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 한(韓)족은 중국 평야에, 한(漢)족은 산악서 거주

입력 2013-12-14 14:50: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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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연구에 들어가며
 
필자는 중국과의 사대관계와 일제강점시대에 조작된 역사관을 바로잡기 위해 환국, 배달국, 단군조선이 실재했었던 것을 말했다. 그러나 중국과 일제가 왜곡시킨 우리 국사에 대한 고정관념은 아직도 변조되고 왜곡시킨 역사의 테두리 안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지금도 그것을 학생들에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 더 큰 문제다. 따라서 가르치는 교재부터 반드시 바로잡아야 한다. 상고시대, 고대시대에서부터 한민족이 현재 중국대륙과 요동을 중심으로 크게 영향을 미치며 타민족을 지배하고 활약한 선진 광역국가였음에도 신화라는 그 너울을 못 벗기고 있는 우리 국민이 역사에 대한 인식은 아직도 너무 미흡한 것이다. 더욱이 일본이 한국을 침략하면서 후진국 일본이 한국을 앞선 것 같이 조작한 역사는 가관이다. 고대부터 우리가 선진국으로 미개한 일본을 개화시킨 것은 고대역사에서 이미 밝혀졌다. 일본은 고대부터 당시 선진국이었던 한국의 지배와 지도로 원시생활에서 오늘의 문명국가로 발전하는데 도움을 크게 받았다.
 
한국과 일본과의 관계를 살펴보면 그 기원은 일찍이 고조선 말기의 민족이동과 관련됐다는 사실에 주목 할 필요가 있다. 상고시대는 물론 후세 한인들이 최고의 조상으로 받들어 왔던 고조선의 개국시조 단군도 신화(神話)로 했으나 엄연히 실존했다. 단군과 같은 위대한 조상이 있는 것을 확실한 역사로 간수하지 못한 것은 전적으로 우리들 탓이다. 지금도 일제에 의해 훼손하기 전보다 더 밝히지 못하고 있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며 또 고대사를 연구하는 학자들도 너무 그 수가 적고 그나마 의견일치 또한 하지 못한 상태다. 근·현대사의 뼈대도 제대로 정립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
 
1978년 국가편찬위원장이시던 최영희(崔永禧) 박사는 일본 헌정회관에서 한·일 간에 역사학회참석과 ‘독도자료’ 수집 차 일본에 왔을 때 이런 말을 했다. 당시 필자가 학위를 받고 건강이 좋지 않아서 쉬고 있을 때라 독도자료를 모아드리고 헌정회관에 같이 참석한 자리에서 나눈 대화다. 최 박사는 “일본은 고대사에 관심을 가진 자가 32만명이나 되고, 학자도 2만명이 되는데 우리나라는 학자가 32명이고 고대사에 관심을 가진 자가 많지 않다”고 했다. 이런 탓에 우리는 역사보존도 제대로 못하고, 역사를 바로 찾지도 못하고 있다. 지금 한국역사는 고대사는 물론이고 근대사와 현대사도 왜곡되고 잘못된 것이 많아서 반드시 복원해야만 한다. 우리의 역사는 외적의 강압, 내부의 사대주의자들, 그리고 폭력으로 정권을 쟁취한 자들의 비리를 합리화하기 위한 기만책으로 변질됐다. 이 과정에서 유구한 역사의 상반과 광활한 영토의 대부분이 절단(切斷)되는 세상에 유례없는 결과를 가져 왔다. 따라서 잃어버린 수천 년의 연대사와 민족의 웅대한 활동지역을 실제 상태로 회복해야만 한다. 우리를 강탈했던 나라들이 폭력을 합리화하고 다시 강탈과 지배를 해야 한다는 것을 그들의 2세들에게 가르치는 잘못을 우리는 바로잡지 못하고 있다. 우리가 이를 반드시 바로잡고 더 이상 잘못을 답습하게 해서는 안 된다. 하지만 우리 교과서는 아직도 그것을 바로잡지 않고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이번 칼럼에서는 상고시대의 문물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원시사회와 상고시대 유적과 유물
 
