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일본 신사궁전 수호신은 고구려 개(박견, 狛犬)

입력 2013-07-13 16:5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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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고구려가 일본을 정복하고 후국(侯國)으로 삼다
 
일본 역사책을 보면 너무나 허황된 것들을 많이 보게 된다. 4세기 일본은 석기시대의 생활을 방불케 하는 미개한 원시생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런 일본이 391년 조선에 출병해 고구려와 싸웠다고 버젓이 교과서에 게재하고 그럴 듯하게 꾸미고 있다. 너무 기가차서 말이 안 나온다. 앞 <42편> 칼럼에서는 백제가 무력과 기술로 일본을 지도·지배하고 가르친 것을 살펴봤다. 이번 칼럼에서는 고구려가 일본을 어떻게 대했는지에 살펴보고자 한다. 서기 478년 왜왕 무(倭王武=유우라크·雄略王)는 사절을 송(宋)나라 조정에 보내 순제(順帝)에게 문서를 전한다. 그 문서 표문(表文)에 ‘왜, 백제, 신라, 임나, 가라(加羅), 진한(秦韓), 모한(慕韓), 七國 諸軍事 安東大將軍 倭國王’이라 칭한 표현이 나온다. 이 표문(表文)에 대해 일본 사가들은 일본이 한국과 왜한(倭韓) 연합을 형성하고 왜(倭)가 한국을 지배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앞서 칼럼에서 살펴보았듯이 임나(任那), 가야(伽倻), 신라, 백제가 일본을 지도·지배했다. 따라서 일본사가(史家)들의 주장은 그릇된 것으로 일고의 가치도 없다. 진한(秦韓), 모한(慕韓)은 왜왕 무(倭王武) 이전에 고구려, 백제, 신라 3국에 흡수돼 이미 멸망해서 없는 나라들이기도 하다. 왜왕 무(倭王武=유우라크·雄略王) 이전에 이미 사라진 진한(秦韓), 모한(慕韓)을 왜왕 무(倭王武)가 지배 할 수 없는 것이다. 일본은 이같이 이미 사라진 나라도 거론하며 역사를 왜곡하고 있다.
 
진한(秦韓), 모한(慕韓)은 3국 이전의 소 부족으로서 극히 미약한 부족국가였다. 이들 부족들은 자체 생존을 위한 투쟁 여력이 없었다. 그것도 바다 건너 해외에 진출해 분국을 설치하고 통치 할 수 없는 것이다. 설령 일본에 건너간 이주민들이 분국을 건설했다고 한다면 이는 부족시대의 원리를 모르는 견해다. 부족시대는 소국가 분립시대이다. 따라서 동일한 부족이 다른 지역에 이주하면 독립 국가를 세우고 다른 국명을 붙이고 대립 투쟁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당시 한국에서는 수많은 소국가가 분립해 서로 대립 투쟁했다. 그런데 백제, 고구려, 신라 외에 이런 소수 부족이 해외에 진출한 이주민을 통해 본국에 예속되는 분국(分國)을 건설하고 본국의 통치를 할 수 없었다. 그 당시 일본에 건너간 유민들은 대부분이 본국정부에 불평불만을 품고 정치적으로 망명이 아니면 위난을 피하기 위해 피난한 사람들이었다는 것이 이를 뒷받침 한다. 이들 유민이 본국에 진출해 분국 운운은 본국에 반역하는 것이기도 하다. 본국은 유민이 된 일본보다 강하고 일본 보다 너무 앞서 있었다. 일본은 유민에게도 밀리고 있었다. 그래서 유력한 유민에게 본국의 명예를 그대로 이어서 봉작(封爵까지 줬다.
 
