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국은 ‘유라시아’ - 배달국은 ‘중국 80%’ 지배

입력 2013-11-30 19:33: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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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최초의 고대광역국가 환국(桓國)
 
한민족(韓民族)이 선진민족으로 일찍부터 중국대륙과 유라시아 및 한반도에서 중국 한족(中國漢族)에 앞서 선주하고 치수법(治水法), 무기 등 또한 선행문화를 갖고 있었다는 것은 숨길 수 없는 진실이다. 상고시대의 환국, 배달국, 고조선의 역사적 활동영역은 한반도가 아닌 중국대륙이었다. 우리나라 최초의 고대국가인 환국(桓國)은 중국과 일본이 아예 없애 버렸으나 엄연히 존재했었다. 중국 주은래(周恩來) 수상과 장개석(蔣介石) 총통도 우리 고대사를 인정했었다. 장개석은 이시영 부통령에게 “자기 고향 양자강 절강성은 옛 백제 땅이었다”고 말할 만큼 우리 역사를 이해하고 있는 인물이었다. 반면 후진타오는 국가주석이 되면서 그리고 앞서 상해 서기시절부터 구상한 동북공정을 통해 우리 역사를 훔치며 도둑질하는 일에 나섰다. 하지만 역사는 억지로 조작한다고 자기 역사가 되는 것이 아니다. 동북공정은 그야말로 언어도단이다.
 
우리는 중국 한족과는 어계(語系)부터 엄연히 다를 뿐 아니라 다른 문화전통을 가진 종족이다. 지금 ‘홍산문화(‘紅山文化)’에서 밝혀지고 있듯이 고조선 지역의 청동문화 시작도 모두 중국보다 앞선다는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규원사화(揆園史話), 환단고기, 단기고사 등과 중국 문헌에 이미 나와 있는 대로 고대 환국의 황제를 환인(桓因=桓仁)으로 불렀다. 환국의 최초 발상지는 환단고기에 중국서부 위구르족 자치구의 천산(天山)에서 시작됐다고 나와 있다. 이 천산은 중국 위구르자치구의 우루무치 시 외곽북쪽에 있는 고산으로 산 정상에는 백두산 천제연과 같은 호수가 있어 지금은 유명관광지가 되고 있는 곳이다. 환국은 천산서역에서 시작됐음이 확실시 된다. 부두지(符都誌) 제1장에는 마고성(麻姑城)이 나온다. 이 마고성(麻姑城)은 천산의 남쪽에 있다고 하고 있는데, 천산의 남쪽지대는 타클라마칸사막이고 서남쪽은 파미르고원의 오른 쪽 지대에 속한다. 예부터 파미르고원은 우리 한민족의 발상지이자 기원지로 알려져 있는 곳이다.
 
 
 ▲ 우리 민족의 선조인 환국은 BC 7199년에 원시국가 형태로 안파견 환인천왕(安巴堅 桓仁=桓因天王)에 의해 파내류산(波奈留山, 천산) 아래에서 건국했다. 이어 환국은 유라시아를 제패하는 강력한 고대국가의 강역을 차지하면서 3301년 동안 이어졌다. 환국시대가 끝날 무렵 환국의 마지막 천왕인 지위리(智爲利桓人) 천왕의 아들 환웅(桓雄)이 동방으로 가서 신시(神市)를 건설하고 BC 3898년에 배달국을 세웠다. 그가 바로 거발환(居發桓) 환웅천왕(桓雄天王)이다. 배달국은 오늘날 중국의 땅 80%를 지배해 고대 중국의 역사는 바로 한민족 역사였다. 이미지는 역사서를 바탕으로 한 ‘환국’의 유라시아 강역도. ⓒ스카이데일리 <이미지=최은숙>

환단고기에는 환국을 건설한 안파견(安巴堅) 환인천왕이 “삼위산과 태백산을 내려다보고~”라는 내용이 있다. 여기서 삼위산은 감숙성 돈황면에 있으며 태백산은 섬서성 동천시 외곽과 서안시 서남쪽에 두 개가 있다. 환국의 위치는 지금 중국서부에 있는 천산지역을 환국의 중심지로 보는 견해와 또한 견해는 바이칼호수 동남쪽지역 시베리아와 만주가 환국의 중심지였다는 주장이 제기되고 있다. 따라서 환국의 백성들은 파미르고원, 천산산맥, 몽골고원, 바이칼 호수 동남쪽지역에서 수렵생활과 채집을 하며 살았을 것으로 보고 있다.
 
