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支那)역사에서 춘추시대(春秋時代)는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서기전 770년~서기전 403년까지 367년간 계속된 시대이다. 이 시대의 유력민족은 10개가 넘는다. 북으로부터 남으로의 순으로 살펴보면 산융(山戎), 북적(北狄), 적적(赤狄), 백적(白狄), 서융(西戎), 견융(犬戎), 활윤(猾允), 형만(荊蠻)과 협이(莢夷), 회이(淮夷)등으로 불리는 민족이었다.
사가(史家)들은 주(周)무왕이 그 수도를 동쪽 낙읍(洛邑;洛陽)에 정했으나 후에 호경(鎬京;長安;현재의 서안(西安))으로 옮겨간 이후의 시대를 춘추시대라고 하고 있다. 이곳은 교역의 중심이었기에 이곳을 중심으로 세력 확대방향을 동방으로 확대해 갔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춘추(春秋)라는 것은 공자(孔子)의 역사서가 춘추인데 여기서 따온 이름이라고 하고 있다. 이후 계속되는 전국시대(戰國時代)는 서기전 403년~서기전 221년까지 약 200년간을 말하는 시대이다. 이 시대는 제국간(諸國間)에 항쟁이 계속된 시대인데 그 주된 나라는 진(秦), 초(楚), 연(燕)과 신흥의 전제(田齊), 한(韓), 위(魏), 조(趙)의 7개국이었다.
이 강성했던 7개국을 전국칠웅(戰國七雄)이라고 하는데 이 칠웅(七雄)의 나라에서 특기할 인물로는 제(齊)의 환공(桓公), 진(晉)의 문공(文公), 초(楚)의 장왕(莊王), 오(吳)의 합려(闔閭), 월(越)의 구천(句踐) 등이 유명하다. 전국시대 전한(前漢)의 유향(劉向)이 전국책(戰國策)을 편찬하였는데 이 시대를 전국시대라 하게 되었다고 하나 그 기준은 명확한 것은 아니다.
일반적으로 구분상 전국시대라 하는 것인데 당시 이 7개국이 서로 하극상(下剋上)의 시대로 들어감과 동시에 약육강식의 풍조가 점점 높아가기 때문에 각 제후(諸侯)는 부국강병정책을 취하지 않을 수 없었던 시대이다.
우리는 상고시대(上古時代)부터 철기(鐵器)를 사용해 중원(中原)을 정벌하고 정복해 지배하였으나, 지나에서는 이 춘추시대에 와서야 철기사용이 시작하면서 우리북방민족이 거쳐 온 과정을 지나도 이때부터 각기 세력 확장을 해 간 것으로 보고 있다.
한편 은족(殷族)이 황하 중류지역으로 부터 하류지역에 걸쳐서 씨족연합체가 형성하기 시작할 즈음 지나 각지에도 각기 선주민(先住民)이 있었다. 그 주류는 몽골계(系)를 주류로 한 유목민족과, 수렵민족이 융합되어서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다.
오늘은 춘추전국시대는 기마민족의 주 무대로 이어진 것으로 퉁구스계, 몽골계, 티베트계, 터키계, 그리고 이란계 등의 유목수렵민족이 주종을 이루며 대륙을 주름잡았는데 이렇게 된 것은 고대강국인 고조선의 통치력이 약화됨에서 된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예맥조선, 동주(東周)시대부터 대륙지배
본론에 들어가기 전, 고대 우리나라 역사에 나온 조선(朝鮮)이라는 국호를 한 것은 여러 개를 볼 수 있다. 조선으로 국호를 한 최초의 국가는 단군조선(檀君朝鮮;서기전 2333~서기전239년)과, 기자조선(箕子朝鮮;서기전 239~서기전195년), 위만조선(衛滿朝鮮;서기전 194~서기전 108년)인데 여기에서 빠진 조선이 예맥조선(銳麥;濊貊 朝鮮)이다.
예맥조선은 기자조선보다도 먼저 건국했으며, 극히 강대해 동주(東周)시대부터 한무제 시대 까지 1000여년 동안 대륙을 정벌, 정복해 지배한 사실이 지나 역사에 명기(明記)되어 있다. 이 예맥은 산해경(山海經) 대황동경(大荒東經)에 기록한 유위국(有蔿國)인데 너무 강대해 대륙을 정벌함으로 지나인(支那人)들은 증오심으로 예맥(濊貊)이라는 악명을 붙인 것이다.
서전(書傳) 무성편(武成篇;(주무왕(周武王)이 은(殷)을 정벌한 역사를 기록한 책)에는 화하만맥(華夏蠻貊)이라 했다. 즉, 안으로 지나, 밖으로 예맥조선이라 기록한 것이다. 기자조선보다 먼저 건국하고 극히 강대해 지나와 대립 병칭(竝稱)된 국가이다.
