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최근 역사교과서 문제가 논란이 되고 있다. 하지만 그 조 논란조차 근·현대사일 뿐 우리의 진짜 뿌리이면서 근·현대사의 진실을 투영할 상고사는 아예 언급조차 없다. 겉만 진실을 찾겠다는 논쟁은 그 역시 반쪽짜리 논쟁일 뿐이다. 역사는 선조의 걸어온 길을 있는 그대로 올바르게 전해야 하는데, 우리나라는 외국학자들도 실재한 것으로 주장한 환국과 배달국까지 뭉개고 빼버리는 잔혹행위를 스스로 하고 있다. 일제가 위대한 우리 상고사 역사를 짓밟은 행위는 잊어버린 채 벌이는 싸움을 해결할 방법은 하나뿐이다. 일제가 망가뜨린 우리의 상고사 역사를 되찾으면 근현대사의 굴절된 역사도 바로 잡아지게 된다. 한민족의 역사를 변조시켜 5천년을 잘라 버린 일제가 조작한 허구의 왜곡된 역사를 학생들에게 더 이상 가르쳐서는 안 된다. 이번 칼럼은 우리 배달민족인 환(桓)민족, 중화족의 기원, 배달국 제14대 자오지 치우천왕(慈烏支 蚩尤天王=BC 2707~2599년)과 그 시대상황 등을 다뤄보고자 한다. 특히 환국 이후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세운 배달국(倍達國)과 중국 화하족(華夏族)이 사활을 건 치열한 전투를 벌였던 황제 헌원(皇帝 軒轅)의 계보 등 당시 상황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환(桓)민족과 중화족의 기원(起源)
배달국이 중국 황허(황하강) 유역에서 고대문명을 한창 꽃피우기 오래전부터 언어와 의식주생활과 풍습이 이질적인 부족들이 아시아 서남으로부터 이동해 와서 나름대로 나라의 체제를 갖추게 된다. 사가들은 이들을 화하족(華夏族=支那族)으로 보고 있다. 이들의 기원지역(起源地域)이 타림분지, 티베트라고 알려져 있으나 정확한 발흥지역(發興地域)은 확실히 밝혀지지 않고 있다. 한 학자는 현 중국인의 조상들이 동남아지역으로부터 이동해 왔으며, 화족(華夏族)의 언어구조도 실제 동남아 언어와 그 뿌리를 같이하고 있다고 했다. 그래서 우리 어순과는 판이하게 다르다.
필자는 고등학교 때 중국어를 배웠다. 중국어는 한국어나 몽골어, 만주어, 터키어와 달리 하나의 문자에 높고 낮게 4성(聲) 발음이 있어서 높낮이 발음에 따라 같은 글자라도 의미가 다르고 문법구성의 기본이 다르다. 1990년대 말과 2000년대 필자는 ‘한국비교노동법학회’와 중국의 북경대학, 인민대학에서 학술세미나를 같이 한 적이 있다. 처음 ‘인민대학’에서 학술발표를 할 때 회장 인사말을 중국어로 했으나 중국학자들이 잘 알아듣지 못함으로 통역을 내세워 다시 인사한 일이 있다. 같은 한자(漢字)인 중국어로 말한다고 했으나 4성(聲) 발음이 이자(字) 발음만도 142가지이니 이를 구분하기는 외국인으로써는 매우 어렵기 때문이었다. 중국어는 같은 중국인끼리도 말이 잘 안 통하는 것은 발음의 차이에서 온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한국어와 중국어가 판이하게 다른 것은 한민족(韓民族)과 중국 화하족(華夏族)이 다르다는 것을 의미한다. 언어의 상이함은 곧 민족의 다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 중국의 조상이라고 하는 화하족(華夏族)은 어디에서 온 것인지. 부도지(符都誌)에는 이들이 우리 한민족 최초의 국가인 환국(桓國)이 세워지기 전에 갈라져 나간 민족으로 여겨진다는 기록이 있다고 하나 우리와는 판이하게 다른 족속이다. 상고시대부터 중국 화하족(華夏族)은 같은 조상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따라서 태고시대부터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세운 환국이나 배달국의 시조가 중국 화하족(華夏族)과 같을 수 없었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동쪽에는 몽골고원이 펼쳐지고 사막의 남으로는 곤륜산맥이 있고, 그 밑에 티베트고원이 있다. 우리 한민족의 조상은 중앙아시아에서 동쪽방향으로 이동해 왔다고 한다. 그런데 화하족(華夏族)의 기원지에 대해 학자들은 곤륜산맥 남쪽 티베트지역 아니면 중국 남서부지역, 혹은 동남아시아인 미얀마지역에서 동으로 이주해온 것으로 보고 있으나 확실한 결론은 내릴 수 없다. 언어학적으로 중국어는 알타이어족과 전혀 다른 지나베트어족 이다.
