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양의 로마제국 같은 대제국 ‘단군 고조선’

입력 2014-06-28 18:33: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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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 중국사서 기록, 명확하지 않아 주의해야
 
중국사서의 맹점은 연대가 정확하지가 않고 동방의 동이족과 중원내의 동이족을 포함한 구이족(九夷族)에 대한 기록에서 구이족(九夷族)인지 지나족(支那族)인지 민족계통을 거의 구분하지 않고 있는데 있다. 따라서 중국은 한민족의 역사도 화하족(華夏族=支那族) 역사에 포함시킬 수 있다는 식의 삐뚤어진 사관을 갖고 있다. 남의 나라 역사와 문화도 자기나라 역사문화라고 자처하는 중국과 일본에 우리는 지금 어떻게 대처하고 있는가. 중국사에서 은(殷), 요(堯), 금(金), 원(元), 청(淸)은 동이족, 거란족, 여진족, 몽골족, 여진족 들이다. 그러나 중국은 이들의 역사를 모두 중국의 역사에 포함시키고 있다.
 
재야학자들은 하(夏), 진(秦), 조(趙), 촉(蜀), 오(吳), 제(齊), 송(宋), 양(梁), 진(陳) 등 중원에 있던 나라들이 모두 고조선족의 후예들이었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허황된 말이 아니다. 배달국시대 치우(蚩尤)와 헌원(軒轅)간의 싸움은 살기 좋은 옥토에 사는 동이족과 땅이 박하고 사람이 살기 어려운 고원사막지대의 화하족(華夏族)과의 싸움이었다. 헌원(軒轅)은 동이족이었으나 화하족의 우두머리가 돼 있었기에 치우와 싸운 것이다. 중국의 평야곡창지대인 화북, 산동을 포함한 동부해안지역은 동이계가 오랜 세월 점거해 중국을 지배했다. 황하, 양자강 지역은 원래부터 동이족이 점유해서 삼국시대까지 점거했으며 당시 동방 구이족(九夷族)들의 위상은 매우 높았다. 그런데 중국이 이 같은 동방족의 역사를 기록하지 않은 것은 동방 구이족(九夷族)이 오랜 세월동안 중원대륙을 지배한 사실에 대한 배타심에서 나왔다.
 
중국은 고대부터 지명과 지도를 바꾸면서까지 중국역사를 조작해 왔으나 중원부터 요서, 발해만, 요동반도, 만주와 한반도까지 단군조선, 번한, 번조선, 마한, 막조선이 있었고 수십 개의 소국이자 제후국이 삼한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국명과 부족명칭에 대해 중국의 사서(史書)는 의도적으로 정확하게 기술하지 않았다. 예컨대, 고조선의 국명이 조선이었음에도 낙랑, 낙랑조선, 예, 맥, 예맥조선, 한(韓), 진한, 변한, 한국(韓國), 고려, 고구려, 마한 등 종주국과 제후국, 부족국가, 부족명칭 등을 제대로 구분도 못하고 있다. 이웃의 국호가 조선임에도 부족의 명칭을 마구 가져다가 예맥조선이니 낙랑조선이니 했을 뿐만 아니라 한(韓), 또는 진국, 진한 등 제멋대로 기술했다.
 
무성의한 휘치필법으로 우리의 역사는 대강대강 축소하고 중국 역사는 과장해서 집필됐음을 역사를 연구하는 사람이라면 능히 알 수 있다. 지도와 지명 또한 마구 고쳐서 본래의 위치를 다르게 바꿔 그 위치를 부정확하게 했다. 고조선도 북쪽에 있었다하기도 하고 동쪽에 가져다가 넣기도 했다. 조선이 대륙에 있는 조선인지 만주와 한반도에 있는 조선을 말하는 것인 지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단군조선에 대하여는 그대로 기록하고 있다. 일연은 삼국유사에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지금으로부터 2000년 전에 단군왕검이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개창(開創)해 이름을 조선이라 하니 요임금과 같은 시기다”고 기록했다. 여기에는 신화나 설화요소는 한 군데도 없다. 고조선의 개국 시기는 삼국유사(三國遺事)나 제왕운기(帝王韻紀) 등에 고대 중국 요임금과 동시라고 기록돼 있는 것이다. 고려 말 공민 왕 때 사관인 백문보(白文寶)가 “우리 동방이 단군으로부터 3600년이 지났다”고 처음 단군기원을 썼다. 서력기원보다 2333년 앞선 단군기원은 요임금의 즉위년인 무진년(서기전 2333년)을 단군건국년도로 하여 대한민국 건국 당시의 법령으로 공포했다. 이번 칼럼에서는 단군 고조선에 대해 살펴보고 져 한다.
 
