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 첫 통일제국 진(秦)은 한민족이 정벌했다

입력 2014-08-30 21:20: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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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
 
조선사편수회가 조작·왜곡한 35권의 조선사는 해방 후에도 반도식민사관의 학노들에 의해서 그대로 국사교과서 편집을 주도하는데 이용돼 역사의 기초를 망가지게 했다. 또 그들 제자들도 조작된 식민사관의 잘못된 역사를 해방 후 지금까지도 그대로 이어오고 있다. 우리의 역사는 중국과 일본에 의한 왜곡뿐만 아니라 이 학노들에 의해 초·중·고, 대학에서 왜곡된채 교육됐다. 이처럼 왜곡된 내용은 또다시 중국과 일본에 그대로 옮겨져 허구·조작·날조된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등의 역사기술로 나타나고 있다. 특히 한민족 보다 약했던 어불성설의 한나라가 한사군을 설치해 망한 고조선을 다스렸다고 기술하고 있다. 한사군은 애초 존재하지도 않았다.
 
또한 중국지도 책에도 고조선의 광활했던 영역(領域)을 한반도 내로 축소시켰다. 나아가 평양 등지에 기자묘를 만들고 제사까지 지내고 있으니 이들이 제정신들인가. 여기에 북한은 단군릉까지 만들어 거들고 있다. 기가 막힐 일이다. 기자의 묘는 지금 중국의 산동성 몽현(蒙縣)에 있고 우리와 아무관계가 없다. 조선시대는 명나라 눈치 보노라 조선 관료들과 선비들이 그렇게 했다고 치더라도 오늘 우리 사학계의 무지가 하늘에 닿고 있다. 해방 후 70년이 되도록 어린 학생들에서부터 이런 왜곡된 역사를 가르치고 있으니 이 나라가 바로 서겠는가. 필자는 지금 우리 사회의 혼란은 민족사관에 입각한 역사가 정립돼 있지 않아 일본이 변질시킨 가치관이 낳은 역사무지의 혼란에 따른 현상으로 본다.
 
작금의 세월호 후유증도 역사무지 혼란과 시대착오적 행동
 
일부 국민들의 애국심은 찾아 볼 수 없고, 눈앞의 이익에만 골몰하고 있는 경향이 너무 심하다. 국가와 민족에 대한 공동체의식이나 연대의식을 찾아 볼 수 없다. 개인주의, 이기주의, 집단이기주의, 한탕주의가 판을 치고 있다. 지금 우리가 얼마나 정신을 못 차리고 있는 것인가를 알 수 있다. 잘못된 역사와 과오에 대해 반성하고, 새로운 결심과 각오로 민족정기를 찾기 위한 노력을 해야 한다. 안타깝게도 정부 관련 기관과 정치권이 역사를 바로 찾고 세우는 일에 무감각한 현실이 우리를 슬프게 하고 있다.
 
지금 세월 호 사태에서 보는 바와 같이 국가의 대의나 사건의 실체를 모르는 한심한 지경에 까지 와 있다. 정치인이나 일부 극단적인 단식행동은 상식을 벗어나고 정상이 아니다. 세월 호는 개인회사의 사고로 회사가 책임질 문제이지, 국가 책임을 우선시하는 세월호 법안은 상식 밖의 주장이다. 국가를 위한 순국한 애국지사나 학도소년병, 재일청소년병의 6.25참전에 대한 보상의 법과 억울하게 학살된 국민의 보상법도 제정이 안 된 상황이다. 그럼에도 개인회사가 저지른 사고까지 국가가 책임지라고 떼만 쓰면 다 된다는 사고방식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런 식의 풍토는 달라져야 한다. 작금의 사태를 보고 있으면 역사를 잃어버린 민족은 망한다는 교훈을 되새기게 한다. 지금은 지식기반 사회이지 떼를 써서 법을 만드는 시대가 아니다. 악순환의 고리는 끊어져야 한다. 막무가내로 자기 목적을 관철시키려는 시대가 아니다. 시대착오적인 행동이다.
 