19세기 지질학자나 생물학자의 가정(假定)에 의하면 인간의 역사는 무기와 연장을 만드는데 있어서 돌과 나무만을 사용한 매우 원시적인 단계에서 비롯됐다는 것을 입증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은 충적지(沖積地)와 동굴 속에서 석기와 이미 멸종됐거나 이주한 동물 군(떼)의 화석들이 함께 발견되는 것을 근거로 인간과 멸종된 동물들은 같은 시대에 살았을 것이라고 추정한다. 이 시기를 구석기시대라고 한다. 인간역사는 금속시대(金屬時代)보다 일찍이 석기시대(石器時代)가 있었다. 인간이 도구로 석기를 이용한 시대를 석기시대라 한다. 석기시대를 타제석기(打製石器) 또는 구석기시대와 마제석기(磨製石器) 또는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로 나눈다. 그 중간에 중석기(中石器) 시대를 끼우기도 하는데 타제석기(打製石器)가 계속 사용됐다. 때로는 석기가 지배적인 시대에는 토기(土器)를 제조하고 석기의 마제(磨製) 등 기술적인 면뿐만 아니라 동물의 가축화와 농업의 시작으로 경제적인 면에서, 그리고 마을을 형성해 사회적인 면에서도 일대혁신을 이루게 됐다. 석기시대와 철기시대의 중간을 청동기시대라고 한다. 그러나 반드시 이런 순서대로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까지 고고학이 이룩한 연구 성과에 의하면 중국에는 170만 년 전에 이미 석기와 불을 사용한 인류가 출현했음이 확인됐다. 초기의 이 인류를 원인(猿人)이라 부르는데, 20만 년 전에 활동이 끝나고 그 뒤를 이어 고인(古人)이 새로 출현하고 다시 4만 년 전에 이르면 신인(新人)이라는 인류가 출현해 활동을 하게 되는데 이들은 현재 인류의 직접적인 조상이 되는 것이다.
 
 
 ▲ 석기시대를 타제석기(打製石器) 또는 구석기시대와 마제석기(磨製石器) 또는 신석기시대(新石器時代)로 나눈다. 그 중간에 중석기(中石器) 시대를 끼우기도 하는데 타제석기(打製石器)가 계속 사용됐다. 사진은 돌로 만든 화살촉 석촉(위)과 돌도끼의 모습. ⓒ스카이데일리

이 기간을 지질학적으로는 홍적세(洪績世)라고 하는데 1만 년 전까지 계속된 홍적세(洪績世) 기간의 인류는 정착생활을 하지 못하고 무리를 지어 떠돌이 생활을 하며 원시적인 타제석기(打製石器)를 사용하며 사냥, 고기잡이, 채집에 의존한 경제생활을 했다. 고고학자들은 이 시기에 사용된 도구가 원시적인 타제석기(打製石器)라는 것에 근거해 이 기간을 구석기시대라고 부른다. 인류학자들은 혈연적인 소수집단이 떠돌이 생활을 하는 것을 사회적인 특징으로 규정해 무리사회(Band Society)라고 부른다.
 
윤내현(尹乃鉉) 교수는 원시시대를 무리사회, 부족사회(部族社會)와 부족집합사회로 구분했다. 윤 교수는 삼국유사의 삼신신화(三神神話)는 단군이 고조선을 건국하기까지 고대 한민족의 성장과정을 전해 주는 것이고 고대신화는 역사적 사실이 반영돼 만들어지는 것이라고 했다. 즉, 그 신화는 고조선이 건국되기 이전에 3단계의 사회가 있었음을 전해 준다고 하고 있다. 환인시대(桓因時代), 환웅시대(桓雄時代), 환웅(桓雄)과 웅녀(熊女)의 결합시대가 그것이다. 이것은 사회발전단계와 일치한다. 부족집합사회는 인류사회에 계층분화가 일어난 시기라는 점에서 이전사회의 단계와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으며 사회발전상의 분기점으로 역사적으로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부족집합사회 다음의 사회는 국가단계의 사회가 되는데 여러 개의 부족집합사회가 또다시 연맹체를 형성해 국가가 성립됨으로 그 지도자의 정치적 권력은 급속하게 성장해 왕권으로 발전하고 개개의 부족 집합사회가 각 지역의 정치단위로서의 제후국으로 변모하게 되는 현상을 볼 수 있다.
 