고고학 상으로 보는 고조선
 
우리 한민족은 환국과 배달국 환웅족속의 세력을 이르는 동안 곰토템 종족과 결혼해 출생한 우리조상들의 유력한 지도자를 보게 되는데, 그 시기가 4300여 년 전이다. 그는 신시시대의 여러 종족을 통일하고 아사달에 나라를 열었다. 그 지도자가 단군임금이고 그가 세운나라를 후일 한자화 해 조선이라 한다. 위만조선 등과 구별되는 고조선(옛조선)이란 명칭은 신라 이후 쓰기 시작했다. 김정학 선생은 “고고학 상으로 고조선을 볼 때, 요령성 대능하 유역에서 우수한 청동기유물들이 많이 출토되고 있다. 거기에 지배자의 권력이 집중되고 강대했음을 말하는 것으로 풍부한 농업생산력을 기반으로 기마의 기동성과 청동무기를 갖고 군소읍락구가들을 정복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요동반도 신석기중기 이래로 밭농사가 많이 행해진 곳이어서 농산력을 바탕으로 청동기문화가 발달했다. 그 유적은 청동기시대 전기부터 후기까지의 고조선 국가형태를 암시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윤내현 교수도 “한반도와 동일계통의 비파형동검 등 청동유물과 토기가 요령성에서 발견된 것으로 보아 4400년 전에 벌써 고대국가 단계였다”고 말하고 있다. 근래 한반도 내에서도 수십만 년 전 주거인들의 구석기시대 유물이 발견되고 있다. 오래전부터 한반도에 주거하던 종족이 있었던 것이다. 신시대 말기 단군개국 초에 이미 농경사회로 발전했으며, 또 청동기 문화기에 들어와서는 광대한 영역의 강대한 국가를 이루었다고 보아도 조금도 무리가 없다. 식민사관의 주구들의 논리는 가당치가 않은 것이다.
 
처음에는 나라이름을 아사달이라 하고 배달임금이라 불렀지만 후일 조선, 단군왕검이라는 칭호로 바뀌었다. 종교가 중요한 지배원리였던 시대의 단군은 제천(祭天)을 주관한 제주(祭主), 천군의 칭호이다. 또 왕검이란 사람이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말의 임금을 왕검이라 했던 것이다. 이로써 단군이전의 환국, 신시시대 배달국과 단군조선(고조선) 시대를 분명히 구분한 것이다. 단군조선이 지속되는 동안 때로는 단결해 강성했고 때로는 흩어져 쇠약하기도 했으나 단군의 고조선은 2000년(2096년) 넘게 존속했다. 세상 사람들에게 전해진 단군임금만을 추려 47대로 압축된 것으로 보고 있다.
 
우리가 단군의 자손이란 말은 단군이 개국한 나라의 백성이란 말이다. 수많은 한족(韓族)들이 모두 혈통 상 단군의 피를 받았다는 게 아니다. ‘단군 할아버지’라는 칭호는 ‘대통령 할아버지’처럼 조상을 친근히 부르는 말일 뿐이다. 단군은 설화에서 말하는 곰의 아들도 신(神)도 아니며, 고조선을 개국한 우리의 실존 조상이라고 역사 첫머리에 찍어낸 것이 정인보(鄭寅普)선생이다. 우리 역사의 출발점을 정확히 본 것이다. 우리의 역사관도 필자의 역사관도 이와 동일하다. 조선은 승유억불정책을 폈지만 최태영 선생의 세대까지도 단군을 변함없이 국조(國祖)로 받들어 조선의 아이들이 ‘천자문’ 다음으로 배우는 교과서 ‘동몽선습(童蒙先習)’에서 단군이 요임금과 같은 때에 고조선을 건국했다고 가르쳤다. 이는 의문의 여지가 없이 조선족 대대로 수천 년간 전해진 시대상식이다. 백 년 전 대한제국의 신식군대에서 군가로 부르던 “단기 내려 고강산에 우리나라 새롭도다”하는 노래는 최태영 선생도 어렸을 때 동요처럼 불렀다고 말했다.
 
