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랑국(樂浪國), 기자 이전부터 있었던 천년왕국

입력 2020-12-13 10:10: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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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우리나라는 역사가 뒤집혀 있어서 저명한 학자나 지식인도 역사 지식은 제대로 아니 되어 있다. 이따금 예맥조선이 3000년 전 구국(舊國)으로 동주(東周)시대부터 1000년간 대륙을 지배하고 낙랑국(樂浪國)이 서기전1237년~서기32년)까지 남만주(南滿洲)에서 반도에 이르는 영역에 있었다고 말하면 그럴리가 하고 반문하는 분이 있음을 본다. 
 
또한 신라가 2개 있고 낙랑국이라는 나라와 또 하나 낙랑군이 있는 것을 우리나라 사람들은 거의 모르고들 있다. 그러나 천년왕국인 낙랑국이 고구려때(서기전239년~32년)도 고구려 제후국으로 있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또한 낙랑군이 서기전 108년~서기 37년에 예(濊)와 고구려의 서쪽에 낙랑군이 있었음을 확인할 수가 있다. 그런데 우리나라 사람들은 이 사실을 모르고 있다는 것은 우리나라 학자들이 얼마나 역사를 연구하지 않고 소홀히 하고 있는지를 말해준다.
 
이는 나태한 우리나라 대다수 반도식민사관자들은 권력 주변서 살면서 기득권에만 눈이 먼 것을 알 수가 있다. 조선시대는 임금의 권력 주변에서 살았고, 한일합방 후 36년 간 총독부 권력 주변서 살며 역사를 외면했다. 부끄러움을 모르고 있는 족속들이다.
 
1945년 우리가 일제에서 벗어났지만 일제가 1922년~1938년간 ‘조선사편수회’에서 왜곡하고 조작된 35권의 반도식민사관의 역사책을 그대로 하고 있음은 사학가가 없음을 말해주는 것이다. 조선사편수회의 역사는 쓰레기역사로 거의가 버려야 할 내용들이다. 
 
최태영 선생은 ‘조선사편수회’가 편찬한 35권 책을 일찍이 쓰레기통에 버렸다고 했다. ‘조선사편수회’는 일본이 상고사가 없음에서 우리나라 역사도 상고사(上古史)는 아예 빼어 없애고 있고, 고대사도 단군조선을 2000년을 잘랐고 일본역사는 1000년이나 늘려서 서기전660년에 개국한 것 같이 해서 우리보다 역사가 오랜 것 같이 행세했다. 
 
그러나 지금 일본 학자들도 이런 천년이나 왜곡한 일본역사를 부끄럽게 생각하고 있으며 전후(戰後) 일본사학계는 우리와 달리 많이 변화를 보고 있는데도 우리는 여전히 일제강점기 때 조작한 ‘조선사편수회’의 역사를 그대로 가르치게 하고 있다. 
 
오늘은 ‘조선사편수회’가 조작한 역사서는 거의가 우리 역사가 아니고 일본이 우리를 영구 지배하기위해 우리 역사문화전통을 아예 없애려는 것이니 이를 바로 잡고자 한다. 
 
낙랑국은 천년 간 실재했었다. 낙랑국과 낙랑군은 다르다
 
낙랑국이 서기전 1237년~서기32년까지 1269년 이상이나 있었던 나라를 우리 역사에는 거론도 하지 않고 있는 우리의 현실은 우리 학자들이 역사연구를 제대로 하지 않음이 입증되는 것으로 너무나 슬픈 일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낙랑국에 대한 상식은 고작 고구려 호동왕자(好童王子)와 낙랑공주(樂浪公主)의 애틋한 사랑이야기 정도이다. 
 
이 낙랑국은 우리 삼국시대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왜(倭)의 건국보다도 먼저 있었던 나라로 우리나라 사서(史書)는 지나(支那)와 일본이 우리 사서(史書)들을 모두 거둬서 태우거나 그들이 가져갔기 때문에 낙랑국에 대한 기록은 찾아 볼 수가 없다. 
 
또한 그들은 이 낙랑국을 숨기고 덮어버리기 위해 삼국지(三國志), 후한서(後漢書), 옥저(沃沮)의 지도(地圖)에도 반도는 백지(白紙)로 되어 있다. 이것은 낙랑국이 이 지역에 있었기 때문이다. 바로 남만주와 반도에 있었던 나라였기에서다. 
 
이에 대해서는 지난주 칼럼에도 말 한대로 한서(漢書)권(卷)28에 최숭(崔崇), 최리(崔理)로 이어진 낙랑국(樂浪國;서기전 1237년~서기32년)이 있었기에 이를 숨기고 덮어서였다. 이렇게 역사를 덮는다고 없어질 나라가 아니다.
 
