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일본은 역사를 수없이 왜곡해 왔지만 한민족이 세계 5대문명을 주도하고 이를 일궈낸 북방 기마민족이라는 진실은 외면 할 수 없어 그들 중학교 교재에 인색하게나마 ‘기마민족도 문명에 영향을 끼쳤다’고 기술하고 있다. 기마민족은 다름 아닌 우리 한민족이다. 우리 민족은 요하문명을 위시해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 황하 등 인류문명의 단초를 제공하고 영향을 끼친 주역이었지만 철저하게 왜곡되고 은폐된 역사는 여전히 진실을 비켜가고 있다.
왜곡된 세계역사를 보면 ‘서기전 4~5세기 경의 세계는 세계교통의 요충지를 장악하고 있던 페르시아 제국이 세계문화를 흡수해서 번영했다’는 내용이 있다. 또한 ‘그 서방에 있던 희랍 도시국가(Polis)는 독자적 문화를 열었으나 페르시아의 문화에 융합됐다’고 했다. 하지만 이 희랍문명도 기마민족의 영향을 많이 받았음은 물론 이들 역시 기마민족과 융합했다.
동북지방의 이들 기마민족은 상고시대부터 12부족을 형성한 민족들의 형제 족이다. 이들 기마족은 12부족 가운데 어느 특정한 민족만을 지칭하는 것은 아니다. 하지만 이들 12부족 중 이들을 주도하고 리드한 것은 한민족이다. 장대한 인류의 문명을 연 기마민족은 세계 최초의 강대국이자 세계 첫 문명국이었다. 배달국부터 시작한 요하문명을 비롯해 5대문명을 주도한 우리 선조들이 주도한 문명들은 동서양을 막론하고 모두 영향을 끼쳤다. 이번 칼럼은 우리 민족이 세계제국(世界帝國)을 건국한 동서양국가들에도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친데 대한 사실들을 살펴보고자 한다.
기마민족과 세계제국, 그리고 인류문명 출현 중심에 ‘한민족’
기마민족이 세계제국을 제패한 것은 세계역사 교재에도 찾아 볼 수 있다. 우리 조선(祖先)의 환국과 배달국은 물론 페르시아제국이나 로마제국, 중국의 진(秦) 등이 강대한 왕의 권력을 배경으로 이민족(異民族)을 지배하는 제국을 이뤘다. 따라서 만리장성 축성과정에서 보듯, 민중은 국가의 노동력이 됐다.
그런데 당시 고대 유라시아에서는 어떤 상황이었을까. 분명한 것은 서기전 4~5세기 경 세계의 상황은 기마민족이 아시아를 넘어 페르시아 제국을 세웠다고 하는 사실이다. 또 서기전 5세기에 페르시아의 침입을 막은 희랍인은 도시국가(Polis)를 중심으로 희랍문명을 이룩하는데, 이들도 기마민족의 영향을 받았다. 이란고원을 아우른 기마민족인 페르시아인은 페루세포리스에 도읍을 정하고, 서기전 6세기 중엽 이란을 통일한다. 그리고 중앙 집권국가를 세웠다.
다리우스1세(재위 서기전 522~486)는 군용도로를 만들고 역전제도(驛傳制度)와 도량형의 제도를 두어 화폐를 발행했다. 그는 제국 내의 제 민족에 대해서는 관대한 태도를 취하고 그들의 종교나 습관을 인정했다. 페르시아인 자신은 선악 두 개의 신으로 분류, 소로아스다 일교(一敎)를 신앙했다. 페르시아전쟁은 서기전(492~479)에 일어나서 13년간 계속된 전쟁이었다. 전후 3회에 걸쳐서 희랍본토를 압박했으나 희랍 각 도시의 연합군에 패했다. 특히 마라톤의 싸움과 사라미스 해전은 유명하다.
이집트 왕국은 서기전 3000년 도시국가가 통일왕국으로 하나가 됐다. 그 후 왕조는 몇 번이고 교체돼 기마민족의 정복왕조가 됐다. 당시 기마민족(한민족)이 중앙아시아에 큰 세력을 펴고 동서를 잇는 교통로를 열었다. 이들은 배달국의 요하문명을 일으킨 기마민족의 문명이 이곳에서도 일어나게 하는 계기를 만들었다.
또한 희랍 이외의 지역에서는 기마민족의 침로(侵路)를 통해 교통로가 문명을 일으키고, 제국(帝國)의 출현을 낳게 하기도 했다. 이미 배달국에서는 우리 한민족이 요하문명(홍산문화)를 꽃피웠고, 이후 서기전 3세기에 이태리 반도를 점령한 로마인은 지중해에 대제국을 만들었다. 대륙과 페르시아제국 하에서 페니키아인의 통상활동 등이 활발해져 동서의 무역과 문화의 교류가 진행돼 나갔다. 따라서 동아시아대륙과 서로마제국 간은 물론 중앙아시아 제 민족(諸民族) 간에 교통로가 열리면서 교류가 활발해 졌다. 이러한 상황이 요하문명 이후 세계문명을 낳게 하는 요인이 됐다. 다시 말해 요하문명을 일으킨 한민족이 메소포타미아 문명, 이집트문명, 인도문명, 황하문명이 일어나는데 원천이자 터전이 됐다.