일연이 쓴 삼국유사의 단군과 숙신씨(肅愼氏)의 역사
 
고려 충렬왕 때 국사(國師)를 지낸 승(僧) 일연은 1280년경 경북 군위에 있는 인각사에서 삼국유사를 마무리 한다. 삼국유사는 삼국사기의 임금, 신하중심으로 기록한 것과는 달리 ‘고기(古記)’를 인용하여 단군의 고조선이 환웅족, 곰 토템족의 삼부족(三部族)이 연맹에 의해 성립된 개국과정을 설명하면서 민간설화, 신화, 전설까지 첨가해 한 덩어리로 혼합해 뒤섞어 놓았다. 이것이 위서(魏書)의 고조선 개국기사보다 더 자세하고 긴 설명이기 때문에 단군의 고조선 개국전체가 마치 신화인 것처럼 외양을 갖게 된 것이다. 신용하 교수는 “그러나 ‘고기(古記)’의 기록이 신화적이라고 해서 위서(魏書)의 역사적 사실 기록이 달라지는 것이 아니다”고 단군형성을 논한 저서 ‘한민족의 형성과 민족사회 학’에서 말하고 있다. 문제의 신화나 전설은, 국가 창건 이전 환국과 신시시대 배달국의 사상과 제도를 고조선이 이어받은 전통일 따름이다. 이런 신화나 전설은 숙신씨(肅愼氏)의 역사에도 명기(明記) 돼 있다. 인류의 역사는 씨족시대, 부족시대, 부족연합시대, 귀족시대, 군주시대, 민주시대로 발전했다. 4300년 전은 석기시대로 씨족시대, 부족시대다. 이 시대에는 동서민족이 몇 백리 안에서 꾸물거리는 소부락생활을 했다. 이때 민간설화, 신화, 전설은 많이 전해지고 있다.
 
일연이 단군조선의 개국을 ‘삼국유사’에 기록하면서 ‘고기(古記)’와 함께 인용한 위서(魏書)는 중국의 사서임에는 틀림없으나 오늘날 전하는 위서(魏書)가 아니다. 정인보(鄭寅普) 선생은 ‘조선사연구’에서 “그것은 왕침(王枕)의 위서(魏書)가 우리나라에 들어온 듯하다”고 했다. 일연이 인용했던 위서(魏書)에는 고대조선을 예찬하는 기록이 상세했기에 송(宋)대에 이르러 중국에 유리하도록 내용을 윤색(潤色)할 즈음, 조선에 관한 기록도 삭제·변작한 결과로 짐작된다고 했다. 최남선 선생은 ‘삼국유사해제’에서 “그 위서(魏書)를 오늘날의 위서(魏書)로만 보는 것은 정견(正見)이 아니다”고 했다.
 
여기서 한 예를 든다면 최인 선생은 “중국의 역사 변조로 4300년 전 중국문헌에 나타난 것은 오직 숙신씨(肅愼氏) 뿐이다. 그러면 숙신씨(肅愼氏)는 모든 동이족의 시조가 된다”고 고 했다. 발해국지장편(渤海國志長編 卷十六, 旅俗考 第三)에 보면 ‘근세 인류학자가 동북민족은 모두 숙신(肅愼)에서 나왔다’고 했다. 이는 또한 동이족의 시조가 숙신씨(肅愼氏)라는 것을 가리킨 것이다. 최인 선생은 “단군신화는 숙신씨(肅愼氏)의 역사를 묘사한 것이다. ‘역사적 신화는 허공중(虛空中)에서 나온 것이 아니고 실생활을 근거로 나온 것이다”고 했다. 아울러 그는 “단군신화가 숙신씨(肅愼氏)의 실생활과 완전히 부합된다”고 덧붙였다. 최인 선생의 저서 ‘한국의 재발견’ 제1장 제3절에는 ‘단군이라는 명칭은 단궁(檀弓)을 잘 쏘는 무사라는 뜻이다’라고 했다. 죽서기년(竹書紀年, 卷上)에는 “숙신씨(肅愼氏)가 순(舜)25년(4300년)전 만 여리(萬餘里) 동 떨어진 중국에 궁시(弓矢)를 수출했다”는 기록이 있다. 이는 대국을 가리킨 것이다. 즉, 숙신씨(肅愼氏)가 4300년 전에 대국을 건설한 것이 단군이 4300년 전에 개국했다는 신화로 표현 된 것이라고 했다.
 
단군은 신화인물이 아닌 영명한 성군이었다
 
이처럼 우리 한민족은 환국, 배달국에 이어 중국에 4300년 전에 단군이 대국을 건설했다. 일제가 역사를 왜곡·변조하고, 조작된 위서(僞書)를 갖고 단군을 신화로 몰고 가고 있지만 한마디로 웃기는 일이다. 세종실록 권75에는 “단군은 조선의 시조이다”라고 했고 ‘삼국유사’보다 10여년 뒤 인 1287년 편찬된 이승휴의 ‘제왕운기(帝王韻紀)’에는 “요동에 별천지가 있으니 중국과는 아주 구분되며 삼면은 바다이고 북쪽은 대륙과 이어진 중방(中方) 천리 땅이 조선이다. 천하의 명승이고 평화로운 고장, 예의 바른 집으로서 중국인이 다른 미개국과는 다른 문화국이라고 일컫는 나라다”고 했다. 이를 보면 고대 중국인들이 나라를 세우고 그 두령(頭領)은 거의 우리한민족이 담당했다. 즉, 중국인이 나라를 세우고 왕을 우리 한족(韓族)을 모셔간 것을 많이 볼 수 있다.
 
