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지난달 26일 일본 메이지대학(明治大學) 교우회 전국대의원대회가 있어 일본에 다녀올 시간을 갖게 됐는데, 많은 교우와 친교 할 수 있어서 좋았다. 그런데 아쉬운 것은 일본인들도 일제가 왜곡한 역사를 그대로 배워서 역사를 잘 모르고 있었다는 점이다. 자신들의 조상이 어디로부터 왔는지도 제대로 모르고 있음을 재확인 했다. 메이지대학의 많은 교우들과 대화를 나눴는데, 귀국하는 아침에는 대학원 교우인 가네쓰나 (金綱久夫) 교우가 필자의 숙소인 한국YMCA까지 찾아와서 ‘한·일 간의 친선이 잘 돼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 어떻게 하면 좋습니까’라고 묻기에 기탄없이 말을 많이 나눠 보았다.
일본은 우리와 1600년간 교류를 해왔다. 3세기까지도 일본은 석기시대의 삶을 못 벗어난 원시상태였다. 당시 이런 일본에 처음에는 가야(伽倻)가 다음은 백제(百濟), 신라, 고구려가 차례로 오늘의 일본에 은혜를 베풀었다. 동경대의 에가미나미오(江上波夫) 교수가 기마민족설을 언급했는데, 그 기마민족은 가야(伽倻)이고 가야는 일본에 분국(식민지)인 미나마(任那)를 두어 일본에 대륙문화를 전수시켰다. 백제는 왕인박사가 천자문, 논어, 바둑, 벚꽃 등 12가지를 갖고 가서 일본을 깨우쳤다. 그리고 마침 TV에서 스모중계가 있었던 터라 몽골출신 하쿠호(白鵬) 요코스나(橫網)가 30회 우승했는데, 이 스모도 일본씨름이 아니라 가야의 노미스쿠네가 전한 것이다. 이 노미스쿠네가 스모의 아버지로 우리가 전해준 한국 부여의 씨름이다. 이 같이 우리는 일본에 은혜를 베풀었으나 일본은 은혜를 감사할 줄 모르고 우리를 침략하며 괴롭혔다. 우리는 유사 이래 932회의 외침을 받았는데, 거의가 일본의 침입이었다. 침입이라기 보다는 왜구(倭寇)의 노략질 수준이었다. 왜구의 구(寇)는 바로 도둑이란 의미다. 양민을 죽이고 도둑질하는 왜구의 노략질은 국력이 극도로 쇠약했던 고려 말에 집중됐다. 1350~1391년 40년 동안 무려 591회의 노략질 기록이 있다. 노약자를 못살게 구는 야만성이 짙은 일본은 여전히 반성이 없는 것에서 일본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다.
따라서 지금 한·일관계가 정상화하는 데는 아베신조와 같은 사고방식으로는 안 된다. 침략을 정당화하는 아베의 19세기적 사고는 정상이 아니다. 똑같은 전범국이었던 독일은 ‘아베가 지금 퇴진을 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독일은 ‘작금의 일본정부 행태는 19세기 초의 상황이다. 한·일 두 나라가 힘을 합치면 세계를 주도 할 수 있는데 안타깝다’고 지적한다. 실제로 일본 민족의 선조는 한국인이다. 일본인은 평생 한번은 미에겡(三重縣) 미애시(三重市)에 있는 이세신큐(伊勢神宮)와 낭아노겡(長野縣)에 있는 센코지(善光寺)에 가서 참배하는데, 그들 신위(神位)가 전부 한국에서 온 유민이 아닌가. 그 후손들인 지금의 일본인들도 결국 한국에서 온 유민의 자손이다. 지금 일본인들은 단일민족이다. 그들은 대륙이동설인 반사이잇게이(萬歲一系)라고 하지만 아니다. 연말 12월 31일 홍백전의 가수는 필자가 유학시절 보니 거의 한국계였다. 미소라 히바리, 미야코 하루미, 모리신이치, 이스키 히로시 등 그 가수의 85% 이상이 모두 한국의 피를 나누고 있었다.
