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漢)은 예맥조선(銳麥;濊貊朝鮮)의 속국이었다

입력 2022-01-29 09:4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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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우리나라 역사를 자학반도사관(自虐半島史觀)의 사람들은 단군조선부터라 하고 있는 자가 많으나 이는 우리나라 상고사를 모르는 무지의 소치다.
 
반도사관자들은 일제강점기 조선사편수회의 왜곡역사만을 고집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1만2000년의 역사를 갖는다는 것이 일반상식이다. 이미 밝힌 바와 같이 우리나라 상고사는 유라시아를 지배한 역사다.
 
유라시아는 지구면적의 40%이고 인구는 71%이며 GDP는 60%로 이 유라시아의 80%가 환국시대의 영토로 지나(支那)의 임혜상(林海詳)교수도 인정하며 자기들의 영토는 아주 적었다고 말을 할 정도인데 우리나라 자학반도사관자들은 아직도 연구는 제대로 하지 않으면서 반도역사라고 철면피하게 고집하고 있다.
 
일본학자들도 우리나라 역사는 일본이 천황통치를 정당화하기 위해 조작했다고 말하고 있다. 더구나 전후에 일본학자들은 요시노 마고토(吉野 マコト)와, 가시마 노보루(鹿島 昇)며, 아고 기요히코(吾鄕淸彦) 등 우리나라 반도사관론자보다 더 우리역사를 깊이 연구해서 말한다.
 
그들은 일본역사도 천년을 조작한 것을 수치로 알며 와세다 대학의 미스노 유(水野 祐)교수는 진무 덴노(神武天皇)는 978년이나 조작하였다고 했고, 아고 기요히코(吾鄕淸彦)는 사마천의 사기(史記)도 단군조선역사를 교묘히 왜곡한 것이라고 러시아의 학자 푸틴과 같은 말을 하고 있는데 우리네는 왜 말이 없는가.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는 제멋대로 붓을 놀려 연대도 제멋대로 고무줄같이 늘렸다 줄였다 하는 허구 사서이다. 예컨대 헌원을 배달국 8대 안부련(安夫連, 환웅;서기전3240~서기전3167년)의 신하인 소전(少典)의 아들이라 하고 있다.
 
또한 사마천은 신농(神農)은 소전(少典)의 아들로 서기전 32세기의 사람이고, 헌원(軒轅)은 서기전 27세기의 사람인데도 헌원을 소전의 아들이라 왜곡했다. 이것은 헌원(軒轅)을 500년이나 끌어 올려 헌원황제와 신농(神農)을 형제로 조작했는데도 반도사관자들은 거의가 침묵하고 있다.
 
이런 일이 있을 수 있는 일인가! 신농(神農)은 서기전 32세기 사람이고 헌원(軒轅)은 서기전 27세기 사람인데도 사마천은 제멋대로 붓을 놀려 조작하고 있다.
 
오늘은 지나(支那)가 우리고대사도 폄하하며 지나(支那)의 역사가 대단한 것 같이 과장하여 말하고 전한(前漢)이 우리를 지배한 것같이 조작하나 그와 정반대로 전한(前漢)은 우리의 강성한 예맥조선의 속국이었음을 살펴보고자 한다.
 
헌원(軒轅)은 치우(蚩尤)천황과 싸워 이긴 적이 없다
 
이미 살펴본 대로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는 믿을 것이 못 된다. 그가 쓴 사기(史記)는 사실에 근거를 두지 않고 사실무근의 있지도 않은 것을 사실인양 제멋대로 붓을 옮겨서 지나(支那)에 수치를 안겨주고 있다.
 
예컨대 배달국의 제14대 자오지 천황(天黃;蚩尤)은 전쟁의 신(神)으로 패한 적이 없는데도 헌원이 치우(蚩尤)천황과 싸워서 치우천황을 사로잡아 죽였다고 하는가 하면, 헌원이 신농(神農)과 싸워서 이겨 천자(天子)로 추대되었다고 쓰고 있는데 당치도 않는 일이다. 헌원을 황제라 하는 것은 전설상의 제왕으로, 서경(書經), 시경(詩經)등 고대 지나(支那) 문헌에도 나오지 않는다.
 