한국유민의 강력한 힘과 국력, 봉작(封爵)에 반영
 
고려시대에 왕이 내외 친척에 조선공(朝鮮 公), 부여 공(夫餘 公), 낙랑 공(樂浪公), 진한 공(辰韓 公), 백제 공(百濟 公)이라는 명예의 봉작(封爵)을 준일이 있다. 조선조에도 이 제도는 상존해 있었으나 우리 민족 중 명예의 봉작을 받은 왕족이 일본에 진출하니 일본에 이미 왜왕이 돼 있는 왕들은 그들을 우대하여 왜왕과 병칭(竝稱)했다.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의하면 일본에 백제왕 백제 공(百濟 公)이 있는데, 백제왕은 백제 의자왕의 후손이고 백제 공(百濟公)은 백제주왕(百濟酒王)의 후손이라고 했다. 이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 기록에는 왜왕 무(倭王武=(유우라크·雄略天皇)가 열거한 국명은 모두 일본에 건너간 우리민족의 왕손이라고 해석 할 수 있다. 왜왕 무(倭王武=유우라크·雄略天皇)가 우리 민족의 왕손을 왜왕과 병칭(竝稱)한 것은 그 왕손을 왜왕과 같이 우대하고 경외(敬畏)한 것이다. 일본으로 간 왕손을 크게 우대하고 경외하며 예우한 원인이 무엇인가? 이는 우리 유민들이 일본을 지도하는 강력한 힘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국과 유민의 영향력이 극히 강력한 까닭이라 볼 수 있다.
 
이 7대 왜(일본)왕 무(倭王武=유우라크 덴노·雄略天皇)가 송나라 순제(順帝)에게 보내는 표문(表文)에 “고구려가 국경지대에 침입해 혼란을 일으켜서 송나라에 조공(朝貢)하는 것을 막음으로 뜻대로 조공을 못합니다. 신의 선친이 고구려가 송에 조공하는 것을 막는 것을 통분(痛忿)해 100만 대병을 일으켜서 고구려에 저항하고 져 하다가 사망했습니다. 송제(宋帝)께옵서 강대한 고구려를 격퇴해 방난(方難)을 평정해 주심을 바랍니다”라는 내용이 있다. 즉, 고구려가 국경지대에 침입해 국경에 난을 일으켰다고 했다. 여기서 방난(方難)은 전국의 난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고구려가 국경의 난을 일으켰는가? 전국의 난을 일으켰는가? 이 표문은 송에 구원을 받기 위해 애써 송에 조공(朝貢)치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해 고구려가 국경을 침입, 국경 통행을 막은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 표문의 문구는 송에 조공하는 것을 막은 것을 설명하는 문법이다. 이것은 신라 김춘추가 당나라 태종에게 “백제 때문에 당에 조공도 못 받치겠다”고 한 ‘삼국사기 신라본기5’에서 보듯 왜(일본)왕 무(倭王武)도 송나라 순제에게 호소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표문의 내용은 방난(方難) 두자에 있다. 즉, 고구려가 일본 전국을 정벌해 전국에 난(亂)을 일으킨 것이다. 전국의 난(亂)임으로 백만 대군을 일으켜서 저항코자 송(宋)나라에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왜왕 무(倭王武=유우라크 덴노·雄略天皇)가 송나라 순제(順帝)에게 보낸 이 표문은 일본이 조선에 왜군을 보내 고구려와 싸운 것이 아니라 고구려가 일본을 정복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고구려를 종주국(宗主國)으로 받들다
 
1970년대 필자가 일본에 유학시절 고구려 벽화인 다카마쓰 쓰가(高松塚壁畵)벽화가 발견 됐다. 그때 일본 학자 중에는 ‘이것은 중국의 벽화다’ 등 고구려의 벽화인 것을 부인하려는 경향을 직접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이 다카마쓰 쓰가 벽화(高松塚壁畵)는 국내외 사가(史家)들이 이구동성으로 고구려의 바탕에서 나왔다고 말하고 있었다. 특히 북한 김석형(金錫亨)을 위시한 북한 사가들은 ‘최근에 북한 수산리(修山里)에서 발견된 고구려 고분벽화와 흡사하다’고 말했다. 이것도 고대 고구려와 일본을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면 다카마쓰 쓰가 벽화(高松塚壁畵)가 어느 나라의 것인가를 해석하는데 분명해진다. 일본은 우리나라의 역사나 유물(遺物)도 모두 부인하려고 하나 일본은 역사변조와 왜곡으로 이를 극복하려고 해도 불가능 하다. 5세기 광개토대왕이 왜를 정벌하기 이전에 이미 왜는 우리나라의 후국(侯國)으로 돼 있었다. 예컨대 일본의 첫 임금인 오진덴노(應神天皇) 22년에 신라가 일본을 정벌해 오사카(大阪)근처 아가시항(明石浦)까지 들어가니 일본이 항복해 백마(白馬)를 잡아 맹세했다. 그리고 6년 후 같은 오진덴노(應神天皇) 28년9월에 고구려가 일본에 보내는 국서(國書)에 일본 왕을 교(敎)한다고 했다. 교(敎)는 종주국의 제왕(帝王)이 식민지 군주(君主)를 명령하는 문구이다. 신라에 항복한 일본이 고구려를 종주국(宗主國)으로 받들었음을 말하는 것이다.
 