일본은 힘이 있으면 침략하는 습성이 있는 나라다. 일본은 청·일전쟁 때 1억5000만앵(圓)의 배상과 대만을 청국으로부터 받았다. 당시 일본국 예산의 2배에 해당하는 것 이상이었다. 또한 러·일전쟁에서는 그 8배인 17억2000만앵을 받았고 만주사변에는 당시 일본의 국민총생산(GNP)의 4배나 되는 이익을 챙겼다. 이러한 옛 꿈을 다시 재현시키려는 지금 아베의 행태는 상식으로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진정한 한·일관계가 정립되기를 바라지만 한·일 간의 정상화는 진정성 있는 자세로 해야 가능하다. 필자는 이상과 같은 이야기들을 기탄없이 전하고 귀국했다. 이번 칼럼은 단군조선의 통치 형태와 일본이 우리 한민족이 세운 나라라는 사실 등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고조선(단군조선)의 통치형태
단군조선은 서기전 2333년 전부터 환국과 배달국에 이어 2096년 간 존속하는 동안 추, 맥, 예, 진번, 임둔, 발, 직신(숙신), 양이, 양주, 유, 청구, 고구려, 고죽, 옥저 신라, 진(辰) 등 대부족 연맹체적 성격으로 형성됐다. ‘조선사편수회’가 말하는 허구의 왜곡을 믿어서는 우리 역사는 바로 설 수 없다. 고대 양자강 회하지역에 조선인이 많은 제후국을 건설했는데, 그 중에는 서언(徐偃)이 세워 1천년을 누리면서 중국의 36~50여 개국의 조공을 받은 서(徐)같은 나라도 있었다. 또 불이지국 같은 정복국가도 있었다. 불이지국은 지금의 직예, 산동, 산서 등 여러 성을 정복하고 발해란 이름을 주기도 한 나라다. 고죽국은 지금의 북경주변, 영평부에 있었다. 그리고 옛 이름이 부여(夫餘)인 하얼빈은 조선족이 최초로 개척한 평야(불)다. 또한 청천강 이남의 한반도 지역에는 후에 마한, 진한, 변한, 삼한이 있었음은 이미 기술 했는데 이 삼한은 각각 많은 제후국을 거느린 봉건제 국가였다. 이들은 고조선 왕국의 직접적 통치를 받지는 않았다. 그러나 청천강 이북 동부 만주지역에 위치한 진국(辰國)을 그들의 공통된 주인으로 받들어 간접적으로는 고조선의 정치질서 속에 들어와 있었다. 또한 종교적으로는 단군을 중심으로 한 고조선 동일문화권에 속했다. 당시에 마한 지역이었던 지금의 강화도에 단군조상과 관련된 제천단이 있는 것은 이러한 사실을 알게 한다. 고대사화를 지배하는 중요한 원리가 종교였다는 점에서 삼한은 고조선의 정신적, 종교적, 문화적 질서에 지배됐다고 할 수 있다.
우리 한족(韓族)은 상고시대부터 여러 부족국가를 이루었다. 다수의 여러 제후국들이 서로 나누어서 다스렸다는 것은 제왕운기, 규원사화, 단군세기, 태백일사 등 여러 고사(古史)에 구체적으로 기록돼 있다. 고조선의 국가 구조는 소읍, 대읍, 왕검성으로 형성된 읍제국가였다. 즉, 고대 봉건제국가였다. 당시 읍의 거주 인들은 혈연의 씨족, 또는 부족 간의 관계를 뜻하는 것이다. 고조선의 통치는 군사력과 행정조직을 중심으로 한 정치력도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또 한편으로는 종교적 권위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따라서 고조선의 통치자는 종교적 최고 권위자인 단군을 겸하고 있었다. 아울러 종교의식인 제천을 통해 연맹 부족 간의 결합을 꾀했다. 제정일치의 체제였다는 점이다.
고조선의 임금은 정치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모든 권위를 장악함으로서 신권정치(神權政治)가 가능했던 것이다. 고조선은 이러한 국가구조와 통치조직을 갖고 동북아시아의 질서자로 군림하며 중국과는 여러 차례 전쟁을 하면서도 빈번한 교역 등 깊은 관계를 가져왔다. 고조선은 후기에 와서 서기전 280년 연(燕)의 장수 진개에 의해 2천리에 이르는 지역을 침략 받은 적도 있으나 이후 국경이 난하 부근 만번한으로 정해진 것으로 보아 고조선이 잃었던 2천리 지역과 그 이상을 되찾았다. 이러한 사실은 고조선왕국이 강한 군사력을 가진 강대한 국가였음을 말해준다. 규원사화와 단군세기는 모두 고조선이 47대에 걸친 단군임금의 치세와 업적을 기록하고 있지만 그 연대와 내용에 다소 차이가 난다. 이는 두 역사서가 다른 자료를 바탕으로 했기 때문이지만 두 역사서는 귀중한 역사자료다.
