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 헌원(軒轅) 한족(漢族)시조 아니다

입력 2021-08-28 16:0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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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지나(支那)는 한민족(漢民族)의 시조(始祖)를 헌원(軒轅)이라고 하나, 이는 사실이 아니다. 이를 뒷받침하는 이론을 1894년 독일의 테리안 두 라코페리(Terriendo Lacouperie)가 바빌로니아로부터 왔다는 이른바 서래설(西來說)을 제창한 후 그에 찬성하는 서양인학자도 있음에서다.
 
헌원의 나온 그 내력에 관해서 구미 각국인들이 이집트설, 인도설, 인도지나설, 중앙아시아설, 티베트설, 감숙설(甘肅說), 터키설, 몽골설 등 제각기 제 나름의 견해를 내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헌원에 관한 위의 이론은 할 수가 없다. 왜냐하면 헌원은 유웅국왕(有熊國王) 소전(少典)의 아들로서 수구(壽丘)에서 출생해 장백산하(長白山下)에서 수도(修道)하였다는 것은 지나의 수많은 문헌들도 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또한 그의 역사활동 등에 비추어서도 헌원의 서래설(西來說)은 성립될 수가 없는 것이다. 지나인(支那人)들은 한민족(漢民族)의 조상이라 칭하는 서방(西方), 서장족(西藏族)을 곤륜산하(崑崙山下) 타리무계(系)라 말한다.
 
헌원이 동방족(東方族)임은 이론(異論)의 여지가 없는데도 지나인들이 헌원을 그들의 시조(始祖)로 받드는 것은 그가 서족인과 결합으로 서족족(西族族)쪽에 가담해 그가 수장으로 살기 좋은 동방족의 흡수~동화를 꾀하며 배달국의 자오지천황(蚩尤)과 73회나 싸운 것 등 한족의 역사적, 이상적인 바탕을 마련해 놓은 창시의 조(祖)이기 때문인 것 같다.
 
오늘은 헌원이 한족(漢族)의 시조(始祖)가 아니며 우리 동이족(東夷族)임은 물론 그 후손이 신라(新羅)의 김유신(金庾信)장군의 선조임과 오늘날 한족(漢族)은 없다는 것을 분명하게 밝히고 지나가 얼마나 역사왜곡을 하며 지명과 지도 등도 바꿔가며 왜곡하는 지를 살펴보려 한다.
 
한민족(漢民族)의 그 시원(始原)을 어디서 찾아야하나
 
고래(古來)로 지나인들은 한민족을 자연발생적인 종족으로 인식해 오고 있으나 이에 대해서는 이론(異論)이 많다. 지나의 학자들은 한족(漢族)의 연원(淵源)에 관하여 화하계(華夏系), 동이계(東夷系), 숙신계(肅愼系), 흉노계(匈奴系), 몽골계, 백월계(百越系)등 무릇 16종을 들고 있다.
 
그러나 한민족은 3000여년에 걸친 동서양족의 마찰과 혼혈로서 비로소 이어진 역사민족이기에 순수 한족은 없으며 많은 종족들의 피를 받아들이기는 했으나 그 주요 성분은 역시 서방족(西方族)과 동방족(東方族)의 혼합인 것을 숨길 수 없다.
 
지나인과 입본인은 자기들이 단일민족이라 하나 그러하지가 않다. 지나와 일본은 많은 족속 피를 받아들임으로서 비대해진 민족이다.
 
이에 비해 현 한국인은 일찍이 거대, 광범, 찬란했던 그 조상들이 상고시대를 거쳐 고대에 와서도 4000여년의 역사활동과정에서 많은 동기(同氣)와 지족(支族)들을 잃고 깎이고 그리해 가면서 그 마룻대만이 남아 있어 순혈민족(純血民族)의 명(名)을 유지해 내려오는 종족이다.
 