학자들은 우리의 문화역사 기원에 대해 70만년 전부터 그 상한(上限)으로 전곡리 유적연도를 측정한 구석기 초인 270만년 전으로 추정하고 있다. 구석기 시대에는 고래잡이와 사냥, 채집을 주로 하면서 무리생활을 했고 신석기 시대에는 빗살무늬토기의 제작과 농경을 시작함으로써 부족단위의 정착생활을 하게 됐다. 이 때 환국이 BC 7199년에 원시국가 형태인 안파견 환인천왕(安巴堅 桓仁=桓因天王)에 의해 파내류산(波奈留山) 아래에서 건국했다. 이어 환국은 3301년 동안 이어졌다. 환국시대를 고고학적 문화단계로 나누면 신석기시대에 해당한다. 외국학자들도 우리 문화가 동아시아에 정착한 연대는 현재 알려진 것보다 훨씬 오래이며 우리문화가 중국과는 다르다는 것은 세계학자가 인정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는 얼마 전까지도 신석기시대부터 시작한 것처럼 잘못 알져왔다. 그러나 근래에 와서 우리 옛 고토(故土)에서 구석기 시대의 유적과 유물 발굴로 우리의 역사도 구석기 시대까지 거슬려 올라가게 됐다. 따라서 우리나라 역사는 구석기시대로부터 신석기·청동기·철기시대의 문화단계를 거치면서 면면이 발전해 왔다. 부두지(符都誌)에서도 우리 한민족의 역사가 7000년이나 된다고 했다. 우리 한민족은 환국, 배달국, 고조선시대부터 종교사상도 천민사상, 인간사상, 중물사상으로 나라를 튼튼히 했다. 백성들의 종교도 하늘과 땅 바다의 여러 신들을 믿고 제사지내는 자연신 신앙이었다.
 
배달국의 건국과 중국대륙 지배
 
배달국은 신석기 말기에서 청동기시대의 초기단계로 보고 있다. 환국시대가 끝날 무렵 환국의 마지막 천왕인 지위리(智爲利桓人) 천왕의 아들 환웅(桓雄)이 동방으로 가서 신시(神市)를 건설하고 BC 3898년에 배달국을 건설한다. 이가 바로 거발환(居發桓) 환웅천왕(桓雄天王)이다. 신시에다 배달국을 세우고 신시시대(神市時代)가 1565년간 지속됐다. 신시배달국왕은 18대로 돼 있는데, 특히 14대 자오지천왕(慈烏支天王-일명 치우천왕·蚩尤天王)은 갈노산(葛盧山)에서 구리와 철을 캐서 칼과 창과 투구, 갑옷 등 병기를 제작해 무장을 하고 중원(中原)에 있는 제후국(諸侯國)인 구려(九黎)를 평정했다고 삼성기(三聖記), 규원사화(揆園史話), 태백일사(太白逸史), 삼한비기(三韓秘記) 등 국내 사료에 기록돼 전해진다. 아울러 중국사기(史記)에도 “그 위세가 천하를 진동시켰다”고 기록했을 정도로 용맹했었다. 중국은 동북공정을 하면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을 자기들의 시조(始祖)로 하고 있으나 어불성설이다.
 