역사의 지문을 지우며 잘못된 과거도 돌아보지 않고 있는 오늘의 우리는 중병에 걸려있는 중환자나 진배없다. 중국과 일본의 역사왜곡이 여전히 거침없는 상황에서 모두가 지각 있는 국민으로 거듭나야 한다. 이를 통해 민족정기를 되찾았으면 한다. 오늘은 우리한민족이 중국의 한족을 정복하고 지배한 사실을 계속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중국 첫 통일제국 진(秦)은 항우가 아닌 한민족 예맥이 정벌
 
중국은 한무제(漢武帝)가 우리 한민족을 정복하고 마치 지배한양 역사를 왜곡했지만 사실과 다르다는 것이 세계 역사학자들에게 의해서도 밝혀졌다. 한나라가 우리를 정복하고 지배한 일은 전무했다. 우리가 중국을 지배한 것이 오히려 판명됐다. 우리가 한(漢)나라에게 지배된 것이 아니라 우리 한민족인 예맥, 부여와 고구려가 중국을 정벌하고 지배했다. 중국은 중국을 통일한 진(秦)과 진을 이은 한(漢)을 대단한 나라로 부각시키지만 진(秦)과 한(漢)도 부여, 예맥, 고구려에는 미치지 못했다.
 
고대역사를 제대로 고찰해 보면 중국은 진(秦)을 타도한 자는 진승(陳勝)과 항우(項羽)라고 선전하지만 이 조차 아니다. 자치통감(資治通鑑 卷十五, 漢紀七, 太宗孝文皇帝下)에 보면 진(秦)을 타도한 자는 다름 아닌 예맥과 남월(南越)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당시 자치통감(資治通鑑)에 나타난 전쟁 상황을 보면 진은 병사(兵事)에 대한 형세를 알지 못해 싸우면 적에게 포로가 되고 주둔하면 사병이 전멸됐다고 했다. 1592년(임진년) 일본이 조선을 침범했다가 겨울 동장군에 낭패를 본 것과 같이 전멸을 한 것이다. 예맥인은 한랭(寒冷)한 지대에서 생활해 한기(寒氣)에 견디는 성질이 있고 강서(江西)의 월인(越人)은 서기(暑氣)에 견디는 성질이 있으나 진(秦)의 군대는 한기(寒氣)와 서기(暑氣)에 견디지 못해 전방에 수비하는 병사는 변지(邊地)에서 죽고 후방에서 수송하는 부대는 길에 쓰러졌다고 했다.
 
이렇기 때문에 당시 진(秦)의 백성들은 전쟁에 출전하는 것을 사형장에 가는 것과 같이 생각해 두려워서 도피했다. 이에 진(秦)은 죄인을 징발해 출전케 했다. 이것이 소위 적술(謫戌)이다. 적술(謫戌)이라는 말은 귀양살이 군인이라는 뜻이다. 적술(謫戌)을 선발하는 순서는 제일 먼저 관리 중 죄 있는 자였다. 이어 데릴사위(가난한 자), 상인, 과거의 상인, 상인의 아들과 손자, 마을 좌측에 사는 자(가난한 자) 등의 순서로 징발했다. 그런데 그 징발이 순서대로 진행되지 않아 출전하는 자가 분원(憤怨)을 품었다. 또한 죽는 해(害)가 있을 뿐 조금의 보답이 없었고 전사자(戰死者)에게 한 푼의 보상이 없었다. 이에 백성들은 극열(極熱)의 화(禍)가 자신에 미칠 것을 잘 알고 불평이 고도에 달했다.
 
예맥과 남월(南越)의 전란으로 혼란한 이 때에 진승(陳勝)이 대택(大澤)에서 혁명군을 일으켜 진을 타도하자고 외치니 천하가 유수같이 호응했다. 이는 강권으로서 국민을 억압한 폐해다. 그러나 실제로 진을 타도한 자는 예맥과 남월(南越)인 것이다. 그 당시 전황을 보면 재래 중국 사가들은 진(秦)이 예맥과 남월의 넓은 영토를 얻으려는 탐욕에서 진(秦)이 예맥과 남월(南越)을 공벌(攻伐)하다가 성공치 못하고 천하가 혼란에 빠졌는데, 이 때 진승(陳勝)과 항우(項羽)가 궐기해 진(秦)을 타도했다고 하지만 이는 표면상으로 보는 중국의 선전이다. 실제로 진을 타도한 자는 예맥과 남월(南越)이다. 우리나라 역사교과서 구성은 위서인 중국문헌을 인용해 그대로 게재했다.
 