기자(箕子)가 동래(東來)할 당시의 조선은 광의적으로는 단군조선(檀君朝鮮)이고 협의적으로는 예맥조선이다. 이 예맥조선은 3000년 전은 구국(舊國)이 없는 시대로 동서민족이 다 몇 백리 소부족(小部族)으로 분립해 불합리한 감정으로 침략하는 전투형 시대였다.
이 시대는 아침에 흥하였다가 저녁에 망하는 시대이다. 특이한 강족(强族)이 아니고는 오랜 역사를 보존치 못하는 시대였다. 그런데 제왕운기(帝王韻紀)에 고시라(故尸羅), 고례(高禮), 남북옥저(南北沃沮), 동북부여(東北夫餘), 예맥(銳麥)이 단군(檀君)의 수(壽)라 했다.
이는 모든 부족의 족장을 다 단군이라 칭한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모든 부족 중 주체는 예맥조선(銳麥;濊貊朝鮮)이다. 예맥조선은 위만의 상전인 한고조(漢高祖)를 지원하고 위만(衛滿)을 책동해 한고조를 배반케 하였을 정도로 강했다.
또한 한무제(漢武帝)가 한사군(漢四郡)을 설치한 후 26년 만에 진번(眞番), 임둔(臨屯), 현토(玄菟) 3군(郡)을 탈취하고, 동주시대부터 한무제시대(漢武帝時代)까지 지나에 남출(南出)하여 한족(漢族)을 정벌, 정복하고 지배했으나 사서(史書)는 이 예맥조선을 지우고 있다.
논어(論語 卷, 第十四, 憲文 第十四.)에 보면, 춘추시대에 지나는 이민족의 정벌을 받아서 거의 멸망의 위기에 직면했다가 제환공(齊桓公)의 신하 관중(管仲)에 의해 겨우 구출되었다고 하고 있다. 그러므로 공자는 말하기를 “관중이 없었다면 지나는 멸망되어 우리가 피발(被髮)하는 되놈이 되었으리라”고 했다.
춘추시대에 지나를 정벌한 민족은 예맥이다. 후한서(後漢書)에 이 사실을 기록했다. 이는 우리민족이 정벌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또 공자의 말에 의하면 지나가 거의 멸망케 한 민족은 피발(被髮)민족이다. 회남자(淮南子)에 예맥(銳麥)이 종발(縱髮)했다고 했다.
고려도경(高麗圖經 皁隸條)에 종발(縱髮)은 피발(被髮)이다. 회남자(淮南子 권(券十一)에 흉노(匈奴)와 예맥(銳麥)이 종발(縱髮) 즉, 피발(被髮)한다고 했다. 그런데 춘추시대에 지나를 정벌한 것을 보면, 이는 흉노가 아니고 예맥이었다. 그리고 우리는 고려시대까지 피발했다고 했다.
이상의 고찰에서 춘추시대에 지나를 정벌해 거의 멸망케 한 민족은 의심 없는 예맥이 분명하다. 시전(詩傳) 비궁구장(閟宮九章)에 신안호(新安胡)가 예맥이 노(魯)를 정복했다 하고, 사기(史記)에 태사공(太史公)은 연(燕)이 북으로 예맥의 압박을 받아 거의 멸망에 직면한 때가 수차(數次)라고 했다. (崔仁, ‘韓國學講義’ 62면~79면 참조 인용하다.)
춘추전국시대가 된 것은 고조선의 통제력약화에서였다
춘추전국시대가 된 것은, 황하유역일대에 북방민족계열의 새로운 나라들이 우후죽순으로 생겨나서, 수십 여 개의 나라가 난립하는 상태가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이 시대, 대부분 나라들은 섬서성(陝西省) 남부지역이나, 하남성(河南省)지역 등 황하유역에 분포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찌해서 수십 여 개국이 난립하게 되었는가? 그것은 고조선은 제후국들을 직접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부족의 장(長)이나 수장(首長)등에 고조선 관위(官位)나 작위(爵位)를 준위에 그 민족 또는 제후국의 풍습에 따라서 통치하는 것을 인정하는 간접통치방법을 썼기 때문이다.
이것을 기미정책(羈縻政策)이라 하는 것이다. 고조선(古朝鮮)으로 보면, 주변 이민족을 길들임에 있어서 황제의 위광(威光)이 이민족까지 미치는 것을 그들에게 알리는 것이 최대의 목적이기 때문에 이민족이 왕조로부터 이반(離反)하지 않으면 그것으로 만족했다. 고조선은 이 정책으로 73~120(?)의 제후국이 있었다고 하고 있다.
