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역사에 대한 서책은 많으나 단기고사(檀奇古史)는 서기 668년 고구려가 망한 후 31년 만에 부장(部將)인 대조영(大祚榮)이 진국(震國)을 수립하자 그의 아우 대야발(大(野勃)에게 명(命)해 고조선역사를 발해어(渤海語)로서 엮었고, 그 뒤 약 300년 후에는 황조복(黃祚福)이 한문으로 번역해 발간했다.
그 후 1889년(?) 김해암(金海菴)이 국한문으로 개역 발간했으나 6.25동란 때 소신(燒燼)당해서 다시 한글로 번역했다고 하는데 여기에는 고조선의 강역도(疆域圖)가 첨부됐다. 그 기록은 봉천성과, 길림성, 한반도를 영역으로 하고 그 국도(國都)를 영고탑(寧古塔) 또는 상춘지방(常春地方)이라 했다.
제1세 왕검(王儉)때 길림성 평양에 도읍을 했다고 했는데 영고탑(寧古塔)으로 옮긴 것은 22세 색불루(索弗婁)36년에 역신(逆臣) 신독(神督)이 군사를 일으켜 제성(帝城)을 점령함으로 영고탑(寧古塔)에 피난했는데 이때부터 백성들이 영고탑에 이주 해 25세 율나(率那) 단제(檀帝)까지라 하고 있다.
한편 규원사화(閨怨史話)는 단군조선의 국도(國都)에 관해 왕검성(王儉城)이라고 했는데 이는 고어(古語)의 서울이라는 뜻이고 또한 평양(平壤)의 뜻은 도성(都城)이라 하고 있다.
단군조선은 태백산(太伯山) 서남 우수하(牛首河)의 둔덕에 왕검성을 건설했다고 하고 있다. 지금의 만주 길림의 땅에 소밀성(蘇密城)이라는 곳이 동말강(凍沫江)의 남쪽에 있는데 이곳이 바로 그 곳이라고 한다. 또한 동말강(凍沫江)을 소밀하(蘇密河)라고도 하니 옛 율말수(栗末水)이다.
이 곳은 발해국연대(渤海國年代(서기 699~926년)까지 오늘날 송화강(松花江)을 율말수(栗末水), 흑룡강을 흑수(黑水)라 했다. 그리고 율말수(栗末水)의 산남수북(山南水北)에 발해(渤海)라는 곳이 있다. 이곳이 중경현덕부(中京(顯德府)로 이 곳이 단군이 처음 도읍한 곳으로 왕검성 즉 평양(平壤)이라고 하고 있다.
이곳에서 600리를 가면 상경(上京) 홀간성(忽汗城)이 있다. 지금의 요양(遼陽),소밀(蘇密) 남쪽 600여리의 지점에 있다고 규원사화(閨怨史話)는 밝히고 있다.
오늘은 단군조선에 관한 각종기록을 살펴봄으로 이단자들의 단군조선에 대한 의구심을 풀어 강대(强大)한 단군조선이 어떠했음을 살펴보고자하는 것이다.
규원사화(閨怨史話)에서 보는 단군조선(檀君朝鮮)
단군조선이 왕검성(王儉城)에 성곽을 쌓고 궁실(宮室)을 짓고 정부조직을 단군왕검의 아들 부루(夫婁)를 호가(虎加)로 명(命)해 제가(諸加)를 통솔하게 했는데 규원사화(閨怨史話)의 기록은 다음과 같이 기록 하고 있다.
역사에 관심이 없는 분은 생소하겠으나, 신지씨(神誌氏)를 마가(馬加)로 명해 주명(主命)을 맡게 하고, 고시씨(高矢氏)를 우가(牛加)로 명해 주곡(主穀)을 맡게 하고, 치우씨(蚩尤氏)를 웅가(熊加)로 명해 주병(主兵)을 맡게 했다.
둘째 아들 부소(夫蘇)를 응가(鷹加)로 명해 주형(主刑)을 맡게 하고, 셋째 아들 부우(夫虞)를 로가(鷺加)로 명해 주병(主病)을 맡게 하고 주인씨(周因氏)를 학가(鶴加)로 명해 주선악(主善惡)을 맡게 하고, 여수기(余守己)를 구가(狗加)로 명해 제주(諸州)를 분영(分營)하게 했다고 하고 있다.