이 낙랑국은 고구려 대무신왕 15년(서기32년)에 당시 낙랑국 왕이었던 최리(崔理)왕이 고구려에 항복함으로 사라졌으나 낙랑국은 천 년 이상 있었던 나라로 숨길 수가 없다.
 
이 낙랑국은 이미 밝힌대로 고구려와 예(濊)의 동쪽, 옥저(沃沮)가 있는 지역에 가깝다. 이 때는 서기전 239년~서기32년까지는 고구려와 예(濊), 옥저가 같이 병립되었는데 해모스 때 최숭(崔崇)이고 대무신왕 때 최리이다. 즉 낙랑국의 건국은 서기전 1237년이고 멸망은 서기32년이었던 것이다. 
 
우리는 낙랑국과 한사군(漢四郡)의 낙랑군의 구별을 배우지 않았기 때문에 혼동하는데 지나는 역사를 왜곡하며 한서(漢書)권(卷)28에 있는 낙랑국을 후한서에 낙랑국과 한사군의 낙랑이 있는 것을 모두 덮어버렸다. 
 
여기에 삼국유사(三國遺事)를 쓴 김일연(金一然)도 천년왕국 낙랑국을 묻어버렸는데 낙랑국과 낙랑군은 하나가 아니다. 여기서 낙랑군은 건무(建武6년(서기30년) 유헌-왕조-왕존이 교체되면서 고구리와 예(濊)의 서쪽 옛조선 땅에 만들어진 군이다.
 
서기전 108년에 낙랑군이 만들어졌고, 서기37년에 고구려에 병합(倂合)되어서 44년에 다시 광무제(光武帝)에 의해 만들어지고, 310년에 사로신라(斯盧新羅)에 항복했으며, 500년대 백제(百濟)땅이 되었던 것이다. 낙랑국과 낙랑군은 위치를 다르게 나타내고 있는데 즉, 낙랑국은 옥저와 함께 있고, 옥저는 고구려, 예(濊)의 동쪽에 있으며, 낙랑군은 예(濊)의 서쪽에 있는 것이 낙랑군인 것이다.
 
낙랑국(樂浪國)을 계승한 것은 반도의 신라였다
 
낙랑국은 고조선 이홀단제의 제(弟) 고불가를 서기전 1237년 낙랑 홀왕에 봉(封)하고, 해모스 때 낙랑왕(樂浪王) 최숭으로 하고 있다. 이 낙랑국의 영역(남만주와 반도)를 계승한 신라는 대륙의 사로신라가 아니고 503년에 독립한 지증왕(智證王)의 신라임은 누차 말한 바 있다.
 
신라와 낙랑이 혼돈되는 이유는 낙랑이 낙랑국과 낙랑군이 다르며, 신라도 가라(加羅), 고구려, 백제, 왜(倭)에서 광복하는 사로신라와 고구려에서 독립하는 신라(新羅)가 있었는데 명확한 몇 부분을 제외하면 혼돈을 주고 있기 때문인 것이다. 
 
이것은 김일연(金一然) 때에도 명확하게 구별 하지 못한 것은 당(唐)과 송(宋)의 동이역사를 대륙에서 밀어내기에 의한 혼돈 때문이다. 그래서 삼국사본기((三國史本紀)14에 있는 낙랑국을 삼국유사는 낙랑군으로 조작한 것이다.  
 
그래서 삼국사(三國史本紀‘ 14-6)에는 고구려 대무신왕(大武神王) 15년(서기32년)에 낙랑국(樂浪國) 최리왕(崔理王)이 옥저를 순행(巡行)한 기록들이 있는데 삼국유사에는 이 기록을 지웠다. 김일연(金一然)은 낙랑군으로 낙랑국을 묻어버렸다. 
 
고조선 아홀제(阿忽帝;33世)의 제(弟)인 고불가(古弗加)는 삼국사본기((三國史本紀)14에 있는 낙랑국이 있었음을 한서(漢書卷28)에 명기(明記)되고 있다. 즉, 서기전1114년 기자(箕子)때 분명히 낙랑국이 남만주와 반도에 이르는 것을 말한 것이다. 
 
낙랑조선에는 민범금(民犯禁) 8조(條)가 있었고, 한사군(漢四郡)의 낙랑보다 1200여 년 이전부터 뿌리가 있음을 말하고 있다. 삼국사에서 낙랑왕과 낙랑태수(樂浪太守)의 기록과 후한서에서 낙랑태수의 변천이 쓰여 있음에도 우리나라 선비들은 성리학에는 몰두하면서도 역사는 소홀히 다루고 있음을 본다.
 
