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역사를 존중하는 목적이 그 민족의 활로를 개척하는데 있음은 이미 지적했다. 우리는 1만년이 넘는 역사를 갖고 있으면서도 인류사회에 통예(通例)를 떠난 이물(異物) 김부식(金富軾)을 시조로 한 조선조(朝鮮朝)의 사대사가(事大史家)와 일제식민사관의 노예노릇을 충실히 하는 강단파 이물(異物) 등에 의해 찬란하고 유구한 역사를 도둑질 당했다. 그들은 한민족 영광에 백안시하고 수치에 혈안이 된 자들이다. 두 눈에 충혈이 된 그들에 의해 한민족은 중국의 후손이요, 단군시대부터 중국을 섬겼다는 이단적 역사를 우리국사로 만들어 버렸고 또한 가르치게 했다. 참으로 있을 수 없는 배반의 역사를 그들이 만들었다. 그리고 끊임없는 외적의 932회 침략으로 인해 우리의 찬란한 역사유적이 불타고 그 흔적이 사라졌다. 또한 중국과 일본의 사가들에 의해 자기들의 역사가 신통치 않음에 따라 자기들 중심의 역사를 쓰면서 한국을 지배하고 예속했다고 위조했음은 이미 앞서 칼럼에서 전술한 바와 같다. 여기에 한국의 이물(異物)들은 연구는 게을리 하면서 아직도 중국과 일본 사가의 위조·왜곡된 역사에 일점을 더하고 있으니 완전히 패배이고 수치다. 식민사관의 역사 장식을 답습하며 중국과 일본의 구미에 맞게 패배, 수치의 역사로 더 위조하고 있는 형국이다. 중국 사가는 중국 중심의 역사를 쓰고, 일본 사가는 일본 중심의 역사를 썼지만 우리는 그 모든 것을 빼앗겼다. 우리가 그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것은 선조들에 대한 불충이고 불경(不敬)이다.
우리 역사는 국내보다도 외국의 학자들에 의해 활발히 연구돼 세계역사의 중심이 우리 한국임을 증언하고 있다. 예컨대, 러시아의 역사학자인 유, 엠, 부틴은 그의 저서 ‘고조선’에서 “고조선 민족은 아주 오랜 옛날 60만 년 전, 구석기시대부터 만주와 한반도는 물론이요, 중국의 북부와 중부 남부에 걸친 넓은 대륙에 분포해 정착하고 살아오면서 일정한 공통점을 지닌 문화를 이루면서 동부아시아 전역에 걸쳐 동방문화권을 형성했다. 이는 중국문화와 전혀 다른 독창적이고 독특하다. 고조선 민족은 독자적인 문화를 수천 여 년 동안 계승·발전시켜왔다”고 그 소명자료를 일일이 열거하고 고증하면서 체계적으로 기술하고 있다. 또한 고고학적인 역사자료를 근거로 “고조선에서는 그 당시부터 농업과 축산업, 직물업(織物業), 도기산업(陶器産業), 제철업(製鐵業), 비금속, 보석가공업의 야금술(冶金術) 등이 발달했다. 또 수송수단으로 수레와 선박의 제조가 각기 분업화 돼 이루어졌다고 단언 할 수 있다”고 기록했다. 즉, 고조선의 사회적 경제체제와 생산력에 관해서 상세하게 논증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 고대사는 불공정한 김부식의 ‘삼국사기’에 의거한다고 해도 고구려가 국사 ‘유기’(留記) 100권을 편찬한 것이 국초인 서기1세기경의 일이다. 백제는 늦어도 근초고왕 때(346~376) 때 고흥의 ‘백제서기’가 편찬됐을 것으로 추정되고, 신라는 545년 거칠부가 ‘국사’를 편찬했으며, 고려는 ‘왕조실록’을 편찬했다는 기록들이 분명히 있다. 이 역사서는 모두 바른 전통과 자립정신을 후손에게 분명히 하고자 한 것이었다.
