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맥조선(銳麥朝鮮)과 진(秦)의 정벌(征伐) 역사

입력 2020-08-29 08:4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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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지나(支那)의 지리지(地理誌)중 가장 오래 된 것으로 산해경(山海經)이 있다. 이 책은 4000년 전 하우(夏禹)시대 대향(對向)이 쓴 것으로 고대에 있었던 ‘부여국(夫餘國)이 예맥(銳麥;濊貊)의 고지(故地)’라 했다. (山海經 第十一, 海內西經). 부여는 예맥의 땅에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는 환국(桓國)과 배달국(倍達國), 고조선(古朝鮮;檀君朝鮮)이 있었고, 그 당시 강 이름도 조선하(朝鮮河)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지나는 이 강 이름에 조선(朝鮮)을 지우고 조선하(朝鮮河)를 조하(朝河)로 바꿔놓았다. 
 
왜 지나는 원래의 강(江)이름과 나라의 지명(地名)들을 지우고 바꾸는 것일까. 그들은 우리나라역사에 대한 열등의식을 갖고 있기에 고대부터 우리역사를 도둑질하며 자기들 역사를 조작하기 때문이다. 위의 하(夏)도 부족국가 수준으로 고조선 제후국의 하나였다. 
 
지나는 고대부터 우리역사를 지우거나 왜곡조작하며 예맥조선(銳麥;濊貊)도 지우고 흉노(匈奴)로 표현해 가르치고 있는 것이기에 우리나라 사람들이 알고 있는 우리역사의 상식이다. 
 
그런데 회남자(淮南子)에 흉노와 예맥(銳麥;濊貊)이 종발(縱髮) 즉, 피발(被髮)한다고 했다.(淮南子 卷十一). 그리고 동이전(東夷傳)에 기입한 것을 보면 춘추시대(서기전770~서기전403년)부터 지나를 정벌한 것이 흉노라고 하나, 이는 흉노가 아니고 예맥임을 알 수 있다. 
 
또한 지나는 진(秦)이 800년 만에 대륙을 통일했다고 주장해 우리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데, 진(秦)은 6국 즉, 연(燕), 조(趙), 제(齊), 위(魏), 한(韓), 초(楚)로 서기전 403년~서기전 221년의 전국시대, 위의 6나라를 통일한 것이지, 당시 강성(强盛)한 예맥조선을 비롯한 그 이외의 다른 모든 나라들을 모두 통일한 것 아닌데도 통일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당시 대륙에는 예맥조선을 비롯해서 동호(東胡), 중산호(中山胡), 임호(林胡), 월씨(月氏), 의거융(義渠戎), 대여융(大荔戎), 저(氐), 야랑(夜郞), 검중(黔中)등 많은 군소국가가 산재해 있었다. 더욱이 당시 대륙을 호령하던 예맥이 동주(東周)시대부터 한무제(漢武帝)시대까지 한족(漢族)을 정벌, 정복한 것이지 진(秦)이 천하통일한 것이 아니었다.
 
오래전 이미 살펴본 대로 지나에 있어서 역사시대의 최고의 국가는 은(殷)이다. 서기전 1600년경 부족국가의 연합체로서 화북일대(華北一帶)를 지배한 은(殷)은 동이족으로 이미 서기전 1300년경에는 정교한 청동기를 제작한 사실이 1899년 은허(殷墟)에서 발견되었다. 
 
여기서 은 시대의 제사, 사회, 정치, 경제에 관한 것이 해명되기 시작해 그때 까지 전설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던 은제국(殷帝國)의 존재가 역사시대로서 인식되게끔 되었다.
  
재래(在來)의 지나 사가(史家)들은 진을 타도한 자는 진승(陳勝)과 항우(項羽)라고 선전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진(秦)이 예맥과 남월(南越)의 전란(戰亂)으로 혼란에 빠진 것을 계기로 진승과 항우(項羽)가 궐기하였던 것이다. 따라서 진승과 항우가 진을 타도했다 함은 표면을 보는 선전이고 실제로 진을 타도한 것는 예맥과 남월(南越)이다.  
 
