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좌원대첩, 후한(後漢)을 망하게 했다(上)

입력 2020-10-18 17:24:20

원문 링크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우리가 대륙을 지배하면서 상고시대부터 고대도 지배한 사실은 구미학자들이 우리보다 더 잘 알고 있다. 러시아의 역사학자 유엠 부틴(1931~2002)은 ‘인류문화의 원형 고향은 러시아라 하며 이곳은 동서양을 아우르는 우리의 환국(桓國)이라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또한 그는 동북아시아에서 단군조선(檀君朝鮮)을 알지 못하면 ‘문화의 공통점’을 이해할 수 없다. 러시아 땅에 잠들고 있는 환국(桓國)에 대해 자신의 근원을 부정하는 것은 있을 수 없음을 말하며 이를 부정하는 그런 나라들은 많은 인간을 학살한 야만국임을 말했다.
 
그리고 조선의 영역은 한번도 중국의 제후국이 된 일이 없을 뿐 아니라, 연(燕)나라 주(周)나라에 예속된 일이 없다고 했다. 한족(漢族)이 들어오기 전, 호북(湖北), 호남(湖南), 강서(江西)는 묘족(苗族)의 영속지(領屬地)였고, 군주는 치우천황(蚩尤天黃)이었다.
 
임어당(林語堂) 박사와 안호상(安浩相) 박사 간의 대화에서 안호상 박사가 한자를 빌려 써 고맙다 말하니, 임어당 박사는 한자는 당신네사람이 만든 글자가 아닌가 라고 답했다. 이에 안 박사가 충격을 받고 역사를 공부하게 된 동기가 되었다 한다.
 
또 한편 중화민국의 장개석(蔣介石) 주석과 이시형(李時榮) 선생 간의 대화 중에 이시형 선생이 우리가 대륙의 주인인 것을 모른다고 하자 이에 대해 장개석 주석(主席)은 “당신들의 선조는 대륙의 주인이었는데 그것도 모르오! 그러니 나라를 빼앗겼지!”라고 말해 여기서 이시형 선생도 큰 충격을 받고 역사를 연구하게 되었다는 이야기는 많이 알려진 일이다.
 
사실 우리나라 사람들은 너무 우리역사를 모르고 있다. 일본의 사가, 아고 기요히코(吾鄕淸彦)는 사마천의 쓴 사기(史記) 25권은 “단군조선이 중원대륙(中原大陸)을 지배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거꾸로 뒤집어가지고 마치 지나(支那)가 단군조선을 지배한 것처럼 힘겹게 변조작업을 한 것이다”고 했다. 이는 일본에서도 잘 알려진 이야기이다.
 
이에 대해서 지나의 사학자 필장박(畢長樸), 임해상(林惠詳), 왕동령(王棟齡), 서양지(徐亮之)등 많은 학자들도 이에 대해 반박하거나 부인하지 않고 있다. 역사는 사실을 사실대로 써야 역사이지 거짓으로 엮어 놓은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
 
오늘은 예맥조선이 강력한 기마군단을 이끌고서 고비사막을 가로질러서 동환분지와 다그라마간 사막도 넘어서 서역지방을 원정했던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지나와 일본은 이를 흉노(匈奴)라고 하나 이들은 흉노가 아니고 예맥조선(銳麥;濊貊朝鮮)이 맞는 것이다. 당시 대륙을 정벌하고 정복하며 지배한 것은 예맥조선(銳麥朝鮮)이었기 때문이다.
 
예맥조선의 영역은 그 어느 나라보다도 광역이었다
 
당시 예맥(銳麥)의 영역을 보면 루란(樓蘭)이나 우전(于闐)등 36개나 되는 오아시스 국가가 존재하고 있었는데 그 모두가 예맥의 군문하(軍門下)에 들어갔을 정도로 예맥의 영토는 동(東)은 서만주(西滿洲)로 부터 북(北)은 바이칼호수, 예니세이강, 오비강의 상류까지, 서(西)는 다그라마간 사막을 포함한 파밀고원까지, 남(南)은 곤륜산맥(崑崙山脈)으로부터 싸이담분지를 거쳐서 전한내의 란주(蘭州) 오루도스(Ordos)를 통해서 만주까지 달하는 가장 큰 영역을 갖고 있었다.
 
이에 대해서 임혜상(林惠詳) 박사가 말했듯이 세계 지구의 40%가 유라시아인데 그 80%가 조선영역이고 한(漢)나라는 매우 좁은 지역을 가졌을 뿐이라고 했다. 이는 예맥을 위시한 북방민족들이 일찍이 철(鐵)의 생산이 되어 기마군단도 철기로 무장하고 있었으나 지나에서는 서기전 500년경부터 철의 생산이 되고 있으므로 기마군단을 막을 길이 없었다.
 
이렇게 광역의 영토를 갖게 된 것은 이미 주지하는 바와 같이 배달국 시대부터 철의 생산으로 무기가 그 어느 민족보다 앞서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지나와 일본은 북방기마민족은 글도 모르고 무지하며 낙후된 보잘 것 없는 민족이라 비하하지만 실은 이와 정반대였다.
 
우리는 고대 문자도 다 우리민족이 만들었고, 무기도 지나는 오랜 기간 청동기와 병용되는 시대가 계속되어 진(秦)시대에도 화살 앞에 붙이는 촉(鏃)은 동(銅)이었다. 한고조(漢高祖)시대에는 약간의 활촉(矢)에는 철제의 촉이 사용된 것으로 보나, 전술적으로는 종래와 같은 방법이었기 때문에 적(敵)의 수가 많으면 예맥의 기마군단에게는 감당할 수 없었다고 한다.
 
여기에 한무제시대(漢武帝時代)시대가 되자 주철(鑄鐵), 즉 주물(鑄物)기술이 개발되어서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되었다. 종래에는 철광석을 연철(鍊鐵)로 바꾸고 기구를 제작해 왔는데 대해 주철이란 철광석을 녹여서 이를 주형에 흘려보내는 것만으로 생산을 하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새로운 대량생산이 가능해 졌다. 철촉(鐵鏃)은 예리하게 되고 2세기말에 이르러 후한(後漢)은 고구려에 도전해 좌원(坐原)에서 국운을 건 두 차례의 격전을 벌였던 것은 한(漢)도 기마군단과 같이 철제무기가 어느 정도 갖추었기 에서 가능했던 것이었다.
 
그래서 지나에도 철제 기구와 무기가 우리 동이족에 의해 발달하게 된 것을 부인할 수 없다. 그들은 이 철을 얻기 위해 산에 나무를 벌목함으로 오늘날에도 화북지방에 민둥산(禿山)이 된 것은 그 최대의 이유가 한무제에 의한 철제무구(鐵製武具)와 농구(農具)의 생산에 있었던 것이다. 철을 생산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목재가 필요한 데서 연유한다.
 
그 때문에 화북일대(華北一帶)의 산과 산은 벌거숭이 민둥산이 되기까지 벌채해버렸던 것이다. 그것도 건조한 대지이기 때문에 한번 벌채(伐採)하면 재생은 불가능하게 되었다.  
 
(다음에 계속)
 
 
 
이을형 필진페이지 +
후원하기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0
좋아요
2
감동이에요
2
화나요
0
슬퍼요
0
댓글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