원시사회의 특징과 구석기시대유물 유적
 
무리사회(Band Society)에서 중요한 특징은 공구, 가공기술의 발전과정과 지역적인 특징이 분명해진다는 것이다. 즉, 자연환경의 영향에 의하여 나타난 것이다. 중국북부의 변경지대는 경제적으로 사냥이 위주였고 문화의 분포범위도 대단히 넓다. 그러나 황하 중류지역은 그와 반대로 좁다. 남부지역은 기온이 따뜻했으므로 식물과 연체동물이 풍부해 식물의 채집이 용이했기 때문에 석기의 발달이 더디고 유적과 유적 사이에 석기가공기술 공통성이 빈약했다. 이 같은 지역적인 문화차이는 신인(新人) 단계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나는데, 그것은 자연환경의 영향에 의해 적응하거나 그것을 극복하려는 인간의 노력이 분명해졌음을 의미한다. 이후 마지막 빙하기에 일어난 심한 기후변화로 인류의 대이동이 있음에 따라 사냥문화의 특징인 세석기가 각처에 퍼져나가는 중석기시대를 지나면서 인류사회는 새로운 국면에 들었다. 즉, 지금부터 1만 년 전에 마지막 빙하기가 끝나고 기온이 상승함에 따라 인구가 현저하게 증가하고 자연환경에도 변화를 가져왔다. 초원에는 숲이 우거지고 추운 겨울에 살던 매머드와 같은 큰 동물은 사라지고 사슴, 노루, 멧돼지, 토끼 등과 같은 몸집이 작고 날랠 동물들이 많아졌다. 하지만 이들 동물들은 쉽게 숲속으로 피해 버리기 때문에 사냥하기가 어려웠다. 인구는 증가하는데 식료의 원천에서 타격을 받게 되다보니 새로운 고기잡이와 연체동물의 채집에 나섰다. 다시 말해 편리하게 철새를 사냥 할 수 있는 강과 호수가로 이동하게 됐다. 그러나 이 조차 식료의 공급이 충분치 못해 농경과 목축업이라는 새로운 경제생활을 하니 자연스럽게 부락을 이루고 정착생활을 하게 됐다.
 
이 시기부터 마제석기(磨製石器)와 질그릇이 출현하게 되는데, 사용된 석기를 기준해 청동기시대가 출현하기까지 시기를 ‘신석기시대’라 한다. 그러나 사회 성격 면에서 신석기시대 기간이 두 단계로 분류하게 되는데, 전기는 부족사회이고 후기는 추방사회(酋邦社會)가 된다. 여기서 주목을 끄는 것은 황하 중류지역이 동부해안지대에서보다 전쟁이 치열했다는 점이다. 부족사회에서 추방사회(酋邦社會)로 사회성격의 변화는 황하 중류지역에서 보다는 동부해안에서 먼저 일어났는데 추방사회(酋邦社會) 말기를 대표하는 이리두(二里頭) 문화와 중국 최초의 국가인 (商:殷)왕국은 황하 중류에서 출현했다는 점이다. 중국의 고대문화와 그 유적은 우리나라 고대역사 강역이 만주와 중국대륙에 걸쳐 활동 분포했기 때문에 우리문화와 직 간접적으로 밀접한 관계가 있음으로 우리나라 역사연구에 필수 불가결하다. 그것은 고대 우리 한민족이 살기 좋은 평야지대에서 살고 중국 한족(漢族)은 산악지대에서 산 역사가 모두 근래에 밝혀지면서 알 수 있다. 그리고 한반도에서는 1962~3년에 걸친 함북 웅기의 굴포리(屈浦里) 발굴에서 출토된 흑도(黑陶), 홍도(紅陶), 방수차(紡倕?車) 등이 구석기 초·중기 것임이 밝혀졌다.
 
