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북조시대 북위(北魏)와 송(宋) 흥망사(興亡史)

입력 2020-11-14 13: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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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위(魏), 촉(蜀), 오(吳) 삼국시대(三國時代)의 종지부를 찍은 것은 위(魏)의 장군(將軍)인 사마염(司馬炎;236~290)이었다. 사마의(司馬懿) 중달(仲達)의 자손인 사마염(司馬炎)은 위(魏)로부터 제위(帝位)를 찬탈해서 265년에 진(晋)을 건국했다. 
 
그러나 사마염 무제(武帝)가 290년에 죽자 왕실의 분쟁이 발생해 16년간 계속되었다. 이렇게 되자 여러 제왕(諸王)은 갖고 있는 병력만으로는 부족했기 때문에 흉노(匈奴), 강(羌), 저(氐), 선비(鮮卑), 흉노의 지족(支族)인 갈(羯)등의 이민족(異民族)을 많이 포용했다.
 
이들 오호(五胡)는 속속 만리장성을 넘어 지나(支那) 내부에 침입하기 시작해 우선 진(晋)의 국도(國都)인 낙양(洛陽)을 공격해 점령(311년)하고 다른 부대는 장안을 함락했다.(316년).
 
여기에 한족(漢族)이라는 전량(前涼), 서량(西涼), 북연(北燕)도 합쳐서 304년에서 439년 까지 거의 140년간에 16국가가 흥망을 거듭했다. 이 시대를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이라고 부르고 있다. 
 
이러한 화북(華北)의 민족적 혼란을 통일한 것은 선비(鮮卑)의 한 부족인 척발부족(拓跋部族)이었다. 이 척발부족은 더욱 늦게 몽골지방에서 일어나서 386년에 평성(平城)에 북위(北魏)를 건국한다. 이 북위는 외몽골지방에서 세력을 증대하고 있는 터키계 민족 고차(高車)를 399년에 정복해 계속해서 화북(華北)의 약소국가를 멸망시켜 국력을 키웠다.
 
북위는 439년, 화북을 통일해 140년간에 걸친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의 쟁난(爭亂)은 막(幕)을 고하게 한다. 거의 같은 시기에 강남(江南)에도 군벌(軍閥)의 유유(劉裕)가 동진(東晋)을 넘어뜨리고 남송(南宋)을 세워서(420년) 지나는 남북조(南北朝) 시대가 된다.
 
즉 남북조시대(南北朝時代)=북위(北魏;386~534년)와 송(宋;420~479년)시대로 들어간 것이다. 이 때 북위는 제6대 효문제(孝文帝)의 시대, 494년이었다. 효문제는 다수의 이민족이 되는 국가통일정책으로서 민족 문화적 지주(支柱)를 한문화(漢文化)로서 정신적지도원리(精神的指導原理)를 불교에 두고 불교의 보호와 장려를 하는 것이었다.  
 
오늘은 남북조를 이루는 북위와 남조(南朝)의 송(宋)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남북조(南北朝)의 대립
 
남북조시대에 유유(劉裕)가 420년에 세운 송왕조(宋王朝)는 479년에 이르러 멸망한다. 겨우 60년 밖에 가지 못했다. 그러나 조씨(趙氏)가 세운 송왕조(宋王朝)는 960~1279년 까지 약 300년에 걸쳐서 지나를 지배한, 후의 송왕조에 대해서 이를 유송(劉宋)이라고 부르며 구별한다. 
 
동진을 이어 받은 송(宋)은 같은 양식의 형식으로 다음의 세왕조가 교대된다. 즉 제왕조(齊王朝;479~502년)로 바꿔지고 계속해서 양(梁;502~577), 진(陳;557~589)에 이어진 것이다. 
 
북조(北朝)가 북위의 태무제(太武帝;439년)이래 동서 위(魏)의 분립까지 약100년 간 화북(華北)의 통일을 유지 한 것에 비해서, 남조의 정권은 어쩐 일인지 안정을 하지 못했다.
 
동진이 고립한 왕실이 귀족에 압박되어 쇠멸(衰滅)한 폐해에 교훈을 얻은 남조(南朝)에서는 중앙정부의 고관은 명문(名門)을 피해서 하급사족출신자(下級士族出身者), 당시의 말로 말하는 ‘한인(寒人)’으로 맡게 했다. 요해(要害)의 지방에는 황족(皇族)의 왕(王)을 자사(刺史), 즉, 지방장관을 임명해서 군사와 정치를 장악하게 했다. 
 
