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인류사상 가장 강대한 자는 우리 한민족을 포함해 북방유목민족이다. 또한 북방민족 중 가장 강대한 자는 우리민족과 함께 몽골족이다. 몽골은 우리 한민족 전통과 동일하나 그 몽골이 역사의 뒤안길로 빠진 이유가 무엇인가. 오늘 칼럼을 통해 필자는 우리역사의 전통성과 함께 북방민족을 잠시 생각하고 가고자 한다. 북방민족의 구성을 살펴보면 신원사본기(新元史本紀 第一)에 몽골은 돌궐이 후손이요, 금국인(金國人)이 달조(韃靻)라고 칭했다. 또 입국조(蒙韃秘錄, 立國條)에 성길사황제(成吉思皇帝=징기스칸) 및 장상(將相)과 대신은 모두 흑달조인(黑韃靻人)이라 했다. 달주시기조(韃主始起條)에는 징기스칸(成吉思)이 소시(少時)에 금국인(金國人)에 포로가 돼 노예로 있다가 도탈(逃脫)하여 귀국했다고 했다. 때문에 금국(金國)의 실정을 모두 잘 안다하고 했다. 고금도서집성 변예전(古今圖書集成,邊裔典一三五,蒙古部)에 달조(韃靻=金國人)는 말갈(靺鞨)의 후손이요, 달조(韃靻)와 몽골은 같은 민족이라고 했다. 즉, 몽골은 말갈의 후손이라 하고 수서동이전(隨書東夷傳)에 말갈은 숙신(肅愼)의 후손이라 하고, 금사(金史)에 율미말갈(栗未靺鞨)이 후일에 발해가 됐다고 했다. 그렇다면 몽골은 한민족의 계열이다. 몽달비록 전증(蒙韃秘錄 箋證1面)에 달조인(韃靻人)은 노인에 천대하고 소장인(少壯人)을 우대해 1월에 반드시 하늘(天)에 절을 하고 5월 5일에 또한 하늘에 절을 한다고 했다. 제사조(祭)祀條)에 달조(韃靻)의 풍속은 하늘과 땅(天地)을 모두 존중하고 매사에 반드시 하늘(天)을 칭한다고 했다.
북방민족은 하늘을 숭배했음을 알 수 있다. 신원사(新元史 志四十八 禮志 一)에 몽골은 배천(拜天)의 예(禮)를 가장 중시한다. 국가에 대사(大事)가 있으면 관을 벗고 대(帶)를 풀고 꿇어앉아서 하늘(天)에 기도한다고 했다. 또 흑달사략전증(黑韃事略箋證, 一面)에 보면 흑달조(黑韃靻)를 대 몽골이라고 칭하고 있다. 사막 가운데 몽골산이 있는데, 달조어(韃靻語) 은(銀)을 몽골이라고 칭한다고 했다. 이는 몽골이 은(銀)과 철(鐵)을 중시한 것을 의미한다. 또 흑달사략전증(黑韃事略箋證, 九面)에는 달조인(韃靻人)은 새 달을 보면 반드시 절을 한다고 했으며, 흑달사략전증 군정조(黑韃事略箋證, 軍政條)에 달조인(韃靻人)은 적과 싸울 때에 명령을 복종하지 않은 자는 사형에 처한다고 했다. 동조(同條) 15면에 달조(韃靻)의 풍속에 길에 떨어진 물품을 줍지 아니한다(17면)고 하는 내용도 있다. 달조(韃靻)는 아울러 도둑을 죽이고, 그 처자를 몰수해 노예를 만든다고 할 만큼 도둑을 경계했다. 이는 진서(晋書烈傳 第六十七, 東夷)에 숙신씨(肅愼氏=예·濊-맥·貊族)는 노인을 천대하고 소장인(少壯人)을 우대하며, 도둑을 다 죽인다고 한 것과 같다. 한민족은 본래 하늘(天)을 존중해 천민사상(天民思想)을 제창했으며 또한 하늘(天)과 땅(地)을 모두 존중했다. 고구려의 천황지신총(天皇地神塚)과 고려의 천황지신사(天皇地神祠))가 이를 실증한다.
