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민족이 중국인 보다 먼저 황하유역서 살았다

입력 2013-08-17 21:07: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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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인류의 기원은 언제부터 인가
 
필자는 이번 칼럼에서 한민족의 기원뿐만 아니라 인류의 기원까지 진지하게 살펴보고자 한다. 이는 한민족의 족적을 제대로 인식하기 위한데 있다. 지구가 형성된 이래 다양한 생물과 동물들이 발생해 진화하고 그 중에는 소멸한 것들도 있다. 인류 또한 지구상의 한 생명체다. 19세기 말 이래 각지에서 화석인골(化石人骨)이 발견되면서 인류사에 대한 연구가 활발해 졌다. 여기서 인류의 조선(祖先) 모습이 명백해지게 됐다. 인류의 발생은 학자에 따라 다르나 거의 200만 년 전으로 보고 있다. 시기는 지구상에서 빙하시대가 시작한 때다. 원시시대 인류의 발전을 보면, 원인(猿人)은 직립보행하고 손으로 간단한 도구를 만들었으며, 원시인은 불을 사용하고 언어가 상당히 발달해 있었다. 그 후 옛 사람들은 죽은 자를 매장하는 등 종교를 만들었다. 아울러 인류는 벽화 등 예술을 낳았다. 활과 화살 등을 발명해서 사냥이 진보하고 현대인과 같은 특징을 가진 인류가 수만 년 전에 출현했다. 그리고 농경이 시작하기까지의 약 200만년을 구석기시대라고 한다. 이 때 원숭이와 가까운 원인(猿人)이 시작되고 원시인, 구인(舊人)을 거쳐 신인이 출현을 한다. 이 기간 지구상은 빙하시대였다. 그런데 19세기 중엽 독일의 라인 강 지류에서 돌을 캐는 작업 중 우연히 주목되는 화석인골이 발견됐다. 당시에는 ‘병인의 뼈’로 되어 인류의 조선으로는 인정하지 않았으나 발굴과 연구가 진행돼 20세기 초 20~7만 년 전의 인류인 것을 학계가 인정하게 됐다.
 
그런데 19세기 중엽이 지나 프랑스의 구로마욘 동혈(洞穴)에서 수만 년 전의 것으로 추정되는 화석인골을 발견했다. 이 인골은 현대 인류와 같은 특징을 지녔다. 19세기 말 자와 섬에서도 화석인골을 발견, 40년의 연구결과 50~30만 년 전 인류의 조선(祖先)인 것이 인정됐다. 이 인골은 직립원인(直立猿人)이라고 이름이 붙여졌다. 또 1920~30년대에는 북경 교외의 주구점 동혈(周口店, 洞穴)에서 40체 이상을 발견, 자와 인과 같은 시대의 인류인 것이 인정됐다. 1924년 남아프리카에서 자와 인보다 더 오랜 원숭이에 가까운 인골이 발견됐다. 이는 1955년이 되어 최고의 인류인 것이 정식으로 인정됐다. 그래서 인류의 역사는 200만년에 미친다는 것이 판명됐다. 지질시대 신생대의 최후 시기인 제4기(紀)의 전반시대에는 지구상에 널리 빙하가 발달하고 있었다. 인류가 나타난 홍적세(洪績世)에는 빙하가 발달한 추운 빙기가 4회, 그 사이 따뜻한 간빙기(間氷期)가 3회 있었다. 약 1만 년 전부터 현재와 같은 충적세(沖積世)가 된다. 우리 민족은 이 보다 앞서 요동과 한반도에 중국보다 먼저 선주하고 세계최초의 문명을 일으킨 민족이다. 10만년 전 당시 빙하기 등의 영향을 받은 민족 대이동으로 우리는 중국보다도 앞서서 바이칼 호 서방의 대하유역과 중국의 황하유역 및 요동과 한반도에 제일 먼저 정착했던 주인이다. 그리고 구석기문화를 일으킨 민족으로 보고 있다.
 