송(宋), 제(齊), 양(梁), 진(陳)등 제왕조(諸王朝)의 시조, 유유(劉裕), 소도성(蕭道成), 소연(蕭衍), 진패선(陳覇先) 모두 한인(寒人)으로 된 자이기 때문에 왕씨(王氏), 사씨(謝氏)와 같은 귀족에 대한 당연한 대항조치로서 황제권(皇帝權)을 강화함과 동시에 지방에 할거(割據)하는 군벌(軍閥), 호족(豪族)세력을 약하게 하는 정책을 취한 것이었다.
 
이것은 당시 북방에서 척발족(拓跋族)이 황하유역을 통일해서 세운 강대한 북위왕조(北魏王朝)에 대한 필요의 산물이었다. 남조(南朝)의 사회에 있어서 귀족제는, 더욱 흔들림이 없는 권위를 가졌기 때문에 한인(寒人)관료의 정치는 가는 곳 마다 눈에 보이지 않은 저항을 받았다.
 
송(宋)의 문제(文帝;424~~452년在位)와, 양무제(梁武帝;502~549년在位)가 남조의 사회에 있어서 뛰어난 명주(名主)로 칭해져 원가(元嘉;문제(文帝)의 연호(年號)), 또는 천감(天監;무제(武帝)의 年號)의 평화롭고 번영한 시대를 현출(現出)시키기도 했다. 
 
또한 송(宋)의 문제(文帝)와 양무제(梁武帝)정무에 대한 노력도 노력이지만 한인(寒人)출신의 관료를 둬서 귀족출신의 문인(文人)을 재상 등의 높은 위치에 두어 귀족에 대한 타협적인 정책에 의한 것도 많았다. 한편 하급관료 군인출신의 왕조가 단명한 원인의 하나는 올라간 계급생활이, 구 귀족에 비해서 안정된 이상(理想)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 시기 불교가 성행한다. 
 
북조(南北朝)는 불교(佛敎)를 장려한 나라였다
 
먼저 북위(北魏)는 국가사업으로서 불교의 보호와 장려를 하기위해서 구도(舊都), 대동(大同)의 운강(雲岡)에 석굴사원을 세움과 동시에 신도(新都) 낙양(洛陽)에도 불교사원을 1367개의 사찰(寺刹)을 건립하고 불교회화(佛敎繪畵) 조각(彫刻)등에 힘을 경주(傾注)했다. 
 
낙양시의 남쪽 13Km의 곳에 용문산(龍門山)이라는 석회암의 산이 있는데 북위는 여기에도 대규모의 석굴사의 건조를 계획해 석가상(釋迦像)과 보살상(菩薩像)을 조각하고 있다. 용문석굴로서 대표적인 것은 봉선사(奉先寺)로서 완성은 당(唐)시대가 되는 675년이다. 
 
본존(本尊)의 노사나불(盧舍那佛)은 높이가 17m 정도로 751년 일본 경도(京都)의 도다이지(東大寺)는 이 노사나불을 모방해서 건조되었다고 하고 있다. 또 일본의 최고 불상(佛像)인 호류지(法隆寺) 금당(金堂)의 석가삼존상(釋迦三尊像;(6世紀 前半作)도 북위양식(北魏樣式)이라고 전해지고 있다.
 
한편 남조(南朝)는 송(宋), 제(齊), 양(梁), 진(陳)으로 변천하는데 이러한 나라들은 같이 수도(首都)를 건업(建業)에 두고 있다. 이 건업은 그 후 ‘건강(健康)’으로 개명(改名)하는데 780년 후의 1368년에는 명(明)이 남경(南京)으로 해서 도(都)를 정한 장소이다. 
 
이와 관련해서 왜(倭)에서는 350년 야마토조정(大和朝廷)이 전국을 통일해 413년에는 왜왕(倭王) 찬(讚)이 동진에 사신을 보낸 것 외에 동진을 넘어트리고 건국한 송(宋)과 남조(南朝) 제국(諸國)에 왜(倭)의 오왕(五王), 찬(讚), 진(珍), 제(濟), 흥(興), 무(武)가 송(宋)에 국서(國書)를 보내온 것이 송서(宋書)에 기록되고 있다.
 
이 시기의 지나는 북조(北朝)도 남조(南朝)도 불교가 크게 퍼진 시대로서 당대(唐代)에 와서 시인(詩人) 두목(杜牧;(803~852)이 강남 땅에 놀 때 ‘남조480사(寺)가 있었다고 하고 있으나 실제로는 700이상의 사원(寺院)이 있었다고 말해지고 있다. 
 
남조의 역대 왕조는 이민족에게 화북이 ?i기던 한족왕조(漢族王朝)였으나, 귀족들은 화북지방을 탈환하는 것 등은 전혀 생각하지도 않고 정치도 잊고 공리공론(空理空論)만을 논하고 있었다. 이것이 세상에서 말하는 청담(淸談)이나, 노장사상(老莊思想)을 조술(祖述)함과 동시에 유교를 경시해 오직 형이상학적인 논쟁에 열중하고 있었다.
 