또한 규원사화(閨怨史話)는 아들 부루(夫婁)가 우(禹)의 치수사업에 협조하기 위해 우(禹)의 처가인 도산국(塗山國)의 대회의(大會議)에 참석했다고 기록하고 있는데 이는 제후국의 행사에 단군조선이 관여한 것을 볼 수 있다.
부루(夫婁)가 이미 수토(水土)를 평(平)했는데 이 때 하우(夏禹)가 당요(唐堯) 9년간의 치수를 위해 천하 제국(諸國)들을 빠짐없이 소집한 것인데 단군의 명을 받들고 이 회의에 장자(長子)인 부루(夫婁)를 파견한 것이었다.
부루(夫婁)가 회의에 참석하는데 신지(神誌)가 보옥(寶玉)과 궁시(弓矢)를 갖고 부루의 신변보호를 위해 수행한 것을 봐도 당시의 상황을 알 수 있다.
원래 배달국의 제14대 치우황제(蚩尤黃帝)와 화하족(華夏族)의 수령인 헌원(軒轅)은 73회의 크게 싸웠으나 헌원(軒轅)은 치우천황에게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 그리고 치후천황(蚩尤天黃)은 헌원을 죽이지 않고 살려주고 제후국으로 삼았는데 단군조선에 와서 두 나라가 동방회맹(東方會盟)이 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지나(支那)는 치후천황(蚩尤天黃)이 헌원(軒轅)에게 패해 죽임을 당했다고 허구역사를 조작하고 지나 역사에 엮었으나 이것이 허구임이 밝혀진다.
이는 치우황제가 전쟁의 신(神)으로 한무제도 전쟁터로 가기 전에 치우천황께 제(祭)를 올리고 갔을 정도로 이는 화하족(華夏族)은 배달국시대부터 단군왕검때에도 지배 받은 것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
단군조선은 우(禹)에 치수방법과 홍범구주(洪範九疇) 전수했다
규원사화(閨怨史話)는 단군조선은 이미 만주지방에 여러 강하(江河)를 치수에 힘썼음으로 역사적인 경험으로 70이 넘는 제후국들에게 치수(治水)뿐만 아니라 ‘홍범구주(洪範九疇)’며 모든 문물제도를 단군조선에게서 전수 받았다.
이 당시 치수사업은 단군조선이전 배달국시대부터 치수에 힘썼음을 알 수 있다. 그것은 여와(여(女蝸)씨에 의해서 행해졌다고 회남자(淮南子) 응명훈(鷹冥訓)에 말하고 있다. (徐亮之 中國史前史話113(面).
당시 단군조선은 그 방위(方位)를 색별(色別)에 따라 구분했는데 북방(北方)을 현(玄), 동방(東方)을 람(籃), 서방(西方)을 백(白), 중부(中部)를 황(黃)이라 했으며 오늘날 봉천성 북부에 위치했던 도산국지방(塗山國地方)이라 한다.
이 지방의 사람들의 역사적인 활동과 그 사건들이 왕성했음으로 인해 지나의 고문헌상(古文獻上) 현조(玄鳥), 현이(玄夷), 현방도사(玄方道士)등이 많이 나타났다고 하고 있다.
고대 고대역사를 엮은 사서(史書), 서전(書傳), 우서(虞書), 익직(益稷), 주서홍범(周書洪範)등이 전하는 요순시대의 가장 큰 난제는 황하 기타 아홉 갈래의 강하(江河)가 크게 범람해 백성들을 살지 못하게 하는 일이었다고 한다.
서전(書傳)은 한초(漢初)에 거짓된 위작(僞作)이 많은데 우(禹)의 부(父)의 곤(鯀)이 순조(舜朝)에 배역(背逆)하다가 살해당한 것은 지나의 많은 고서(古書)들이 전하는 바인데 그 당시 치수(治水)가 가장 중요한 것은 사실이었다.
이 시대에 치수사업의 대임(大任)을 맡은 서방족인 하우(夏禹)가 단군조산의 후국(侯國)인 도산국왕녀(塗山國王女)에게 장가를 든 것은 정치적인 관련에서 치수를 잘 하기 위해서였다. 우(禹)가 관계제국의 후원을 얻어 치수사업에 성공하고 그 덕분으로 왕이 된 것은 역사적인 사실로 밝혀진 것이다.
