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민족은 상고시대부터 경제적 사회적 생활조건을 찾아서 동방의 해 돋는 곳으로 이동했다. 이를 아는 지나인(支那人)들은 양곡(暘谷)이라 칭했다. 양곡(暘谷)은 해 돋는 동방(東方)이라는 뜻을 말하는 것이다.
우리 민족의 역사를 보면 우리 민족은 알타이어계(語系)로 동방족(東方族)으로서 일찍이 유라시아를 정벌하고 정복해 지배한 민족이다. 한편, 뒤늦게 동하(東下)한 서방족(西方族)은 신농씨연대(神農氏年代)까지 동방족의 지배하에 있었으며 서기전 2700년경 동서양 부족연맹주의자(部族聯盟主義者)인 헌원(軒轅)에 의해 비로소 국가성립의 붕아(崩芽)가 트였다.
그리고 다음 협화만방주의자(協和萬邦主義者)인 요제방훈(堯帝放勳)에 의해 그들의 기반이 이룩되고 우(禹) 문정(文政)에 이르러 지나(支那)의 처음 정권이 수립되었던 것을 알 수가 있다.
여기서 공자(孔子)는 지나 역사의 상한(上限)을 요(堯)로 했으며, 한대(漢代)에 이르러 처음 정권이 수립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공자가 지나 역사상한(上限)을 요(堯)로 한 것은 한대에 이르러서 황제헌원을 그들의 시조로 했다 그런데 헌원도 우리 동이족이다.
그리고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단군조선(檀君朝鮮)은 매우 강성했으며 하초(夏初)부터 대륙으로 진출해 서(西)로는 기(岐)지방에 이르고 동(東)으로는 광녕(廣寧), 북평(北平)이라 했고, 회(淮), 사(泗)지방에 까지 들어가 여러 후국(侯國)들을 만들었다고 했다. 그러한 그들을 지나인들은 예맥족(濊貊族)이라 이름을 남기게 되었는데 그들을 이(夷)라고 칭했다.
이와 같이 요(堯) 하대(夏代)의 지나인들은 우리를 이(夷) 또는 숙신씨(肅愼氏)라 호칭했고 주대(周代)에는 이적(夷狄), 엄윤(玁狁)이라 했으며 춘추(春秋)와 한대(漢代)에는 호맥맥(胡貊貉), 흉노(匈奴)라 했다. 한(漢)~위(魏)~진대(晋代)에는 예맥(濊貊), 한(韓), 오환(烏桓), 선비(鮮卑)라 했으며 17세기 서양인들은 퉁구스(Toungus)족이라 하고 있다.(徐亮之[史前史話)]164面).
오늘은 우리 역사가 한반도가 아닌 대륙의 주역이었다는 것과 그 실체를 밝히려 한다.
서양학자도 우리민족이 대륙중앙에 살았다고 했다
후학을 위해 잠시 퉁구스(Toungus)족의 유래에 관해 학자들의 주장을 보면, 카스트렌(Castren)은 시베리아 모든 유족(遊族)인 퉁구스족들은 흑룡강의 비옥한 유역지대에서 이동해온 것이라 하고 있으며, 흑룡강 주민들의 언어와 민속에 대해 여러 저서를 발표한 P.P 슈미트(Schmidt)는 일반적인 학설과는 반대로 발해(渤海)나 읍루족(挹婁族)을 퉁구스~만주족으로 보지 않고 한국인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G.M 레빈은 “고대 티키~몽골~퉁구스들이 고향을 알타이 산맥 바로 남쪽 지방에서 찾으려 한다. 만주 퉁구스족은 셀렝가 하(河)유역에 살고 있었던 모양이며 이 지역에서 만주 퉁구스어로서 해석할 수 있는 지명들을 많이 볼 수 있다는 것은 이를 입증하는 것이다.
셀렝가강(江)의 지류는 아르군강 지류들과 인접하고 있으며 이 아르군 강(江)은 몽골북부와 트란스. 바이칼리아로 부터 만주(滿洲)에로 이르는 자연교통로인 것이라고 하고 있다.
또 러시아의 민속학자 S.M. 쉬로코고로프(Shirokogorov)는 다년간 지나에 머무르면서 인류학적 조사를 했는데, 지나인의 형질(形質), 인류학적 분야와 퉁구스 전승문제에 관해서 일련의 논고를 1923~1931까지 5개를 발표했는데 퉁구스-만주족의 조상 즉 퉁구스족은 원래 지나의 중앙부에 살고 있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이외에도 포퍼스(Poppers)나 코퍼셈트(Koppersemd)도 다 같이 동호(東胡), 선비(鮮卑), 척발(拓拔)을 퉁구스라 하고 있는 것이다. (以上은 文定昌, [古朝鮮史硏究], 19~23面 참조하고 본문을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위에서 살펴보듯 우리 민족의 시원에 대해 제대로 알고 있지 않은 학자들도 의견들이 다양하나 대다수의 외국의 석학들은 우리 민족이 세계 최초의 시원국이고 상고(上古)시대 동북방원수(元首)들이 모두 우리 동이족임을 밝히고 있다.
