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한말기(前漢末期) 외척과 환관의 권력투쟁을 보면 지방호족(豪族)이 대두하게 되고 전한(前漢) 평제(平帝)가 10세에 왕위를 계승한지 겨우 5년 재위로 죽자 서기8년 왕망(王莽)은 한(漢)을 신(新)으로 국호를 바꾸고 관료제도와 토지국유화정책, 노비금지령을 내는 등 대개혁에 나섰다. 그러나 관료, 지방호족, 대상인 등이 일으킨 적미(赤眉)의 난(亂)으로 망하고 후한(後漢)이 성립했다.
후한은 서기25년 성립하나 후한중기 이후가 되면서 유약한 왕(王)이 계속되고 외척과 환관이 격렬하게 세력경쟁을 반복하는 이 기간, 지방의 호족은 지방관직을 독점한 위에 후한에 복속되어 있던 이민족들을 혹사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중원의 서방(西方), 티벳에서는 강족(羌族)의 대반란이 일어났다. 여기에 또 물가의 고등(高騰)으로 생활고에 시달리고 있던 농민들은 도교(道敎)에 의한 종교결사(宗敎結社)의 태평도(太平道)에 입신하는 자가 많아 10여 년 간에 수십만으로 확대했다.
태평도의 교조 장각(張角;?~184년)은 이러한 신도를 군대조직으로 하여, 황건(黃巾)을 표식으로 해 거병(擧兵)한 것이 ‘황건적(黃巾賊)의 난(亂)’이다. 이들은 지나(支那)의 동반부의 관청과 촌락을 불사르며 약탈을 행했기에 그 연말에 여러 군웅(軍雄)들이 이를 진압하게 되었다.
이중에서도 황건적을 토벌한 조조(曹操;155~220년)는 207년경에는 화북일대(華北一帶)의 세력을 잡고 위(魏)를 건국했다. 한편 조조에 적대하고 있던 유비(劉備;161~2223년)가 있었다. 그는 전한(前漢) 제6대 경제(景帝)의 말예(末裔)로 칭해 학문은 없으나 인망이 높았다.
그는 관우(關羽), 장비(張飛), 후에 제갈공명(諸葛孔明)을 얻어 양자강 중유역(中流域)에 실권을 장악해서 촉(蜀)을 건국했다. 또 한편 황건적의 난에 활약한 손견(孫堅)의 아들인 손권(182~252년)은 절강(浙江省)을 중심으로 화남(華南)에 세력을 갖고 있던 오(吳)를 건국했다.
이같이 위(魏), 촉(蜀), 오(吳)의 삼국정립이 이뤄졌다. 여기서 지나 역사는 삼국시대로 나아가게 되었다 그런데 조조는 헌제(獻帝)를 볼모로 정권을 장악해 이에 항거하는 원소(袁紹)를 관도대전(官渡大戰(서기200년)에 물리침으로 208년 후한의 권력을 독차지하게 된다.
우리나라 사람들은 진수(陳壽)가 지은 삼국지(三國志)를 나관중(羅貫中)이 편찬한 ‘삼국지연의(三國志演義)’의 내용을 많이 읽고 이를 마치 지나의 역사인양 말들을 하나 이 위(魏), 촉(蜀), 오(吳)의 역사는 사실과 다른 허구투성이의 기록인 것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삼국지는 고구려 11대 임금인 동천왕(東川王18년) 때 위(魏)나라 관구검(毌丘儉)이 쳐들어와 수도인 환도성이 함락되고 위급한 상황에 임금이 피난을 간 상황이었다. 이때 관구검은 고구려 침범하는 목적이 국토를 넘본 침략이 아니라 서책을 노린 침입으로 이때 가져간 책을 저본으로 해 위(魏), 진(晉)시대의 사관(史官) 진수(陳壽)가 삼국지(三國志)를 썼다. 이것이 처음 동이전에 들어가게 되었다. 후한서도 백년 후 삼국지를 바탕으로 동이열전에 들어간다.
오늘은 후한의 멸망원인과 위(魏),진(晉)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의 전단계를 살펴보고자 한다.
지나(支那)천하 삼분형세를 가져온 적벽(赤壁)의 싸움
이 당시 후한조(後漢朝) 208년 난세에 포스트 한(漢)의 패권을 지향하는 조조는 지나 통일책으로서 손권(孫權), 유비(劉備)의 연합군과 적벽에서 만난다. 배에 익숙지 않은 조조수군(曹操水軍)은 연합군의 화공전(火攻戰)에 대패해서 조조의 꿈은 무너진다.