헌원(軒轅)은 자오지천황(慈烏支天黃;蚩尤)과 73회 싸웠으나 단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는데 사마천은 이 허구의 역사를 조작했다. 당시 부족국가의 족장인 헌원(軒轅)이 전쟁의 신(神)이라 하는 치우를 사로잡아 죽였다는 것은 소설이다.
 
태백일사 제사(第四) 삼한관경본기(三韓管境本紀) 번한세가편에는 치우가 사방의 나라들을 평정하여 그 영토가 만 여리에 달한다고 하고 있는데 헌원이 하남성 일대에서 세력을 키우고 왕위에 올라 질서를 어지럽게 하자 치우천황은 바로 탁록(涿鹿)의 들판으로 나아가 헌원과 10여년 간 73회 싸워서 모두 승리하고 최종에는 헌원을 사로잡아 서안북쪽 광릉으로 내?i았다.
 
대청광여도에는 헌원 황제(黃帝)의 능(陵)이 표기되어 있는데 이곳이 바로 광릉이요 후일상궁일대이다. 서안(西安)시로부터 동북으로 약 180km 지점으로 섬서성(陜西省) 황능현성(黃陵縣城)을 벗어난 교산(橋山)에 있다. 중공(中共)은 헌원을 한민족(漢民族)의 조선(祖先)으로 현56민족은 모두 동일의 선조(先祖)를 가진 형제와 같은 것이라 말하나 이를 믿는 민족은 없다.
 
헌원은 한민족(漢民族)이 아니기 때문인데 중공은 헌원을 한족(漢族)의 조선(祖先)으로 하며 전 인민이 제전(祭典)집행하며 엄숙히 배례(拜禮)하고 있어서 현 지나인(支那人)들이 헌원을 한족 조선(祖先)으로 생각하고 있다.
 
헌원은 서기전27세기 하남성 일대에서 세력을 키우다가 자오지천황(慈烏支天黃;蚩尤)에게 패하여 상군일대로 쫓겨 난후 섬서성(陜西省) 일부에서 명맥을 이어오다가 진(秦) 혼란의 틈을 타 그 후손이 한(漢)을 건국하게 된다.
 
전한(前漢)은 예맥조선의 제후국(諸侯國)이었다
 
우리나라 국민은 반도사관의 왜곡역사에 길들여져서 한(漢)나라가 우리선조의 한분인 헌원의 후예가 세운 나라라고 하면 믿지 않겠으나 이는 사실이다.
 
전한시대(前漢時代) 서기전202년~서기8년을 전한(前漢)이라고 하는데, 전한이 성립한 서기전 202년 이전부터 예맥조선(銳麥;濊貊朝鮮)이 동주(東周)시대부터 1000년간 대륙을 정벌하고 정복하여 지배한 시대다.
 
일본학자는 서기전 3세기부터 1200년간 흉노(匈奴), 선비(鮮卑), 유연(柔然), 돌궐(突厥), 위굴(回鶻), 토번(土蕃) 등의 유목민족이 강대한 왕국을 건설하여 한민족왕조(漢民族王朝)에 위협이 계속되었다고 하고 있으나 그 이전의 동주시대(東周) 시대부터 대륙을 정벌하고 정복하여 지배하여 온 것을 숨길수가 없다.
 
특히 흉노(匈奴)가 가장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흉노의 시조(始祖)는 삭정(索靖)으로 원래 고조선의 일파였다. 흉노는 몽골고원일대에서 세력을 키워 서기전3세기경 두만(頭曼)이 선우(單于;首長)에 즉위한 이후부터 진(秦)을 공격하고 민심을 잃은 진(秦)을 멸망으로 유도했다
 
그리고 4세기경에는 남하하여 황하유역일대를 휩쓸었다. 더욱이 두만(頭曼)의 아들 묵돌(曼頓)이 선우(單于;首長)에 등극하자 이미 밝힌 바대로 동호(東胡), 월씨(月氏), 정령(丁零), 견곤(堅昆)등을 격파하자 한고조는 예맥을 공격한다.
 
서기전 200년 32만 대군으로 산서성 대동현(大同縣) 평성(平城)까지 진군하였으나 묵돌선우(曼頓單于)가 이끄는 40만 기마군단에 포위되어 격파당하고 유방은 백등산(白登山)으로 도주했으나 사로잡혀 죽게 되었는데 한(漢)은 공주와 함께 교역을 할 관시(關市)와, 매년 세폐(歲幣) 등 증물(贈物)을 바치기로 하여 항복함으로 조약을 체결하여 묵돌선우(曼頓單于)가 이를 받아들인 것이었다.
 