중, 일의 역사조작 왜곡과 고대사를 밝힐 증거
그런데 이 귀한 역사서는 현재 남아 있지 않고 다른 사서들이 이를 인용한 것이 간간히 남아 있을 뿐이다. 단군 고조선 개국이 기록돼 있는 현존사서(史書) 몇 가지와 현재는 없는 고서(古書)들 몇 가지를 제시하면 다음과 같다. 현존의 고서(古書)로는 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 고조선조,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 정도전의 조선경국전(朝鮮經國典), 국호조, 조선왕조실록의 세종지리지, 평양조 단군기, 북애(北崖)의 규원사화(揆園史話), 박세무의 동몽선습(童蒙先習) 등이다. 삼성기(三聖記), 삼성비밀기, 조대기(朝代記), 고조선비사(古朝鮮秘史), 단기고사(檀奇古史), 단군세기(檀君世紀), 북부여기(北扶餘記), 태백일사(太白逸史) 등의 기록은 우리 한민족의 정통사관으로서 고대 동양사를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있는 역사문헌들이다. 하지만 이들 서책은 일본인에 의해 많이 불태워 없어졌다. 또한 단군세기(檀君世紀)와 번한세가(番韓世家)에는 왜인의 뿌리라든지, 이도국(伊都國=사마대국(邪馬臺國) 문제 등 고대사의 최대 관심사가 모두 기재돼 있다. 잃어버린 상가야의 역사는 환단고기에 의해 불사조처럼 소생했다. 고려(高麗)에 이르러서는 몽골과 금(金)에 예속체제를 강요당한 정세에서 삼국사기(三國史記)가 편찬됐다. 고려왕조실록 또한 조선조로 바뀌던 혼란기에 분실·변작(變作)되고, 더구나 조선조에 이르러서는 처음부터 명(明)나라에 의존체제인데다 호(胡)와 왜(倭)의 장기간에 걸친 연속침입으로 많은 사료와 문화재가 소실됐었다. 명(明)나라와 청(淸)나라에의 예속이 더욱 강화된 체제 아래서 고려사와 조선왕조실록이 기록됐다.
결국 우리 조상의 손으로 기록된 원형대로의 자주적 역사자료를 찾아보기 힘든데다가 조선조의 학자라는 유생들의 비판적이고 자주적인 민족사관과 중국경서(中國經書)에 대한 비판적 해설까지도 유교를 어지럽혀지는 사문난적(斯文亂賊)이라고 해서 정부의 억압과 당파간의 견제를 받았다. 외국인의 저술로는 명나라 왕엄주(王弇洲=본명 왕세정·王世貞)의 속완위여편(續宛委餘編)에 단군과 그의 치적(治積), 교(敎)가 기술(記述) 돼 있다. (이시영의 감시만어(感時漫語)에서 밝히고 있다) 또한 20세기 초에 들어와서 일제 강점기간 중에는 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를 통해 우리 역사가 일제의 의도에 따라 1만년의 역사가 절반이하로 짧게 잘려지고 강역도 한반도로 좁혀지는 등 날조, 왜곡, 변조·조작되고 그것마저도 말살 될 뻔했다. 최태영 선생은 일제가 우리의 역사, 지지(地誌), 사상에 관한 모든 서적을 초등교과서에 이르기까지 거둬들여 없애버린 일이 기억에 생생하다고 ‘한국고대사를 생각한다’에서 밝혔다. 지금의 우리 역사는 가진 수모를 당하고 있음이 여전하다. 우리 역사는 타국의 간섭아래 눈치를 보아 가며 본의 아닌 것을 남겨놓은 기록이다. 여기에 더해 매우 거만한 외국의 불공정한 필법에 의해 그들의 감정에 맞도록 제멋대로 조작된 불확실하고 간접적인 자료인 이른바 외사(外史)라는 것이 지금 우리 고대사의 주된 자료가 되기에 이르렀다. 그런 와중에서 우리의 진정한 옛 모습과 고대사의 원형을 찾아낸다는 것은 실로 어려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뿐만 아니라 한자(漢字)는 함축성이 있어 묘미가 있는 것도 사실이지만 그 시대의 특수한 의미를 오랜 후세의 우리가 제대로 확정한다는 것은 어려운 일이어서 고대인들이 한자로 기술(記述)해 둔 고서(古書)의 본의(本意)를 밝히는 것 또한 쉬운 일이 아니다. 그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는 삼국유사(三國遺事) 첫머리에 있는 고대조선의 단군왕검조(檀君王儉朝) 건국이념 해설만 보아도 알 수 있다. 또 현재 남아 있는 자료들에 근거로 연구함에 있어서도 문제에 부딪치게 된다. 그것은 지금 남아 있는 고사(古史)들의 고조선국을 개창(開創)한 단군기록을 신화(神話)라고 해서 고조선의 대부분을 한국사에서 아주 빼어버려 나라의 나이를 수천 년을 줄이려 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제 변조된 역사를 제자리로 찾아놓아야 한다.