또한 공주 석장리에서 석영(石英), 분암(玢岩)제의 녹편석기, 타제석기(打製石器)를 다수 발견한 것을 비롯해 함북 동광진 웅기군 굴포리, 평남 덕천 승리산 동굴, 평양 상원(祥原) 정문모즈동굴, 충북 제천(提川) 점말동굴, 청원 두루봉 동굴, 공주 석장리, 황해도의 편산, 강원도의 도화리·신곡리, 제주도의 빌레못 동굴, 경기도의 연천 등은 구석기시대의 유적으로 밝혀졌다. 구석기시대의 유적이 계속 발굴되고 있는 것으로 보아 구석기의 사람들이 우리나라 전국각지에도 퍼져 살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원시사회인 구석기시대의 문화는 마지막 빙하기(氷河期), 또는 충적지(沖積地)가 끝나는 때쯤 막을 내리게 됐다고 한다. 우리의 선민(先民)들이 이동으로 생활조건이 좋은 곳을 가려 이동해 올 때 해안지대 혹은 산곡간(山谷間)으로 방랑하며 수렵, 채취생활, 목축이나 재배를 하면서 농경생활을 하게 됐다. 그들이 사용하던 토기(土器)에는 즐문토기(櫛文土器, 빗살무늬토기)와 무문토기(無文土器)의 두 계통이 있었다.
 
 ▲ 인류는 사냥이 어렵게 되면서 농경과 목축업이라는 새로운 경제생활을 하게 됐고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부락을 이루고 정착생활을 하게 됐다. 이 시기부터 마제석기(磨製石器)와 질그릇이 출현하게 된다. 사진은 국내에서 출토된 빗살무늬토기의 모습. ⓒ스카이데일리

그들에게 있어서 좋은 무기는 화살(弓矢)이었다. 그들이 활을 다루는 것에 능했음은 중국인이 이(夷), 즉 큰활(大弓)을 사용하는 사람을 상징한 글자를 사용해 불렀음으로 보아 알 수 있고 또 문헌에 맥궁(貊弓), 단궁(檀弓)이라는 이름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당나라는 신라의 활 만드는 법을 배우려고 노력할 정도였다. 1988년에는 삼한시대의 모필(毛筆) 및 필기도구(筆墨)들이 발굴돼 사학계가 활기를 띄게 됐다. 따라서 인간이 기록을 남기기 시작한 역사시대는 5천년밖에 되지 않고 인간역사의 시작은 대부분이 구석기시대라고 보면 그 뿌리를 이해하는데 큰 도움이 된다.
 
한민족(韓民族) 대륙과 한반도 선주(先住) 지배
 
우리 한민족의 기원은 BC, 6000년 경 중국이나 알타이 쪽에서 이동해온 것이 아니라 구석기시대부터 백두산을 중심으로 중국대륙과 유라시아와 한반도의 광대한 지역에 토착해 살았다고 학자들은 보고 있다. 오늘날과 같은 지능인(Homo Sapiens)의 단계에 이른 것이 지금으로부터 3만5000년쯤이라는데 학자들의 의견이 일치돼 있다. 제4빙하기의 전후 무렵에도 한반도와 만주 동북부와 동남부, 일본 등지에 걸쳐 생활하했다. 극빙기(極氷期)의 절정이자 지구의 5분의1이 얼음에 덥혀 있었다는 2만년 전 이후 이뤄진 빙하기의 소멸과 함께 중국 및 일본 지역으로부터 분리된 중국과 만주와 한반도에 걸쳐서 거주한 사람들이 우리민족의 기원이라고 볼 수 있다. 1921년 스웨덴의 고고학자 앤더슨에 의해 발굴·조사된 BC 3~4000년기의 앙소(仰韶) 유적이 중국에 있으나 1963년 레빈(M, G, Levin)이 지적한 바와 같이 그 당시까지 중국민족은 없었다. 중국민족에 대한 서방기원설(西方起源說)이 붕괴되고 토착기원설(土着起源說)을 정설로 한 예도 있다. 따라서 우리 민족은 토착기원설(土着起源說)이 정설로 받아들이고 있다. 인류의 발전단계는 원인(猿人), 고인(古人), 신인(新人), 세단계의 진화과정을 거치면서 석기의 가공기술과 문화상에서 진보를 보였다. 인류의 진화는 세단계로 끝이 나지만 문화상에는 네 단계의 변화를 나타낸다. 원인(猿人), 고인(古人), 신인(新人)의 단계는 각각 전기 구석기시대, 중기구석기시대, 후기구석기시대가 되고 1만 년 전을 전후해 중석기시대(中石器時代)가 있는 것이다
 
