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이족은 비옥한 황하유역에 정착해서 살았다

입력 2021-09-19 10:10: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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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지나인(支那人)들이 실재가 확인되는 지나(支那)의 최고왕조(最古王朝)는 은(殷)으로서 서기전 1600년경부터 서기전 1100년경까지 황하(黃河)의 중류역(中流域)에서 번영한 나라로 보고 있다. 지나는 은(殷)의 성립이전에 하(夏)가 있었다 하나 이는 고조선(古朝鮮)의 제후부족이었다고 전해지고 있다.
 
따라서 한족(漢族)의 조선(祖先)중에 어떠한 민족이나 부족이 있었는지는 은시대(殷時代)가 되기까지 전혀 불명(不明)이다. 세계의 학자들의 말하는 학설은 여러 개가 있어서 흥미가 있으나 결정적인 것은 지금도 알 수 없다고 하는데 은(殷)은 기마민족이 세운 나라이다.
 
역사시대에 들어선 은시대(殷時代;서기전 1600년경~서기전 1100년경까지)가 되면 갑골문자(甲骨文字)가 서기전 1500년경에 나와 있어서 이 시대에 은족 이외에 50개가 넘는 씨족집단(후에 국가를 세운 집단)이 있었다고 하고 있다.
 
당시 은(殷)의 세력권 확대방향이나 그 후에 이어지는 서주(西周서기전 1100년~서기전 770년)의 진출방향을 보면 낙읍(洛邑;낙양(洛陽)이나 호경(鎬京, 후의 장안長安;현재 서안西安)으로부터 동방(東方)으로 확대한 것을 알 수가 있다.
 
이곳은 비옥한 농지도 좋지만 교역을 위한 거점으로도 발달해 시장의 상권을 장악함에 의해 점차로 세역을 확장 할 수가 있기에 배달국(倍達國)시대도 헌원(轅轅)과 치우천황과의 쟁탈전의 적지이기도 했던 것이다.
 
오늘은 은족이 황하의 중류역(中流域)으로부터 하류역(下流域)에 걸쳐서 씨족연합체를 형성하기 시작한때로부터 지나 각지에 각기 선주민족이 동이족으로 지나인의 조형(祖型)은 몽골족이 주류로서 퉁구스계, 티벳계, 터키계 등의 유목민족이 국가를 형성하고 발전한 것을 살펴보고자 한다.
 
주왕조(周王朝) 서주(西周)와 동주(東周)의 건국과 멸망
 
지나의 역사를 연구하다보면 지나왕조(支那王朝)와 그 지배자가 거의가 동이족임을 알 수 있다. 주(周)를 세운 주족(周族)을 고고학적으로나 인류학적으로 보면, 몽골초원지대로 부터 양(羊)을 따라서 오르도스지방에 들어와서 계속해서 황하 동쪽 분수(汾水) 부근에 정착해 씨족연합체를 형성하고 있었다.
  
한편 은(殷)은 약500년 간 왕조를 유지했는데 그간 여러 번 천도(遷都)를 하게 되는데 그 이유는 유목민과 티벳트계의 민족인 강족(羌族)의 압박에 의해서 천도를 했다. 이 때문에 제단용 희생공물로 강족(羌族) 머리를 제물로 드렸다.
 
강족은 티벳트 고원(高原)으로부터 양을 몰면서 동진해 일부는 위수(渭水)를 따라서 동점(東漸)하고 그 일부는 황하를 건너서 산서성(山西省)방면으로 가고 또 다른 일부는 양자강 중류로 부터 하류역에 진출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미 기술한바 있는데 은(殷)시대 후반 주(周)13대 고공단부(古公亶父)의 시대가 되어서 은족의 침공을 받았기 때문에 황하서쪽을 건너서 협서성(陜西省)의 기산(岐山)으로 가서 도시국가연합(都市國家聯合)을 형성했다.
 
주(周) 15대 문왕(文王)은 서방(西方) 강족(羌族)의 리더인 태공망 여상(太公望呂尙)을 왕사(王師)로 맞아들여 은(殷) 타도(打到)의 준비를 해서 일족을 은(殷)의 산 제물(祭物)로 한 원한이 깊었던 여상(呂尙)은 주(周) 16대 무왕(武王)을 도와서 은(殷)을 파하고 주(周)나라를 수립되었다.
 
주(周)는 서기전 770년에 서방(西方)의 견융(犬戎)의 침공을 받아 호경(鎬京)을 버리고 수도(首都)를 동(東)쪽의 낙읍(洛邑)으로 옮겼다. 그리하여 호경(鎬京)에서의 약 330년간을 칭해서 서주(西周)라 했다.
 
또한 동주(東周)는 서기전 256년 진(秦)에 멸망하기까지의 낙읍(洛邑)에서의 514년간을 칭해서 동주라 하고 있는 것이다. 이때의 국가와 국가원수(國家元首)는 거의가 동이족이었음을 사서들을 말해주고 있다.
 
예컨대, 춘추시대(서기전 770년~서기전403년)과 전국시대(서기전 403년(서기전 221년)의 나라들이다. 즉, 주(周), 예맥(銳麥;濊貊), 진(秦), 제(齊) 진(晋), 초(楚), 위(魏), 한(韓), 조(趙), 북적(北狄), 적적(赤狄), 백적(白狄), 견융(犬戎), 선비(鮮卑), 서융(西戎), 산융(山戎), 동호(東胡), 돌궐(突厥)등 거의가 동이족이 세운 나라들이다.
 
고구려침범한 수양제(隋煬帝) 어느 민족이었으며 그 멸망은 왜
 
지나의 4000여년 역사를 보면 가장 강대한 시대가 진(秦), 수(隨), 당(唐)시대이다. 진(秦)은 처음으로 초(楚), 연(燕)과 신흥(新興)의 전제(田齊), 한(韓), 위(魏), 조(趙)의 6국을 통일하고 크게 국위(國威)를 떨친 나라이다.
 