그러나 우리나라의 자학반도식민사관자들은 지나와 일본사가(日本史家)들의 위조에 패배, 수치 식민지사를 장식하고 있다. 예컨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천왕도(天王圖)가 발견되고 일본에 있는 백제왕신사(百濟王神社)에서 우두천왕(牛頭天王)이라는 간판이 왜인지 모른다.
또한 광개토태왕비문(廣開)開土太王碑文)에 영락(永樂)이라는 연호(年號)가 있고 왕토(往討)라는 문구가 있다. 연호는 독립국가의 제왕(帝王)이 칭하는 것이다. 천자(天子)는 토의불벌(討而不伐)하고 후왕(侯王)은 벌이불토(伐而不討)라 해 천자의 군(軍)에 토자(討字)붙이고 후왕(侯王)의 군(軍)에 벌자(伐字)를 부치고 토자(討字)붙이지 못한다. 이는 우리가 천자국(天子國)임이 알 수 있다.
고대 우리 민족이 천자(天子), 황제(皇帝)의 국가로 등장한 것이 오늘날 고고학에 의해 확실히 판명됐다. 그런데 문서역사에는 도리어 천자(天子), 황제(皇帝)의 우리국가가 후왕(侯王)국가로 위조되어 있다.
지금 역사교재는 사관이 없고 생명력 잃은 위조된 여사이다
우리나라 제도권에서는 우리 역사가 언제부터 왜곡되어 있는지조차 제대로 모르고 있다. 그것은 우리 역사가 왜곡되기 시작한 시기와 방법도 파악을 하지 못하고 있다. 일반적으로 일제가 강점기에 왜곡됐다고 믿고들 있다.
그러나 이것도 부분일 뿐이다. 1945년 광복 후에도 우리 역사를 제대로 연구하지 않고 일제강점기총독부의 ‘조선사편수회’가 조작한 조선사35권을 주축으로 일제 때 교육을 받은 교육자들이 왜곡된 역사를 그대로 가르치며 연구는 뒷전으로 사서(史書)를 부정하기에만 급급한 행태로 오늘 우리 역사는 뒤엎어져 있다.
우리 역사를 반도로 끌어들인 자는 일본보다 앞서 김일연(金一然)과 신채호(申采浩)등 우리 사학자들 책임이 크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이다.
김일연과 신채호며 최남선 선생까지도 우리나라 역사가 대륙사임에도 이를 기록하고 있는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외면하고 반도사로 유도한 김일연의 [삼국유사(三國遺事)]만을 인용한데서 역사를 그르치게 했다. 최태영(崔泰永)선생도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三國史)]에 고조선이 빠져 있다고 하시며 [삼국사]를 외면한 것은 아쉬운 일이다.
여기서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은 우리 민족사는 국가의 영토에 맞춰 서술하는 국가사관에 의한 역사가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역사를 고조선을 기준으로 하는 민족사관인 것인데 대륙시대의 영역과 백성은 모두 우리 민족인데도 환국(桓國), 배달국(倍達國), 고조선의 영역도 숨기고 국가기원(國家起原)도 숨기고 있음을 제대로 알지 못하고 있다.
지금 우리 민족의 역사기원을 고조선으로 하고 이것이 기록된 삼국유사를 효시라 하며 이를 받들고 있다. 그러나 한족(漢族)의 25사에서도 고조선 이전의 상고시대의 역사가 있음을 기록하고 있다.(사기 40과 1)
삼국사기 역시 우리가 대륙을 지배한 것을 다루고 있는데도 신채호 선생은 자주독립의 민족사를 찾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러나 신채호의 역사는 사관(史觀)이 없고 생명력을 잃은 위조된 역사라는 것이다.
그는 역사를 기술함에 있어서 무사(武士)와 영웅의 승패를 논하는 기록에 그쳤다. 그는 오월춘추(吳越春秋), 해상잡록(海上雜錄), 갓쉰동전(傳)등 거짓말 책에서 취재해 그가 말하는 역사는 그릇된 것이다. 오월춘추는 후한(後漢)의 조엽(趙曄)이 저술했는데 권두(卷頭)에 위항(委巷), 망탄(妄誕), 진허막측(眞虛莫測)의 잡사(雜史)라고 하고 있다.