춘추전국시대는 고조선 제34대 오루문(奧婁門) 단군(檀君;재위 서기전795~서기전 773년)과 제35대 사벌(沙伐) 단군(檀君;재위 서기전 772~서기전 705년)이 즉위한 시기에 걸쳐서 고조선의 지방통제력이 약화되면서 북서쪽으로부터 서융(西戎), 북적(北狄)등의 북방민족이 남하(南下)해 시작된 하나의 역사시대로, 그 실체를 규명하면 충분히 알 수가 있다. (以上은 정희철 [중국은 없다] 127면~128면 참조, 인용하다.)
춘추전국시대의 기간은 주(周)의 수도가 동쪽 낙읍(洛邑)으로 옮겨간 서기전 770년부터 진왕(秦王)이 등장해 중원을 통일한 서기전 221년까지로 보고 있다.
당시 황하유역에는 주(周)의 수도를 옮기기 이전부터 수많은 도시국가(Police)들이 생겨나 각 지역마다 다양한 문화를 이루고 있었다. 그리고 은(殷)의 뒤를 이은 주족(周族)은 고고학적, 고인류학적으로 보면, 몽골의 나무가 없는 대초원지대(Steppe)으로부터 양(羊)을 따라서 오루도스 지방에 들어와 황하동측 분수(汾水) 근처에 정주하여 씨족연합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그런데 은시대(殷時代)의 후반 주(周) 13대의 고공단부(古公亶父)의 시대가 되어서 은족의 침공을 받았기 때문에 황하 서쪽을 건너서 섬서성(陝西省)의 기산(蚑山)에 도망가서 도시국가연합을 형성했다. 그리하여 주(周)의 15대 문왕(文王)은 서방 티베트 강족(羌族) 리더인 태공망(太公望) 여상(呂尙)을 스승을 모시고 은(殷) 타도의 준비를 개시했다.
일족을 은(殷)의 희생제물로 여한이 깊었던 여상(呂尙)은 주(周)의 16대 무왕(武王)을 도와서 은(殷)을 격파해 서기전 110년경 주(周)가 수립되기에 이른다. 여상(呂尙)은 이때의 공적(功績)으로 산동성(山東省)에 땅을 하사(下賜)받아 제(齊)나라를 건국한다.
주(周)는 서기전 770년에 서방(西方)의 견융(犬戎)의 침공 때 호경(鎬京)을 버리고 수도를 낙읍(洛邑)에 옮겼다. 이런 연유로 호경(鎬京)에서의 약 330년간을 칭해서 서주(西周)라 하고, 서기전 256년 진(秦)이 멸망할 때까지의 낙읍(洛邑)에서의 514년간을 칭해서 동주(東周)라 했다.
진(秦) 정벌한 예맥기록 지웠고 진(秦)을 한족(漢族)이 세운나라로 했다
동주시대(東周時代)부터 1000여년 간, 대륙을 정벌한 예맥은 전국시대 7웅(雄)중 하나로 오늘날 서안(西安)부근에 에 있는 함양(咸陽)을 중심으로 일어나서 진이 최초로 중원의 6국을 통일했으나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겨우 41년간밖에 되지 않은 나라였다.
진의 멸망원인은 진이 무리한 토목공사와 전사자등에게 보상도 없었다는 것과 예맥과 남월(南越)을 공벌(攻伐)한 것이었다. 진은 국경을 방위하고 민중이 죽어가는 것을 구출키 위한 것이 아니고 영토를 얻으려는 탐욕으로 공벌했으나 실패한데서 혼란에 빠졌다.
그러지 않아도 진은 강권으로 국민을 억압한 폐해에 분노가 극에 달한 때에 진승(陳勝)이 대택(大澤)에서 ‘진을 타도하자!’고 외치니 천하가 유수같이 호응했다. 이는 예맥(銳麥)과 남월(南越)의 전란(戰亂)으로 혼란에 빠진 것을 계기로 진승과 항우가 궐기한 것이다.
재래 지나의 사가(史家)들은 진을 타도한 자는 진승과 항우(項羽)라고 선전들 하나, 진을 타도한 자는 진승과 항우가 타도했다 함은 표면으로 보는 선전이고, 실제로 진을 타도한 자는 진승과 항우가 아니라 예맥과 남월(南越)인 것을 알 수 있다. (以上은 崔仁, ‘韓國學講義’ 74면~78면 참조 인용하다.)
그리고 지나는 북방 기마민족에 대해 이적국(夷狄國)이라 하며 동물이나 곤충의 이름을 붙여서 부르고 하시(下視)하는 명칭으로 말을 하며 왜곡하지만, 진왕의 계보를 살펴보면 진의 왕실은 여수(女脩)의 후손으로 그 자손 중 오래(惡來)가 은(殷)의 마지막 군주 주왕(紂王)의 신하였고, 오래(惡來)의 후손인 조보가 주(周)에서 공을 세워 주(周) 5대 목왕(穆王 ; 서기전 977~서기전 922년)으로 부터 조씨 성(姓)을 하사받았다고 했다.
