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시조 삼황오제는 도둑질당한 한민족 선조

입력 2014-01-11 15:48: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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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면서
 
중국의 역사는 거의가 우리 한민족의 역사를 베낀 위조사(僞造史)다. 이 변조한 중국사서(史書)를 믿으면 역사의 기본 줄기에 큰 오류(誤謬)를 범하게 된다. 이번 칼럼은 중국의 역사왜곡이 어느 정도인가를 가늠하기 위해서 배달국시대에 중국역사에 나오는 인물로 알려진 여러 고대 왕과 군장들의 한국고대 역사와의 관련성, 그리고 그것을 통해 그 인물들의 뿌리를 알아보고자 한다. 예컨대, 반고(盤固), 천황씨(天皇氏), 지황씨(地皇氏), 인황씨(人皇氏), 유소씨(有巢氏), 수인씨(燧人氏), 고시씨(高矢氏), 치우씨(蚩尤氏), 신지씨(神誌氏), 복희씨(伏羲氏), 여왜=여와(女㛂), 소전(少典), 신농(神農)유망(楡罔), 소호(小昊) 등이 그 인물들이다. 이들은 중국에 도둑질당한 우리 선조들이다.
 
이들 역사 인물에 대해 중국이 얼마나 허황되고 어처구니없는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그들을 추적해 보고자 한다. 이들을 통해 중국의 치졸한 역사왜곡을 적나라하게 들추어내고자 하는 것이다. 거듭 강조하지만 중국의 역사기록은 믿을 수 없는 터무니없는 허위의 기록이라는 점이다. 중국은 너무 역사가 빈약함으로 인해 삼황오제(三皇五帝)를 비롯해 우리 한민족의 인물들을 자기들의 조상이라고 흡수하려고 혈안이 돼 있어 이를 절대 그대로 묵과 할 수 없다. 그들의 왜곡·변조를 방치하는 것은 우리 조상에 대한 죄를 짓는 일이다. 정부도 동북공정의 잘못을 좌시하지 말고 중국에 강력히 항의해야 한다. 이를 방치하는 것은 선조에 대한 도리가 아니다. 우리의 정통성과 뿌리를 온전히 뽑아내는 일이기 때문이다. 우리 선조의 위대한 역사를 도둑질 하는 중국에 강력한 항의와 함께 우리역사를 제대로 가르치도록 교육 즉각 또한 바로세워져야 한다. 작금의 우리 역사내용과 그 교육 거짓이다. 일제가 왜곡한 역사를 지금도 가르치고 있으니 우리 모두는 패륜아에 다름 아니다.
 
삼황오제(三皇五帝), 한민족(韓民族)·배달족(倍達族)
 
중국의 시조로 알려진 반고(盤固)부터 역사의 인물들 가운데 다대수가 중국화족(華族)이 아니라 한민족(韓民族)이다. 반고와 관련해서는 환단고기(桓檀古記)와 삼성기전(三聖記傳) 하편(下篇=신라말 원중동 편찬)에 이렇게 적혀 있다. “BC 3898년 서자부에 환웅이 있는데 용맹함과 더불어 어질고 지혜가 있으며 일찍이 ‘홍익인간’으로 세상을 바꿀 뜻을 가졌으니 그를 태백산으로 보내 다스리게 하심이 좋을 듯합니다~중략~반고(盤固)라는 자가 있었는데 괴상한 술법을 즐기며 길을 나누어 가기를 청함으로 이를 허락했다. 마침내 재물과 보물을 모으고 십간(十干)과 십이지(十二支)에 밝은 장수들을 이끌고 유소(有巢), 유묘(有苗), 유수(有燧)를 거느리고 삼위산(三危山)의 납림(拉林)동굴에 이르러 임금이 되니 이를 제견(諸畎)이라고 부르고 이를 반고가한(盤固可汗)이라고 했다” 가한(可汗)이라고 하는 명칭은 북방 고대민족을 포함한 한민족(韓民族) 고대사회 추장이나 부족장 또는 왕을 일컫는 용어로 반고(盤固)가 한민족(韓民族)임이 틀림이 없다는 사실을 입증한다. 그럼에도 중국은 자기조상이라고 하고 있다. 반고(盤固)는 본래 환국의 관리 중 한 사람이었다. 이러한 반고(盤固)를 중국사서에는 반고(盤固)가 천지만물의 시조이자 천지개벽한 성인으로서 혼돈씨(渾沌氏)라고 칭했다. 그리고 반고(盤固)의 최초 거점은 한 중국역사 지도책에는 삼위산(三危山)이 아니라 월남의 북쪽에 있었다고 조작표시 되어 있다. 안호상 박사는 “삼위산(三危山)이 운남성(雲南省), 사천성(四川省) 등지에도 있다. 여기서의 삼위산(三危山)은 지금의 감숙성(甘肅省)에 있는 산을 말하며, 반고(盤固)는 그 지역민을 통솔하고 지역 군장이 됐다”고 했다.
 