중국의 사서 전한서와 후한서에 역사조작 사실이 드러난다
 
한서(漢書 九十九中 列傳 第六十九 王莽)에 보면 중국은 우리의 한민족을 두려워하며 특히 예맥과 부여의 정벌에 노심초사한 면을 볼 수 있다. 또한 한서(漢書 二十四下, 食貨志第四下)에는 예맥이 한나라 문제(文帝), 경제(景帝) 시대에 한(漢)나라를 정벌해 많은 해를 끼쳤다고 했는데, 당시 한(漢)나라는 부여나 예맥을 정벌할 만큼 강대하지 못했다. 이 당시 부여나 예맥 고구려는 강한 나라였다. 한서(漢書)에 나타난 기록도 부여, 예맥이 다시 일어나면 대우(大憂)라고 했다.
 
전한서(前漢書七十八, 蕭望傳 第四十八)에 보면 소망(蕭望)이 예맥에게 신(信)을 지키고 양보하는 것이 국가보존의 양책(良策)이라고 주장하니 천자가 그 주장을 채택해 예맥에 굴복하고 배상금까지 바쳤다. 당시 예맥의 강대함은 한서(漢書)도 기록했을 정도다. 또한 화하족(華夏族)인 한(漢)나라 역시 우리나라와 겨룰 정도의 나라가 아니었다. 한은 위만조선에도 밀리는 상황이었다. 서기전 109년부터 전군을 동원해 위만조선을 쳤으나 승리하지 못하고 그 책임을 물어 한나라 장수 양복, 순체 등이 사형에 처해진 사실은 이를 증명한다. 이겼으면 왜 장수들이 죽임을 당하겠는가. 중국 한서의 조선열전에는 왕검성이 함락했다든지 한나라 군이 우리와 대적해서 이겼다는 등의 기록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위만조선도 한나라의 침략으로 멸망한 것이 아니다. 위만조선은 선정을 베풀지 않아 쿠데타로 망했다. 그런데 한나라 군에 의해 조선이 망했다는 주장과 역사기술은 어찌된 것인가.
 
사기(史記), 위만조선 망한 후 사군(四郡) ‘한민족이 다스렸다’
 
위만조선이 쿠데타로 망한 후 설치된 사군(四郡)은 한나라가 다스리던 한사군이 아니다. 이것도 우리 한민족인 참, 최, 음, 협이라는 4인이 평주, 홰청, 추저, 날양이라는 조선 4군이라고 사기(史記)에 명시되어 있다. 사기에는 그 위치가 발해만(渤海灣)에 국한 한 것이 아니라 발해연안에서 산동반도라고 했다.
 
한민족의 역사를 왜곡·삭제한 사마천도 이 문제만은 사실대로 기술했는데, 이를 두고 마치 한나라의 사군을 주장하고 있는 학자들이 있으니 이들은 도대체 어느 나라 학자인가. 아무리 한자를 모르는 자라도 한글 본, 사기열전을 자세히 검토해보면 사실진위를 파악 할 수 있다. 중국 25사에 한사군이라는 말이 많지만 한마디로 중국고대 사가들의 역사왜곡이다. 한문기록은 잘못 해석하면 원래의 의미가 다르게 해석 될 수 있기에 조심해야 한다.
 
중국 25시 등에서 주장하는 낙랑(樂浪), 현토(玄菟), 진번(眞番), 임둔(臨屯) 등 4군은 새로 만든 것이 아니라 원래 예부터 있어 왔던 군현(郡縣)의 이름이며, 태수라는 직책의 사람들이 대대로 다스려 온 지방이었다. 그 위치에 대해서는 중국 측 사서들에는 전부가 발해만 북경 가까운 곳을 가리키는데 해방 전부터 마치 한사군이 조선을 멸한 지역에 세워진 식민지 같이 조작하고 홍보·교육시켜 왔다. 이는 반도식민사관 학자들에 의해 저질러진 행태다. 이제 일제와 반도식민사관 학노(學奴)들에 의해 일제시대 조작, 말살, 왜곡, 축소된 반도사관으로 점철된 가공할만한 역사조작의 결과물이었던 35권의 조선사는 그 원흉이기에 바로 잡혀야 한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최인 ‘한국학강의’,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한창건 ‘한국고대사 발굴’, 한정호 ‘대조선민족사’, 강동민 ‘불쌍한 대한민국’,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삼성(三聖)의 역사’,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최진열 ‘대륙에 서다’,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한창건 ‘환국·배달·조선사신론’ ‘주해 ‘환단고기’. 김부식 ‘삼국사기’, 日本國書 刊行會 ‘神皇紀’, 三省堂 編修所編 ‘各國別:世界史の整理’,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秋山謙藏 ‘日本の歷史’ 외 다수서책을 참조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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