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와 일본이 우리사서(史書) 침탈한 이유

입력 2021-12-11 15:50: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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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우리나라는 고대부터 문자들을 만든 나라답게 기록을 남기고 있었다. 환국과 배달국사서는 그렇다 치고 단군조선에 신지비사(신(神祗秘詞)가 있었고, 고구려(高句麗王朝)는 초기에 단조(檀朝)로부터 고구려 그 당시에 이르기까지 사실(史實)들을 100권에 수록해 [유기(留記)]를 남겼다. 
 
이후 신라에는 [신라본기(新羅本紀)], 고구려에는 [고구려본기(高句麗本紀)], 백제에는 백제본기(百濟本紀)] 등이 있었음을 여러 고문헌과 [일본서기(日本書紀)]에 전하고 있어서 우리나라 역사가 상고시대에는 세년가(世年歌)로 불릴만큼 역사 민족인 것이다. 그런데 지나(支那)와 일본(日本)은 우리사적 없애는데 혈안이다.
 
때문에 우리나라 고문헌(古文獻)과 사서(史書)인 사적(史籍)들이 지나와 일본의 침탈(侵奪)로 우리사서(史書)들이 모조리 없어지게 된 것을 볼 수 있다. 그 이유는 지나(支那)와 일본의 사적(史籍)이 너무 빈약함에서인 것이다. 
 
지나의 역사는 위안 텅페이(袁 藤飛)가 말했듯이 “지나의 역사는 5%도 아니 된다.” 일본역사역시 그 역사는 양자강 이남에 있을 때인 왜(倭)때부터 백제의 지배와 고구려, 신라, 가야의 지배를 받은 역사로 지금 일본열도에서 처음부터 있는 것 같이 허구역사를 만드나 이를 숨길 수가 없는 것이다.  
 
지나와 일본은 없는 역사를 조작해 제멋대로 허구(虛構)의 역사를 역사서에 올리고 있으나 허구의 역사는 역사가 아니다. “잉크로 쓴 거짓말은 진실을 감출 수가 없다”는데도 지나와 일본은 여전히 역사왜곡을 하고 있다. 
 
특히 지나는 근래엔 동북공정(東北工程)을 한다며 고구려도 지방정권이라고 하고, 발해도 자기들 역사라 하나 고구려, 발해가 지나의 지배를 받은 적이 있는가. 이들 강국은 지배를 받은 적이 없는 황제의 나라였다. 
 
오늘은 지나와 일본이 자기들 역사를 긍지와 자부심을 갖게 하기 위해 역사를 조작하나 그들이 조작한 역사는 세계 사학자들은 이들이 사서를 훔치며 허구의 역사를 조작한 것에 대해 환멸을 느끼고 있음을 말하려 한다.  
 
지나와 일본이 우리 사서를 어떻게 훔쳤나
 
우리나라 사학계(史學界)는 지나와 일본이 우리역사 사서(史書)를 어떻게 노략질을 했는가를 말하지 않고, 지나와 일본이 왜곡역사만을 역사인양 가르치고 있는데 지금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는 왜곡한 것이라서 제대로 된 우리역사가 아니고 소설을 가르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우리 역사를 제대로 알기 위해서는 우리 역사가 어떠한 수난을 당한 것도 알고 있어야 우리 역사무지를 바로 할 수 있다. 지나는 우리가 중원을 지배한 것을 숨기고, 일본은 일제강점기 ‘조선사편수회’를 두어 우리 역사를 조작해 이 역사만을 가르치고 있는데 우리역사 제대로 알고 말하기를 바란다. 
 
우리 역사는 지나와 일본의 침탈과 자학반도식민사관자들의 한심한 우거(愚擧) 등으로 천추의 한이 되는 수난을 당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 수난의 사실은 한두 차례가 아니라 많았는데 우리는 너무 모르고들 있다. 
 
사서 침탈당한 것을 살펴보면, 수차례나 사고(史庫)가 털린 것을  볼 수 있다. 그 첫 화앙(禍殃)이 고구려 동천왕(東川王) 18년(서기244년)에 위장(魏將) 관구검(毌丘儉)의 환도성공함(攻陷)과 사고(史庫)의 모든 서적탈취가 처음이다.  
 