이상에서 고찰한 것을 보면 고구려가 일본을 예속국(隸屬國)으로 간주해 일본 왕을 교(敎)한다는 국서(國書)를 보낸 것으로 해석된다. 서기 478년 왜왕 무(倭王武=유우라크·雄略天皇)가 송(宋)나라 순제(順帝)에게 보내는 표문(表文)에 고구려가 일본 전국을 정벌하였다는 것은 사실이며 또한 7세기 대표적인 호족(豪族)인 소가씨(蘇我氏)가 일왕18대 스슝덴노(崇峻天皇=일본은 32대라 함)를 암살하는 대란을 일으킴으로 일본은 극도로 혼란에 빠졌다. 이때 동양의 대국중 하나인 수(隨)나라의 100만 대군을 격파한 강국 고구려는 이미 앞서 논한 대로 혜자법사(惠慈法師)를 일본에 보내 대화개신(大化改新)을 지도했다. 이는 고구려가 일본의 혼란을 수습하고 지배하려는 문화정책을 쓴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그리고 7세기 대표적인 부여 기마민족 가야계의 호족인 소가씨(蘇我氏)는 일본 역사상 처음 대 호족(豪族)으로 등장해 사실상 야마토 정부(大和政府)의 통치권을 장악했다. 이는 한국유민이 일본을 지도·지배하며 통치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같이 일본에 유민의 힘은 막강했으며 정권을 장악할 정도로 일본사회를 지배했다. 또한 그들의 수호신도 고구려의 동물로 하고 있다.
 