다음으로 천황씨(天皇氏)는 반고(盤固) 다음에 나타난 태고시대의 제왕으로 중국문헌 신화 속에 전해지고 있다. 또 중국의 고서에는 천황씨(天皇氏)가 천하를 12제국으로 나누어 정사를 펼쳤다 하는데 우리 환국의 12제후국을 도용한 것으로 추정 된다. 한 사학자는 이 때 천황씨(天皇氏)가 천부경(天符經)의 원리로서 정사를 했다고 했다. 이를 보면 천황씨(天皇氏)는 환국이나 배달국시대에 살았던 제왕을 가리킨다. 환인천황씨(桓仁天皇氏), 지황씨(地皇氏=환웅천황), 인황씨(人皇氏=단군 왕검) 모두가 천부경(天符經)의 원리로서 통치한 것으로 봐도 우리 한민족(韓民族)임이 틀림없다.
 
유소씨(有巢氏), 수인씨(燧人氏)는 반고(盤固)와 같이 동행한 자로 중국의 고대신화에 자주등장하지만 우리 한민족(韓民族)의 조상이다. 중국 사서(史書)에는 유소씨(有巢氏)는 반고(盤固) 다음에 등장하는데 수인씨(燧人氏)의 아버지로 나온다. 이것은 잘못된 것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는 유소씨(有巢氏)와 수인씨(燧人氏) 두 사람이 등장하는데, 이들은 배달국 제5대 태우의(太虞儀) 환웅천황(桓雄天皇)의 12번째 아들 복희씨(伏羲氏)와 함께 서토(西土)를 다스린 것으로 돼 있다. 이 기록으로 봐서 유소(有巢)와 수인(燧人)도 고대역사를 잃어버린 동방겨레이다. 다시 말해 중국의 삼황오제(三皇五帝)는 모두 우리 한민족(韓民族)이었다. 중국이 말하는 삼황(三皇)은 수인씨(燧人氏), 복희씨(伏羲氏), 신농씨(神農氏)를 말하는데 이들은 중국화족이 아니라는 것이다. 엄연한 배달족이다. 지금 고대역사를 잃어버린 한민족(韓民族)들은 조상까지 중국의 조상으로 바꿔지고 있으며 우리 한국의 역사는 중국역사로 둔갑돼 버렸다. 분명한 것은 배달국 제5대 태우의(太虞儀) 환웅천황(桓雄天皇)때부터 중원에서 세력을 넓히며 대 황하문명을 이룬 것은 바로 우리들의 선조인 한민족(韓民族)이었다는 점이다.
 