두 번째는 백제 의자왕 20년(서기660년) 나당연합군에 의한 사비성(泗泌城)의 함락과 그 초토화(焦土化)가 있었고, 세 번째는 고구려 보장왕 27년(서기668년) 당장(唐將) 이적(李勣)의 평양성 공함(攻陷)과 일체의 전적(典籍) 수거였다.
 
네 번째는 신라 경순왕(敬順王) 원년(元年;서기927년) 후백제왕 견훤(甄萱)이 신라 왕도(王都)에 들어가 경애왕(景哀王)을 자살하게 하고 경순왕(敬順王)을 세운 다음 신라의 전적(典籍)을 그 국도 전주에 이관했다가 경순왕 44년(서기935년) 고려 왕건에게 토멸당할 때 병화(兵禍)로 인해 소진(燒盡)된 일이다.
 
다섯 번 때는 고려 인종(仁宗) 7년(서기1129년) 금(金)나라에 속(屬)해 서표(誓表)를 바친 후 금제(金帝)의 제압(制壓) 하에서 주체성(主體性)이 있는 수많은 고적(古籍)들이 자취를 감춘 일이다. (以上은 文定昌,[古朝鮮史硏究],63~64面)
 
여섯 번째는 고려 고종(高宗) 20년(서기1233년 몽골에 패한 고려조에 홀필열(忽必烈)의 위풍(威風)이 떨치자 지금까지 사용해 왔던 황경(皇京), 제궁(帝宮) 등이 없어지고 해동천자(海東天子)의 팔관악부(八關樂府)가 금지되고, 삼한고기(三韓古記), 해동고기(海東古記), 삼국사(三國史)등이 자취를 감춘일이다.   
 
조선조와 일제강점기에 없어진 사서도 수십만 권이다
 
고려에서 1392년 조선(朝鮮)이 성립되어 안정을 찾게 되는 태종(太宗)때에는 오부학당(五部學堂)을 송제(宋帝)에 의해 설치하는 등 유교를 널리 장려할 때에 유학도가 이단시하는 일체의 문헌들을 소각한 것 역시 우리 손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선조25년 (서기1592년) 5월 임진왜란(壬辰倭亂)으로 도성이 함락되자 이때 수많은 전적(典籍)이 난민들의 방화로 인해 소실되고 또 왜장(倭將)들이 탈거(奪去)해 가져갔는데 1965년 한일협정시도 이를 되돌려 받지 못했다. 
 
그리고 1624년 이활(李活)의 난(亂)과 1636년 병자호란(丙子胡亂)때에 무수히 많은 서책(書冊)이 소실(燒失)된 것과 고종3년(1866년) 대원군이 프랑스 신부 9명과 수천 명의 천주교도를 처형한 병인박해(丙寅迫害)로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은 군함 7척과 천여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강화도에 침입했다.
 
이를 ‘병인양요(丙寅洋擾)’라 하는데 이때 강화도 외규장각에 있는 도서들을 가져갔다. 이로 인해 대원군(大院君)의 쇄국정책은 더욱더 심해지게 되었다. 
 
또한 고종 8년 (서기1871년에는 미국의 로제스 제독(提督)이 5척의 군함으로 조선의 개항을 요구하며 강화도를 침입해왔다. 이를 ‘신미양요(辛未洋擾)’로 조선군 수백 명이 죽고 미군도 30명 죽는 일이 일어나자 미군은 철수했다.
 
이후 1910년 대한제국을 강점한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가 군경들을 앞세워서 22만수천권 사서(史書)를 거둬가고 이도 부족한 일본은 군청의 관리들을 동원해서 사대부(士大夫)들의 사서인 비기(祕記)등 우리사서들을 빌리는 형식으로 수십만 권을 거둬들여서 불사르거나 혹은 탈거(奪去)해 모두 없앴다.   
 