여기서 손권과 유비는 다 함께 그 위명(威名)으로 천하는 삼분(三分)된다. 이렇게 된 배경을 보면 후한 중평오(中平五(118년), 황건난(黃巾亂)의 잔당(殘黨)을 진압하지 못한 외척 하진(河進)은 군조직의 정비를 시도했다. 이 개혁에서 동탁(董卓), 원소(袁紹)와 환관조등(宦官曹騰)의 손(孫) 조조(曹操;155~220년)가 대군사력을 갖게 되었다.
이듬해에 영제(靈帝)가 죽자 하진(河進)은 원소와 모의해서 환관세력을 일소하려고 동탁(董卓)에게 협력을 요청하는데, 이 일이 알려져서 하진은 환관들에 의해 죽임을 당한다. 이에 원소(袁紹)등은 궁전을 공격하고 궁전에 들어와서 불 지르고 환관들을 다 죽인다.
이 때 소제(小帝)와 아우 진류왕(陳留王)은 성(城)밖으로 피난했다. 이 때 3000명의 병력을 이끌고 진격해온 동탁(董卓)은 소제일행(小帝一行)을 맞으며 기회가 왔음을 기뻐하며 수도인 낙양(洛陽)에 입성한 후 천하에 군림한다. 그러나 원소와 조조는 천자(天子)를 무시하며 전횡(專橫)하는 동탁(董卓)에게 협력하는 것을 거부하며 동방으로 피했다.
188년 9월 동탁은 소제(小帝)를 폐하고 진류왕(陳留王)을 세워 헌제(獻帝)라 하고 하태후(河太后)를 하진(河進)의 딸이라 하여 살해하니 조조는 원소(袁紹)등 각지의 제장(諸將)과 뜻을 모아 왕을 무시하는 동탁(董卓)을 타도하는 병(兵)을 일으킨다. 그런데 초평삼년(初平三年;서기192년 4월, 장안(長安)에서 동탁(董卓)은 부하 여포(呂布)에게 죽임을 당하게 된다.
이렇게 되자 지나는 한(漢)의 제장(諸將), 황건군(黃巾軍), 오환(烏桓) 등의 이민족(異民族)과 여러 세력들이 들어오니 전국적인 전란상태가 되었다. 이 와중에서 건안원년(建安元年(196년) 정월(正月), 관중(關中)으로부터 피해온 헌제(獻帝)를 자기진영에 맞게 되는데 성공한 조조는 명목상 다른 무장(武將)보다도 우위에 서서 후한의 권력을 독차지했던 것이다.
건안원년(建安5年, 서기200년) 8월 원소(袁紹)의 대군을 관도(官渡)에서 격파하고 건안 10년에는 원소 일파의 본거지였던 업(鄴)을 제압해서 자신의 근거지로 했다. 화북(華北)의 전토를 일단 수중에 넣은 조조의 다음목표는 남방에 진출해서 전국을 통일하고 지배하는 것에 옮겼던 것이다. 조조의 남하책의 과제는 유비(劉備(161~223년), 손권(孫權;182~252년)이었다.
그러나 조조는 그 후 208년, 80만의 조조군과 유비, 손권의 연합군이 양자강 근처 적벽(赤璧;(湖北省 嘉魚縣 東北)에서 마주치는데 이 적벽대전에서 대패하면서 중원(中原)의 통일은 실패하게 된다.
이리하여 건안(建安19년, 서기214년), 유비(劉備)가 사천(四川)을 영유(領有)하니 형주(荊州)는 손권의 손에 들어간다. 220년 조조가 죽자 그 식자(息子) 조비(曹丕)가 뒤를 이어받는다.
조비는 헌제(獻帝)로부터 선양(禪讓)했다는 형식을 취해 위(魏)를 건국해 후한은 멸망한다. 이 소식을 들은 유비는 221년 4월에, 손권은 229년 4월에 각기 촉(蜀)과 오(吳)의 제위(帝位)에 올라 3국 정립시대가 이뤄진 것이었다.(以上은 三浦一郞, 小倉芳彦, 樺山纊一, [世界を變えた戰爭, 革命, 反亂] 59~60面을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했음을 밝힙니다.)
위, 촉, 오, 정립과정서 전쟁사에 유례없는 인구감소초래
이 지나의 삼국시대가 되니 조조, 유비, 손권에 공명(孔明)과 사마의(司馬懿) 중달(仲達;179~251년)등 역사적 대스타들이 활약하는데, 적벽싸움이나 제갈량(諸葛亮)과의 오장원(五丈原)의 싸움 등 대회전(大會戰)에서 양군이 합해서 200만의 군세가 격돌해 100만 단위의 사상자수를 낸 결과가 되는데 이는 엄청난 재난을 가져 온다.
