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사는 국가의 영토에 맞추어서 서술하는 국가사관(國家史觀)에 의한 역사가 아니다. 한민족(韓民族)의 계보는 환국, 배달국, 고조선, 예맥조선,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가야, 발해, 고려, 조선 등을 본원(本源)으로 하고 있다.
우리는 상고시대부터 대국을 건설하고 대륙을 지배한 것은 21세기에 와서 더 확연히 판명되고 있다. 환국시대에도 유라시아를 지배했고 배달국 시대와 고대에도 대륙을 지배한 민족임은 물론 모든 문물제도 역시 우리가 창조한 것이 다 판명되고 있다.
지나(支那)는 당치도 않은 대중화의 몽상주의에 빠져 주자(朱子)같은 자는 지나를 높이고 조선을 하시했으나 우리는 고대부터 그들에게 모든 문물제도를 전수시킨 것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지나의 학자들 문헌에서도 찾아 볼 수 있다.
공자의 손자 자사(子思)가 ‘공자(孔子)는 요순(堯舜)의 사상을 계승했다’고 했다. (中庸右第三十章 言天道也). 그런데 지나 문화를 개척한 자는 동이인(東夷人)인 순(舜)이다. 공자가 창조한 유교는 우리의 인간사상인 인(仁)사상을 계승한 것이다.
특히 허신(許愼), 서연경(舒連景)등이 저술한 ‘설문고문소증(說文古文䟽證)’에 ‘동이는 대인(大人)이다. 동이의 풍속은 인(仁)하다. 그런 동이가 오래 수(壽)함으로 군자불사(君子不死)의 나라라 칭한다’고 한 것이었다.
따라서 공자(孔子)가 한국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한 것은 한국의 인(仁)을 숭배한 것이라 말한 것이다. 이는 유교의 주지(主旨)는 인(仁)이요, 그 인(仁)은 분명히 우리의 인간사상을 계승해 창조한 것이다. (崔仁, [韓國學講義]. 44面~47面 參照 引用하다.)
오늘은 지나가 우리의 모든 문물제도를 전수 받았음에도 자기들이 우리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착각하나 지나의 천자(天子)의 문물제도와 군주제도 및 관제와 군사학, 주역철학과 홍범구주(洪範九疇)의 종교사상조차도 우리에게서 배워간 것을 밝혀 우리가 역사의 주역임을 확실히 밝혀보고자 한다.
우리는 군주(君主)가 있고 지나는 문물제도가 없었다
이에 관해서는 이미 밝힌바 있다. 논어(論語)에 [夷狄之有君 不如諸夏之無也]라 했다. 즉, 이적(夷狄)은 군주(君主)가 있고, 지나는 군주가 없다. 그럼으로 이적(夷狄)의 풍속과 지나의 풍속은 같지 않다고 한 것이다. 그것은 우리는 공자(孔子)시대에 군주가 있었다. 그런데 지나는 군주가 없다고 한 것은 왜인가?
이는 이적(夷狄)은 군주를 섬기는 문물제도가 있으나, 지나는 군주를 섬기는 문물제도가 없음을 말한 것이다. 즉, 이적은 군주를 섬기는 문물제도가 있는데 지나는 문물제도가 없음을 개탄한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이적은 어느 민족을 가리킨 것인가? 바로 동이인 우리를 말한 것이다.
고대 지나인(支那人)이 남방민족은 만(巒)이라 칭하고, 서방민족을 융(戎)이라 말하고, 북방민족을 적(狄)이라 칭했다. 고대 우리 민족은 대륙과 한반도에 거주해 동북방에 처했다. 그러므로 우리 한민족을 이적이라 칭하고 예맥을 북적(北狄)이라 칭했다고 하고 있다. (太平寰宇記 卷百七十二, 四夷一, 東夷一).
상고시대 동서남북 사방민족 중, 높은 문화를 가진 민족은 오직 한민족(韓民族)뿐으로 기타 민족은 문물제도가 없는 야만민족이었다. 당시 군주를 섬기는 문물제도가 발전한 민족은 분명히 우리 한민족(韓民族)이었다.
진수(陳壽)가 쓴 삼국지에 부여, 고구려 등 한민족(韓民族)을 소개하는 전문(前文)에 [雖夷狄之那而俎豆象在 中國失禮 求之四夷] 즉, 부여, 고구려 등 이적의 나라에 조두(俎豆)의 문화가 있음으로 지나가 예(禮)를 잃으면 부여, 고구려 등 이적의 나라에서 배운다고 한 것이다. 근래 문화 혁명후도 우리에게 배웠다.
또 관제도 천자(天子)가 관제를 잃으면 사이(四夷)에게 배웠다고 했다. 춘추좌전(春秋左傳)에 소공(昭公) 17년 추(秋)에 담자(郯子)가 내조(來朝)하니 소공(昭公)이 소호씨(少嘷氏)가 관직(官職)에 조명(鳥名)을 부친 유래를 물었다.