지나 한민족은 정치를 최상의 가치로 하는 민족이라는 것이 유명하다. 유일(唯一) 남조시대에 지나인(支那人)은 야모(野暮)로서 밤낮풍류(風流)를 가치 있는 것으로 한 희유(稀有)의 한민족이었다고 하고 있으나, 그 평가는 보기에 따라 달리 평가할 수 있다.
 
남북조와 그 이전도 우리민족이 대륙지배 했다
 
분명한 것은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이 흥망을 반복한 양자강 이북의 지나에서는 4세기 초부터 280년간에 걸쳐서 북방 기마민족의 지배가 계속되었는데 이 와중에 북주(北周)의 무장 양견(楊堅)이 수(隨)를 건국해 지나를 통일 하나 이 사태에 의해서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시대의 지나에 순수한 한민족은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한나라를 건국한 유방(劉邦)도 동이(東夷)이고, 대륙에서 나라를 세운 모든 왕(王)들이 한족이라고 한 왕은 찾지 못함에서이다. 하(夏), 은(殷) 주(周) 진시황(秦始王)을 비롯해서 한(漢), 신(新), 진(晉), 수(隨), 당(唐), 송(宋), 제(齊), 양(梁), 진(陳), 위(魏), 요(遼), 금(金), 원(元), 명(明), 청(淸)의 왕들 중에 동이가 아닌 한족이 있었는가? 
 
따라서 오호십육국 시대로 부터 남북조시대에 걸친 300년간 요시대(遼時代)의 209년간, 원(元)시대의 90년과 청(淸)시대까지 지배되어 혼혈융합(混血融合)이 진행되었기 때문에 지나에 순수한 한민족은 있을 수 없다고 보는 것이 옳다. 
 
대륙에서 국가를 건국한 왕들이 모두 동이족이라서 원래부터 한민족은 있을 수 없는 것이다. 또한, 지나의 인구의 변천을 봐도 한족만의 종족은 찾아 볼 수 없다. 
 
우리 역사를 많이 숨기고 왜곡(歪曲)한 당(唐)의 이연(李淵)도 선비족이고 수양제(隋煬帝)도 한족이 아니다. 선비족이다. 그는 고구려를 침공해 패전한 장수 우문수를 죽임에 그 아들 우문화가 수양제를 죽인다. 이 때 수양제가 약 먹고 죽게 해달라는 청도 안들어줬다고 한다.
 
지나의 역사는 믿을 것이 못된다. 예컨대 황제의 명칭은 진시왕(秦始王)이 황제(皇帝) 발포 후 13개월 만에 지방시찰 중 급병에 걸려 급사(急死)했다고 하나 이것 또한 거짓말이다. 
 
진왕(秦王;진시황)은 사후 추서(追敍)한 것이었음을 이미 기술한 바와 같이 진왕은 가족을 죽인 원한을 늘 품고 있던 진왕 마차의 마부(馬夫) 창해(滄海)사람 여후영이 그 원수를 갚겠다고 결심하고 있던 중, 왕(王)이 민란을 피하는 도중에 박살(撲殺)되어 죽은 후 추서된 것이다.
 
당시 ‘시황제(始皇帝)’라고 한 것도 진왕의 죽임을 당한 것을 숨기기 위해 조작한 것이다. 이미 기술한바와 같이 진왕 37년(서기전 210년7월) 진왕이 순행도중(巡行途中) 병을 얻어서 사구평태(砂丘平台;河北省廣宗縣西北)에서 급사(急死)했다고 하나, 이것도 위에서 본바와 같이 거짓으로 사실(事實)을 왜곡하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 당시 진(秦)의 재상(宰相)이었던 이사(李斯)와 진왕(秦王)의 뒤를 이을 장자 부소(扶蘇)가 진왕의 사후(死後) 시호(諡號)로서 시황제(始皇帝)라고 한 데서 나온 것이라 속이나, 이도 조작이다. 부소는 간사한 환관과 재상 이사(李斯)가 기피해 진왕(秦王)이 죽자 변방방위를 맡고 있던 영명한 부소에게 ‘왕의 사약을 내렸다해’ 미리 제거했기에서다.
 
고대 우리 기마 민족은 남북조시대뿐만 아니라 그 이전 3000년 전 부터 예맥(銳麥;濊貊)조선이 동주시대부터 1000년 이상 대륙을 정벌, 정복해 지배한 것을 숨길 수가 없다. 
 
(以上은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125面~130面. 貝塚茂樹, [中國の歷史,(中)] 26面~35面.외 다수(多數)의 서적(書籍)을 참조(參照)하고 본문(本文)을 인용(引用)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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