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나(支那)의 중원지대에 유방(劉邦)이 한(漢)을 건국했을 때 만리장성의 서북(西北)에서는 이미 예맥조선(銳麥;濊貊朝鮮)의 묵돌선우(曼頓單于)가 기마민족의 강대한 예맥(濊貊)이라는 예맥조선제국(銳麥朝鮮帝國)이 세워져 있었다.
이 묵돌선우는 애첩의 아들을 후계자로 결정했기 때문에 정부인의 아들 두만(頭曼)은 부친에게 원한이 많아 부하들을 시켜에게 묵돌(曼頓)을 향해 활을 쏘도록 했다. 묵돌은 고슴도치가 되어 죽었고 그후 두만(頭曼)이 예맥 선우(單于)가 됐다.
그는 바로 부친 묵돌선우가 진장(秦將) 몽념(蒙恬)에 공격당해 방기(放棄)하고 있었던 예맥의 고지(故地) 오르도스를 되찾고 서기전 201년에는 장성(長城)을 넘어 마읍(馬邑;山西省 朔原)에 진격해서 수비하고 있던 한왕신(韓王信)을 항복케 하고 태원(太原)을 압박했다. 이에 유방은 32만 군사를 이끌고 평성(平城)으로 진군했으나 두만선우(頭曼單于)가 이끄는 기마군단에 참패 당했다.
한(漢)의 후세사람들은 이 패전을 “평성(平城)의 수치(恥)”로 불렀다. 이 치욕을 만회하기 위해 한왕실(漢王室)은 제7대로 한무제가 즉위 하자마자 재위기간(서기전141년~서기전87년) 힘을 키우며 역전 기회를 도모하고 있었다.
한편 한무제(漢武帝)가 암살하려던 예맥조선의 군신선우(軍臣單于)가 타계하자 그 아들 이치사(伊雉斜;재위 서기전 126년~서기전 114년)가 선우(單于)로 즉위하면서 예맥의 세력이 약화되기 시작했는데 한무제(漢武帝)는 이 기회를 이용해 예맥을 공략하게 된다.
즉, 한무제(漢武帝) 유철(劉徹)은 대규모의 병력을 편성하여 예맥을 공격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한군(漢軍)에는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이라는 유능한 군사(軍事)의 영웅이 계속 나와서 한무제가 죽을 때까지 양국의 싸움은 평온한 날이 없었다. 이로 인하여 양국(兩國)의 피폐함도 심해졌다.
오늘은 예맥과 한(漢)의 300여년 전쟁과 이와 관련된 사실을 살펴보고자 한다.
한무제(漢武帝)가 예맥을 공략한 비밀병기
예맥에 대하여 굴욕적인 관계에 있던 전한(前漢)은 그 후 국내지배가 안정화하자 서기전 141년에 한무제(漢武帝)가 제7대 왕으로 즉위하기에 이르러서 예맥과의 그 역학관계를 역전하기 위한 정책으로 바뀌어 갔다.
그것은 서기전 139년에 부하인 장건(張騫);?~서기전 114년)을 서방 이리 분지(盆地)의 대월씨(大月氏)에 파견해서 예맥의 동서로부터 공격할 전략을 짜고 있었다. 그러나 장건(張騫)이 한(漢)을 나오자마자 예맥에 붙잡혀 10년 가까이 예맥에 구류하게 됐다.
그 후 탈출해서 대월씨(大月氏)에 도착한 것은 서기전 129년경이었다. 그러나 그가 우여곡절 끝에 장안에 돌아온 것은 서기전126년으로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으나 13년간의 서역의 곤란한 여행으로 얻은 것이 많았다.
그것은 서역(西域) 제국(諸國)의 지리, 기후, 인정, 민족, 습속, 물산 등의 정보를 지나(支那)에 가져와서 한무제(漢武帝)로 하여금 대규모, 서역을 지배할 야망을 결심하게 하였다. 그 후 역대 왕들도 상권과 교역 루트를 확보하기 위한 결정적인 정보를 제공한 것이었다.
한무제(漢武帝)는 장건(張騫)이 귀국하기 3년 전에 예맥토벌의 군세를 일으켜 차기장군(車騎將軍), 위청(衛靑)과 곽거병(霍去病)을 북방에 파견했다. 특히 위청(衛靑)은 11년간에 걸쳐서 예맥과 싸워 예맥을 물리치는 무훈을 세웠다.
