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우리나라 교과서는 어느 것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다. 그것은 지나(支那)와 일본의 역사왜곡하고 조작한 것을 그대로 가르치고 있기 때문이다. 우리 역사는 삼국사와 지나 동이전에 나와 있는 아시아사를 그대로 전하지 않고 있다.
우리 역사는 김일연(金一然)이 쓴 [삼국유사(三國遺事)]와 제왕운기(帝王韻紀)를 기본으로 잘못된 위서(僞書)만을 인용하며 사서(史書)에 나와 있는 것을 제대로 쓰지를 아니하고 허구의 역사를 우리나라 역사인양 가르치고 있다. 이는 우리역사의 정체성을 말살시키는 것으로 대단히 큰 문제가 아닐 수 없는 것이다.
[삼국사]와 ‘동이전’은 아시아를 나타냈으나, 김일연은 역사연구를 제대로 하지않아서 요동군에 있는 위만조선도 명확히 모르고, 또 안달산맥(安達山脈)북쪽 목단강 서쪽에 위치한 녕고탑(寧古塔)이 단군조선의 국도(國都)였음도 모른다. 그러나 성경통지(盛京通志卷二)는 명백히 반도가 아님을 밝히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왕검은 지나 기록에도 없고, 고조선 지도도 없음에서 위만조선지도를 가지고 고조선 지도라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다. 이는 역사무지이다. 고조선강역은 만주와 유연제노까지 고조선 지도이다. 교과서 내용과는 천지차이이다.
단군조선은 다 알다시피 수많은 제후국(諸侯國)과 왕국을 이룩했는데 당시에 큰 족적을 남긴 국가들을 말한다면 산해경(山海經)과 기타 많은 문헌들은 연북(燕北) [숙신씨(肅愼氏)]가 고조선과 같은 시대의 국가라 말하고 있다.
또 창여지방(昌黎地方)의 치우(蚩尤)와 황제(黃帝)가 크게 싸운 송화강 유역의 동북방의 관문(關門)인 곳의 [예맥조선(濊貊朝鮮)]이 크게 족적을 남기고 있다.
그리고 광녕지방(廣寧地方)의 진조선(眞朝鮮)으로 동사부여세가전(東史夫餘世家傳)은 지자(支者)를 그 국호를 [부여(夫餘)]라 정했다 했고, [부여(夫餘)]가 남만주 예지(濊地)에 이거(移居)했음을 분명히 했는데 고조선 역사에 이 숙신(肅愼)과 예맥(濊貊)과 부여(夫餘), 3개 국가가 큰 족적을 남기고 있는 것이다.
오늘은 고대사에서 지나가 얼마나 황당한 역사조작과 왜곡을 하고 있는지에 대해 배달국 때부터 삼국시대의 조작한 역사내용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사마천의 <사기(史記)>는 허구역사로 목불인견이다
신시배달국(神市倍達國)의 제14대자오지천황(慈烏支天黃;서기전 2707~서기전 2598)시대에 화하족(華夏族)의 우두머리로 헌원(軒轅)을 등장시키는데 황제(黃帝)헌원은 소전(少典)의 아들로 성은 공손(公孫)이고 이름은 헌원이라고 했다.
그런데 사마천은 도저히 수긍할 수 없는 착각을 하고 있다. 그것은 소전(少典)은 고시씨(高矢氏)의 신지혁덕(神誌赫德)과 더불어 서기전 39세기에 활동한 인물로 황웅천황 거발환(桓雄天皇;(서기전 3897년~서기전 3804년)의 신하였다.
거발환(桓雄天皇)은 누구나 잘 알고 있는 배달조선의 제1대 환웅을 말하는데 연대가 7세기나 다른 인물을 내세워 조작하고 있음을 알 수가 있다. 그것은 고기(古記)에 따르면 고시씨(高矢氏)의 방계(傍系)중에 소전(少典)과 소호(少嗥)가 있는데 소전(少典)의 아들이 신농(神農)이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사마천 말대로 황제가 소전(少典)의 아들이라면
황제(黃帝) 헌원(軒轅)과 신농(神農)은 형제가 되어야 맞는데 신농은 32세기의 사람이고 황제 헌원은 27세기라는 점에서 사기의 기록은 거짓인 것이다.
