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後漢) 멸망 후 지나 역사의 허구 밝힌다(上)

입력 2020-10-24 10:15: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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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지나(支那)는 역사를 기술함에 있어서 휘치필법(筆法)으로 역사를 자기나라 본위로 기술(記述)하기 때문에 우리에게 패(敗)한 것도 승리로 과장해서 엮음은 물론, 있지도 않은 것을 거꾸로 꾸며 우리민족이 세운 나라는 제대로 기술하지 않고 부정적으로 말하는 것이 그들 사서이다. 
 
예컨대 신(新)나라는 한무제(漢武帝)사후 김일제(金日磾)의 증손자인 왕망(王莽)이 역사에 전면등장하면서 신라김씨(新羅金氏)들이 한(漢)의 국호를 신(新)이라 했는데 지나는 이를 찬탈(簒奪)이라고 하나 찬탈한 것이 아니었다. 
 
그 내력을 보면 김일제는 한서(漢書) 김일제전(金日磾傳)에서 밝힌 대로 흉노(匈奴)라하는 예맥(銳麥), 휴도왕의 태자였던 용정(龍庭)에서 한(漢)으로 귀화해 시중(侍中), 상시(常侍)를 거쳐 투정후(秺亭候)에 봉했을 만큼 한(漢)나라에 많은 공을 세운 공신(功臣)이었다. 
 
그는 전한(前漢)의 원제(元帝)황후의 생질(甥姪)로 태어난 왕망(王莽;서기전45년~서기23년)은 딸(娘)을 10세의 평제(平帝)에 시집보냈는데 평제(平帝)가 겨우 5년간의 재위(在位)로 세상을 떠나자, 한무제(漢武帝)의 유언에 따라 곽광(霍光)과 함께 신탁통치를 했다. 
 
이후 곽광(霍光)은 실각했으나 신라 김씨들은 7대를 내려오며 돈황(燉煌;沙州)을 다스리고 멀리 경조군(京兆郡;옹주(雍州)을 다스렸다. 그런데 이 옹주는 후한(後漢)의 13주 중 하나로 그 중심지는 장안(長安)이다. (후한 때의 옹주는 감숙성과 섬서성 일부를 말한다.) 
 
왕망(王莽)은 서기8년에 황제(皇帝)로 즉위하며 국명(國名)을 한(漢)에서 신(新)으로 변경한다. 그리고 전한말기(前漢末期) 외척과 환관의 횡포와 지방호족(豪族)의 대두로 중앙집권적인 체제가 혼란하자 왕망(王莽)은 백성을 생각하고 그들을 위한 새로운 관료제도와 정책을 발표한다. 
 
그 내용은 토지의 국유화정책과 노비의 금지령을 내리는 등 대개혁을 내놓았으나 기득권층의 관료와 지방호족, 대상신(大商人) 등의 반대에 부딪혀 경제도 혼란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농민들은 한(漢)의 부흥을 요구하며 화북(華北)에서 반란을 일으킨다. 즉 적미난(赤眉亂)이라는 반란이다.
 
오늘은 지나의 나라들이 고대부터 왜곡한 역사기록과 후한(後漢)이 고구려와 좌원(坐原)전투에 패한 후의 상황을 바로 밝혀 잘못된 역사조작이 얼마나 허황된 것인가를 말하려 한다. 
 
적미난(赤眉亂)과 후한(後漢)의 성립과 멸망 
 
신(新)나라가 적미난(赤眉亂)으로 혼란에 빠지자 이 기회에 한(漢)의 일족인 유수(劉秀;서기전 6~서기57년)가 거병해 장안(長安)에 입성함으로 신(新)나라는 무너지고 왕망(王莽)은 죽임을 당하고 유수(劉秀)가 서기25년 황제로 즉위하니 이가 광무제(光武帝)로 후한시대가 된 것이다. 
 
후한(後漢)은 수도를 장안에서 낙양(洛陽)으로 옮겨 서기220년 멸망할 때까지 195년간 계속된 것이다. 이 기간 신라김씨에 대한 정치보복을 무자비하게 자행되는데 이를 한란(漢亂)이라고 하며 그 처절함은 말할 수 없었다. 때문에 성(姓)을 바꾸며 피신할 정도였다.
 
전한(前漢)말 서기2년 당시 5959만의 인구였던 것이 후한초대의 황제 광무제가 죽은 서기57년에는 2100만인이 감소하고 있는 데서도 잘 알 수가 있다. 이 인구의 최소, 최대의 이유는 수백만이 넘는 적미군(赤眉軍)이 유수군(劉秀軍)에 멸망되고 학살과 기근이 그 큰 원인이었다.
 
더욱이 농민농사를 방기(放棄)해서 10년간이나 전장(戰場)생활이 계속되니 밭은 황패하고 식량이 없어지니 매년 기근이 연속이 된다. 이 결과로 수백만인이 사망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오늘날 지나 사람들이 먹는 것에는 혐오스러운 요리가 많은데 이것은 뱀, 곰, 이리, 개, 박쥐, 귀뚜라미, 제비 소(巢)등 현재는 고급요리로서 치고 있는 것도 있으나, 원래는 전란과 대 재해에 의한 기근에서 백성이 식량난에 빠졌기에 시작된 것이다. 
 
이것은 이때에 50여년간, 전쟁과 전란으로 4000만에 가까운 인구가 줄었고 또한 한민족(漢民族)에 의한 대량살육이 왕조가 교체될 때마다 반복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삼국사기 고구려 본기 신대왕 8년 11월의 기사는, 한(漢)의 군사들이 공격하다 이기지 못하자 장졸들이 굶주리다 못해 퇴각하니 답부(答夫)가 수천 명의 기병을 이끌고 추격해 좌원(坐原)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한의 군대가 크게 패해 말 한필 살아 돌아가지 못했다고 기록했다. 
 
이것은 서기 172년에 있었던 일이며. 또 고국천왕(故國川王) 6년 기사에는, 한(漢)의 요동태수가 군사를 일으켜 고구려를 공격했는데 이에 고구려에서는 왕자 계수(罽須)를 파견했으나 이기지 못하자 왕이 친히 정예기병을 거느리고 가서 한(漢)군사와 좌원에서 싸워 패퇴시키니 적의 머리가 산을 덮었다고 하는데 이것이 제2차 좌원대첩(坐原大捷)인 것이었다.
 
이로서 후한은 고구려에 의해 망하게 되는데 그것은 좌원에서의 패전으로 혼란에 빠지게 되었는데 이 때(서기184년) 태평도(太平道)를 넓히는 장각(張角)이 중도(衆徒) 수십만을 얻어서 한(漢)을 대신해서 제위(帝位)에 자기가 오른다고 예언해 일제히 봉기한다. 
 
이에 후한은 좌원의 패전과 황건적(黃巾賊亂)의 난(亂)을 계기로 위(魏), 촉(蜀), 오(吳)의 삼국시대가 개막되고 서기220년 후한의 헌제(獻帝)는 마침내 위(魏)의 문제(文帝) 조비(曹丕)에게 제위를 넘겨줌으로 이로서 후한은 종말을 고하게 된 것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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