이 싸움으로 예맥은 오르도스 지방을 잃을 뿐 아니라 일족(一族)의 태자(太子) 어단(於單)과 휘사왕(渾邪王)이 전한(前漢)에 망명하는 등, 그 반수는 고비사막의 북방으로 ?i기게 되었다.
이것은 지금까지 한무제(漢武帝)가 연전연패에서 승리하게 되어서 예맥은 음산산맥(陰山山脈)의 남록(南麓)까지 ?i기게 되었는데 그 비밀은 철(鐵)에 있었다.
지나(支那)에서는 이미 기술한대로 서기전 500년경부터 철 생산이 시작 되었으나 오랫동안 청동기가 병용되는 시대가 계속되어 진(秦)시대에 있어서도 화살촉은 동(銅)이었다.
그런데 한고조시대(漢高祖時代)에는 약간의 철제(鐵製)의 화살촉이 사용된 것으로 생각되나 전술적으로는 종래와 같은 방법이었기 때문에 적(敵)의 수가 많으면 당시 예맥조선의 기마군단을 도저히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나 한무제(漢武帝)시대가 되면서 주철(鑄鐵), 즉, 주물의 기술이 개발됐기 때문에 대량생산이 가능하게 됐다. 이렇게 해서 대량생산된 철의 족(鏃)은 예맥조선의 기마군단을 격파하는데 크게 기여하게 됐다.
강성한 예맥, 내분으로 분열돼 약화
한편 대륙을 지배한 강성한 예맥은 서기 48년 남북으로 분열하여 그중 북예맥은 중앙아시아로 가서 힘을 비축하여 유럽으로 들어가서 게르만 민족의 대이동을 유발하게 한다.
이렇게 된 배경을 보면 한무제가 예맥정복에 의욕을 불태우기 시작한 서기전129년부터 매년 예맥에 공격을 시작하게 됐다. 그리고 서기전 124년에는 위청(衛靑)과 다른 6장군이 10여만의 대군으로 술에 취해있는 예맥의 용장(勇將)인 우현왕(右賢王)에 야습(夜襲)으로 승리하자 한무제는 기뻐서 위청(衛靑)을 대장군의 칭호를 신설해 그를 맞이했다.
그러나 위청(衛靑)의 별동대인 조신(趙信)과 소건(蘇建)은 예맥에 패하여 조신은 예맥에 항복하고 소건은 목숨을 건져 단신으로 귀환하는가 하면, 한무제의 처조카인 곽거병(霍去病) ; 서기전?~서기전 117년)은 18세의 젊은 나이로 800명을 데리고 2028명의 예맥을 물리치고 돌아오기도 했다.
서기전 121년에도 한(漢)이 다시 예맥에 공격해오자 예맥의 이치사선우(伊雉斜單于)는 휴도왕(休屠王)을 보내어 이를 막게 하였으나 그는 예맥의 기마민족답지 않게 싸우지 않았다.
이에 예맥의 이치사선우(伊雉斜單于)는 서방(西方) 수비의 실패한 책임을 물어 혼사왕(渾邪王)과 휴도왕(休屠王)을 죽이려 했다. 이에 두 왕은 자신들의 안위를 위해서 예맥의 남여 4만을 이끌고 항복하여 장안(長安)에 이르렀다.
이들은 이치사선우(伊雉斜單于)로부터 처벌을 걱정한 혼사왕(渾邪王)은 예맥사람답지 않게 같은 예맥의 휴도왕(休屠王)을 죽이고 곽거병(霍去病)에게 투항하였다. 이로 인하여 감숙성일대(甘肅省一帶)가 한(漢)으로 넘어갔던 것이다.
이 일은 예맥의 왕중에 한(漢)에 항복한 것은 고금에 없었던 일이라고 외국의 학자들도 말하고 있을 정도로 혼사왕(渾邪王)은 예맥조선의 수치로 보고 있다.