지나라고 부르는 것은 진(秦)이라는 명칭에서 나온 것임은 다 알고 있는 사실이다. 수(隨)는 지나(支那)역사상 특기할 강국이고 당(唐)보다 더 강대해 지나의 제왕(帝王)중 제1인자로 칭하는 왕이다.
 
이들도 한족이 아님은 잘 알려져 있다. 당(唐)의 이연(李淵)은 선비족이고 수양제(隋煬帝) 양관과 이종사촌이다. 수(隨)를 건국한 양견(楊堅;서기541년~604년)은 북주(北周)의 고급무장이었으나 북주(北周)라는 나라는 원래 척발부족(拓跋部族)이 세운 북위(北魏)의 후예이고 양견(楊堅)도 척발족(拓跋族)이었다.
 
양견은 북방에서 세력을 확대해간 돌궐(突厥)을 공격해 이를 누르고 587년에는 호북(湖北)에서 겨우 명맥을 이어가는 후량(後粱)을 멸하고 염원의 지나 통일을 위해 남조(南朝)의 진(陳)토벌을 위해 군세를 갖추었다.
 
그제야 문제(文帝)가 된 양견(楊堅)은 588년10월 52만의 대군을 이끌고 진(陳)을 공격해 적 10만을 간단히 격파해서 오호(五胡)의 난(亂)이래 280여년 만에 지나의 주변국을 재통합했다.
 
그러나 604년 식자(息子) 광(廣)이 604년 부(父) 문제(文帝)를 살해해서 제2대 양제(煬帝;569년~618년)가 되니 수(隨)의 북동(北東)의 경계에 접(接)하고 있는 나라가 고구려였다.
 
그런데 수(隨)가 영토로 하려는 요서지방에 고구려군이 군세를 강화하자 문제(文帝)는 해륙(海陸)합해서 30만 대군으로 원정했으나 대패해 살아 돌아온 자가 10인중 한 두 명이었다. 30만 대군을 보내서 대패한 이유는 무엇이었나?
 
그것은 고구려군이 기마전법(騎馬戰法)이었는데 반해 수군(隨軍)은 보병전법(步兵戰法)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기마군단은 현대의 전차(戰車)에 필적할 만큼 위력이 있었던 것이다. 예맥이 대륙을 정벌하고 정복하는데도 기마군단이 큰 위력을 발휘한 것을 알 수가 있다.
 
글을 맺으며- 수(隨)는 고구려 원정이 멸망 원인이 되었다
 
양제(煬帝)는 612년 복수(復讐)로서 서기 612년 제1회 때 고구려 원정군을 보냈다. 그 규모는 해륙(海陸)으로부터 113만 명, 수송부대로서 200만 명이나 되는 사상 유례가 없는 대부대를 보내어 고구려에 침공했다.
 
그러나 수군(隨軍)은 이때도 살아 돌아온 자가 10인 중 한 두 명으로 대 패전이었다. 수(隨)나라는 이듬해에도 제2차원정군을 보냈으나 중신(重臣) 양현감(楊玄感)의 반란이 전국적으로 확대로 실패한다.
 
양제(煬帝)는 두 번이나 실패함에도 다시 614년 제3회 원정을 강행한다. 이러한 결과 585년 돌궐과의 화의가 맺었었는데 수군(隨軍)이 고구려에 패한 것을 본 돌궐의 수와의 화의를 깨고 북변경(北邊境)에 침입해오자 대군을 이끌고 결전에 임했으나 역으로 포위되어 부하 이세민(李世民)에 의해 구해진다.
 
이러한 상황에서 양현감의 반란 발생이후 반란은 전국적으로 퍼지고 그 수는 200건이 넘는 결과가 됐다. 이 군웅(群雄)중에 한사람이 태원(太原)에 있는 이연(李淵;565년~635년)과 그의 식자(息子)인 이세민(李世民)과 같이 617년 진양(晋陽)에서 거병(擧兵)해 장안(長安)에 입성하게 된 것이다.
 
양제는 618년 그 비(妃)와 자식들과 같이 호위병사(護衛兵士)에 의해서 살해(殺害)되어 수(隨)나라는 겨우 30년 만에 멸망을 하게 된다. 그 원인은 강성한 고구려에 침범에 의한 것으로 618년 당(唐)나라가 건국하게 된 것이다. (以上은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80面~139面 參照, 本文引用하다.)
 
(以上은<최태영 ‘한국고대사'‘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유적지를 찾아서. 한동억, ‘인류시원(人類始原)의 역사이야기’. ‘우실하, ‘동북공정넘어 [요하문명론],. 吳在成 「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九犂系史」 ’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 ‘校勘十八史’,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윤진영 編集 「三國史」「우리역사(東夷傳」.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정희철, 중국은 없다. 반재원, ‘鴻史桓殷’. 文定昌), [古朝鮮史硏究],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智勝, [우리 上古史]. 이명우, 최현호 [환단고기]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好太王碑の謎’.」, 井上 淸,‘日本の歷史’. 永原慶二, [絶對中學社會歷史]. 津田秀夫外3人 ‘ひとり で學べる日本史’. .劉泳,海燕,‘赤蜂博物館’. 松村剛 譯 ‘歷史は續く’.劉泳,海燕,‘赤蜂博物館’.‘各國別 [世界史の整理].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西島定生 護雅夫, 木村常三郞, 猿谷 要 編著,世界歷史の基礎知識’.外 多數書冊, 參照, 本文引用했음을 밝힙니다.)
 
(※전문가 칼럼의 내용은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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