한국인의 조상족이 그 후대에 있어서 일부 일본으로 건너가 일본민족의 형성과 그 국가발전에 그 주역역할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민족이 형성할 때까지의 3000여년 간에 있어서 많은 동족, 지족(枝族)들을 한민족의 혈관 속에 잃어 왔다.
 
그러기 때문에 우리조선족의 내력과 그 계보를 찾으려면, 자연히 한민족시원(漢民族始原)과, 그 형성과정의 역사활동도 제대로 알아야 한다.
 
한족도 우리와 피를 나눈 종족으로 그 역사와 형성과정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는 것은 중원(中原)의 역사도 제대로 바로 잡을 수가 있는 것이다. 지금 지나의 역사는 제대로 된 것이 거의 없고 조작과 왜곡으로 허구 투성이다.
 
여기서 한족의 형성과정과 역사의 허구성에 있어서 먼저 지나 학자들의 주장과 우리의 동이(東夷)를 지나인으로 둔갑시켜 헌원까지 자기조상으로 편입시킨 그 배경과정도 제대로 알 필요가 있다.
 
한민족(漢民族)의 형성과정과 그 허구성
 
지나인 학자들은 인류의 발상지를 곤륜산하(崑崙山下) 타리무분지(盆地)라 하고, 그 타리무분지가 홍적통(洪積統) 제2빙하기에 건조한 사막으로 화(化)하여 먹을 것이 없게 되자 대이동을 개시했다고 하고 있다.
 
한 무리는 하북평원(河北平原)에 옮겨와 정착하는 등 북경원인(北京猿人)이 되고, 한 무리는 동남방으로 향해 쟈바 솔로강 지방으로 들어가 쟈바 입행원인(立行猿人)이 되고, 또 한무리는 서쪽으로 독일 하이드베르크(Heideberg)지방에 들어가 지나원인적(支那猿人的);Homo Hoidel-bergensis가 되었다 주장한다고 하고 있다.(徐亮之 中國史前史話 64面)
 
그런데 현생(現生) 한민족의 시원(始原)에 관해서는 그 내력이 상세히 하지 않고 있다. 그런데 서양지(徐亮之)는 서장서방족(西藏西方族)이 타리무분지 대이동 시에 하북성(河北省)지방으로 동천(東遷)해 헌원 황제 때 동방족과 부족맹(部族盟)을 결성한데서 지나 역사가 시작된 것이라 했다.
 
이 이론은 공자(孔子)를 제외한, 사마천(司馬遷), 반고(班固)등 지나(支那)의 사가(史家)들이 똑같은 취급을 하고 있다. (徐亮之, 中國史前史話, 225面).
 
따라서 한민족의 시원(始原)은 거의 배달국시대로 추산되는 황제년대(黃帝年代)가 되게 하고 있으나, 지나의 역사상한(歷史上限)은 만주지방에서 발(發)한 우리 동방족의 그것보다 아주 뒤인 역사로 지나의 역사는 4300여년의 역사로 보고 있는 것으로 일본 학자들도 보고 있다.
 
우리나라 일부 사가(史家)들은 지나의 역사가 우리역사보다 오래된 것같이 생각하는 자가 있고 또한 우리조선족과 사적규명상(史蹟糾明上) 불가부지(不可不知)의 관계에 있는 한민족의 형성에 관해 그 연구를 너무 소홀히 하기 때문에 우리 역사가 도둑을 맞고 있는데 이것은 슬픈 일이다.
 
지나는 상고사(上古史)가 없다. 우리 인식이 필요한 것은 지나의 문헌에서 흔히 보는 복희씨(伏羲氏)~헌원(軒轅黃帝)에 이르기까지의 수천 년간의 역사는 한민족의 것이 아니다. 환국과 배달국의 역사를 왜곡 조작하나 헌원(軒轅黃帝)의 역사도 우리의 역사인 것을 바로 알아야 한다.
 