고조선(단군조선)을 질시한 일본의 만행(蠻行)
일제는 조선을 침략하면서 일본보다 유구(悠久)하고 우월한 역사를 가진 조선인들에게 그 옛날 상고시대와 고대시대에 환국과 배달국 그리고 조선(고조선=단군조선)이라는 강대하고 광활한 영역의 독립국가가 있었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서든지 잊어버리도록 해야만 통치가 수월하다는 판단을 했다. 환국은 53대 3301년, 배달국 환웅천황은 1565년, 단군조선 47대 2096년까지 일본은 모두 실재가 아닌 신화(神話)라는 사상을 퍼뜨리기 위해 혈안이 됐고 실제로 행동으로 옮겼다. 환국이 기재된 삼국유사를 비롯해 수십만 권의 우리 역사서를 불태우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를 통해 일찍이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기도 했다는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을 사실처럼 날조하고 확산시켰다. 한국 고대사 왜곡의 앞잡이 이마니시 류(今西 龍)의 부류들은 “한국사는 신라 때부터 시작이라”는 당치도 않은 설을 ‘실증주의 사학’이라고 호도하고 그 이전 수천 년의 한국고대사를 못 믿을 것으로 돌려버렸다. 그러나 어느 것이 실증주의 역사인지 숨길 수 없었다. 오히려 일본의 양심 있는 학자들은 우리 역사가 실재한 사실을 솔직히 말하고 있다. 자신의 조상을 없는 것으로 부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을 부정하는 것이야 말로 금수만도 못한 행태나 다를 바 없는 탓이었다.
가시마 노보루(鹿島 昇)는 “일본의 황통사(皇統史)는 거짓역사이지만…일본이 짧은 기간 청·일, 러·일전쟁에 승리하고 한 때 세계지배를 꿈꿀 정도로 자부심과 용기를 갖고 발전한 것은…오로지 역사위조의 공적이다”라고 실토했다. 또 고조선사와 일본의 진정한 고대사인 상가야 왕조사(上伽倻 王朝史)가 연접돼 있는 것을 바로알고 있는 아고 기요히코(吾鄕淸彦) 같은 학자는 “일본서기(日本書紀)와 고사기기(古事記)는 진정한 역사서가 아니다”라는 것을 밝혔다. 그는 이에 대해 상세히 연구하고 발표했다. 이로 인해 당시 일본군부와 신직(神職)이 개입된 황통사가들로부터 많은 박해를 받은 것도 개의치 않고 학자의 양식을 지켰다.
이에 반해 우리나라 학노(學奴)들은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다. 이미 기술한 바 있는 1988년 일본 후지산(富士山) 아래 지하서고에서 비서(秘書)인 ‘미야시다 문서(宮下文書):신황기(神皇紀)’를 통해 진실을 확인할 수 있었던 것이다. 1200년 전의 이 문서에는 ‘백제인이 와서 일본을 가르치다가 그대로 일본 왕이 됐다’고 전한다. 또한 일본 궁내성소장의 상기(上記)에는 ‘일본에 건너온 단군자손의 73대 손이 일본 진무(神武)일왕이 됐다’는 기록이 있으다. 아울러 단군세기와 상기에는 단군조선의 3대 가륵(嘉勒) 때인 단기 160년(서기전 2173년) “반란을 일으킨 예읍의 소시모리를 참했는데, 그 후손에 섬승노(陜野奴)가 있다”는 기록이 있다. 즉, 베폐명(裵幣命)과 낭아스네히코(長髓彦)이 내란평정의 기록이다. 베폐명(裵幣命)이야기는 환단고기 중 단군세기에 나와 있는 기록이고 낭아스네히코(長髓彦)의 내란은 상기에 나와 있다.