한민족의 기원은 언제 부터인가
 
그런데 그때 어떤 인종이 살았는지는 알 수가 없다. 존 카터 코벨(Jon Carter Covell(1910~1996) 박사는 백인종인 코카서스인종도 있었다고 주장하나 우리 민족이 단일민족은 아닌 것만은 분명하다. 석기시대는 학자에 따라 다룰 수 있으나 일반적으로 전기와 후기로 나눈다. 유명한 북경인 자와 직립원인(直立猿人) 등은 전기 홍적세(洪績世)의 인류이며 현생인류의 출현은 그 후기 BC 약 4만년 경부터 아세아 북방과 우리나라에 살기 시작한 것으로 보고 있다. 확실한 연대는 어려우나 인류의 생활은 각지에서 점점 다양화했다. 농경민, 유목민, 수렵민 등이 그들이다. 초기 15000년간은 수렵을 하고 그 후 농업과 유목으로 광역국가를 일궈낸 민족이 바로 우리 한민족이다. 그런데 신석기시대에 우리 한반도와 그 인접지역에는 어떤 사람이 살고 또 그들은 어디로부터 왔는지 알 수는 없다. 신석기시대에는 한반도 방방곡곡의 해안이나 하천유역 또는 산이나 구릉(丘陵)에 사람이 살았던 거주적(居住跡)이나 패총(貝塚) 등을 남기고 있다. 그곳에서 발견되는 유물은 돌로 만든 도끼·화살촉·칼·검 등의 석기, 동물의 뼈나 뿔로 만든 화살촉·검·도끼·침, 패각(貝殼)으로 만든 용기 등 골각(骨角)·패기(貝器)) 등이지만 그 중 가장 특징적인 것은 토기(土器)다. 이 토기의 제작연대는 측정해서 말을 할 수 있을 뿐이다.
 
신석기시대 토기가 갖는 특징은 여러가지 계통의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우리 한반도 까지 들어온 것을 말하는 것이다. 토기 중에서 넓은 지역에 분포하고 있는 것의 하나는 빗과 같은 것으로서 무늬를 붙인 즐문토기(櫛文土器)가 있다. 이것은 우리나라 전역의 하천유역이나 해안지대의 유적에서 나오고 있다. 이 즐문토기(櫛文土器)는 러시아 시베리아의 바이칼 호 주변(湖周邊)등에 분포하고 있는 것과 근사(近似)하고 있으며. 그 계통을 따른 것이다. 이에 대해서 반도의 전역에 걸쳐 하천에 가까운 산이나 구릉(丘陵)으로부터 발견되는 후육무문토기(厚肉無文土器)가 있다. 이것은 거칠고 둔한 저열(低熱)에서 구은 토기로서 만주의 일부지방에 볼 수 있는 것이다. 이외에 표면이 마갈아서 단(丹)이 칠해진 도단마연토기(塗丹磨硏土器)가 있는데, 이것은 중국본토에 연결되는 것이다. 대륙 북방계의 즐문토기(櫛文土器)의 사람들이 하천이나 해안에 들어가서 또 만주의 일부지방에 연결을 가진 무문토기계의 사람들도 산맥이나 구릉(丘陵)을 따라서 들어가 중국의 마연토기(磨硏土器) 문화를 이룩한 것으로 보인다. 토기 외에 한민족의 기원을 어족(語族)에서 찾아 볼 수 있다.
 
어족에서 보이는 한민족의 구분
 
우리가 알타이 어족-퉁구스 제어(諸語)라고 하면 몽골제어(諸語), 터키제어(諸語)로부터 되어 우리의 언어와 일본어, 오키나와 어(琉球語)도 여기에 포함된다. 이 어족(語族)은 동쪽으로는 러시아 화태, 북쪽으로는 시베리아 몽골일대로 부터 아세아 중앙부를 넘어 터키에 이르는 지역에 분포하고 있다. 오늘 우리들에게 상속되어 있는 언어는 만주동부, 연해주일대로부터 바이칼 호 북방에 이르는 시베리아 지역의 퉁구스 제어(諸語)와 내외몽고 일대의 몽고어와 함께 소위 알타이어족을 형성하는 것으로 보아져 동일조어(同一祖語)로부터 분기(分岐)된 것으로 보고 있다. 또 그들 우리 한민족은 이러한 아세아 북방계제족과 공통하는 원시문화를 갖고 있었던 것이다. 중국의 고기록(古記錄)에서는 우리 원 민족 중 일 종족과 맥족(貊族) 또는 예맥족(濊貊族)이라 말하며 원래는 중국의 북의 방각(方角)에 있었다고 한다. 곰의 일종인 맥(貊)을 신성화 하는 원 민족(原民族)의 사상과 의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맥족(貊族)이라고 불려지는 것 같다. 우리 원 민족은 광의의 예맥 족(濊貊 族)이나, 그들 자신은 곰 또는 고마(固麻), 개마(蓋馬) 등을 종족명으로 해 인명·지명 등에도 남기고 있다. 여기서 예맥족(濊貊族)이라 함은 예족(濊族)과 맥족(貊族)을 합친 호칭이나 맥(貊)이라는 동물은 지금은 절멸해서 생존하고 있지 않다. 곰, 감은 상(上), 대(大), 신(神), 신성(神聖)을 나타내는 종족이었다. 예맥족(濊貊族)의 발전한 고구려를 고대 일본에서는 고마(高麗)로 부르고 있다.
 