중국의 고대문화와 유물은 우리나라 고대의 문화와 직접 간접적으로 관계가 있다. 고대 우리나라 강역이 만주와 중국대륙에 걸쳐 활동 분포하였기 때문에 이를 비교 연구함은 필수이다. 우리나라에 있는 유적을 보고 중국의 유물을 보면 잘 알 수 있다. 이미 소개한 바 있는 1978년 경기도 연천군 전곡면 전곡리(漣川郡 全谷面 全谷里)에서 발굴된 유적과 유물은 270만 년 전 것으로 확인됐고 평양시 상원유적은 60~50만 년 전부터 1만년 전까지 계속된 유물로 판정됐다. 고조선의 옛터에서 4400년 전의 청동기가 발굴됐고, 1990년대 말에는 4만 년 전의 석기들이 발굴됐다. 평양시 상원유적과 공주 석장리 유적의 경우 60~50만 년 전부터 1만년 전까지 계속된 유물로 판정 되는 등 우리민족의 역사가 구석기시대 이후 오늘날 까지 계속해서 살아온 토착민으로서 절대적 증거가 된다.
 

 ▲ 기원전 6000년 경의 신석기 초기 황하강 유역의 ‘자산문화’와 기원전 5000년에서 7000년 사이에 역시 황하강 유역에서 존재했던 ‘배리강문화’는 빗살무늬토기 탄소측정연도가 그 시기를 증거해 준다. 중국 한족이 이곳에 들어오기 전 우리 한민족이 남겨놓은 유적인 것으로 학계에서는 보고 있다. ⓒ스카이데일리

최근 보도된 BC 6000년경의 강원도 오산리 신석기유적들 또한 주목되고 있다. 1930년경부터 조사돼 온 부산영도의 동삼동유적(東三洞遺蹟)은 BC 4780, BC 4725, BC 4405년 등의 토기가 발견됐다. 이것은 구석기시대를 계승한 신석기유적이기 때문이다. 이를 미루어 보면 우리민족의 역사가 구석기시대부터 계속돼 온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발해연안의 빗살무늬토기의 탄소측정 연대가 BC 6000년~BC 5000년경이다. 자산문화(중국 신석기시대 가장 이른 시기의 문화 가운데 하나로서 하북성(河北省) 중남부에 주로 분포한다), 배리강문화(중국의 황화강(黄河) 유역에서 기원전 7000년에서 5000년 사이에 존재했던 신석기시대 초기의 문화)의 빗살무늬토기 또한 비슷한 시기다. 현재 중국 한족이 이곳에 들어오기 전 우리 한민족이 남겨놓은 유적인 것이다. 1936년에 조사된 대동강 기슭의 청호리(淸湖里) 유적도 4개 문화층 중에서 맨 밑층의 전형적인 빗살무늬토기문화층이었으며 여기에서 주거지도 발견된바 있으므로 이를 연결시키기만 하면 우리 한민족이 한반도뿐만 아니라 만주와 중국대륙에 살았음을 알 수 있는 것이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의 ‘한국고대사를 생각한다’를 비롯해 최인의 ‘한국학강의’, 이강민의 ‘대한국고대사’, 한창건의 ‘환국배달 조선사신론’, 한정호의 ‘대 조선민족사’,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임승국 번역·주해 ‘환단고기’(桓檀古記)], 日本國書 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외 다수의 서책들을 참조·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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