한민족 역사 지속되고 몽골의 몰락 원인
우리 한민족은 은과 철 등 금속을 존중해 일찍부터 동(銅)을 중국에 수출하고 활자와 철갑선을 먼저 발명하고 개발했다. 또한 한민족(韓民族)은 새해 정월 보름밤 음력 1월15일)에 떠오르는 새 달(新月)에 절을 하는 풍속이 있는데, 그 풍속이 오늘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또 당서 동이전(唐書 東夷傳)에 고구려는 적과 싸울 때에 패퇴한 자를 사형에 처하고 도둑을 엄벌에 처하고 또 고구려인은 땅에 떨어진 물품을 줍지 아니한다고 북사백제전(北史百濟傳)에 언급하고 있다. 백제역시 적과 싸울 때에 패퇴하는 자를 사형에 처한다고 하고 있다. 또한 주서열전(周書列傳, 第四十一)에 고구려는 도둑에 대해 10여배를 징취(徵取)하고 가난해 공사채(公私債)를 보상치 못하는 자에 대해 그 자녀를 대신 몰수학 노예를 만든다고 했다. 이처럼 몽골의 풍속과 한국의 풍속이 동일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몽골은 한국이 그 전통을 발굴해 민족 철학을 창조한 것과 대조적으로 몽골의 전통을 발굴해 민족철학을 창조하지 못하고 외래사상에 맹신해 민족정신을 말살했다. 이것이 한국과 몽골의 차이점이다. 몽고원류전증(蒙古源流箋證) 첫머리에 정예삼보(頂禮三寶), 삼세제불(三世諸佛), 불도생령(佛道生靈) 등 불교의 문구로 시작하고 인도의 수미산(湏彌山)이 천하제일이요, 석가모니불(釋迦牟尼佛)을 천고제일 (千古第一)이라고 내세웠다.
즉, 몽골의 본원(本源)을 기록한 신화(神話)가 불교로 장식됐다. 자치통감 절요 속편(資治通鑑節要續編)에 원(元)이 승 팔사(僧 八思)를 국사로 추대했다 하고, 원사(元史)에 불교가 중국을 전래한지 천수백년에 달하는데 승(僧)을 제사(帝師)로 추대한 성황(盛況)은 원(元)이 최고라 하며, 신원사(新元史志, 三十五, 食貨志, 一)에 불사를 인하여 국가재정이 부족했다고 했다. 그런데 몽골 4대 칸인 홀필열(忽必烈)에게 공자를 백왕의 사(師)로 모시고 공자의 교를 만세의 법으로 정하라고 건의한 유병충(劉秉忠)과 공자의 51대손인 원조(元措)가 공자의 교훈을 받들어 원의 예(禮), 낙(樂), 백관(百官)의 제도를 창설했다. 그런데 신원사(新元史)에 용하변이자의관시언(用夏變夷必自衣冠始焉)이라고 했다. 즉, 중국의 문화를 수입해 몽골의 풍습을 개조하는 것은 의복제도로부터 비롯돼야 한다고 한 것이다. 이어 헌종(憲宗) 시대부터 중국의 제복을 입었는데, 문종(文宗) 시대에 이르러 중국의 큰 옷을 입어 완전히 중국화 했다고 했다. 유병충(劉秉忠)은 ‘병력으로서 천하를 얻을 수 있으나 병력으로 천하를 다스리지 못한다’는 고어가 있다고 말했다. 이는 무력으로 천하를 정복할 수 있으나 문화사상이 없음으로 그 천하를 상실한다는 말이다. 몽골이 무력으로 천하를 정복했으나 문화사상이 없음으로 그 천하를 상실하고 도리어 천하를 정복한 것을 계기로 외래사상을 맹신해 1271년 건국 후 1368년 97년 만에 원이 멸망했다는 것이다.