황제때에 시작된 타리무계(系) 서방족(西方族)이 형성하기까지에는 허다한 우여곡절과 시련들을 겪었다는 사실 등을 바로 알아야 한다.
 
지나의 서북방에는 해발5500m~6000m의 곤륜산(崑崙山)이 있는데 이 곤륜산맥(崑崙山脈)의 총길이는 2500Km이고, 최고봉인 목자탑격봉(木孜塔格峰)의 높이는 6973m이다. (한동억, ‘인류시원의 역사 이야기’ 90面 參照 引用)
 
이 곤륜산하에는 동서 양 대륙에 걸친 넓은 타리무분지가 있다. 이 분지에는 신석기시대부터 서방(西方) 서장족(西藏族)이 살고 있었으며 그들을 총칭해 서왕모족(西王母族)이라 하고 있는데 그 진위는 알 수 없다.
 
지나가 꾸며낸 황당무계한 전설들
 
지나는 곤륜산과 서왕모족(西王母族)에 관해 지나인들은 여러가지 황당무계한 여러가지 전설을 꾸며내어 신비경(神秘境)으로 만들어 내고 있으나 신빙성은 없는 것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황제의 방문을 받은 서왕모(西王母)가 백환(白環)을 받쳤다.’ ‘요(堯)임금이 친히 그녀를 예방했다.’ ‘순(舜)이 즉위하자 그녀(女)가 백옥관(白玉琯)을 받쳤다.’ ‘우(禹)가 그녀를 방문했다.’ ‘주목왕(周穆왕)이 그녀와 더불어 요지(요지(瑤池)에서 술을 마시고 시(詩)를 읊었다.’ ‘한무제(漢武帝)가 그녀로부터 장생불로술(長生不老術)을 배웠다.
 
‘삼천년(三千年) 묵은 반도(蟠桃)가 있으며 한 개를 먹으면 장생불사(長生不死)한다.’ ‘산정(山頂)에 높이 솟은 둘레 삼천리(三千里)의 동주(銅柱)가 서있다.’ ‘각급(各級) 선관(仙官)이 노는 공청(公廳)이 있다.’ ‘희귀한 큰새가 나래를 벌려 동왕공(東王公)과 서왕모(西王母)를 포옹(抱擁)하고 있되 그 등의 넓이가 1만9000리(里)에 달한다’ 등인 것이었다. 참으로 황당무계한 것들이었다.
 
그런데 20세기 초엽 영국 고고학자 M. A. stein이 그 신비경(神秘境)을 답사한 결과 그 소위 동주(銅柱). 신선(神仙)의 놀이청(廳) 큰새의 나래 등이라는 것이 기후의 한냉(寒冷)으로 인하여 그 넓은 산악지대의 암층(岩層)들이 붕열(崩)裂)되어 일망천장(一望千丈)의 석주(石柱)들이 총립(叢立)한 만물상을 이룩했고, 거기에 태고(太古)이래의 빙하(氷河)가 수직적인 장관을 이룩했으며 동예중(洞叡中)에 엉킨 얼음과 눈의 찬 기운이 일광(日光)을 받아 오색의 신비경을 이룩하고 있음이 판명되었다고 한다. 이를 지나인들은 각색했다.
 
이같이 많은 전설 중에서 독서자에 널리 알려져 있는 것은 주목왕(周穆王)의 서왕모(西王母)와의 호유(豪遊)였다고 서산경(西山經)은 말하고 있다.
 
그런데 서방족(西方族)은 일찍 타리무분지로 부터 황하, 양자강을 타고 동하(東下)하던 이 서방족은 제4빙하의 해동기에 전멸적인 익사(溺死)를 당했다고 하는데 그러한 사실을 지나의 일서(一書)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뇌신(雷神)이 노(怒)하여 홍수를 발하였다. 다른 가족은 모두 물에 빠져죽고 오직 한사람의 형과 그 누이동생이 살아남았다. 또한 이 홍수에 전 인류가 빠져 죽었다. 드디어 형(兄)과 매(妹)가 결성해 한 부부가 되었다. 그리하여 오늘날 인류의 공동선조가 되었던 것이라고 하고 있는 것이다.
 