그 후 비자(非子)가 제8대 효왕(孝王)의 총애를 받아 영(嬴)씨 성과 함께 진이라는 지역에 봉토를 받았는데 그 후손 중 영정(嬴政)이 진왕이 된 후, 6국 즉, 초(楚), 연(燕), 제(齊), 한(韓), 위(魏), 조(趙)를 통일했던 것이다.(杉山徹宗,‘眞實の中國四千年史’71~74면 참조 인용하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진은 한족(漢族)이 세운 나라가 아니고, 동이(東夷)가 세운 나라이다. 진은 우리역사에 포함되어야 마땅한 나라이지 지나 역사로 한 것은 잘못된 것이다. 사마천 사기(史記)도 진은 오래(惡來)의 후손이고 오래는 동이가 세운 은(殷)나라 사람이다.
지나의 문인인 부사년(傳斯年)도 은(殷)은 동이족(東夷族)의 나라이니 진은 본래 서이족(西夷族)으로 예맥 계열이기에 한족(漢族)의 역사에 포함시킨 것은 잘못이라고 지적한다. 진(秦)은 인류학적으로도 당연히 우리나라 역사에 편입되어야 할 나라인 것이다.
금후 우리나라 역사가 반도역사가 아니라 대륙사인 것을 바로잡을 때 바로 잡아야할 역사이다.
끝을 맺으며 - 한민족(韓民族)은 인류사상 최초로 등장한 문화민족이다
사서(史書)들은 지나문화를 창설한자는 요(堯)와 순(舜)이라 하고 있다. 그런데 실제로 지나문화를 창설한자는 요가 아니고 순이다. 이는 지나 사학계 제1인자 사마온공(司馬溫公)도 계고록(稽古錄)에서 순(舜)에 대해 자세히 말하고 있다.
이에 지나문화의 개척자 순(舜)과 지나문화의 대종사(大宗師) 공자가 우리 한민족이라 분명히 기록하고, 한국을 군자국(君子國)이라고 찬양까지 했다.
그들은 우리에게서 궁시(弓矢)만 수입한 것이 아니라 문화까지 수입해야 한다고 결론까지 말한 지나의 정사(正史)와 경전에 명기해놓은 것이 거짓이라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들이 제아무리 ‘대중화주의(大中華主義)’를 선전해도 그들의 역사는 10%도 아니 된다.
원래 중국(中國)이라는 국호(國號)도 가락국(駕洛國)을 중국이라 칭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卷二 駕洛國記)에 수로왕(首露王)이 황천(皇天)의 명(命)을 받아 왕이 되었다하면서 가락국을 중국(中國)이라한 것이다. 즉 황천(皇天)의 명과 결부된 중국은 세계의 중심을 가리킨 것이다.
또한 덧붙일 것은 예맥이 장기간 지나를 정벌한 것을 분명히 기록하고 지나병가(支那兵家)의 대종사(大宗師) 강태공(姜太公)이 한민족(韓民族)이라 분명히 기록하고 한국을 대국(大國), 구국(舊國)이라는 찬양까지 하며 우리가 강대했음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지나의 문화는 천자(天子)의 문물제도나, 관제, 군사학과 주역철학(周易哲學)과 홍범구주(洪範九疇)가 우리에게서 창조된 것이라는 것이 실증된다. 북사(北史 卷94末尾)와 주역(周易 卷之24 說卦傳)은 이를 말하고 있다.
고대 지나인이 2000년 동안 우리 고시(楛矢), 석족(石鏃)을 수입하고 당태종이 신라쇠뇌 기술을 구진천(仇珍川)에게 배우려 한 것 등을 보면 문화사상뿐 아니라 물질문명 등 만 가지 문물제도가 황제제도를 비롯해 우리에게서 배웠음을 숨길 수가 없다.
(以上은 최태영 [한국고대사],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김세환,[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九犂系史] ’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 ‘校勘十八史]. 정희철’[중국은 없다.]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朴鐘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한국인 자부심 더 알씨사랑]’ [한국인 자부심 물이랑] ‘[한국인 자부심 더 코어랑] [한국인 자부심 더 아리랑].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朴昌和 찬술, 金星謙 번역, [숨겨진 역사를 찾아서]. 朴昌和 筆寫 金星謙 번역, [고구리 창세기]. 檀檀學會編輯, [桓檀古記]. 文定昌,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貝塚茂樹, [中國の歷史].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三浦一郞, 小倉芳彦, 樺山纊一, [世界を變えた戰爭, 革命, 反亂]外 多數書冊을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했음을 밝힙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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