이때 항복한 숫자는 10만이라 발표되고 혼사왕(渾邪王)은 1만호(萬戶)의 영유(領有)하는 탑음후(漯陰候)로 봉(封)해 졌다. 이로 인하여 곽거병(霍去病)의 명성은 일약 높아지게 된다. 그러나 그는 서기전 117년 24세의 젊은 나이로 병사하고 만다.
여기서 위청(衛靑)과 곽거병의 가계(家系)를 보면 위청(衛靑)은 서기전119년 까지 7회 출병하는데 그는 한무제 유철(劉徹)의 처남이고, 곽거병(霍去病)은 한무제(漢武帝)의 처조카로 이들은 5만의 기병과 10만의 보병(步兵)을 가지고 분열로 약해진 예맥의 거점을 공격한 인물로 알려져 있다.
글을 맺으며 - 사서 없다고 예맥조선, 낙랑조선 덮은 지나
예맥조선은 우리나라 역사체계에서 낙랑조선과 함께 제외되었는데 이는 지나(支那)와 일본이 우리 사서를 다 없애고 게다가 일제강점기에 수십만 권의 서책을 모아 불태우고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그들은 우리국민들을 속이고 예맥조선과 낙랑조선을 아예 없는 나라로 제외시켰으나 엄연히 존재했던 자랑스러운 나라들이다.
예맥조선은 단군조선시대부터 있던 3000년이 넘는 구국(舊國)이라고 지칭하는 대륙 창여(昌黎)지방에 있었던 국가였고, 낙랑조선은 서기전 1237년부터 서기 32년까지 있었던 한서권(漢書卷)28과 사마천의 사기(史記) 조선열전(朝鮮列傳) 주(注)에 엄연히 나와 있는 국가들이다.
지나인(支那人)들은 무녕지방(撫寧地方)에 위치한 남후(藍候)의 조선(朝鮮)을 예맥조선과 낙랑조선이라고 하고 있다. 하지만 한무제가 죽고 양국이 다 같이 장기전으로 피폐했으니, 예맥은 서기전 57년 5선우(單于)가 세워지는 분열상태가 되었다가 서기48년에 예맥이 남북으로 갈라진 것이 맞다.
이후도 한(漢)은 반초(班超) 등이 때때로 예맥을 공격했으나 오환(烏桓), 선비(鮮卑)등도 한족(漢族)을 위협하게 되어 민족항쟁이 복잡하게 이어짐을 알 수가 있다.
우리는 한(漢)나라를 대단한 나라로 말을 하나 진실과는 거리가 멀게 과장되어 있음을 제대로 알아야 역사를 바로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나라 역사와 지나와 일본역사를 연구하면 할수록 역사가 뒤집혀 있다는 것을 통감하게 된다.
(以上은 <최태영 [한국고대사]. [한국 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한국상고사]. 崔仁, [韓國學講義], 김세환, [고조선 역사유적지답사기]. [동남아역사유적지를 찾아서]. 吳在成 [밝혀질 우리역사] 「三國史 高句麗本紀」, 「百濟本紀」, 「廣開土境平安好太王碑 硏究」, 「九犂系史」 [東夷歷史 쇠集]. [(右犂)의 歷史] ‘校勘十八史’, [百濟는 中國에 있었다]. 윤진영 編集 「三國史」「우리역사(東夷傳」. 박종원, [한국인자부심 문화열차]. 한동억, [인류시원(人類始原)의 역사이야기]. 우실하, ‘동북공정넘어 [요하문명론], 정희철, [중국은 없다]. 반재원,[鴻史桓殷]. [단군과 교웅], 文定昌,[古朝鮮史硏究], 「韓國史の延長」, 「古代日本史」. 智勝, [우리 上古史]. 이명우, 최현호[환단고기]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杉山徹宗, 「眞實の中國四千年史」.三浦一郞, 小倉芳彦, 樺山紘一 監修 [世界を変えた 戰爭, 革命, 反亂]. 井上 淸, [日本の歷史]. 永原慶二, [絶對中學社會歷史]. 津田秀夫外3人 [‘ひとり で學べる日本史].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張金奎, [匈奴帝國]. 黃斌, 劉厚生, [箕氏朝鮮史話]. 西島定生 護雅夫, 木村常三郞, 猿谷 要 編著 [世界歷史の基礎知識]外 多數 書冊을, 參照하고, 本文을 引用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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