오늘은 지나가 지명 등을 이동, 변조, 조작하며 역사를 왜곡해 우리나라 국민들도 이에 익숙해져 있는 점을 지적하고, 여기서 지나 역사와 6국을 통일한 진의 통일정책과 당시 예맥과 진이 정벌과 멸망원인이 어디에 있었는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진왕(秦王)은 즉위하자 왕능(王陵)건설로 백성에 고통 안겼다
 
진왕(秦王)인 정(政)은 13세에서 즉위하자마자 바로 여산(驪山)기숙에 자신의 지하궁전과 같은 능묘(陵墓)의 조영(造營)을 시작해 매년 70만명을 징용(徵用)해서 오면 죽을 때까지 조영(造營)을 계속하게 했다. 그리고 능묘 안에는 진귀한 재보(財寶)를 가득 채웠다.
 
능묘내부(陵墓內部)에는 도굴방지를 위해서 장치를 만들었다. 공사가 끝나면 이를 만든 기술자인 공장(工匠)들은 비밀을 유지하기 위해 모두를 능묘내(陵墓內)에 가두어서 죽임을 당하였다. 
 
또 진왕(秦王)은 수도(首都) 함양(咸陽)에도 장려(壯麗)한 궁전을 건설했을 뿐만 아니라 치세말기에는 위수(渭水)사이 함양(咸陽)의 맞은편에도 새로운 궁전을 35만명이 짓게 했다. 
 
이러한 토목공사에 일을 할 인원조달이 가능한 것은 진왕이 만든 강력한 중앙집권체제와 관료제(官僚制)와 엄격한 법치주의 덕분이었다. 즉, 진왕 지배하의 관료(官僚)는 진왕이 70만명을 징집하라고 하면 경징(輕徵)의 법률위반자인 죄수 등 70만인을 끌어들이면 족했다. 
 
이들은 죄인이기 때문에 임금을 지급할 필요도 없고, 병(病)이나 사고로 죽어도 아무런 보상도 하지 않았다. 그래서 조영증축(造營增築)은 생각대로 잘 진행되어 갔다. 이로 인해 백성들의 민심은 흉흉할 대로 악화할 뿐이었다. 결과는 일촉즉발의 상황으로 악화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같이 진왕의 창시(創始)한 가혹한 정치는 멸망한 타국의 유민들에게는 원한과 반감을 사는 일로 이어 졌다. 그것은 노역 외에도 외정(外征)을 몇 번이고 하는 중에 백성들은 이중삼중으로 동원되어 재정적으로나 인명이 손상과 큰 부담은 민심이 나쁠대로 나빠져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지방순시 중에 민란(民亂)이 터지고 진왕이 ?i기는 가운데 진왕의 마차의 마부를 하고 있던 창해(滄海)사람인 여후영은 가족을 죽인 원한을 늘 품고 있던 중 그 원수를 갚겠다고 결심하고 있던 중 왕(王)이 민란을 피하는 도중에 박살내어 죽이게 된 것이다. 
 
지나 4000여년의 역사상 가장 강대한 시대가 진(秦), 수(隨), 당(唐)시대인데, 진은 처음으로 지나를 통일하고 크게 국위(國威)를 떨친 나라이기도 하다. 또한 지나 역사상 가장 강대한 나라요 세계사상 보기 드문 대제국(大帝國)이 진이었다.
 
이같이 지나 역사상 가장 강대한 시대가 진이고 그 후, 수(隨), 당(唐)시대이다. 그런데 이미 살펴 본대로 당시 예맥이 진을 타도했다. 이러한 역사를 우리나라 국민들에게는 가르치지 않아 이런 사실을 전혀 모르고 있는 것이 현재 우리들의 모습이다.     
 
천하를 통일한 진(秦)의 정책과 멸망원인
 
진왕은 연(燕), 조(趙), 제(齊), 위(魏), 한(韓), 초(楚)를 멸망시키고 6국(國)을 통일했다. 그리고 진왕은 오르도스(Ordos), 복건(福建), 광동(廣東), 광서(廣西), 그리고 인도지나, 하노이 까지 군(郡)을 두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진이 멸망하기까지 남월(南越)은 멸망한 것이라 하고 있으나 멸망한 것은 아니다. 다시 재건한 것이었다. 
 