변조 왜곡된 고대사 제대로 잡아야
일제가 단군을 신화(神話)라고 몰아버린 발단은 옛 사람들이 국조단군을 숭앙(崇仰) 해 단군의 고상한 정신이 민족과 함께 살아 있음을 우려했기 때문이었다. 단군을 통해 우리는 영원히 민족을 가호하며 단결시켜주기를 바랬다. 그것은 강력한 결속력의 바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다만 단군의 실재한 역사는 각 사서(史書)의 저자에 따라서 그 표현 방식이 불교적 혹은 선교적 색채를 띄게 된 경우가 있었다. 그 이유로 신화(神話) 속에 단군이 생겨난 것이 아니고 단군의 사적(史蹟)을 신화(神話)로 인위적인 채색을 하고 수식한 것이다. 그렇다면 신화(神話) 때문에 사적을 말살 할 것이 아니라 꾸며 놓은 신화적 요소를 조심스럽게 추려내고 본래의 역사적 사실을 밝혀 상징적으로 표현된 설화(說話) 속에서 바른 사실을 찾아내야 할 것이다. 고려조에는 몽골의 인왕백고좌(仁王百高座) 강회 금지정책 하에서도 호국 불교신앙과 함께 단군정신을 고취했다. 조선조에서는 유학을 숭상하는 정책 때문에 불교는 억압했지만 단군숭앙사상만(檀君崇仰思想)은 유지해서 구한말 까지도 단군과 고조선을 의심한 일이 없었다. 상고시대(上古時代)의 고조선, 예맥(濊貊), 부여(夫餘), 삼한(三韓), 가야(伽倻) 등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주력이 강성해서 요동과 중원, 한반도는 우리 선조들의 본거지였다. 우리 선조가 이민족을 억압하고 지배하며 서울을 여러 곳에 두고 크게 활약하다가 점차 세력에 밀려 한반도로 옮겨오면서 수도(首都)를 여러 번 옮겼다. 이로 인해 한반도에서의 산하와 도시의 명칭이 중국의 그것과 동일하다. 중국 본토와 같은 지명을 반도 내에도 만들어 놓은 이름 때문에 옛날의 우리 주무대를 잊어버리고 만 것이다. 나아가 강단사학자들이 역사를 한반도만으로 줄여버리려는 데서 생겨난 지명의 혼란이다.
예컨대, 고조선의 3경, 발해의 5경, 고려의 3경 등과 같은 시대에 서울이 여러 곳에 있었던 사실에 관해서는 신채호(申采浩), 최동(崔棟), 이시영(李始榮), 정인보(鄭寅普) 선생들이 연구해 왔다. 아울러 이 보다 일찍이 북애(北崖)가 연구발표를 했다. 서기 1675년 조선 숙종원년 북애(北崖)가 편찬한 규원사화(揆園史話=고조선 단군역사) 저서로 유명한 북애(北崖)는 “왕검성(王儉城)이란, 경성(서울)이나는 의미의 고어(古語)이고, 평양도 틀림이 없다. 평양은 제2의 왕검성이고, 단군의 제2평양은 압수(압수(鴨水)의 북쪽에 있었다. 또한 태백산이란 이름을 가진 산이 허다한데, 태백산을 영변의 묘향산이라고 하는 자는 안공이 너무 작아서 더불어 논할 바가 못 된다. 개마, 태백, 장백 등은 모두 같은 산의 이름이다. 역대 방언(方言)의 차이다. 개마, 백두도 이자(異字) 동의(同意)인 것이다”고 했다. 중국 내에도 평양이란 지명과 태백산이란 산이 여러 곳에 있다. 이들 지명들은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중국대륙과 유라시아에서 활동한 유서 깊은 산하(山河)인 것을 알 수 있다. 동양 미술 사학자인 미국의 존 코벨(Jon Carter Covell(1910~1996) 박사는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동아시아에 정착한 연대는 현재 알려진 것 보다 훨씬 더 일찍 정착했다고 주장한다. 일제가 역사 말살을 위해 우리역사를 절반이상 잘라버린 것을 말한 것이다. 또 중국은 우리선조들의 문화도 자기 것으로 만들고 있으나 “우리문화가 중국과 다르고 한민족 문화가 중국 것이 아니고 독특하다. 단군은 단군이다”고 했다. 코벨 박사의 이 같은 주장은 변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고대부터 여러 다른 종족과 융합하면서 중국의 중원(中原)과 유라시아, 한반도, 일본열도 등을 지배하고 지도한 민족임을 거듭 강조한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선생의 ‘한국고대사를 생각한다’ 외 다수서적과 한정호의 ‘대조선민족사’, 이강민의 ‘대한국고대사’, せい いくと ‘新漢族から大和民族’등의 서책들을 참조·인용했음을 밝힙니다>
후원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