그는 우리가 중원대륙을 지배하고 고구려와 백제가 강성할 때는 유연제노오월(幽然齊魯 吳越)을 정벌하고 정복해 지배한 것을 기록하고 있는 우리 [삼국사]와, 지나 [남제서(南齊書)]와 25사를 연구도 하지 않고 우리 역사를 동서를 바꿔서라도 반도에 맞추고 있는 역사왜곡을 한 사람이 신채호이다.
신채호의 역사는 아주 그릇된 것이다. 우리 역사는 자주독립의 민족사를 찾아내는 방향으로 연구하고 문화사상등을 다뤄야 한다. 그리고 그 방법은 진서(眞書)에서 취재해야 한다. 그러나 진서에도 오류가 있다.
그러므로 인류발달사를 기준으로 해야 한다. 인류발달사는 보편적 역사이다. 보편적 역사를 고찰하면서 우리 민족의 특수성을 발견해야 한다. 인류발달사에 편향해 우리 민족의 특수성을 무시하는 방법으로는 한국사를 발견 못한다.
우리 민족의 특수성은 특수한 경제적 사회적 조건에서 창조된 특수한 문화사상이다. 문화사상(文化思想)은 경제적 사회적 조건에서 발생한다. 그러므로 특수한 경제적 사회적 조건이 있으면 반드시 특수한 문화사상을 창조하는 것이다.
그 실례로 경제적 조건은 우리는 고시(楛矢), 석족(石鏃)과 산삼(山蔘)의 생산이다. 고시, 석족은 석기와, 철기를 파괴하는 신비성이 있고 다른 곳에 없고 오직 우리 동이에서만 생산된 것이다.
고대 지나인들은 2000년 동안 우리의 고시, 석족을 수입하면서 보물이라 칭했다. 그리고 산삼은 불로장생의 신비성이 있고 지구상 다른 곳에 없고 우리 땅에서만 생산됨으로 고대 지나인과 일본인들은 진물(珍物)이라 칭하면서 앞을 다투어 수입해 갔던 것이다.
이와 같은 경제적 조건하에서 특수한 문화사상이 창조됐다. 즉 석기시대에 우리는 신석기시대로 석기 철기를 파괴하는 고시, 석족을 발견한 우리민족은 사방원시족(四方原始族)을 정복하고 대국(大國)으로 등장했다.
이리하여 우리 민족은 천명(天命)을 받았다는 자존심을 북돋았다. 인류사상 최초에 대국(大國)으로 등장하고 이에 자존심을 더한 우리 민족은 천신(天神)의 피를 받았다는 천민사상 창조해 인류의 대표로 자처했던 것이다.
그 결과 우리는 자주자존의 민족의식으로 전통적 천민사상을 더욱 발전시켰고, 천신(天神)의 피를 받았다 하여 왕을 황제로 칭하게 된 문물제도가 우리가 창안했다. 이는 산해경(山海經)과 지나고서(支那古書) 독단(獨斷)에 기록되어 있다.
우리 민족은 인류의 대표로 자처하는 천민사상의 특수한 문화사상이 나온 배경을 제대로 알고 이 나라에 만연된 식민사관에서 탈피해야 우리 민족의 정체성을 바로 할 수 있고 위대하고 찬란한 우리역사를 되찾는 길인 것이다. (以上은 崔仁, ‘韓國學講義’ 15面~31面을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했음을 밝힙니다.)
(以上은 <최태영 [한국고대사]. [한국 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崔仁, ‘韓國學講義’,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유적지를 찾아서]. 한동억, [인류시원(人類始原)의 역사이야기]. ‘우실하, ‘동북공정넘어 [요하문명론],. 吳在成 [밝혀질 우리역사]「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九犂系史」 ’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 ‘校勘十八史’,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윤진영 編集 「三國史」「우리역사(東夷傳」.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정희철, [중국은 없다]. 반재원, [鴻史桓殷]. 文定昌), [古朝鮮史硏究],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智勝, [우리 上古史]. 이명우, 최현호 [환단고기]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井上 淸, [日本の歷史]. 永原慶二, [絶對中學社會歷史]. 津田秀夫外3人 [‘ひとり で學べる日本史]. 貝塚茂樹,[中國の歷史]. 西島定生 護雅夫, 木村常三郞, 猿谷 要 編著 [世界歷史の基礎知識]外 多數書冊, 參照, 本文 引用했음을 밝힙니다.)
(다음에 계속)
(※전문가 칼럼의 글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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