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한(後漢)은 고구려에 의해 멸망된 나라였다

입력 2022-05-29 13:0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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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을형 숭실대 전 법대 교수
 
왕망(王莽) 등 신라의 김씨(金氏)가 세운 '신(新)'이라는 나라는 서기 8년~23년에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의 교체기에 겨우 15년간의 단명 왕조(王朝)가 왕망의 신왕조(新王朝)였다. 그런데 이 왕망의 시대에 일어난 농민반란 중 최대 규모의 난(亂)이 ‘적미(赤眉)의 난’이었다.
 
왕망의 급격한 개혁정책 하에서 많은 민중반란이 일어났는데 ‘적미의 난’은 그 대표적인 것으로 한때 장안(長安)까지 점령했는데 이 틈을 타서 한(漢) 부활을 꿈꾸는 유현(劉玄)이 난을 일으켰다.
 
그런데 그 휘하에 있던 유수(劉秀)가 유현을 제거한 후, ‘적미의 난’을 진압하여 한조(漢朝)를 재건한 자가 후한 광무제로 등극하였던 것이다.
 
후한의 광무제(光武帝)는 후한의 왕이 되자마자 자신의 기반을 강화하기 위해 신라 김씨에 대한 정치보복을 했는데 그 정도가 상상을 초월한 무자비 그 자체였다.
 
이에 신라(新羅) 김씨들은 이름까지 바꿔가며 요동(遼東)으로 피난을 하였는데 그 주역이 바로 성한왕(星漢王) 김알지(金閼智)다. 그 후 서라벌(徐羅伐)은 기림왕(基臨王) 10년인 서기 307년 다시 신라로 국호 복귀하게 되었던 것이다.
 
신라 김씨를 몰아내는데 성공한 후한(서기25년~220년)은 주변 나라들을 침략했다. 예컨대 대완(大宛)은 페루시아계 유목 민족이 세운 나라로서 서기전 104년에는 무제(武帝)가 이광리(李廣利)를 원정시켜 이를 제압한 것이었는데 전한과 후한의 시대에는 일시적 외신(外臣)이 된 적도 있다고 하고 있다.
 
또한 서강(西羌)은 지나 서부(西部) 또는 서북부에 있었는데 후한시대가 되니 정치적 통일을 이뤄 그 땅의 한인(漢人)인 호족(豪族)과 관리의 과혹(過酷)한 수탈 및 혹사(酷使)에 대해서 때때로 반란을 일으켜서 제국(帝國)을 괴롭혔다.
 
그리고 기타 한(漢)의 주변에는 티베트계의 저족(氐族)과, 베트남반도 남부까지 진출하고 임읍(林邑) 및 크메르족의 국가인 3세기 전반에는 인도와 지나(支那)가 국교를 연 부남(扶南)이 있었다. 부남(扶南)과 임읍(林邑)지방에는 평화적으로 이민(移民)까지 하며 인도문화를 크게 넓히고 세력범위를 넓혀갔었다.
 
오늘은 이 후한이 힘을 길러 강해지면서 고구려에도 도전하자 고구려는 후한을 좌원(坐原)에서 잇달아 패망하도록 한 것을 말하려 한다.
 
후한이 반초(班超)에 의한 서역 정벌
 
먼저 후한의 명제(明帝)는 서기 72년 서역 지배를 위해서 보고(寶固;?~88년)를 기용해서 황하상류의 량주(涼州)에 주둔시켰다. 보고는 천산북도(天山北道)의 입구 부근을 지배하고 있었던 ‘차사(車師)’를 공격하여 이를 정복하였다.
 
그리고 73년에는 반초(班超; 서기 32년~102년)도 일대(一隊)를 인솔하여 차사(車師)의 이웃인 천산북로와 천산남로(天山南路) 북도의 분기점에 상당하는 땅을 갖고 있는 이오(伊吾)를 토벌하여 그 땅에 둔전병(屯田兵)을 두었다.
 
이후 반초는 서역제국(西域諸國)의 초무(招撫)의 책임을 지고 서역에 주류(駐留)를 계속하였다. 그는 우선 투르크스탄 남방에 있는 오아시스 국가인 선선(鄯善)에 36인의 부하를 이끌고 가서 선선왕(鄯善王)도 후한에 따르게 하였다.
 