수인씨(燧人氏)·복희씨(伏羲氏)·신농씨(神農氏) 실체는
 
신농씨(神農氏) 또한 중국고대역사에 자주 등장시키나 그는 중국화족(中國華族)이 아니다. 우리배달족이다. 중국의 삼황(三皇=수인씨(燧人氏), 복희씨(伏羲氏), 신농씨(神農氏)은 모두 배달족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 신시본기(神市本紀)에 보면 신농(神農)은 소전(小典)의 아들이라고 나와 있다. 소전(小典)과 신농(神農)은 배달국 제8대 안부련 환웅천황(安夫連 桓雄天皇, BC 3240년~BC 3170년) 때의 인물이다. 신시본기(神市本紀)에는 제10대 “갈고환웅(葛古桓雄(BC 3071년 즉위~ BC 2972년 타계) 때 신농(神農)의 나라와 구역과 경계를 확정해 공상(空桑)의 구역을 우리에게 속하게 했다”는 기록이 있다. 따라서 소전(小典)과 신농(神農)이 활동하던 시기는 BC 3100년~2071년 경 사이로 보고 있다. 신농(神農)은 중국화족(中國華族)의 17번째의 왕으로 한 중국고서(中國古書), 왕계표(王系表)에 나와 있다. 그는 백성들에게 농사짓는 법을 가르쳤다고 한다. 신농(神農)을 염제(炎帝)라고도 부르는데, 염제신농(炎帝神農)에 대한 기록이 중국문헌에서 군데군데 나온다. 그러나 일반적으로 신농(神農)을 왕의 이름도 나라이름도 신농씨(神農氏)로 부른다. 그는 열산(列山)에서 태어났고 또한 열산(列山)에서 일어났다. BC 3071년 10세(世) 갈고환웅(葛古桓雄)과 공상(空桑)을 등장시켜 공상(空桑)의 동쪽을 배달국이, 서쪽은 신농(神農) 나라가 다스렸다는 것인데 동이의 중심은 산동성의 태산지역이다. 규원사화(揆園史話)에 보면 공상(空桑)이 오늘날 진류(陳留)였다고 분명히 나와 있다. 우리 배달민족은 일찍부터 중국 동부지역 요동과 산동반도를 포함한 대광역의 나라였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은 자기들보다 정치, 문화, 군사적으로 앞서 있는 우리 구려족(九藜族=구이족, 동이족, 고조선족)의 역사는 아예 기록하지 않을 뿐 아니라 의도적으로 축소·왜곡·변조하며 우세한 배달국과 고조선에 대해서는 일체 관련기사를 실지 않고 빼버렸다. 그리고 중국화족(中國華族)의 역사도 기록이 거의 없으니 그들의 태고의 역사도 기록할 수 없었다. 여기서 중국학자들은 우리 선조들인 수인씨(燧人氏), 복희씨(伏羲氏), 신농씨(神農氏)를 마치 화하족(華夏族)의 대 조상으로 만들어 화하족(華夏族) 상고역사의 시발점으로 삼고 자기들 나라의 시조로 크게 부각시켰다. 참으로 통탄할 노릇이다. 중국 사가들은 환국, 배달국의 왕자나 고위관리의 기록은 철저히 배제했다. 그러나 중국이 우리고서(古書)와 역사를 아무리 왜곡하고 변조해도 진실된 기록은 살아 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 규원사화(揆園史話), 삼성기(三聖記), 단기고사(檀奇古史), 단군세기(檀君世紀), 북부여기(北夫餘記), 백일사(太白逸史), 부도지(符都誌) 제왕운기(帝王韻紀), 삼성비밀기(三聖秘密記), 조대기(朝代記), 고조선비사(古朝鮮秘史)등이 그것이다. 이들 사서들이 공통된 기록을 하고 있으니 삼황오제의 역사는 부정 할 수 없는 우리 역사가 정확하다. 문자가 없을 때는 세년가(歲年歌)를 통해 우리 위대한 역사와 천민사상(天民思想), 인간사상, 중물사상 등의 찬란한 전통문화가 구전으로 전승돼 왔다. 위에 언급한 고서들은 우리민족의 우수성과 선진문물의 이동, 수렵, 목축생활에서 농업을 일으키고 쇠를 발명하고 글자와 숫자를 발명하며 공업과 상업을 통해 고대 강력한 국가를 이룩한 것을 분명히 기록하고 있다.
 