지나와 일본(日本)은 전국시대인 서기전334년에는 ‘월(越)’이 있었는데 진을 위해서 초(楚)를 멸망시킨 그 일부는 해안선을 따라서 남하해 절강(浙江) 남부로부터 복건(福建)에 걸쳐서 할거(割據)하고 있었다. 진군(秦軍)은 이들을 제압했다고 하나, 완전 제압이 아니었다.
 
당시 대륙의 북방에 거주하고 있던 예맥조선은 소위 한족왕조(漢族王朝)와의 1000년 이상에 걸쳐서 대륙을 정벌하고 정복해 지배하면서 강성한 나라로 고대부터 한족(漢族)과 서로 도와주고 이용하면서도 대립한 상극(相剋)이 당시 상황이었다. 
 
그런데 어찌해서 강국인 진이 멸망하게 된 것인가. 진왕의 정치는 멸망된 유민의 원한과 반감을 사는 것이 많았다. 그 위에 외국정벌을 몇 번이고 행하기 때문에 당시 백성은 원격지로부터 군무에 따르지 않으면 아니 되어 왕복하는 재정적 부담도 엄청난 것이었다. 
   
그리고 진왕은 정벌을 하면서 말할 수없는 학정(虐政)을 해 인명 살상을 했다. 그것은 지나의 역사를 살펴보면 그들은 대집단의 민족이라도 거침없이 무수히 절멸시키고 있다는데 진의 멸망원인이 있었다. 그것은 진왕의 잔혹함의 극치에서였다. 
 
진왕의 잔혹함을 보면, 진(秦)때가 가장 잔혹한 학정(虐政)이 아닌가 생각하게 한다. 지나 한족(漢族)이 건국한 왕조는 은(殷), 주(周), 진(秦), 한(漢), 위(魏), 촉(蜀), 오(吳), 진(晉), 수(隨), 당(唐), 송(宋), 원(元), 명(明), 청(淸)의 일문자(一文字)의 나라와 중화민국(中華民國), 중화인민공화국(中華人民共和國)등이 있는데 이들 나라 중 가장 잔혹한 시대가 진이다. 
 
사기(史記)에 나와 있듯이 전국시대 말기 진나라와 조(趙)나라의 ‘장평(長平)의 싸움’에서 진군이 승리하고 조군(趙軍)이 항복하자 진은 그 항복한 40만명을 생매장한 것을 비롯해 가혹한 형벌과 노역에 시달리는 백성을 돌보지 않고 자신의 영달에만 신경썼다.
 
진왕인 ‘정(政)은 서기전 221년에 제(齊)를 멸망시켜서 춘추(春秋以來)의 난세(亂世)를 통일했으나, 지나는 통일을 달성하니 지금까지의 왕의 칭호를 버리고 황제(皇帝)라 칭하고 스스로 시황제(始皇帝)라고 했다’고 했는데 이도 왜곡이다. 시황제라는 칭호는 진왕 사후(死後) 시호(諡號)로 주어진 것이었다. 이에 관해서는 이미 다뤘다.
 
여기서 진왕의 치세에 대해 말한다면 그는 지금까지의 봉건제를 폐하고, 새로운 관료제도를 채용해서 군현제(郡縣制)를 두고 중앙으로부터 관료를 임명해서 파견했다. 진왕이 채택한 정책 중에서도 특필해야 할 것은 지금까지 나라마다 달리되어 있던 문자의 자체(字體), 차륜(車輪)의 폭(幅), 도량형(度量衡), 화폐(貨幣)등 여러 제도를 통일한 일이었다. 
 
또한 나라마다 있는 성벽을 파괴해 병기(兵器)를 몰수한 것 외에 전국부호(全國富豪) 12만호를 진의 수도(首都)로 옮기고 장려한 궁전과 기타 토목공사를 일으켰다. 
 
여기서 가장 곤란한 사업은 문자의 통일이었다. 이미 전국시대(戰國時代)부터 다른 서체(書體)를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각국의 왕은 유교의 도배(徒輩)를 고용해서 외교문서 등을 작성한다든가, 사자(使者)로 세우든가 했기 때문에 진왕은 서채(書體)와 읽기를 통일하면 좋겠다고 보고, 한자(漢字)의 수를 3000자로 결정했다. 
 