신사 궁전 수호신 박견(狛犬)도 고구려 개이다
 
가장 신성시하는 일본 신사(神社) 궁전 앞에 이민족(異民族)의 개를 받들어 세울 수 있겠는가. 혈연을 존중해 이민족을 배제하는 고대사회에서 그 조선(祖先)의 영을 받들어 모시는 신사 앞에 이민족의 개를 받들어 세울 수 없고 국가를 통치하는 기관인 궁전 앞에 이민족의 개를 받들어 세울 수 없다. 우리 궁궐에 수호신으로 일본의 개나 다른 짐승을 세울 수 있겠는가. 우리는 해표(海豹)를 세우고 있다. 그런데 일본은 고구려의 박견(狛犬)을 세우고 있다. 북 구주 일본(北 九州 古代日本 一 二) 책에는 ‘고대의 일본은 백제와 동맹해 고구려와 싸웠다’고 했다. 고대 일본은 고구려와 불화(不和) 투쟁했다. 적대 투쟁하는 고구려의 개를 가장 신성시 하는 신사(神社) 궁전(宮殿)앞에 세울 수 없음은 더욱 분명하다. 그러면 그 신사(神社)의 주인은 고구려인이라고 추정 할 수 있다. 즉, 고구려의 신을 모신 신사(神社)요 고구려인이 거주한 궁전(宮殿)임으로 고구려의 개를 세운 것이라고 해석 할 수 있다. 이것은 고대 고구려가 일본을 정복하고 통치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정창원(正倉院)에 있는 환두(環頭)의 대도(大刀)는 도다이지(東大寺) 헌물장에 고려양태도(高麗樣太刀), 만요집(萬葉集)에 박검(狛劍)이라고 각각 기록돼 있다. 고려양식의 대도(大刀)라는 것이다. 박검(狛劍)은 고려의 검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도 고려의 세력이 일본에 크게 작용한 일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최태영 선생은 현재 일본이 통용하는 일본어가 고구려의 말이 변형된 것이라고 했다. 이러한 사실들을 고찰해보면, 일본이 주도면밀하게 우리 역사와 한국유민들의 역사 행적을 숨기고 감추려 일본이 고구려와 싸웠다고 한 것이다. 그러나 역사는 숨기고 감추며 왜곡해도 끝내 숨길 수 없다. 역사고증을 통해 다 밝혀지게 마련이다. 지금까지 모든 사실을 고찰해 보면 우리나라 고구려가 일본을 정복하고 통치한 것은 너무도 명백한 역사적 사실이다. ‘조선총독부’는 민간 사대부의 책까지 합쳐 23만~27만으로 추산되는 책과 역사자료를 없애고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역사왜곡을 자행했으나 엄연한 사실은 우리 한민족이 고대로부터 일본을 지도·지배했다는 변할 수 없는 진실이다. 일본은 명치유신 전까지 한국을 존중하고 ‘한국 통신사’를 위해 엄청난 경비를 마다 않고 통신사를 영접해 대륙의 정보를 얻고 배우고 지도를 받아 왔다. 일본은 명치유신부터 시작한 광개토대왕의 비문을 명치왕의 특명으로 이곳을 답사하고 변조해 역사를 거꾸로 꾸며가나 일본의 양심 있는 학자들은 4세기 ‘당시 일본은 국내 통일도 완성하지 못한 때’라 한국에 파병은 엄두도 낼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을 고백을 하고 있다.
 
고구려·신라가 일 정복, 백제세력 일에 확대시키다
 
일본은 광개토대왕의 비를 회를 바르고 변조해 왜가 바다를 건너와서 백제, 신라를 격파하고 신민을 만들었다고 하나, 지나가는 개나 돼지가 웃을 일이다. 고구려, 신라가 일본을 정복하고 백제가 세력을 일본에 확대한 사실은 역사고증을 통해 아는 사실들이다. 우리 한민족은 고대로부터 중세~근세까지도 일본에 영향을 주었다. 일본은 선진한국을 뒤따라 왔다. 고대부터 한민족(韓民族)의 지도·지배를 받는 일본이 신라와 백제 중 어느 일국(一國)을 격파 할 수 없다. 와가모리 타로(和歌森太郞) 교수는 “청조시대(淸朝時代)인 1882년에 광개토대왕의 비문이 발견됐는데 대왕의 비문에 나타난 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일본사람 중에도 나가쓰가 씨(中塚氏)같은 사람들은 당시 일본은 국내통일이 완성되지 못했다고 하며 이를 부인한다. 그런데 일본이 대군을 보냈다 함은 이해할 수 없다. 확실히 4세기말에 일본정부가 군을 조선에 보내는 것은 용이한 일이 아니다”고 했다. 일본 마이니치신문(每日新聞1971.8.9 日本史の虛像と實像)에서도 일본사의 허상과 실상을 말하고 있을 정도다.
 
광개토대왕의 비문 변조에 대해서는 이미 논한바 있기에 더 이상 논하지 않겠다. 그러나 허약한 일본이 광개토대왕 수륙의 강력한 고구려군단을 당할 수 없었다. 처음부터 끝까지 허구의 조작과 변조·왜곡하는 일본의 작태는 예나 지금이나 변함없이 똑 같다. 우리는 그들의 기만에 속아서도 안 되고 그들의 왜곡 변조된 역사를 믿어서도 안 된다. 우리는 고증을 통해 이들의 허구성을 벗겨가야 한다. 역사조작 사실을 낱낱이 파헤치고 진실의 역사를 되찾아야 한다. 이것은 우리 선조에 대한 자손의 도리이며 사명이다. 또한 지금까지의 잘못을 뉘우치는 길이기도 하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선생과 최인 선생 외 다수의 서책들을 참조·인용했음을 밝혀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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