묵돌선우(曼頓單于)는 한(漢)을 속국(屬國)으로 하는데 만족하지 않았다. 그는 이어 돈황(敦煌)을 접수하고 누란(樓蘭), 오손(烏孫), 호갈(呼擖)과 서역26개국을 차례로 예맥조선 지배하에 두었다. 이 당시 우리민족의 주체는 예맥이었다.
 
당시 상황이 이러한데도 섬서성(陜西省)일대의 조그마한 도시국가(都市國家)에 불과한 한(漢)이 광활한 지나(支那)대륙에 구석구석에 군현(郡縣)을 설치하여 통치한 것처럼 과장한 것은 역사가의 붓끝에서 각색된 결과임을 알아야 한다.
 
분명한 것은 한(漢)나라는 예맥조선(銳麥;濊貊朝鮮)의 작은 속방(屬邦)에 불과 한 것이었음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를 과장하여 논함은 역사무지(無知)이다.
 
글을 맺으며 - 조공액수도 해마다 늘려 받았다
 
한(漢)나라가 예맥이 요구하는 조공의 액수가 해마다 늘어났다. 이러자 한(漢)은 조공액수를 감당하지 못하여 예맥으로부터 징벌을 받는 일도 있었다.
 
서기전 177년에는 예맥의 우현왕(右賢王)이 군대를 이끌고 상군(上郡)으로 내려왔다. 한(漢)의 태종(太宗) 효문제(孝文帝;서기전180년~서기전 157년 재위)는 예맥의 요구에 굴복하여 자신의 딸을 늙은 묵돌선우(曼頓單于;서기전174~서기전 161년)에게 보내야 했다. 이같이 한(漢)은 예맥의 속국으로 주종관계이었다.
 
한편 사기(史記)에 한고조(漢高祖)와 노관(盧綰)이 고향과 생일이 같음으로 한고조가 한(漢)을 세운 후 노관(盧綰)을 연(燕)나라 왕으로 임명하였는데 노관이 위만(衛滿)과 같이 배신하여 한(漢)이 위급해지자 예맥조선(銳麥;濊貊朝鮮)에 구원을 요청하자 용감한 기병을 보내어 한고조(漢高祖) 유방(劉邦)을 구해주었다.
 
이러한 관계는 묵돌선우(曼頓單于)가 죽은 후에도 그 아들 군신선우(軍臣單于;서기전160년~서기전126년재위)까지 한경제(漢景帝) 유계(劉啓;서기전157년~141년)는 공주를 바치고 조공을 하며 양국관계는 돈독하였으나 유철(劉徹;서기전 141년~서기전 87년 재위)이 즉위하면서 예맥에 배신하기 시작하였다.
 
한(漢)의 유철(劉徹)은 예맥의 군신선우(軍臣單于)를 암살하기 위하여 서기전 133년 마읍(馬邑)이라는 곳에 매복작전을 펼쳤다. 이에 군신선우(軍臣單于)는 한(漢)과 체결된 조약을 파기하고 직접 병력을 이끌고 나가 유철군을 맞아 전쟁이 시작하였다. 한(漢)은 위청(衛靑) 등을 보내 저항했으나 부대가 전멸 당했다.
 
이 마읍(馬邑)이라는 곳은 고구려의 옛 땅으로 당(唐)이 침공하여 고구려와 격전을 벌였던 곳이며 고구려가 멸망한 후에는 나당(羅唐)간 전쟁의 격전지였다.
 
우리나라 강단파들은 왜곡하고 조작된 허구의 역사를 가르치는데 분명한 것은 우리나라가 단 한 번도 한(漢)의 지배 받은 적이 없었음을 제대로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역사는 5000년 역사가 아니라 1만2000년이다. 국보132호 징심록(澄心錄)은 우리역사는 1만2000년의 역사임을 밝히고 있다. (以上은 崔仁, [韓國學講義], 62면~80面, 정희철, [중국은 없다]. 139면~148.面,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 85面~92面과 國內外의 多數 書冊을,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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