많은 북방민족 자국문화 못 지켜 사라졌다
게릴라 전술로 유명한 흉노족(匈奴族)은 유럽까지 침입하고 중국도 침략할 정도로 강성했다. 조환(鳥桓)은 자주 한족(漢族)의 요새를 침략해 하북(河北), 산서(山西)를 위협하고 선비(鮮卑)는 오호(五胡)의 하나로서 중국에 침입하고, 회흘(回紇)은 문자(文字)가 있고 약 1세기동안 몽골리아 전역을 지배하고 당의 공주를 하가(下嫁, 지체가 낮은 가문으로 시집간다는 뜻으로 임금의 딸이 사대부에게 시집가는 것을 의미)케 할 정도로 막강했다. 설연타(薛延陀)는 서돌궐(西突厥)을 격파해 건국하고 몽골리아 및 중앙아시아를 지배했으며, 유연(柔然)은 북방민족 중 가한(可汗=최고 권력자)을 칭하고 몽골리아 및 중앙아시아에서 패권을 장악해 공전의 대 유목제국(大遊牧帝國)을 건설해 중국을 위협했다. 거란(契丹)은 내외 몽골리아를 정복하고 발해의 신하로 있던 야율아보기는 228년 발해에서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후 거란은 중국을 정복코자 시도하고, 여진(女眞)은 중국을 정복 지배했다. 이상에서 보듯 이들은 다 같이 인류사상 가장 강력한 북방민족으로서 천하를 지배하고 천하를 지배하려고 시도했다. 그러나 그 북방민족들은 거의 전멸했다. 그렇게 강대한 무력을 자랑하면서 북방민족이 전멸 된 것은 어떤 이유에서인가. 그것은 북방민족은 용맹하고 강대하나 문화사상이 없음에서였다. 문화사상이 없음으로 고유한 전통을 지키지 못하고 주체성이 없이 타민족의 문화사상을 맹신하다가 타민족에 동화돼 전멸했던 것이다.
그러나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달랐다. 우리가 몽골이 침입했을 때 고려조정은 강화도에 천도하고 끝까지 방어한 것은 우리에게는 타민족에 동화 될 수 없는 훌륭한 문화사상이 있고 한민족의 자존심과 자부심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화도에 천도하고 나서도 민족의식을 고취한 것은 국가 수호를 위한 것이었다. 고려는 당시 단군 제(檀君祭)를 거행했다. 전통을 이은 것이다. 즉, 마니산 첨성대(瞻星臺)를 단군의 제천단(祭天壇)이라고 전하게 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잘못 전해진 오전(誤傳)이다. 혜원(慧遠)의 대승기신논의소(大乘起信論義䟽) 첫머리에 마니보전(摩尼寶殿)을 기록해 마니(摩尼)가 불교의 문구(文句)라 가리켰다. 페르시아에서 출생한 마니(摩尼)가 241년경에 불교, 기독교, 배화교 등과 종합해 마니교(摩尼敎)를 창설했다는 것이다. 당나라 측천무후 시대에 회흘(回紇)인이 마니교(摩尼敎)를 중국에 수입한 후 그 교가 협서(陜西), 호북(湖北), 하남(河南), 산서(山西), 강소(江蘇), 석강(淅江), 강서(江西)등 각성(各省) 등에 유포됐다. 이 마니교(摩尼敎)는 단군이 제천(祭天)하는 성지(聖地)에 외래어 마니(摩尼)를 붙일 수가 없다. 당시 강화도는 변방에 동 떨어진 고도(孤島)로서 고대에 단군과의 행사와 관계가 없다. 반면에 강화는 바다를 통해 중국과 교류 할 수 있다. 그러면 중국각성(中國各省)에 유포된 마니교(摩尼敎)가 들어 올 수 있다. 마니산 첨성대(瞻星臺)는 마니교도(摩尼敎徒)의 유적으로 보아야 한다. 우리 단군과 관련이 없는 마니(摩尼)는 적절치 않다. 마니산(摩尼山)의 원명을 찾아 씀이 민족의 정서로 보나 제천단(祭天壇)의 성격상 맞다.