우(禹)가 처음 치수사업에 착수할 때에 치수에 관한 방법을 도산국(塗山國)의 북방
(北方)에 위치한 현이(玄夷)로부터 교도(敎導)받았던 것으로 알고 있는데 공자(孔子)가 편(編)한 지나정사(支那正史)라는 서전(書傳)에 전하지 아니 했다. 그러나 지나의 역대신선통감(歷代神仙通鑑 卷三 五節)에는 적혀 있다.
글을 맺으며-우(禹)의 치수사업에 단군조선과 제후국이 지원했다
단군조선이 많은 제후국을 거느린 것 중의 하나가 치수사업을 비롯해서 선진 문물제도를 제후국들에게 전수(傳授)해 대연방제국을 이룬 것을 알 수 있다.
규원사화는 하우(夏禹)가 헌원계이나 단군조선은 이 제후국들의 선무(宣撫)를 잘 했음을 보는데 하우(夏禹)가 홍수를 요리할 수 있는 비방(秘方)과 금간옥첩(金簡玉牒)을 전한 자가 단군왕검의 장자 부루(夫婁)이었다. 그는 단군조선과 도산국(塗山國) 회의(會議)에 참석한 것도 제후국의 관리차원인 것이다.
단군조선시대에 치수의 비법이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규원사화(閨怨史話)는 [부루 기평수토(기(夫婁 旣平水土)]라 한 대목은 요대(堯代)에 있어서 만주(滿洲), 북지(北支) 양 지방의 홍수와 범람기(汎濫期)에 처했던 것에서 비롯됐다.
이런 와중에 단군조선이 북지(北支)에 앞서 송화강(松花江) 기타 만주(滿洲) 내 각 강하(江河)의 치수사업에 착수해 성공했다는 사실을 반영한 것이다.
그리고 부루(夫婁)가 하우(夏禹)에게 사자(使者)로 가서 전한 금간옥첩(金簡玉牒)이 바로 ‘홍범구주(洪範九疇)’이었다. 하우(夏禹)는 이 선진문헌들을 익히고 그 비방(秘方)으로 치수(治水)에 성공, 왕이 될 수 있었던 것이었다.
따라서 하우(夏禹)의 치수사업성공은 단군왕검이 우(禹)에게 홍범구주(洪範九疇)를 전수한 것과 제후들이 치수사업에 크게 협력했기에 성공했다.
그러나 지나는 단군조선이 전수한 ‘홍범구주(洪홍範九疇)’를 기자(箕子)와 결부시켜 그 내용을 재록(載錄)한 것은 지나의 조작된 것을 알 수 있다.
필자 역시 그전에 투고한 칼럼에는 기자(箕子)가 주무왕에게 전했다고 했는데 이 기록도 우리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서 조작한 것이기에 오늘 바로 잡습니다. (以上은 文定昌,[古朝鮮史硏究],75~98面外 多數書冊 參照, 本文 引用했음).
(以上은 <최태영 [한국고대사]. [한국 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한국상고사]. 崔仁, [韓國學講義],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 [밝혀질 우리역사] 「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九犂系史」 [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 ‘校勘十八史’,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윤진영 編集 「三國史」「우리역사(東夷傳」. 박종원, [한국인자부심 문화열차]. 한동억, [인류시원(人類始原)의 역사이야기]. 우실하, ‘동북공정넘어 [요하문명론], 정희철, [중국은 없다]. 반재원,[鴻史桓殷]. [단군과 교웅], 文定昌,[古朝鮮史硏究],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智勝, [우리 上古史]. 이명우, 최현호[환단고기]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三浦一郞, 小倉芳彦, 樺山紘一 監修 [世界を変えた 戰爭, 革命, 反亂]. 井上 淸, [日本の歷史]. 永原慶二, [絶對中學社會歷史]. 津田秀夫外3人 [‘ひとり で學べる日本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張金奎, [匈奴帝國]. 黃斌, 劉厚生, [箕氏朝鮮史話]. 西島定生 護雅夫, 木村常三郞, 猿谷 要 編著 [世界歷史の基礎知識]外 多數 書冊을,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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