어느 민족이든 그 민족의 기원지(起源地)를 밝히는 것은 어려운 일이나 화하족(華夏族)은 처음에는 사천성(四川省)에 모여 살았다고 추정된다. 인구수는 평야지대인 동쪽의 배달국에 비해 많았던 것으로 보고 있다. 처음에는 이 두 민족(배달족과 화하족)의 인구가 적었고 거주지역이 멀리 떨어져 있어서 접촉할 기회가 적었으나 세월이 흐르면서 인구가 증가되어 민족끼리 접촉이 늘어나면서 마찰을 빚게 됐다. 언어소통이 안 돼 서로간의 갈등이 생기고 심하면 싸움이 빚어지기도 했다. 특히 배달국 중기부터 화하족(華夏族)들은 우리 한민족보다 호전적이고 전쟁을 좋아해 중국내 토착민들을 대거 복속·동화시켰으며 영역을 빠르게 확장해 갔다. 따라서 우리와는 언어, 음식, 풍속이 달라 융합되기가 어려웠으나 우리 동이족들은 언제나 지배층으로 그리고 화하족(華夏族)은 피지배층으로 있었다. 고대 화하족(華夏族) 나라가 배달조선국의 제후국으로 있었음은 역사 기록으로 남아 있다. 이 두 종족은 별로 섞여 살지 않았다. 그러나 화하족(華夏族) 제후국들의 왕은 모든 면에서 앞서간 배달족에서 모셔다 봉한 것을 알 수 있다. 그 대표적 사례가 황제 헌원(軒轅)이다. 중국어군(中國語群) 민족이 언제부터 국가체제를 갖추었는지는 불분명한데, 중국은 우리 배달민족의 왕들을 다 자기들 조상으로 바꿔놓고 있다.
배달국 역사에서 보는 치우천왕(蚩尤天王)의 치적(治積)
환국에 이어 배달국의 발전도 괄목할만하다. 이 배달국시대에 세계적 문명이 한민족(韓民族)에 의해서 이뤄진 것을 위시해 우리 선조들의 장대한 문화도 꽃피워지는 청동기시대를 맞아 더욱 찬란한 문화를 창달시켰다. 그런데 중국은 이들 문명을 일으킨 우리 선조들조차 자기들 조상이며 자기들 역사라고 하는데, 참으로 언어도단이다. 지금 남아있는 문헌만으로도 환국과 배달국은 우리의 선조가 이룩한 것임을 분명히 말해주고 있다. 따라서 엄연한 사실은 우리 환국이나 배달국의 역사가 중국의 역사로 둔갑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컨대, 배달국 제14대 치우천왕(蚩尤天王=BC 2707~2599년)은 배달국 위상을 한층 높인 천왕으로 자오지천왕(慈烏支天王)이라는 별칭까지 있다. 규원사화(揆園史話)에 보면 “치우천왕(蚩尤天王)은 그 백성과 함께 황하 이북에 자리 잡고...유망(楡罔)이 쇠해 약해지는 것을 보고 군사를 일으켰다.....우두머리 될 사람 81명을 뽑고...칼과 화살촉을 꾸준히 만들고...1년 동안 9제후의 땅을 빼앗고...공상으로 쳐들어갔으며...다시 1년 동안 12제국을 빼앗으니 시체가 들에 가득차서 중국백성들은 간담이 서늘해 도망가거나 그렇지 않으면 숨어버렸다”는 기록이 있다. 치우천왕(蚩尤天王)에 대한 기록은 환단고기(桓檀古記)와 규원사화에 뿐만 아니라 중국역사에도 많이 전해지고 있다. 그는 천왕의 왕위에 오르면서 백성들과 함께 신시(神市)의 위대한 열성(列聖)들의 전통을 계승해 나라를 더욱 발전시킨 것이다. 제13대 사와라 환웅천왕(斯瓦羅 桓雄天王 BC 2774년 즉위)의 덕치로 타처의 여러 제후들이 와서 선정을 치하하며 토산물을 바치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많은 부족이 귀화하기를 원하고 그 다른 백성들이 수천에 이르렀다고 한다.