북방민족 중 불멸의 한민족, 고유사상 견지해야
마니교(摩尼敎)는 카돌릭의 교부(敎父)인 성 아우구스티누스(Augustinus)도 일시 믿었던 종교이나 단군과 아무런 상관이 없다. 이런 마니교(摩尼敎) 교주이름을 딴 마니산(摩尼山)에 제단을 쌓은 것은 잘못이다. 첨성대(瞻星臺)를 단군의 제천단(祭天壇)이라고 전하게 된 유래를 제대로 그 유래 배경을 밝히고 사용여부를 결정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사료된다. 그렇치 않아도 우리는 조선조에 와서 고유한 문화사상을 배제하고 외래사상인 유교를 맹신한 원인이 어디 있는가를 따져보아야 한다. 한국은 명장은 많으나 독창적인 사상가가 없기에 우리가 갖고 있는 인간사상, 천민사상, 중물사상을 체계화하지 못하고 뚜렷한 철학을 완성하지 못했다. 고유한 문화사상을 체계화하지 못함으로 인해 완성된 외래사상에 빠져 외래사상의 횡행(橫行)을 막아내지 못하고 있다. 조선시대부터 외래사상을 추종하고 맹신함으로서 고유한 문화사상이 완전히 말살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이 사실을 정시(正視)해야 한다. ‘북학(北學)’ 또는 ‘주자학(朱子學)’은 우리사상이 아니다. 이 같은 현실은 일제강점기에 민족 운동에도 민족의 생명력인 문화사상을 중흥하는 의식사상적(意識思想的) 운동으로 전개하지 못하는데 영향을 미쳤다. 결국 구호와 말로만 부르짖는 방황한 결과를 가져 왔다. 결국 일제는 한민족(韓民族) 가치관의 변질을 손쉽게 했다.
인류역사는 자연적·발생적 운동으로 창조치 못하고 의식사상적(意識思想的) 운동으로 창조하는 것이다. 자연 발생적 운동이 실패하지 않을 수 없다. 그런데 지금까지도 이를 반성하지 못하고 그 자연 발생적 운동을 되풀이 하고 있다. 1백년의 실패를 되풀이하고 있는 것이다. 아직도 우리나라 학자들은 원효사상, 퇴계사상, 실학사상을 한국사상이라 착각하고 있다. 원효는 고유한 한국사상을 발굴해 창조치 못하고 불교를 개조했다. 그 본질이 외래사상이요 한국사상이 아니다. 퇴계, 실학파는 중국사상을 맹종해 그 사상에 진전을 이뤘으나 도리어 한국사상을 말살했다. 고유한 한국사상을 존중하는 단군대(檀君臺), 사선정(四仙亭)이 조선 중기까지 존재했다. 그런데 단군대(檀君臺), 사선정(四仙亭)을 철거하고, 마을마다 공자묘(孔子墓), 관우묘(關羽墓)를 세운자가 바로 퇴계학파, 실학파(實學派)다. 한국사상을 말살한 사상을 한국사상이라고 착각하면서 한국사상을 송두리째 말살했다. 이제 우리는 위대한 한국사를 창조한 한국사상을 다시 일으켜 한국사를 올바르게 가르쳐 자주자존(自主自存)의 민족의식을 북돋워야 한다. 위대한 한국사상을 토착화 해 국민을 오도(誤導)하는 외래사상을 탈피하고 한국 철학사상을 회복함으로서 ‘홍익인간’과 ‘단군’을 신화화(神話化)한 식민사관과 대중화사상(大中華思想)을 배제하고 바로잡아야 한다. 아울러 고루한 국수주의나 잘못된 이데올로기, 편협한 민족주의 등을 탈피해 인류주의(人類主義)를 창조한 ‘홍익인간’의 신기원(新紀元)을 재창조하는 인류사상 일대광명(一大光明)을 밝힐 때다. 한민족사상은 영원할 것으로 믿기 때문이다.
<본 칼럼은 최태영·최인 선생의 서책들과 김능근 선생의 ‘유교(儒敎)의 천사상(天思想)’, 공구(孔丘)·맹가(孟軻)/이가원 역해(논어·맹자), 한국출판공사 간행 ‘사서오경(四書五經) 1~13’, 소천환수역(小川環樹譯) ‘世界の名著’와 ‘노자·장자’, 성균관대 출파부 ‘이회재(李晦齋)의 사상과 그 세계’, 이을형의 ‘법철학 강의’ 등의 서적을 참조·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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