또 반초는 천산남도의 서쪽 600km에 있는 우전(于闐)에 파견되었다. 그때에도 30인으로 출발시켜 남도 연안에 있는 오아시스 국가를 차례로 정압(征壓)하여 우전왕(于闐王)의 설득에도 성공하였다.
 
이를 본 후한에서는 서기 74년에 서역도호(西域都護)를 부활하여 이를 차사후부(車師後部)에 두었다. 그러나 75년에 보고(寶固)가 귀국하자 다시 서역제국이 돌아서자 반초는 귀국 명령을 거절하고 서역제국을 원정(遠征)하였다.
 
반초의 결심을 안 장제(章帝)는 두 번에 걸쳐서 1800명의 군세(軍勢)를 반초에게 보냈다. 이에 반초는 다시 천산남도에 있는 우전(于闐)까지 진출하여 사차(莎車)를 항복 받고, 다음은 다쿠라마칸 사막의 서북에 있는 소륵(疏勒)도 다시 굴복시켰다. 그리고 서방의 대국(大國)인 대월씨(大月氏)가 후한군(後漢軍)을 공격해 왔으나 이도 격퇴시켰다.
 
더욱이 반초는 예맥에 따르고 있는 천산 북도연안의 오아시스 국가인 온숙(溫宿), 고묵(姑墨), 구자(龜玆) 등을 복속시켰다. 90년에는 대월씨(大月氏)를 격퇴해 공을 세웠기에 후한은 91년에 반초를 서역도호(西域都護)로 임명했다.
 
어쨌든 반초는 ‘비단길’을 확보했기 때문에 부하의 감영(甘英)을 대진(大秦;로마帝國)까지 파견하였다. 반초는 오랫동안 후한을 떠나서 귀국을 원함으로 31년 만에 후한에 도착하였으나 나이가 70세로 그 이듬해 서기 102년 사망하였다. (以上은 杉山徹宗,「眞實の中國四千年史」.109面~113面 參照, 引用하였음).
 
후한도 고구려에는 적수가 될 수 없었다
 
후한은 여러 나라를 침략하며 영역을 넓힌 제국(帝國)으로 발전되자 고구려에도 도전하게 된다. 이에 고구려는 후한과 전쟁에 돌입하게 되는데 전쟁 초기에는 양국이 팽팽한 접전을 벌였으나 고구려를 당할 수는 없었다.
 
후한이 고구려와 싸울 수 있었던 것은 전한의 무제(武帝) 때부터 쇠를 부어 만든 주철(鑄鐵)과 주물(鑄物) 기술이 개발되어 후한에서도 무기가 대량 생산이 가능하게 되어 철촉(鐵鏃)도 예맥, 고구려가 쓰던 것이 후한에도 쓰게 되었다.
 
후한이 수(隨), 당(唐)을 물리친 고구려에의 도발은 잘못된 것이었다. 서기 184년 좌원(坐原)에서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수차 대패함으로 후한이 몰락을 하게 되는데 그것은 고구려와 싸움에서 패한 것이 주 원인이었다.
 
이해에 후한은 좌원(坐原)에서 고구려와의 싸움에서 패함으로서 국내가 혼란으로 빠지자, 각처에서 농민 난이 일어나게 되었다.
 
이는 후한 말 태평도(太平道)를 넓힌 장각(張角)이 중도(衆徒) 수십만명을 얻어서 세력을 확장하여 이들이 ‘황건적(黃巾賊)’의 종교적 농민반란을 일으킨 해와 같은 서기 184년의 일이다.
 
이해에 후한은 좌원(坐原)에서 고구려와의 큰 싸움에서 패함으로 후한은 멸망하게 된 것이다. 후한이 고구려와의 전쟁은 식량이 확보되지 않아 나라의 백성들이 굶주리게 되면서 백성들이 민란(民亂)으로 발전한 것이었다. 이 당시의 상황을 보면 후한은 제4대 화제(和帝) 이후 유제즉위(幼帝卽位)가 계속되어 모후임조(母后臨朝)의 정치는 외척(外戚)의 전횡(專橫)이 심하였다.
 