예맥족(濊貊族)은 아세아 대륙 북방으로부터 동으로 이동해 흑룡강 연안을 끼고 만주 동부에 정착한 종족 중으로부터 송화강 유역과 한반도에 남하한 것으로 보고 있다. 그들의 이동에는 그 민족의 내부를 꿰뚫는 원시신앙이 있었던 것이 틀림없다. 그들은 태양을 천신(天神)으로 숭배해 태양이 솟는 동방을 신비의 세계로 해서 동경하고 더욱이 광명이 있는 남쪽에로 수십 세기, 긴 기간에 걸쳐서 일관하게 이동을 계속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천신 사상(天神思想) 몽고 퉁구스 제족(諸族)에도 공통한 것이 있으며, 우리 선사시대의 원시문화로서 형성된 것이다. 그들은 일계의 가족과 일단이 돼 식물을 구해서 이동하고 산록(山麓), 구릉(丘陵)을 찾아서 수렵을 하고 나무 열매를 채취하는 자도 있고 해안 강가에서 어로(漁撈)를 한 자도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점점 도구가 진보함에 따라 행동범위가 넓혀지자 일정의 지역에서 있다가 또 다른 곳으로 이동하는 반 이동적 생활이 돼 수렵과 어로를 하면서 원시적 농경을 시도, 농업이 진보에 따라 일정지역에 정착해 집단생활을 하게 됐다. 거기에 일족의 혈족으로 된 씨족 단체가 구성됐다. 그들은 먹고 살기 위한 생산이 충분하지 않아 생산의 용구(用具) 방법도 참으로 유치하기 때문에 작업에는 씨족 전체가 나서서 했으며 분배도 공동으로 행해졌다. 개인은 씨족의 집단을 떠나서는 살 수 없었다.
 
고대 부족사회에 군림한 한민족
 
인구가 증가하고 씨족으로부터 또 씨족이 분기(分岐)해 갔다. 같은 씨족사회가 확대해지면서 이들이 연합해서 부족사회가 형성됐다. 부족사회는 공동의 시조(始祖)하에 연결되어 혈연으로 이어진 1인의 족장에 통솔되었으며, 족장은 그 족의 수호신을 위하는 제사(祭司=제사장)를 겸했다. 그리고 각 부족사회에는 그 생활환경으로부터 나오는 각기 특색 있는 문화 사상이 성장해 갔다. 오랜 연대에는 제도 습속(習俗)에도 달리 나타나서 각각 다른 종족으로 발전해 갔음을 볼 수 있다. 그 결과 후에 만주 송화강 유역의 부여, 압록강 유역의 예맥·고구려, 반도 서북의 조선, 동북의 옥저, 동의 동예, 남의 진(辰) 등의 제 부족 또는 부족연맹이 대두한다. 이 외에도 역사에 나타나지 않은 많은 소 부족이 반도와 만주의 넓은 지역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이러한 우리 한민족은 만주요동과 대륙에서 고대 문명을 일으킬 수 있었다. 이 당시 원시사회에는 새로운 문명을 먼저 받아들인 쪽이 먼저 발전해 갔다. 우리민족은 북방민족으로 먼저 발전해 갔다. 남부의 사회는 아주 뒤쳐져 새로운 문명은 우리 한민족의 북으로부터 흘러 들어갔다. 북방의 동계 족(同系 族)으로부터 새 문명이 끊이지 않고 흘러들어 왔다. 이 북방의 동계 족으로부터 새로운 문명이 들어오면서 이들 북방 동계족은 낡은 문화를 가진 제 부족사회에 군림했다. 이렇게 군림한 것이 우리 한민족이었다. 고대를 지배한 우리 민족의 부족국가는 조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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