중국역사의 중요 인물들 거의가 ‘우리 겨레’
 
또 환단고기(桓檀古記)에 보면 (1)고시씨(高矢氏 BC 3898년)는 배달국 초기에 등장하는 인물이다. 규원사화(揆園史話)에 보면 그는 배달국을 건국한 거발환웅천황(居發桓雄天皇)의 신하로서 불을 만드는 방법을 발견해 음식을 익혀 먹고 쇠를 캐서 녹이는 제련술(製鍊術)을 인류 최초로 발견한 사람이라고 했다. 그에 대한 일화를 소개한다면 그는 백성들을 잘 먹여 살리는 일을 맡았다고 한다. 그는 숲속에서 나무와 나무가 마찰해 불꽃이 발생하는 것을 보고 불을 얻는 방법을 생각했고, 그 이튿날 숲속에서 범을 만나 돌을 던지니 돌이 바위 모서리에 맞아 불꽃이 나는 것을 보고 부싯돌을 만들어 불을 얻었다는 기록이 있다. 이후 그는 백성들에게 음식을 익혀 먹도록 했다고 한다. 중국사서(史書)도 수인씨(燧人氏)가 나무를 마찰해 불을 얻었다고 했다. 환웅천황은 백성들의 안락한 생활을 위해 우사(雨師) 왕금령으로 하여금 동굴과 토굴에서 짐승과 각종 벌레로 고생하는 백성들에게 집을 지어 살게 했다. 또한 소, 말, 개, 돼지 등의 짐승을 산채로 잡아 기르도록 해 최초의 목축을 시작하게 한 인물이다. 그리고 운사(雲師) 육약비로 하여금 남녀의 혼례 법을 정하게 했다. 고시씨(高矢氏)의 후손들이 중원(西土)으로 진출해 진한(辰韓)과 변한(弁韓)을 세웠다. (진한(辰韓)과 변한(弁韓), 마한(馬韓)은 한반도가 아니라 대륙에 세운 것이다) 지금도 일부 농촌풍속에 음식을 먹기 전에 첫 숟가락의 음식을 떠서 던지고 난 뒤에 ‘고시레~고시레~’ 한 뒤 음식을 먹는 것을 고시례(高矢禮)라고 하는데, 이는 고시(高矢)의 업적을 기리며 그에게 감사한 마음을 음식 먹기 전에 드리는 예(禮)다.
 
(2)치우씨(治尤氏)는 배달국 건국 당시 한 관료다. 여기서 주의해야 할 점은 후대에 등장하는 치우천왕(蚩尤天王)과는 동일 인물이 아니다. 치우씨(治尤氏)는 병마와 도적을 막는 일을 담당했다. 규원사화(揆園史話)에는 이 치우(治尤)가 집을 짓는 법을 담당했다고 나와 있으며 치우(治尤)의 후손은 중국의 서남지방을 차지하고 살았다고 한다.
 
(3)신지씨(神誌氏 BC 3898년) 역시 환웅천왕의 신하로 환웅천왕의 명을 받아 인류최초의 문자를 창제했다고 한다. 신지씨(神誌氏)가 어느 날 사냥을 갔다가 사슴을 만나 화살을 쏘았으나 맞지 않아 놓쳐버렸다. 달아난 사슴의 발자국을 보고 문자를 적는 방법을 고안해 문자라는 형태의 그림을 만들었다고 하는데, 녹도문(鹿圖文)은 삼황오제 복희(伏羲)와 동문수학한 발귀리(發貴理)가 녹도문(鹿圖文)을 창작한 것으로도 보고 있다. 배달국 시대에는 녹도문(鹿圖文), 가림토, 투전문, 산목(算木), 서산(書算), 전목(錢木) 등 기록상으로 4~5개 종류의 문자가 있었으며 몇 종의 문자형태가 오늘날 까지 전해오고 있다. 우리 배달민족의 고대문자는 온 세계로 전파되어 인류문화의 초석이 됐다. 이 시대에 이 같은 문자창작은 우리 한민족이 선진문화민족임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신지씨(神誌氏)의 후손들은 서토에 가지 않고 동북지방에 살았다고 전해진다.
 