이에 담자(郯子)가 내 할아버지 소호씨(少嘷氏)가 즉위 하니 봉황이 나타났다. 이로 인해 조명(조(鳥名)을 부치었다고 해설했다. 이 말을 들은 공자(孔子)가 28세의 청년으로서 담자(郯子)선생을 방견(訪見)해 천자(天子)의 관제(官制)를 배우고 옛날부터 천자(天子)의 관제(官制)를 잃으면 사이(四夷)에게서 배운다고 한 것이다.
이것은 한민족이 천자(天子)의 문물제도를 창조하고 지나는 우리 한민족이 창조한 문물제도를 수입한 것을 말하는 것이다. 봉황은 천자(天子)에 전용(專用)하는 문구이다. 즉 천자의 좌석을 봉탑(鳳榻)이라 칭하고, 천자의 궁전을 봉지(鳳墀)라 칭하며, 천자의 서(書)를 봉조(鳳詔)라 칭한 것이다.
그럼으로 소호씨(少嘷氏)가 봉황을 보고 관명(官名)을 지었다 함은 천자(天子)의 문물제도를 설정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고대 지나인이 봉황(鳳凰)은 한국에서 출생했다고 했다. 이는 문물제도가 한국에서 창조된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지나(支那)의 삼황(三皇)도 한국에서 수입한 것이다
공자(孔子)가 사이(四夷)에서 천자의 관제를 배웠다고 말한 것은 지나의 저명한 사가(史家) 범엽(范曄)이 후한서(後漢書)에 기입하고, 태평환우기(太平寰宇記)에도 이러한 공자의 말을 기입했다. 이는 공자를 가르친 담자(郯子)가 한민족이요 공자가 말한 사이(四夷)가 한민족이라 입증한 것이다.
또한 한(漢)나라 채옹(蔡邕)의 [독단(獨斷)]권상(卷上)에도 천자(天子)라는 칭호는 이적이 창조한 것이요, 이적은 천신(天神) 지신(地神)의 피를 받은 민족으로 자처함으로 천자라는 칭호를 창조했다고 했다.
채옹의 글은 우리 한민족이 최초에 천자의 문물제도를 창조하고 지나는 한민족이 창조한 문물제도를 수입했다고 고백한 것이다. 지나의 고서 산해경(山海經) 해내경(海內經)에도 천자라는 명칭이 한민족에 의해서 창조되었다고 가르치고 있다.
또한 포박자(抱朴子)에 지나민족(支那民族)의 시조라 칭하는 신화적 제왕인 황제(黃帝)가 동으로부터 청구(靑丘)에 와서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얻었다고 했다. 여기서 청구(靑丘)는 우리 한국이요, 삼황(三皇)은, 천황(天皇), 지황(地皇), 인황(人皇)을 가리킨 것이다.
그런데 지나는 우리 삼황내문(三皇內文)을 수입해 쓰면서도 원래부터 자기들이 제도를 만든 것같이 그들 역사 첫머리에 천황(天皇氏), 지황(地皇氏), 인황(人皇氏)라 기록한 것은 우리에게서 수입한 삼황내문(三皇內文)을 베낀 것이다.
이 신화도 천자(天子), 천황(天皇), 황제(黃帝)의 문물제도를 최초에 창조한 자가 우리 한민족이요 지나는 우리나라가 창조한 문물제도를 수입한 것을 가르치는 것으로 지나의 모든 문헌은 위 제도를 창조한 자가 우리임을 충분히 입증한다.
그런데 진(秦)나라를 세운 진왕(秦王)을 처음으로 황제칭호를 씀으로 ‘진시황(秦始皇)’이라 하며 황제발포 후 13개월 만에 죽었다고 하는데 이 역시 허구이다. 진시황 칭호는 진왕(秦王)이 6국을 통일 후 15년 후인 서기전 210년 지방순회 중, 창해역사(昌海力士)인 여홍성(黎洪星)에 의해 살해된 후 추서(追敍)한 것이었다.
군사학, 주역철학, 홍범구주(洪範九疇)도 우리가 창조했다
지나의 군사학의 시조는 ‘강태공(姜太公)이요, 강태공의 군사철학이 후세에 전파되었다 하고, 사기(史記;齊太公 世家第二)에 강태공도 동이 사(士)라 했다’고 했다. 이는 지나의 군사학도 우리에게서 수입했음을 말하는 것이다.
또한 주역철학(周易哲學)과 홍범구주(洪範九疇;서경(書經)에 기록되어있는 정치도덕의 9원칙도 우리에게서 창조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서전고명편(書傳顧命篇)에 대옥(大玉), 이옥(夷玉), 천구(天球), 하도(河圖)가 동서(東序)에 있다고 했다.