총독부는 여기에 그치지 않고 우리나라 역사말살을 시도하며 ‘조선사편수회’를 만들어서 우리나라 역사의 왜곡에 착수해 우리 상고사는 물론 고대사도 잘라내는 만행을 저질러 우리 역사를 뒤엎고 망가뜨렸던 것이다. 
 
지금 우리나라 학교에서 가르치는 역사는 일제가 철저하게 왜곡한 소설로서 역사가 아니다. 환국 때부터 유라시아를 지배하고 고대에도 중원을 지배한 우리역사가 반도의 역사로 둔갑시킨 내용을 가르치는 한심한 지경이 되고 있다.
 
글을 맺으며-역사 알아야 민족이 나아갈 방향 찾는다
 
이 지구상에는 크고 작은 250여 나라가 있는데 우리나라 국민들 같이 자기나라 역사를 모르는 민족은 없다고 외국인들까지도 비웃고 있는 것을 모르고 있다. 
 
지나와 일본을 탓하고 특정 사가들을 탓하기 전에 우리 국민들도 얼마나 우리역사에 관심을 갖고 자부심이나 긍지를 갖고 있는지도 자문해야 한다. 
 
우리나라 역사는 활자화하기 이전부터 노래로 임금이 대를 이으면서 각대에 이룩한 사적(史蹟)을 전하는 세년가(世年歌)가 있었다. 이 세년가는 고려조에도 공양왕(恭讓王)때까지의 사적(史蹟)을 언급한 권도의 ‘동국세년가(東國世年歌)가’ [표제음주동국사략(標題音註東國史略)]에서 나온 것을 볼 수 있다.
 
또 조선조의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나온 세년가(世年歌)를 세종(世宗)이 이병도 박사보다도 먼저 보고 알게 된 것을 이후 이병도 박사도 단군을 실제 인물로 받아들이게 된 계기가 된 것이었다. 이같이 우리 국민 스스로도 역사를 알려면 알 수가 있음에도 관심이 없는 것은 우리 국민들도 크게 반성할 점이라 본다. 
 
이런 점을 보다 못한 러시아의 U. M. 푸틴 박사도 오죽하면 “지나와 일본은 없는 역사도 있다고 하는데 한국 사람들은 왜 있는 역사도 없다고 하는가”라며 우리의 역사무지를 안타깝게 질책하며 동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런 상황을 알고 있는 국사대관(國史大觀)을 써서 반도사관의 수장인 이병도 박사는 1986년 10월9일 조선일보에 글을 올리고 국사학의 방향을 전환했고, 1989년에는 [한국상고사 입문]을 최태영 선생과 공저로 나오게 된 것이었다. 
 
그는 말년에 이마니시류(今西 龍)에게 속아 어리석은 역사했음을 참회했다. 그런데도 그 일부 사학자들이 지금도 반도식민사관에 매달려 있는 것은 참으로 한심한 일로 국민도 교육부도 제자리로 돌아가기를 바라는 것이다. 
 
(以上은 <최태영 [한국고대사]. [한국 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한국상고사]. 崔仁, [韓國學講義],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 [밝혀질 우리역사] 「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九犂系史」 [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 ‘校勘十八史’,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윤진영 編集 「三國史」「우리역사(東夷傳」. 박종원, [한국인자부심 문화열차]. 한동억, [인류시원(人類始原)의 역사이야기]. 우실하, ‘동북공정넘어 [요하문명론], 정희철, [중국은 없다]. 반재원,[鴻史桓殷]. [단군과 교웅], 文定昌,[古朝鮮史硏究],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智勝, [우리 上古史]. 이명우,  최현호[환단고기]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三浦一郞, 小倉芳彦, 樺山紘一 監修 [世界を変えた 戰爭, 革命, 反亂]. 井上 淸, [日本の歷史]. 永原慶二, [絶對中學社會歷史]. 津田秀夫外3人 [‘ひとり で學べる日本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張金奎, [匈奴帝國]. 黃斌, 劉厚生, [箕氏朝鮮史話]. 西島定生 護雅夫, 木村常三郞, 猿谷 要 編著 [世界歷史の基礎知識]外 多數 書冊을,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했음을 밝힙니다.)
 
(※전문가 칼럼의 내용은 본지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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