“단군은 개국하여 조선의 국토를 차지하고 임금이 됐다. 시라(尸羅), 고례(高禮), 예(濊)와 맥(貊)은 모두 단군의 자손이다. 열국이 모이고 헤어지며 강성하고 쇠퇴해 삼한이 이뤄졌다. 주(州)와 현(縣)이 산곡 간에 흩어져 각각 나라라 일컬으며 서로 침략했다. 그 중의 대국은 부여(夫餘)와 비류국(沸流國)이었고, 다음은 삼국(三國)과 남쪽의 옥저(沃沮)와 예맥(濊貊)이었다. 그들 왕의 조상은 모두 단군의 계통이었음은 물론이다”
 
삼국사기의 편찬자 김부식(金富軾)은 사대주의 입장에서 단군 고조선사(古朝鮮史)를 의식적으로 피해 단군과 상고사를 잘라내고 신라, 고구려, 백제 삼국부터 역사를 저술했다. 그래도 고구려본기에 와서 “평양은 선인(仙人)왕검의 옛 도성이다”라고 했는데, 이는 위치에 대한 논란에 앞서 왕검이 고조선 건국의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이다. 여기서 말하는 평양은 지금의 북한 평양이 아니다. 그가 평양을 기자의 근거지로 보지 않았음도 주목된다.
 
이규보(李奎報)가 지은 ‘동명왕편’(東明王編)에는 “지난 계축년 4월 구삼국사(舊三國史)를 보고 김부식이 중찬한 국사에는 이 부분이 매우 약술돼 있다. 김부식은 의도적으로 당시 건재했던 고대 역사책을 통해 단군의 고조선 건국을 당연히 알았다. 그러나 중국과 충돌해 가면서 우리 상고사의 정확한 연대와 지역을 알아내거나 우리가 중국보다 앞섰음을 말하려 하지 않았다”는 내용이 있다. 요동 옛 땅을 회복하려는 의지가 없어 ‘고대기록의 내용이 거칠다’는 등의 변명을 늘어놓고 발해지역까지도 줄여 고대사를 흩으려 얼버무린 책임이 크다. 그는 역적행위를 한 자이다.
 
여기서 고대사를 상고하는데 그 지명과 경계를 찾지 않고 간단히 넘어가도록 한 것은 독자의 머리를 혼란케 하지 않으려는 생각에서다. 태백산을 묘향산이라 하는 식으로 괄호로 표기된 지명 다수는 후세에 덧붙여진 것으로 보고 있다. 역사기록과는 별도로 노래를 통해서도 상고사 고대사 단군의 개국과 그 역사가 구전(口傳) 돼 내려왔다. ‘세년가(世年歌)’가 그것이다. 10월 수릿달 이면 하늘과 조상에 제사하는 제천이 소도(蘇塗)에서 행해졌다. 여기서 신지(臣智)라는 관명의 제관(祭官)이 조상의 건국과 통치, 업적, 후인들에게 가르칠 일들을 노래한 것이 ‘세년가(世年歌)’로 전해졌다. 제천의식은 대개 삼한시대 혹은 삼국시대까지 계속된 것으로 보인다. 기록에 의하면 삼한과 백제 등 여러 나라에 각각 별 읍(邑)이 있어 솟대를 세우고 제천(祭天)을 행했다. 최근까지도 ‘솟대백이’라는 지명은 다른 여러 지방에도 있음이 확인된다. 고조선의 수두교는 요(遼), 금(金) 등 중국 각지에 널리 분포됐다. 우리민족이 여러 차례 국난을 겪으면서도 단군조상에게 제사하며 세년가(世年歌)를 불러온 사실은 ‘세종실록’과 ‘표제음주동국사략’(標題音註東國史略)에도 나와 있다. 일본가고시마 미야마(美山)에서도 단군사당을 건축하고 일제강점기간까지 해마다 단군제사를 받들며 세년가(世年歌)를 불렀음이 확인되고 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 고대사를 생각한다’와 ‘한국상고사’, 최인 ‘한국학강의’,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강동민 ‘불쌍한 대한민국’, 한창건 ‘환국·배달·조선사신론’,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한창호 ‘한국고대사 발굴’, 한정호 ‘조선민족사’,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김부식 ‘삼국사기’, 日本國書 刊行會 ‘神皇紀’,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梶村秀樹 渡部學 編者 ‘日本に訴える シリ-ズ.’日本と朝鮮,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西嶋定生·護雅夫·木村尙三郞·猿谷要 ‘世界歷史の基礎知識1·2’.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 ‘世界史史料集’ 외 다수서책을 참고하고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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