글을 맺으며
 
이상에서 보듯이 한족(漢族)의 발생지는 타무리분지와 타리무분지와 곤륜산(崑崙山)지방에는 모계사회의 서왕모족(西王母族)의 국가가 있었다고 하며 이 서왕모족(西王母族)은 야만적으로 용한(勇悍)했다고 하는데 이 족속들은 모계사회를 이룩하고 있었으며 그들은 곤륜산하에 살며 역사 활동을 전개했다.
 
한편 복희씨(伏羲氏)때에 이미 남계사회(男系社會)를 확립한 동방족(東方族)은 전자제중심(傳子制中心)의 역사활동을 하면서 유연제노(幽燕齊魯) 오월(吳越)을 지배한 우리는 하북성(河北省) 지방에서 서방족(西方族)과 맞서게 되었다.
 
이 대립하는 양족(兩族)은 각기 그 부족의 역량을 집결하는 상징 즉, 기치(旗幟)를 갖게 되었는데 동방족은 아름다운 새 봉(鳳)으로 하고, 서방족은 뿔과 이가 있으며 날으면 구천(九天)으로 올라가고 숨으면 구지(九地)로 들어간다는 상상의 동물용(龍)으로 했다. 서양지(徐亮之)는 이를 도등(圖騰)이라 했다.
 
그런데 이 서방족의 수장(首長)이 황제헌원이었다. 이 헌원은 배달국 치우천황과 73회나 싸웠으나 단 한 번도 이기지 못했다. 그리고 이 황제헌원도 지나인이 아니고 명백한 우리 배달의 우리 동족인 것이다.
 
사마천(司馬遷)의 쓴 사기오제본기기(史記五帝本紀)는 황제자(黃帝者) 소전지자(少典之者)라 했고, 해외서경(海外書經)은 [상선팔대제(常先代帝) 취어숙신씨 지국(取於肅愼氏之國]이라 했으며 제계사기(帝繫(史記)는 [황제생백민(黃帝生白民)...자속동이(自屬東夷)라 했다. 즉 헌원은 우리 동이(東夷)라 한 것이다.
 
구석기 시대말부터 하북성지방에 모여든 동서 양족의 집단은 각각 수십종에 달했으며 이중에 헌원의 황룡기치(黃龍旗幟下)에 치참(馳參)한자는 상당수에 달해 일대세력을 이룩했는데 서양지는 이를 부락맹(部落盟)이라 했다.(以上은 文定昌 [古朝鮮史硏究]317~324面 參照 本文도 引用했음을 밝힙니다.)
 
그런데 헌원은 전쟁의 신(神)으로 숭앙(崇仰)하는 치우(蚩尤)천황과의 싸움에서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는데도 최후에는 이기고 치우를 참살했다고 했는데 이는 조작한 허구로 그 반대로 치우는 헌원을 죽이지 않았음도 숨기고 있다. 때문에 지나 역사는 허구인 것을 세계가 다 알고 있는 것이다.
 
(以上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유적지를 찾아서. 한동억, ‘인류시원(人類始原)의 역사이야기’. 우실하, ‘동북공정넘어 [요하문명론]. 吳在成 「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九犂系史」 ’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 ‘校勘十八史’,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윤진영 編集 「三國史」「우리역사(東夷傳」. 정희철, 중국은 없다.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반재원, ‘鴻史桓殷’. 文定昌), [古朝鮮史硏究],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28면~29면. 智勝, [우리 上古史]. 이명우, 최현호 [환단고기]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井上 淸, ‘日本の歷史’. .劉泳,海燕,‘赤蜂博物館’.‘各國別 [世界史の整理]. 永原慶二, [絶對中學社會歷史]外 多數書冊, 參照, 本文을 引用했음).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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