제13대 사와라 환웅천왕(斯瓦羅 桓雄天王)에 이어 제14대 왕위에 오른 치우천왕(蚩尤天王)은 더 많은 업적을 볼 수 있다. 환단고기(桓檀古記)와 규원사화(揆園史話)에 보면 그는 첫째, 옛 제도를 고쳐 새로운 제도를 마련했고 둘째, 황무지에 농토를 개간해 농산물을 증산하게 했다. 셋째, 백성들을 호족들과 분리해 황허(黃河) 이북에 살도록 했다. 넷째, 동철생산과 병기제작 및 생활도구를 생산했다. 다섯째, 서토 제후의 반발을 기화로 전쟁이 벌어지자 1년 만에 9제후를 정복하고 또다시 병기를 정비해 공상(空桑)을 점령하는 등 이해에 12제후국 도합 21개 제후국을 합병시킨 것이다.
이 같이 치우천왕(蚩尤天王)은 배달국 제왕 중 가장 강력한 천왕이 된다. 이러한 배달국의 21개 제후국을 합병한데 놀란 중국 화하족(華夏族)이 언제부터 국가체제를 갖췄는지는 불분명하다. 중국은 복희(伏羲)-소전(少典)-신농(神農)-헌원(軒轅)-소호(小昊)-전욱-제곡-제요(堯임금) 등이 고대국가를 세웠다고 하지만 이들은 모두 배달족이기거나 그 후손들이라 중국역사로 보기 어렵다. 중국역사로 본다고 해도 그 수장들은 모두 배달족이기 때문이다.
여기서 중국이 우리나라 단군정도로 인식되고 있는 이 헌원(軒轅)에 대한 내용을 잠시 살펴봐도 소전(少典)의 후손( 배달족)이라고 여겨지는 공손(公孫)이라는 자가 있었다. 공손(公孫)은 헌원(軒轅)의 성이다. 이 공손(公孫)의 활동 시기는 치우천왕(蚩尤天王)과 동시대의 사람이다. 즉, 황제헌원(皇帝軒轅)이 활동 시기가 치우천왕(蚩尤天王) 시대(BC 2704~2600년)라는 것이다. 황제헌원(皇帝軒轅)에 대해 환단고기(桓檀古記) 신시본기(神市本紀)에 신농(神農)이 소전(少典)의 아들이고 소전(少典)과 소호(小昊)는 고시씨(高矢氏)의 방계후손이라는 기록이 있다. 헌원(軒轅)이 신농(神農)과 같이 소전(少典)의 아들과 같이 보이는 기록도 있는데 확실치는 않다고 한다. 헌원(軒轅)이 소전(少典)의 후손이라면 배달족계통이다. 따라서 치우천왕(蚩尤天王)의 중원 21개국 정벌은 같은 동이계(東夷系 ) 나라를 정벌한 것으로 중국의 역사에 편입하는 것은 가당치 않은 일이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는 황제헌원(皇帝軒轅)이 토착민의 우두머리였다고 만 나와 있다. 황제 헌원(皇帝軒轅)이 어떻게 서토에 가서 왕이 됐는지는 알 수 없다. 그런데 중국인의 삼황오제(三皇五帝)의 한사람으로 존경을 받고 있다. 황제 헌원(皇帝軒轅)은 분명히 배달민족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고대황제로서 추앙을 받고 있는 것이다. 이는 중국의 국조(國祖)나 역대왕의 다수가 배달민족이었다는 사실을 역으로 입증한다. 중국이 제아무리 역사를 왜곡해도 우리역사서에 분명한 기록이 명시돼 있다. 엄정한 결론을 내리자면 헌원(軒轅)은 서토(西土)에 가서 왕이 된 배달민족의 후손이라는 사실이다.
치우천왕과 황제헌원(皇帝軒轅)과의 싸움
그러면 치우천왕과 황제 헌원(皇帝軒轅)은 어떠한 관계였나. 중국 화하족(華夏族)은 선진 배달국의 영향을 받아 그들도 그들 나름대로의 나라체제를 갖추고 처음에는 배달국의 제후국으로 산악지대에서 살았으나 배달족과 어울려 살면서 개화를 했다. 중국인들도 우리 한민족의 우수성을 본받아 개명하게 되면서 동족의식과 단합력을 키웠다. 중국인들은 강대민족이 되기 위해 계획성을 확립하고 사고방식이나 가치관 또한 자신의 가족·친척과 국가민족을 위한 희생봉사정신 함양을 고양시켰다. 아울러 우리 선조들의 전통인 상부상조하는 민족성으로 발전해 오늘날 까지도 중국이라는 나라를 이어 올 수 있었던 큰 원동력이 되고 있다.