사기(史記)에 따르면 헌원시대에 신농씨(神農氏)의 세력이 약해지자 제후들이 서로 침략하고 싸우니 신농씨가 정벌 못하자 헌원이 정벌하니 제후들이 함께 와서 복종하게 했다고 하는데 사마천은 완전한 소설을 쓰고 있다.
사마천은 더 나아가 마치 이를 더 믿게 하기 위해 염제 신농이 제후들을 침략하려하자 제후들은 함께 헌원에게 귀순했다고 하는가 하면, 헌원이 덕을 쌓아 병력을 모우고 오기(五氣)를 다스리고 염제와는 판천(阪泉)의 들판에서 세번 싸운 후에 그 뜻을 이루었다는 소설을 쓰고 있는데 모두 허구이다.
서기전 27세기의 인물인 헌원(軒轅)이 32세기 인물인 염제(炎帝)신농과 싸워 중원의 패권을 잡았다는 것은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왜냐하면 헌원이 시간을 500년이나 거슬려 올라가서 싸웠다는 것은 만화에나 있을 수 있는 일로서 삼척동자도 웃을 일이며 인간사회에는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위와 같이 사마천은 있을 수도 없는 이야기를 조작해 역사라 내놓은 것은 신화나 우화도 내놓을 수 없는 소설을 지나(支那)는 자기들의 <사서(史書)>라고 내놓고 있는데, 지나가는 개가 웃을 거짓 위사(僞史)인 것이다.
자오지천황(蚩尤天皇)의 역사도 왜곡하고 있다
사마천은 치우천황에 대해서도 왜곡하고 있는데 참으로 무지하기 짝이 없는 역사조작을 하고 있다. 그것은 헌원이 치우천황과 73회나 싸웠는데 단 한번도 이긴 적이 없는데 전쟁의 신(神)인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고 조작하고 있다. 이쯤 되면 사마천의 사기(史記)가 얼마나 허구투성이의 책인가 알 수가 있다.
헌원은 서기전 27세기경 하남성일데에서 세력을 키우다가 섬서성으로 ?i겨난 것인데도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는 ‘금살치우(禽殺蚩尤)’라고 조작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은 도시국가 부족장정도의 헌원이 동서고금을 통해서 전쟁 신(神)으로 추앙받는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는 새빨간 거짓말을 사서에 써놓았다.
또한 헌원은 화하족(華夏族)의 수장이라 하나 당시 화하족은 어디에도 없었다. 이 화하족은 송(宋 )나라 때 만들어진 조작한 말인데도 이를 사실인양 말하고 있다. 너무 기가 차는 것으로 이때 사실이 없는 터무니없는 소설을 쓰고 있다.
그때 자오지천황(蚩尤天皇)은 헌원이 하남성 일대에서 세력을 키우고 왕위에 올라 질서를 어지렵게 함으로 치우천황(蚩尤天皇)은 탁록(涿鹿) 들판으로 나아가서 헌원을 사로잡고 죽이지 않고 서안(西安)북쪽 광릉으로 내?i았던 것이다.
지금 헌원의 무덤도 서안시(西安市)로부터 약180km, 떨어진 협서성(陜西省) 황능현성(黃陵縣城) 변두리인 교산(橋山)에 수령(樹齡) 5000년이 넘는다는 거목(巨木)으로 둘러싸인 교산(橋山)의 한정(閑靜)한 곳에 묻혀있다.
그런데 지나는 자기 민족 시조(始祖)라하며 삼황오제(三皇五帝)의 첫 순위에 올리고 현재 56민족은 모두 동일의 선조(先祖)를 가진 형제와 같은 것이라 하며 결속을 호소함과 동시에 소수민족압박의 구실로 하고 있는 것, 명백히 들어나고 있다. 그러나 55민족중 이 말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있는 자는 거의 없다.