그 당시 상황을 보면, 삼국(三國)은 대외전쟁도 적극적으로 행해서 그들이 말하는 이적(夷狄)정벌에 주력해 병력부족을 메우기 위해 농민을 군역(軍役)에 나가도록 했기 때문에, 농촌인구는 감소해서 농작물의 수확이 없어서 위(魏),촉(蜀),오(吳) 다 같이 기근이 연속하게 되었다.
중원의 인구는 후한이 가장 번영을 자랑한 157년경이 가장 절정기였다. 이 당시 후한의 인구는 5649만 인으로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지고 있었다. 그런데 조조가 죽은 220년경의 인구는 763만에 격감하고 있다. 이는 짧은 기간에 4800명이 소멸한 것이다.
이것은 전란에 의해서 수많은 사람들이 살육되고 학살이 반복됐으며 한편 기근과 자연재해가 연속해서 지나를 음습(蔭襲) 했다. 이는 전쟁사에 유례가 없는 기록으로 불행을 초래했던 것이다.
이는 후한말기 국도(國都)를 낙양(洛陽)에 옮긴 후 정권을 제 마음대로 한, 동탁(董卓)은 저(氐)나 강(羌)등의 이민족을 거느리고 천하를 분열시킨 원인도 있으나 정권욕이 문제이었다.
그리고 동탁의 부하였던 조조는 이적병(夷狄兵)에 의한 군단의 유용함을 알고 동탁의 사후 새로운 유목민(遊牧民) 기마병(騎馬兵)을 징발해 유성(柳城)을 급습해서 20만을 살육하고 나머지 오환병(烏桓兵)을 붙잡고 자군(自軍)에 편입시켜 이용했다.
이러한 조조의 하는 방법을 오(吳)와 촉(蜀)이 모방하게 되어, 오(吳)는 산간부에 거하는 산월(山越)을 이용하고, 촉(蜀)은 티벳계 저(氐)나 강(羌族)을 이용했다. 이는 계속되는 전쟁과 기근 때문에 대량의 인구가 상실했기 때문이었는데 인구감소는 재앙으로 되돌아온 것이다.
이와 같은 인구의 감소는 결과적으로는 화북의 후한을 멸망하게 해 140년에 걸친 이민족국가(異民族國家)의 창설이라는 대혼란시대인 오호십육국(五胡16國)으로 남북조(南北朝)를 맞이하는 주 요인이 되었고 끊임없는 살육이 이어졌던 것을 알 수가 있다. (以上은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106面~124面을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했음을 밝힙니다.)
글을 맺으며
우리나라 사람들은 제 나라 역사를 잘 모르면서도 삼국지(三國志)를 즐겨 읽어 대단한 것으로 보나 위(魏), 촉(蜀), 오(吳)의 역사는 고작 60년 미만의 역사이다. 그 영역도 섬서성과 감숙성 일부, 사천성, 중경시와, 귀주성과 호남성 일부를 합한 면적이 전부로 우리가 지배한 중원대륙과는 비교도 되지 않은 것이다. 또 위 삼국 역시 따지고 보면 우리 동이족들이 세운 나라이다.
그리고 이후 300년간에 걸친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도 거의 동이족이다. 그런데 여기서 주목할 것은 위(魏), 촉(蜀), 오(吳)삼국시대에 5649만 인구가 700만까지 감소한 후, 몽골계, 티벳계, 퉁구수계와 남방계 유입으로 새로운 한족이 형성된 것이라 하나 거의 동이족이다.
타이완의 백양씨(柏楊氏)가 작성한 [중국역대전란편년사(中國歷代戰亂編年史)]에 의하면 지나는 유사 이래 4000년간 매년 반드시 국내 어디에서 전쟁이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기근에 의해서 식량이 없어 백성은 곤충과 조수(鳥獸), 초목화(草木花)까지 살아있는 생물은 먹었다.
이도 없으면 인육식(人肉食)까지 먹었던 일이 수천 년 간 행해졌다고 한다. 그리고 언제나 불안감을 갖고 있기 때문에 타인에 대해서도 신용하는 일이 없고 물론 정부도 신용하지 않는다.
또한 타인에 대해서 절대로 약점을 보여서는 아니 되며, 언제나 긴장하고 있는 것이 몸에 배겨 있고, 전쟁에 의한 피해의식도 많은 그들이나 그들은 우리 역사도 엄청나게 부풀려진 것을 우리는 그저 바라만 보는 현실은 정상이 아니다. 우리도 ‘역사를 잃으면 다 잃는다’는 자세로 이에 대처해야 함에도 우리는 지나와 일본의 역사왜곡에 아무런 대책이 없음은 슬픈 일이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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