즉 대옥(大玉)은 화산(華山)의 구(球)이요, 이옥(夷玉)은 동북방 옥속(玉屬)이요 천구(天球)는 옹주(雍州)에서 생산되는 옥(玉)이다. 이들 옥속이 하늘 빛 같은 것은 가공하지 아니한 소재(素材)임으로 예기(禮器)로 사용하지 못하는데 이를 하도(河圖)라 했다.
하도(河圖)가 나타나니 복희씨(伏羲氏)가 이를 보고 팔괘(八卦)를 그리었다. 우리 문화를 말살하는 지나의 문헌에 주역철학과 홍범구주(洪範九疇)가 우리에게서 창조된 것이 입증되는 것이다. 또한 그 사실이 실증이 된다.
지나에서는 은(殷)을 한족(漢族)이 세운 것 같이 말하나, 은은 동이족이다. 그리고 대륙 하남성의 서화(西華)에서 살았던 기자(箕子)는 은의 시조 성탕(成湯)의 16세손으로서 동이족이고 반도에 기자(箕子)는 없었다.
서전(書傳) 홍범장(洪範章)에 기자(箕子)가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주무왕(周武王)에게 전도(傳道)했다고 했다. 이로서 홍범구주(洪範九疇)가 동이족에 의해 창조된 것이 실증되는 것이다.
이상에서 본 바와 같이 지나 문화의 중핵(中核)인 황제제도를 비롯해 만가지 문물제도가 우리 한국에서 창조되고 보급된 것이 지나 문헌에 나와 있는 것이다.
그 외에도 고대 지나가 2000년 동안 고시석촉(楛矢石鏃)을 수입하고 신라의 궁술을 배우려고 기술자 구진천(仇珍川)를 보내달라고 애원한 사실 등을 고찰하면 지나 문화사상뿐 아니라 물질문명도 우리나라에서 수입한 것을 알 수 있다.
(以上은 崔仁, [韓國學講義] 35面~82面을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했음 밝힙니다).
글을 맺으며
이상의 내용들은 부분적으로 이미 기술한 바 있으나 역사가 반도에서 헤매고 있어서 우리 역사가 상고시대에는 유라시아를 지배했고 삼국시대에도 중원(中原)을 정벌하고 지배하며 찬란한 문화를 창조하고 지나에 전수한 것을 살펴봤다.
조선조에 와서도 대륙과 반도를 아우르는 영토임에도 강감찬의 구주대첩도 이성계장군의 오랑캐라 하며 정벌을 출발한 곳이 반도 아닌 장춘(長春)인데 이곳이 반도인가! 그런데 KBS의 역사스페셜을 보면 반도라 말하고 있다. 아직도 일본역사를 체계화하며 우리역사를 조작 왜곡한 쓰다 소우기치(津田左右吉) 범주(範疇)를 못 벗어나고 있다.
쓰다 소우기치는 일본의 와세다 대학의 교수로 1919년 신라본기(新羅本紀), 1921년에 백제본기(百濟本紀), 1922년에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를 차례로 일본의 구미에 맞게 비판하고 [삼국사기(三國史記)] 초기기록이 허구라는 주장을 펴며 제국주의 일본의 역사학을 체계화한 장본인인데 그 제자가 우리 역사를 망치게 했다.
즉, 일본에 유학한 이병도(李丙燾), 손진태(孫晉泰)가 이 왜곡된 일본의 역사방법들을 따르고 또 신채호(申采浩)와 그 제자들까지 이병도, 손진태 이론을 21세기에 와서까지 추종하는 자학반도식민사관자들은 아직도 역사연구는 않고 이를 따르고 있다.
지금 일본학자들도 이는 잘못됐다고 하며 바로 하고 있으며, 지나의 낙빈기(駱賓其)도 그의 저서 <금문신고(金文新攷)에서 지나의 역사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으며 대륙의 최초의 주인이 동이라고 밝히고 있는데도 우리나라 학자들은 오로지 왜곡된 역사에 안주하는 죄를 언제까지 지속할지 한심함을 금할 수 없는 상황이다.
이에 우리역사를 망치고 있는 자학반도식민사관자들의 추방이 과제가 아닐 수 없다.
(以上은 최태영,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김세환,[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九犂系史] ’東夷歷史 쇠集’.[(右犂)의 歷史 ‘校勘十八史]. 文定昌,[古朝鮮史硏究]. 황순종,[동북아 대륙에서 펼쳐진 우리고대사]. 한동억, [인류시원의 역사이야기] 朴鐘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한국인 자부심 더 알씨사랑]’ [한국인 자부심 물이랑] ‘[한국인 자부심 더 코어랑] [한국인 자부심 더 아리랑]. 檀檀學會編輯, [桓檀古記]. 李丙燾, 譯註, [三國遺事], 文定昌,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貝塚茂樹, [中國の歷史1~3].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鹿島 昇, [韓半島のうがや王朝史)] 讀賣新聞大阪本社編,[騎馬民族の謎]. 三浦一郞, 小倉芳彦, 樺山纊一, [世界を變えた戰爭, 革命, 反亂]外 多數書冊을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했음 밝힙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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