그런데 지나인(支那人)들은 헌원(軒轅)을 자기들의 조선(祖先)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왜 이런 현상이 되었느냐? 그것은 ‘거짓말도 백번이상 거듭하면 진짜인줄 안다’는 것이 이를 두고 말하는 것임을 바로 알아야 한다.
분명한 것은 헌원은 지나인의 선조가 아니다. 우리 민족의 선조인 것을 숨길 수 없다. 지나인의 조선(祖先)이라면, [서경(書經)]과 [시경(詩經)]등 고문헌(古文獻)에도 그 이름 나와야하는데 그 기록은 어디에도 없다.
이 전설이 성립한 것은 유방(劉邦)이 한(漢)을 세우고 난 후에 처음으로 나온 것으로 진(秦)이 백성들을 노역(勞役)과 학정으로 혼란한 틈을 타서 진(秦)의 영토와 백성을 가로채면서 이런 조작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글을 맺으며
재래 지나학자들은 진(秦)을 타도한자는 지승(陳勝)과 항우(項羽)가 타도했다 하나, 이것은 표면적으로 보는 선전이고, 실제로는 예맥과 남월(南越)이었다. 이미 여러 번 밝혔다. 유방은 항우 실책으로 진(秦)을 차지하게 된 것이었다.
서기전 210년 진왕(秦王=秦始皇)은 변한(弁韓)이라는 곳에서 창해역사(昌海力士) 여홍성(黎洪星)에 의해 작살된다. 스스로 시황제(始皇帝)라고 발표 후 13개월만이라 하는데 이것도 조작이다. 황제칭호는 그가 죽은 후 추서한 것이다.
지나는 4000년간에 걸쳐서 지나족이야 말로 가장 우수해서, 주변 이민족(異民族)은 늘 지나족에게 머리를 숙이고 올 수밖에 없는 의식이 머리골수까지 박혀지고 있으나, 자신들의 역사를 제대로 모르고 있다.
이 당시 모든 부족의 족장을 단군(檀君)이라 하는 시대이다. 그런데 모든 부족 중 그 주체는 예맥조선(銳麥朝鮮‘濊貊朝鮮)이었다. 이 예맥조선은 너무나 강대해 동주시대(東周時代)부터 한무제시대(漢武帝)까지 1000년간 중원(中原)을 정벌하고 정복해 지배한 국가이었다. 당시 예맥을 구국(舊國)이라 했다.
이에 앞서 치우시대(서기전2707~2598)는 배달조선시대로 복희(伏犧)시대로부터 800여년이 지났고 동아시아를 호령했던 치우천황제는 배달조선제14대 환웅으로 이때 이미 동철(銅鐵)로 무장했고 지나는 서기전 500년경부터 철 생산되어 헌원이 치우와 73회 싸우나 치우의 천병을 당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위에서 보듯이 사마천의 사서(史書)는 지나 위주로 제멋대로 쓰여진 서책(書冊)이기에 이를 근거로 우리역사를 논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지나의 사서들은 거의가 왜곡되고, 조작돼 있어서 믿을 것이 못되기 때문이다.
(以上은 <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 유적지를 찾아서‘우실하, ‘동북공정넘어 [요하문명론],. 吳在成 「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九犂系史」 ’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 ‘校勘十八史’,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윤진영 編集 「三國史」「우리역사(東夷傳」. 정희철, 중국은 없다.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반재원, ‘鴻史桓殷’. 文定昌), [古朝鮮史硏究], 「韓國史の延長」, 「眞實の中國四千年史」. 智勝, [우리 上古史]. 이명우, 최현호 [환단고기]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井上 淸, ‘日本の歷史’. .劉泳,海燕,‘赤蜂博物館’.‘各國別 [世界史の整理]. 貝塚茂樹, ‘中國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外 多數書冊을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했음을 밝힙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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