치우(蚩尤)는 천자(天子)의 이름이었다. BC 27세기경 구리와 철로 병기(兵器)를 제작 할 수 있었다는 사실은 당시로서는 놀라운 일이다. 우리나라 청동기문화개시(靑銅器文化開始)가 BC 27세기부터 꽃피우고 있었다. 치우천왕(蚩尤天王)은 동철(銅鐵)로 된 무기와 투구, 갑옷으로 무장해 한족(漢族)의 헌원황제(軒轅黃帝)등 12제후국(諸侯國)을 평정하고 도읍을 신시(神市)에서 청구(靑丘)로 옮긴다. 청구(靑丘)는 지금의 산동성(山東省, 동평현(東平縣)이다. 현재 치우천왕(蚩尤天王)의 능(陵)도 그곳에 있다. 천부경(天符經)은 환국시대는 구전으로 전해졌으나 환웅천왕의 배달국시대에는 신지혁덕(神誌赫德)이 쓴 녹도문(鹿圖文)으로 전해지고 있다.
 
참고로 배달국(倍達國)에 관한 기록 몇 개를 소개코자 한다. 중국사학자 임혜상(林惠祥)은 그의 저서 ‘중국민족사’ 상권에서 “한족이 중국에 들어오기 이전에 중국의 중부와 남부는 본래부터 배당동이 겨레인 구려 즉, 묘족(苗族)이 살고 있었는데, 한족(漢族)이 이주해 들어온 뒤부터 점차적으로 서로 접촉하게 됐다”고 했다. 일본의 도리이 유조(鳥居龍藏)도 ‘묘족 조사보고’에서 같은 내용을 언급하고 있다. 중국사학자 왕동령(王桐齡)은 ‘중국통사’(中國通史) 4면에서 “지금으로부터 4천 년 전 현재의 호북성(湖北省), 호남성(湖南省), 강서성(江西省) 등 지역은 동이족인 묘족(苗族)이 점령했었다. 이 종족의 국명은 구려(九黎)라 하며 그 군주의 이름은 치우(蚩尤)라고 했다”고 언급했다.
 
상서(尙書)에도 “구려(九黎)는 곧 치우(蚩尤)의 무리다”고 했다. 또한 서량지(徐亮之)도 ‘중국사 전 사화’(中國史前史話)에서 위에 기술 한 바 같이 은(殷)나라나 주(周)나라 이전은 물론 은주시대(殷周時代)까지도 동이(東夷) 즉, 배달민족의 그 활동분포를 알 수 있다고 했다. 그 기록에 의하면 현재 중국의 산동성(山東省)·하북성(河北省) 동남지역, 발해연안, 하남성(河南省) 동남지역, 강소성(江蘇省)의 서부와 북부지역, 안휘성(安徽省)의 중부와 북부지역, 호북성(湖北省)의 동부 및 요동반도와 조선반도 등 광대한 지역이었다고 한다. 아울러 그 활동의 중심지는 산동반도였다는 내용이 있다. 배달국(倍達國)은 실로 현 중국의 80%나 되는 영토를 지배하고 많은 제후국(諸侯國)을 거느린 초강대국이었다. 이러한 우리나라 역사가 중국역사로 둔갑 할 수 없는 것이다. 참으로 한심한 일들을 중국은 서슴치 않게 하고 있다.
 