이 때문에 지금까지 멋대로 만들어진 한자(漢字)를 사용하고 있었던 각종 서적을 일거에 파기하고 말았다.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분서(焚書)’라고 말해지는 것이다. 
 
글을 맺으며 
 
우리는 고구려가 수(隨)를 격파하고 당(唐)을 격파하고 제압해 한족(漢族)과의 쟁패전에서 승리하고 후에 백제와 고구려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한 것은 알면서도, 고대 예맥을 비롯한 월씨(月氏), 제의(諸衣), 전구(旃裘)등 유목민족(遊牧民族)이 대륙에서의 활동도 전혀 모르고 있다. 또 지나의 삼국시대 220년~280년 위(魏), 촉(蜀), 오(吳)도 동이족이다.
 
더욱이 예맥의 모돈단우(冒頓單于)는 40만기(萬騎)의 대기마군단(大騎馬軍團)을 이끌고 동호(東胡)와 월씨(月氏), 견곤(堅昆)도 격파해서 유라시아 대륙에 자랑하는 대유목민국가 예맥조선을 수립했다. 우리는 이를 가르치지도 배우지도 않아 모르고 있다. 
 
예맥조선은 극히 강대해 당시 한인집단(漢人集團)인 기자조선과 위만조선, 한사군(漢四郡)은 물론 동주(東周)시대부터 한무제(漢武帝)시대까지 한족(漢族)을 정벌, 정복했다. 이 사실이 지나의 사서(史書)에도 명기(明記)되어 있다.(論語 卷14. 淮南子 卷 11).
 
시전비궁구장(詩傳閟宮九章 註)에 신안호씨(新安胡氏)가 예맥이 노(魯)를 정복했다하고, 사기(史記)에 태사공(太史公)은 연(燕)이 북으로 예맥(銳麥)의 압박을 받아 거의 멸망에 직면한 때가 수차(數次)라 했다. (史記34, 燕召公 世家 第4. 記129 貨殖列傳 第69 烏氏倮).
 
자치통감의 기록에도 진이 예맥과 남월(南越)을 공격했으나 성공치 못하고 천하가 혼란에 빠졌다고 하고 있으며 진은 병사(兵事)에 대한 형세를 알지 못해 싸우면 적에게 포로가 되고 주둔하면 사병이 전멸되었다고 했다. (資治通鑑 卷15 漢紀7 太宗孝文皇帝下). 
 
이같이 진도 예맥을 이기지 못했다. 여기에 진은 부패하고 출전하는 자가 분원(憤怨)을 품어, 만 번을 죽는 해가 있을 뿐이요 아무런 보답이 없고 전사자에게 한 푼의 배상도 없었다. 이에 국민은 극렬히 화(禍)가 자신에 미칠 것을 잘 알고 불평이 고도에 달했다. 이 때에 진승(陳勝)이 대택(大澤)에서 혁명군을 일으켜 ‘진(秦)을 타도하자!’고 외치니 천하가 유수(流水)같이 호응했다. 이는 진(秦)이 강권으로 국민을 억압한 폐해에서다. 
 
여기서 지나는 진이 예맥과 남월의 전란(戰亂)으로 혼란에 빠진 때 진승과 항우가 궐기했다고 하는 것은 그 사태를 표면에서 보는 관점이고 실제로 진을 멸망에 이르게까지 타도(打倒)하게 한 자는 예맥과 남월의 공이었음 알 수 있다.
 
(以上은 최태영 [한국고대사]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 「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九犂系史」 ’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 ‘校勘十八史].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朴鐘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한국인 자부심 더 알씨사랑], [한국인 자부심 물이랑] [한국인 자부심 더 코어랑] [한국인 자부심 더 아리랑]. 朴昌和 찬술, 金星謙 번역, [숨겨진 역사를 찾아서]. 정희철 지움, [중국은 없다]. 朴昌和 筆寫 金星謙 번역, [고구리 창세기].  檀檀學會編輯, [桓檀古記]. 카터 백지원,‘고려왕조실록’. 윤진영編集「三國史」「우리역사(東夷傳」.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文定昌,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貝塚茂樹,[中國の歷史].杉山徹宗,「眞實の中國四千年史」.三浦一郞,小倉芳彦,樺山纊一, [世界を變えた戰爭, 革命, 反亂]外多數書冊을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했음을 밝힙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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