특히 김일연은 낙랑국의 낙랑왕과 한사군의 낙랑태수(樂浪太守)가 다름에도 낙랑국을 낙랑군으로 덮었으며, 정조시대의 대학자 정약용(丁若鏞)선생은 [아방강역고(我邦疆域考)]에서 검토를 하고 있으나 다만 구별을 분명히 하지 아니했다. 
 
이것은 1589년 ‘기축옥사(己丑獄死)’라는 사건으로 1000명이상을 제거하면서 학문도 성리학 이외에는 허용하지 않고 오로지 성리학 이념만이 최고가치로 한데서 역사를 깊이 연구를 하지 않은 것은 1623년 당시 정철(鄭澈)의 가혹한 동인(東人)을 전멸시키고, 북인(北人)마저 제거하면서 정치환경(政治環境)이 나무 바꿔진 것으로 보이지만, 퇴계(退溪)선생과 율곡(栗谷)선생도 매한가지였다. 이러한 점은 참으로 아쉬운 점이다.  
 
성리학(性理學)에는 대가(大家)로 성인으로 추대되나 역사를 중히 여기지 않은 것이 한(恨)이다. 낙랑국이 있음을 알면서도 이를 방치한 것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
 
당시 풍조가 역사를 중히 여기지 않은 풍토가 그렇다고 해도 한서(漢書卷28)에 있는 것을 묵살은 변명되지 않는다. 지나는 이러한 것을 알고서 낙랑국을 지우기 위해 후한서에 낙랑국과 낙랑군 모두를 덮어버렸다. 이에 침묵, 받아들일 수 없다.
 
글을 맺으며
 
언제 어디서나 역적 같은 사람은 있었다. 우리 역사를 왜곡하는데 가장 악영향을 준 자는 결과적으로 보면 반도사관을 조장한 김일연과 신채호(申采浩)인 것이다.
 
김일연은 낙랑왕과 낙랑태수가 다름을 알았음에서도 낙랑국을 낙랑군으로 덮은 장본인이 되고 있다. 그는 이뿐만 아니라 낙랑국을 기자조선, 위만조선, 삼한(三韓)과 고구려 간(干)의 무대를 사로국으로 덮었던 것이다.
 
위만조선은 고구려, 한(韓), 낙랑국과 함께 4국시대의 예(濊)조선(서기전194년~108), 북부여(서기전 239~38-고구려(서기전37~서기668), 이때의 낙랑국(서기전 239~서기32년)을 제후국격인 간(干)으로 지배한 시대이다. 삼한은 서기전 194년-변한(弁韓)이 사로국이 되고 마한(서기전 194~서기8년)이 백제(百濟)가 되는 때이다.
 
지나는 역사를 왜곡하며 400년간 위만조선을 한반도로 가져 온다. 그런데 위만조선은 반도와 아무런 관계가 없다. 위만조선은 창해(滄海)지역에 있었다. 이곳은 남제서(南齊書卷58)지역이다. 지나와 일본은 되지도 않을 조작을 하나 모두 허구들이다. 
 
분명한 것은 한사군(漢四郡)은 위만조선이 망한 이후의 군(郡)인 것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위만의 손자인 우거가 망하고 나서, 한사군의 낙랑군도 반도 내에 있는 것으로 나타내다가, 요(遼東), 요서설(遼西說)에서 만주로 나타내기도 했으나 다 아니다.
 
위만조선을 배반한 창해지군(滄海之郡)위치는 연제지간(燕齊之間)임으로 한사군(漢四郡)도 그 지역으로 창해(滄海)서쪽, 북평(北平)과 태원(太原)가까이에 낙랑군이 있었고, 징번(眞番) 남쪽의 진파(珍播)이다. 번음(番音)은 ‘번’ ‘반’ ‘파’이다. 이곳은 남제서(南齊書) 권(卷)58지역으로 반도도 만주도 아니라는 것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이상은 吳在成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九犂系史] ’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 ‘校勘十八史]. [번조선사]. [加羅史]. [倭日本]. [斯盧新羅史]. [高麗史]. [발해가 백제땅을 차지하다.] 정희철’[중국은 없다]. 朴鐘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한국인 자부심 더 알씨사랑]’ [한국인 자부심 물이랑] ‘[한국인 자부심 더 코어랑] [한국인 자부심 더 아리랑].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유우찬, [한국사의 실체].  貝塚茂樹, [中國の歷史1].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外 多數書冊을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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