이때 황제가 권력을 장악하려고 할 때는 환관의 힘을 빌려서 외척을 물리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거기서 실제로는 정권이 외척과 환관 간에 뺏으려 하는 것인데 이때 유학(儒學)의 영향을 받은 관료의 저항도 나타나나 당인(黨人)이라 불리는 관료는 바로 탄압되어 버렸다. 소위 “당고(黨錮)의 금(禁)”인 것이다.
 
황건적의 난이 일어난 원인도 후한 말의 184년 태평도(太平道)를 넓혀온 장각(張角)의 수십만 중도(衆徒)에 의해서 일제히 봉기(蜂起)하였다. 정부는 황보고(皇甫고), 주준(朱儁) 등의 장병들을 파견하여 진압에 성공하였으나 이미 한(漢)의 명운은 다되고 난진압의 군웅 중에서 조조(曹操)가 대두하게 된 것이었다.
 
글을 맺으며 - 많은 전란은 인구의 대폭 감소로 이어져
 
사가(史家)들은 황건적의 난을 계기로 후한이 멸망하였다고 평가하지만 후한의 멸망은 좌원에서 고구려에게 잇달아 대패(大敗)한 것이 멸망 원인이었다. 이로써 후한이 성립한 서기전 25년에서 서기 220년에 멸망이었다.
 
후한은 도읍을 장안(長安)으로부터 낙양(洛陽)에 옮기고 서기 220년 멸망하기까지 195년간 계속되었으나 좌원에서 두 차례의 패배로 후한은 걷잡을 수 없는 혼란상태에 빠지고 홍건(紅巾)의 난(亂)까지 일어나자 중원은 이를 진압한답시고 지방호족(地方豪族)들의 대두에 의해 중앙집권적인 체제가 어지럽게 되면서 위(魏), 촉(蜀), 오(吳)의 삼국시대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삼국시대가 되면서 끊임없는 싸움은 전한 말(前漢末; 서기전 2년 당시 5959만명이던 인구가 후한 초대 광무제(光武帝)가 붕어한 57년에는 2100만으로 크게 감소하게 된 것을 봐도 비참한 당시 상황을 알 수가 있다.
 
이 인구 대감소의 최대 이유는 전한과 후한의의 교체기에 일어난 왕망의 [신(新)]나라시대에 일어난 농민반란 중 최대 규모가 된 것이 적미의 난인데 왕망(王莽; 서기전 45년~서기 23년)의 급격한 개혁정책 하에서 많은 민중반란이 일어났으며 ‘적미의난의 난’은 그 대표적인 것이었다.
 
왕망은 전한(前漢) 원제(元帝)의 황후의 생질(甥姪)로 태어난 그는 딸을 10세의 평제(平帝)에게 시집보냈는데 평제가 겨우 5년간의 재위로 죽자 서기 8년에 왕망은 황제로 즉위하고 국명(國名)을 지금까지의 한(漢)으로부터 '신(新)'으로 변경하였다. 신라 출신의 왕망은 백성을 생각해서 새로운 정책들을 폈다.
 
그것은 새로운 관료제도와 토지의 국유화정책, 노비(奴婢) 금지령을 내는 등 대개혁을 하려했으나 관료(官僚)와 지방호족(地方豪族), 거상(巨商)들의 반대에 직면하고 경제도 궁핍에 빠져서 농민들은 한(漢)의 부흥을 요구하며 화북일대(華北一帶)에서 반란이 일어난 것이 ‘적미의 난’이었던 것이다.
 
이 기회에 한(漢)의 일족(一族)인 유수(劉秀; 서기전 6년~서기 57년)가 거병(擧兵)하여 장안에 입성해서 왕망은 죽임 당함으로, 신(新)은 15년의 단명 왕조였다.
 
유수(劉秀)는 후한(後漢)의 황제로 즉위한 후한(後漢)도 좌원(坐原)에서 고구려에게 잇달아 싸움에서 대패함으로 멸망한 것이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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