고조선이 왜를 친 기록과 일본을 세운 한민족
①우리가 왜를 친 기록들은 위의 “반란을 일으킨 예읍의 소시모리를 참하였는데, 그 후손에 섬승노(陜野奴)가 있었다. 그는 해상으로 도망가 세 섬에 의거해 천왕이라 칭했다”고 단군세기에 기록에 나타나 있다. ②35대 단군 사벌(沙伐)조에는 서기전 723년 “장수 언파불합(彦波弗哈)을 보내어 규슈(九州)의 구마소(熊襲)를 평정했다”는 기록이 있다. ③36대 단군 매륵(買勒)조에는 서기전 667년 “섬승후(陜野侯) 베폐명(裵幣命)이 병선을 몰고 가서 왜 세 개의 섬의 반란을 진압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에 상당하는 상기(上記)의 기록에 의하면 “조선인이 선단 70척에 군대 1천명을 싣고 왜(九州)로 쳐들어가 낭아스네히코(長髓彦)로 하여금 내란을 일으키게 하고 임금으로 내세웠다가 몇 십 년 후 평정했다”는 것이다. 이 때의 왜는 규슈(九州)에서 활동하는 집단이었으며, 지금의 일본 본토로 진출한 것은 이로부터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의 일이다. 후일 일본에서 진무(神武)왕이란 이름으로 불리게 된 왜의 지도자가 낭아스네히코(長髓彦)의 대치세력이었는데, 신무(神武)왕의 아버지 대에 일어난 이 전쟁에 신무(神武)네 집안 3대가 나서서 싸우다 신무(神武)왕의 두 형도 죽고 신무(神武)대에 가서 가까스로 수습됐다. 신무(神武)왕에게는 후일 다른 왜왕 대에 있었던 업적까지 덧붙여져 신격화(神格化)되는데, 일본사의 믿을 수 없는 부분이 바로 이런 것이다. 배폐명(裵幣命) 혹은 섬승노(陜野奴), 섬승후(陜野侯)라고 불린 존재의 왜 정벌은 매우 오래고 복잡한 역사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우리가 가서 왜를 정벌하고 임금을 내세웠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선단규모가 70척 또는 500척이라고 한 것으로 미루어 국가적 정벌군으로 보인다. 일본상고사 연구자들도 이 사실에 주목한다. 신무(神武)의 가계(家系)는 상기(上記)에 의하면 일본에 온 단군의 손의 73대가 됨으로 종래는 왜 땅의 통치권을 두고 우리나라 종족끼리 전쟁을 벌인 것이었다. 일본 학자들은 이를 두고 ‘대리전(代理戰)’이라고 한다. 단군세기에서 배폐명(裵幣命)의 사실을 접하면서도 진척되지 못하던 연구가 일본에서 나온 고대사서 상기(上記)와 신황기(神皇紀) 등을 통해 분명해 졌다. 여기서 단군조선은 더 이상 부정할 수 없는 것이며, 일본은 완전히 고대조선 사람이 가서 건설한 것임이 드러난 것이었다. 하지만 일본은 이를 숨기려 한다.
이밖에도 두 책의 단군통치 기록에는 은(殷)나라와 군사적 알력, 제후국들의 부침(浮沈), 반란의 평정, 단군과 여러 제후들의 모임, 역대단군의 치적, 나라를 세운 일, 중요한 관직의 임명, 결혼, 특별한 짐승과 약초이야기 등 국가사직에 있었던 일들이 기록돼 있다. 고조선 말기에는 강력한 제후인 남후(南侯)가 마침내 여타제후를 거느리게 되니 조정의 단군임금을 높이는 이가 드물게 됐다. 마지막 단군 고열가(古列加) 때에는 국가재정을 충당하지 못했다. 고열가(古列加)가 사퇴하고 아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되자(죽었음을 의미) 나라가 없어지고 말았다. 그 후 여러 제후가 무력으로 다투되 남후(南侯)가 뛰어나서 여러 제후를 거느리고 국정을 다스리니 이에 열국이 되었다고 북애(北崖)는 규원사화(揆怨史話)에서 쓰고 있다. 규원사화를 본 후 이병도 박사도 단군조선은 엄연히 실재했음을 시인하고 있음에도 그 제자들은 왜곡된 역사를 아직도 고집하고 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를 생각한다’ ‘단군을 찾아서’,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한창호 ‘한국고대사 발굴’, 한정호 ‘대조선민족사’, 강동민 ‘불쌍한 대한민국’,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한창건 ‘환국·배달·조선사신론’ ‘주해 ‘환단고기’, 김부식 ‘삼국사기’, 張曉 ‘韓國の民族とその步み’, 日本國書 刊行會 ‘神皇紀’, 三省堂編修所編 ‘各國別:世界史の整理’,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せい いくと ‘新漢族から大和民族’ 외 다수서책을 참고하고 최태영 선생의 원문을 많이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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