고대 중국역사는 동이족의 역사다
 
중국이 동북공정을 통해 역사를 변조하나 진실은 숨길 수 없다. 중국의 고대사는 우리 한민족의 역사다. 고대중국의 역사는 우리 동이족의 역사라는 것이 맞다. 중국이 제아무리 역사를 변조하려고 해도 안 되는 것은 역사기록과 유적 유물이 이를 반증한다. 우리 한민족이 고대중국을 지배한 것이지, 중국 한족이 지배한 것을 찾아 볼 수 없다. 한국과 중국의 정사(正史)인 ‘중국25사’(中國二十五史) 역사문헌의 기록을 참고해서 봐도 배달국 시대에 배달동이(倍達東夷)의 구이(九夷)인 구려(九黎)가 현재의 중국을 포함한 동부아세아 거의 전 지역을 개척하고 지배한 것을 언급하고 있다. 러시아의 역사학자인 유 엠 부틴도 그의 저서 ‘고조선’(古朝鮮)에서 이를 기록하고 있다. 또한 중국역사 ‘고사변’(古史辯) 제7권 중편 삼황오제(三皇五帝)에 고대제왕(古代帝王)등의 종적을 살펴봐도 “대다수의 제왕(帝王)이 동방에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고 하고 있다. ‘사기’(史記) 권1 오제본기(五帝本紀)와 서량지(徐亮之)의 ‘중국민족사’(中國民族史)에서도 “정욱(정頊)은 동이(東夷)에서 태어 낳고 이들은 황제의 손자이며 창의(昌意)의 아들이다”고 했다. 고조선을 말한 ‘산해경’(山海經), ‘해외서경’(海外書經)에서도 “8대 제왕이 숙신(肅愼=조선·朝鮮)에서 취(取)해 온 것이다”고 했고 제격사기(帝擊史記)에서도 ”황제는 백민(白民=배달국)에서 태어났음으로 스스로 동이인(東夷人)이라고 했다“는 내용이 있다.
 
또 임혜상(林惠祥)의 ‘중국민족사’ 제5장 구려삼묘(九黎三苗) 편에 “유복림(漻鳳林)이 말하기를 염제(炎帝)와 황제(黃帝)시대에~남쪽에 여(黎)와 묘(苗)가 살았는데 여 모(黎, 苗)가 대대로 살던 곳이었다. 정욱왕 이전에는 구려(九黎)라 칭했고 정욱왕 이후에는 3묘(三苗)라 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중국의 사가 정현(鄭玄)과 위소(韋昭)에도 “삼묘(三苗)는 구려(九黎)의 후손들이다. 이같이 상고시대에 강한(江漢)의 지역이 다 구려(九黎)의 영토였던 것이다. 려, 모(黎苗)의 세력이 제하(諸夏)와 더불어 가장 강성했다. 치우(蚩尤)는 구려(九黎)의 천자(天子)였다”고 했다. 중국도 마단림(馬端臨)과 정현(鄭玄)의 주장에 이의를 제기하는 학자가 없었는데, 지금의 중국은 억지춘향을 만들고 있는 것이다. 이들 기록에 보면 “삼묘(三苗)의 성은 강씨(姜氏)”라고 했다.
 
임혜상(林惠祥)의 ‘중국민족사’ 제1장 3절 각계족 약설에서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동이(東夷)는 삼대(三代)로부터 춘추시대(春秋時代)에 이르러서 화하계(華夏系)와 접촉이 빈번하게 됐다. 여기서 동화(同化)하는 계기가 됐다. 고서(古書)에 이르기를 순임금(舜王)은 동이(東夷) 사람이다. 제환공(齊桓公)을 도와서 이적(夷狄)을 물리친 관중(管仲)이란 사람도, 래이(萊夷) 즉, 동이(東夷)의 사람이다. 지금에 이르러 고증한 바로는 은(殷)나라와 상나라(商國)는 동이(東夷)계통의 나라들이었다. 그 후 진(秦)이 중원을 통일 한 뒤에 동이(東夷) 나라가 흩어져서 민호(民戶)가 됐던 것이다”
 
즉, 진시황이 중국을 통일함으로 중원대륙의 80%를 차지했던 한민족(韓民族)이 만리장성 밖인 란하(灤河)유역으로 그 영토가 축소된 것을 알 수 있다. 기원전 221~128년 경이었다. 이후 중국은 중화사상(中華思想)을 내세워 자기네가 모든 패권을 가져야 하는 것처럼 철저히 주변국의 역사를 개조하기에 이르나 이는 역사의 말살이다. 우리 역사는 그럼에도 영원히 살아있다. 중국의 동북공정은 천인공노할 야만 행위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선생의 ‘한국고대사를 생각한다’ 외 다수 서적과 이강민 선생의 ‘대한국고대사’, 한정호 선생의 ‘대조선민족사’, ‘환단고기’ 등의 서책들을 참조·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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