(4)복희씨(伏羲氏)는 이미 기술한 대로 태우의(太虞儀) 환웅천황(桓雄天皇)의 12번째 아들로 수인(燧人), 유소(有巢)와 함께 서토에서 이름을 빛냈으나 후에 그 무리가 중국의 중원으로 이동해 황하남쪽 하남성(河南省)에서 나라를 세운 것으로 기록돼 있다. 역대(歷代) 신선통감, 회남자(淮南子), 사기(史記) 등에는 복희(伏羲)가 진(震=辰)나라에서 나왔다고 했다. 역사학자 최동선 선생도 이 진(震=辰)은 동방나라 배달국과 단군조선을 가리킨다. 복희(伏羲(BC3512~3419)는 배달국의 왕자로서, 풍성수인씨(燧人氏)에 이어 왕위에 올랐다고 하는데 중국에서는 실재인물보다 신화의 인물같이 연대도 BC 3087년 인양 전해지고 있다. 하지만 복희(伏羲)는 엄연한 배달국 5대 천황 태우의(太虞儀) 환웅천황(桓雄天皇)의 12번째 아들이다. 전설의 인물이 아닌데도 전설의 인물로 하는 것은 그가 한민족(韓民族)이라는 점 때문이다. 역사를 왜곡·은폐하기 위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는 우리의 태극기에 있는 정신과 우주만물의 이치를 담은 팔괘(八卦)를 만드는 등 많은 업적을 남기고 BC 3419년 타계한 것으로 환단고기(桓檀古記)에 기록돼 있다. 그의 능(陵)은 지금 중국 산동성 어대현 부산의 남쪽에 있다. 그의 후손들은 번창해 BC 403년 춘추시대(春秋時代)까지 큰 세력을 떨쳤다고 나와 있다. 여와(女㛂)는 복희(伏羲)의 여동생으로 복희(伏羲)와 결혼한 부인이기도 한데 복희(伏羲)의 제도를 계승했다. 당시는 왕족혈통을 위해 형제친척끼리의 혈족결혼이 많았다.
 
중국의 역사말살기도에 단호히 맞서야 한다
 
이외의 중국역사에 나오는 치우씨(蚩尤氏=치우천왕(蚩尤天皇)와 적으로 싸운 황제헌원(黃帝軒轅)을 비롯해 유망(楡罔), 소호(小昊), 강태공(姜太公), 은(殷)의 시조 설(挈)과 성탕왕(成湯王), 공자(孔子), 장량(張良), 한신(韓信) 등도 모두 한(韓)족이다. 믿어지지 않겠지만 진시황(秦始皇)도 중국화족이 아니다. 이는 중국 소수의 사학자들도 알고 있는 사실이다. 이 사실이 알려지면 중국 역사에 대혼란을 야기하게 되기 때문에 철저히 숨기고 은폐하고 있는 것이다. 진(秦)민족은 중화족(中華族)이 아닌 섬서성 황하하류로 일찍이 남하 진출한 북방민족으로 동이겨레임이 확실하다. 이들은 고대 서융(西戎), 융적(戎狄)이라고 불리었는데 이 서융족(西戎族)은 후에 주(周)나라를 멸망시키는 등 현 섬서성에서 강력한 세력을 구축하고 있었다. 중국25사에는 진한(辰韓)이 곧 진한(秦韓)인데 이 진한(秦韓)은 진나라에서 피난 온 사람들로서 마한(馬韓)의 동쪽에 와서 살았다고 나와 있다. 즉, 삼한의 진한이 진(秦)민족과 같은 민족이었다는 것이다. 그 증거들은 유적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서안(西安)에서 발굴된 실물크기의 흙으로 만든 병사들의 용맹한 얼굴모습과 기상, 체형이 누가봐도 완전히 북방계통임을 알 수 있기 때문이다. 이들은 동이족이다. 지금 중국은 삼황오제(三皇五帝)를 비롯해 배달국의 환웅천황 모두를 자기들 중국조상으로 가져가는 웃지 못 해프닝을 벌이고 있다. 아니 역사의 진실에 대한 폭거이고 망동이다. 속수무책 있는 지금의 우리 스스로가 너무 한심하기도 하다. 동북공정에 정면 대응해야 할 동북아역사재단은 이에 대응하기는 커녕 중국의 동북공정에 도움이 되는 빌미만 제공하는 과거 일제치하 제국주의 노예근성에서 아직도 헤어 나오지 못하고 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단군을 찾아서’.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한창건 ‘환국배달 조선사신론’, 한창호 ‘한국고대사 발굴’, 한정호 ‘대조선 민족사’, 日本國書 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秋山謙藏 ‘[日本の 歷史’, 酒井忠夫, 高橋幸八郞 編著 ‘詳解-世界史史料集’ 외 다수의 서책을 참조·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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