일본의 경우 우리가 그들을 깨우쳤으나 은혜를 오히려 유민의 한을 품고 원수로 갚았다. 중국인들도 우리 한민족의 우수성을 본받아 개명하게 되면서 동족의식과 단합력을 키우고 강대민족으로 커갔다. 아울러 희생봉사 정신으로 상부상조하는 것은 우리 선조들의 민족정신인데, 중국이 이를 본받았다. 이 같은 중국인들의 민족성은 오늘날 까지도 중국이라는 나라를 이어 올 수 있었던 큰 원동력이 되고 있다. 비근한 예로, 중국인은 상품구입을 하는 것도 가까운 곳에 상점이 있어도 그들은 거리가 먼 같은 중국인의 상점으로 가서 구입하는 예를 지금도 주변에서 얼마든지 볼 수 있다. 하지만 이 과정에서 그들의 체면불구하고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정신 또한 우리와는 다르게 자리잡았다. 근래 중국아시안게임 때 우리의 전자장비며 인력까지 도움 받고 아시안게임을 치른 그들이 지금은 우리보다 상품도 몇 배 더 많은 국가 경쟁력을 가진 대국으로 발돋움했다. 이러한 발전을 하고 있는 것은 중국인 저력의 DNA가 고대부터 철저하게 실사구시(實事求是)의 전통이 이어져 온 것에서 찾아볼 수 있다. 필요에 따라서는 얼마든지 이용하고 답습하는 것이 우리와는 다르다. 황제 헌원(軒轅)도 배달족이었으나 중국인들은 그를 황제로 모시고 우리 배달국 14대 치우천왕(蚩尤天王)과 운명적인 치열한 싸움을 한 것을 보면 중국도 그들의 욕구를 충족시키기 위해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음을 볼 수 있다.
이러한 중국 화하족(華夏族)과 우리 동이족과 대치관계를 다시 봐도 상고사 중국의 역사는 우리의 역사임이 증명된다. 치우천왕(蚩尤天王)은 1년 만에 9제후국을 정복하고 또다시 병기를 정비해 공상(公桑)을 점령한 뒤 12제후의 나라를 합병했다. 치우천왕(蚩尤天王)의 훌륭한 정치가 공상(公桑)에서 떨치게 되자 헌원(軒轅)이 병마를 이끌고 와서 싸움을 걸었다. 치우천왕(蚩尤天王)은 탁록(涿鹿)을 포위공격하고 안개를 일으키니 헌원(軒轅)의 군사들은 겁에 질려 도망쳤다. 치우천왕(蚩尤天王)은 이곳에 성을 쌓고회대(淮垈)를 차지하게 됐다. 헌원(軒轅)은 끈기 있게 치우천왕(蚩尤天王)에게 100여 번을 도전했으나 치우천왕(蚩尤天王)의 위세가 날로 강성해 천하를 호령했다. 헌원은 그 위세에 늘려 그의 무리들과 함께 항복하고 신하가 됐다. 당시 서토사람들은 동과 철로 제작한 투구와 갑옷 등을 처음 보고 그들은 치우천왕(蚩尤天王)을 가리켜 구리머리 쇠이마(銅頭鐵額)를 가진 분이라고 두려워했다. 사마천 사기(史記)는 “제후가 다 와서 복종하되 치우가 가장 포악해 천하가 능히 치지 못하고 헌원(軒轅)이 섭정하매 치우형제 81인이 있어 짐승의 몸으로 사람의 말을 하며 머리는 구리요, 몸은 쇠이고 모래를 먹으며, 오구(五丘)의 장대와 칼, 창, 대노(大弩)를 만들어 천하를 흔드니 치우(蚩尤)는 옛 천자(天子)의 칭호이다”라고 했다. 당시 치우(蚩尤)가 쇠 갑옷을 입고 투구를 만들었는데 당시 사람들이 이를 알지 못하고 구리로 된 머리에 몸은 쇠로 된 치우(蚩尤)라고 했다.
이러한 배달국의 자오지 환웅천왕(慈烏支 桓雄天왕=치우천황(蚩尤天王)까지 중국의 선조로 둔갑하고 있는 것은 우리 역사를 훼손시키는 일이며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또한 우리나라 역사교재도 이제는 제대로 바로 쓰여져야 하는데, 아직도 일제 황국식민사관의 범주에서 못 벗어나 헤매는 것은 슬픈 비극이 아닐 수 없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한창건 ‘환국배달 조선사신론’, 한창호 ‘한국고대사 발굴’ 한정호 ‘대조선 민족사’, 日本國書 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せい いくど(盛いく度[新.漢民族どら大和民族, ‘중국의 역사’ 외 다수의 서책을 참조·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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