나 동북시대에 대국을 건설했다. 
 
지나는 숙신씨의 일명(一名)이 ‘읍루’라 하나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읍루는 한(漢)나라시대에 숙신씨의 영토에 진출했고, 읍루의 본부는 숙신씨의 서쪽에 있다. 이 같은 유래를 모르고 숙신씨의 일명이 읍루라 함은 잘못된 오류(誤謬)인 것이다. 
 
이에 대해서 진서각주(晉書斠注 卷九十七, 列傳 第六十七, 四夷)는 오사감(吳士鑑)과 유승간(劉承幹), 양인(兩人)은 진서(晉書)에 주해(註解)를 가(加)해 숙신을 읍루라 기록한 것은 그릇된 오류(誤謬)라고 비판하고 있는 것이다. 
 
즉, 숙신은 4300여년 전에 저명한 문화국이요, 읍루는 후한(後漢)시대에 비로소 나타나고 문화가 발달되지 못한 민족이다. 그럼으로 숙신을 읍루라 기록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 비판한 것이다.(以上은 崔仁, ‘韓國學講義’ 36面~44面을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했음을 밝힙니다.)
 
글을 맺으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세계 어디에 내놓아도 자랑스러운 위대하고 찬란한 우리역사를 가지고 있으나 우리는 너무 모르고 있다. 이것은 자학반도식민사관자들의 우리역사를 제대로 연구하지 않고 우리역사를 잘못 가르침으로 말이 아니게 뒤엎어져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국민들도 왜곡역사만 배워온 터라 바른 역사를 말해도 제대로 받아들이지 않고 있다. 일제강점기인 1922년 설치된 ‘조선사편찬위원회’는 1925년 10월8일 ‘조선사편수회’로 명칭을 바꾸고 제1차 위원회를 개최한 자리에서 사이토 미노루(齊藤 實) 총독은 부임 즉시 전국에 교육시책을 하달한 것을 잊고들 있다.
  
사이토 미노루는 “1, 조선 사람들이 자신의 역사와 전통을 알지 못하게 해서 겨레의 혼과 문화를 상실하게 하고, 2, 그들의 조상 선인(先人)들이 무위(無爲), 무능(無能)과 악행을 들추어내고, 그것을 과장해 조선인의 후손들에게 가르쳐서 그 조상들을 경시(輕視) 멸시(蔑視)하는 감정을 일으켜 하나의 기풍으로 만들고, 3, 그 결과 조선청소년들이 자국의 모든 인물과 사적(史蹟)에 관해 부정적인 지식을 얻게 되면 반드시 실망감에 빠지게 될 것이니 4, 그 때에 일본사적, 일본인물, 일본문화를 소개하면 그 동화(同化)가 지대할 것이다. 이것이 제국일본이 조선인을 반(半) 일본인으로 만드는 방법이다.” 이 미친 소리를 들으면서도 이를 따르고들 있다.   
 
이 일에 촉탁으로 참여한 이병도(李丙燾), 신석호(申奭鎬) 등과 그들의 학생들이 가르친 역사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우리의 역사는 이렇게 말살됐다. 이것을 그대로 가르치는 오늘의 자학반도식민사관자들을 보면 개탄을 금치 못하는 바이다.
 
(以上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杉山徹宗,「眞實の中國四千年史」.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 「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九犂系史」 ‘犂: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 ‘校勘十八史’,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윤진영 編集 「三國史」「우리역사(東夷傳」. 朴鐘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한국인 자부심 더 알씨사랑’ ‘한국인 자부심 물이랑’ ‘한국인 자부심 더 코어랑’ ‘한국인 자부심 더 아리랑’. 朴昌和 찬술, 金星謙) 번역, ‘숨겨진 역사를 찾아서’. 朴昌和 筆寫 金星謙 번역, ‘고구리 창세기’, 정희철 저 ‘중국은 없다’. 檀檀學會編輯), ‘桓檀古記’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백지원, ‘고려왕조실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文定昌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外 多數書冊을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했을 밝힙니다.)
 
이을형 필진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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