서기전 8세기부터 발칸반도로 남하한 희랍인은 도시국가(Polis)를 세우고 철기(鐵器)를 써서 높은 문명을 구축한다. 과연 이들은 누구인가. 이들 역시 기마민족이다. 희랍인들은 서기전 5세기 페르시아와의 전쟁에서 승리해 민주정치를 발전시켰는데, 도시국가(Polis)에서는 노동은 노예에 맡기고 자신들은 정치와 군대에 종사했다. 또 18세 이상의 시민에 의한 선출된 민회(民會)에서 정치를 했다. 이를 데모크라시(democracy)라고 했는데, 여성과 노예에게는 참정권이 없었다.
기마민족, 로마제국 탄생과 동서문명 교류에 직접적 기폭제
희랍의 문화는 합리적이고 과학적 사고방식을 바탕으로 학문, 특히 철학을 발전시켜 소크라테스(Scorates)와 플라톤(Platon) 같은 위대한 사상가를 낳게 했다. 또한 대리석의 신전(神殿)과 아름다운 조각을 만들어 오늘날 까지 인류사의 유적으로 남기고 있다. 이들은 또 4년마다 올림피아의 신전(神殿)에 모여 경기대회를 열었다. 아울러 그들이 남긴 ‘희랍신화’는 오늘날에도 많은 사람들에게 친근히 남아 있다.
서기전 4세기경이 되면 아테네와 스파르타 등의 도시국가(Polis)가 쇠약해져 북방의 마케도니아에게 정복된다. 그 왕이 알렉산더다. 왕은 페르시아를 멸망시키고 멀리 인도까지 원정해 거대한 제국(帝國)을 세운다. 이로 인해 동서의 문화는 더욱 교류가 활발해 새로운 헬레니즘(Hellenism) 문화가 만들어졌다. 이는 이후 건축방식 등에서 후대에 큰 영향을 미치게 한다. 1~2세기에 와서는 서로마제국이 영토를 확장시켜 여러 민족을 지배하며 문명도 확대 번창했다.
특히 북방 기마민족이 중앙아시아에 세력을 넓혀 동서를 잇는 교통도로가 더 넓어져 갔다. 이때 로마는 이태리반도의 한 도시국가로부터 일어나 서기전 3세기에 이태리반도를 통일하고 라틴 국가를 세웠다. 로마는 카르타고와의 전쟁에 승리해 지중해를 정패(征覇)하고 이스파니아, 가리아, 희랍, 이집트 등을 정복해서 로마제국을 만든다. 당시 로마정치는 귀족이 힘을 가졌으나 점차 평민도 민회(民會)에 나가게 됐다. 정복전쟁(征服戰爭)은 로마에 많은 부(富)를 가져오게 했으나 빈부의 차가 생기게 돼 평민이 가난해지는 한편 넓은 토지를 가진 자가 나타났다. 그 중에는 부(富)를 기반으로 사병(私兵) 군대를 키우는 자도 나와 정치적 실권을 장악하게 된다.
로마의 시저는 그 세력자의 한사람이며 그 양자(養子) 옥타비아누스는 서기전 27년에 초대로마의 황제가 됐다. 서기전 1세기경의 로마는 이태리반도에만 150만의 노예가 있었다. 노예들은 포도, 올리브, 소맥(小麥) 등의 생산에 종사했다. 심한 차별대우를 받은 노예는 심지어 ‘말을 하는 도구’라는 혹평까지 받았다. 때문에 때때로 노예들의 도주(逃走)와 반란(反亂)이 일어났다.
검투사였던 스팔타쿠스가 이끄는 반란은 약 10~12만의 노예가 2년간에 걸쳐서 저항한 사건이었다. 당시 로마가 세계 역사상에서 큰 지위를 갖게 한 것은 대체 누구였는가. 그것은 노예제였다. 로마는 노예제 위에 번영하고 노예제로 망했다고 언급될 정도다. 귀족들은 전쟁에 의한 약탈과 노예매각, 원주민으로부터의 착취로 부(富)를 축적했다. 가이사르는 가리아 원정시 100만의 노예를 팔아서 거대한 부를 축적했다고 전해진다.
로마인은 도로, 수도, 대건축 등 토목사업에서 재능을 발휘했다. 또 법률을 정비해 민족이 다르고 관습을 달리하는 대제국 하에서 공통의 만민법(萬民法)을 만들어 시행하는 방식으로 다른 민족을 지배했다. 만민법은 국제상법(國際商法)으로 발족해 로마인 대 외인 상호간의 거래를 규율하는 체제였다. 또 로마인들은 태양 역(太陽 歷)을 받아들이고 로마글자를 만들었다.
중앙아시아의 기마민족은 대륙 북방으로부터 중앙아시아에 펼쳐진 대초원에서 유목민족 국가를 여러 곳에 세우고 있었다. 그들은 뛰어난 말을 갖고 목축과 수렵으로 생활을 하고 있었으나 때로는 농경지대로 내려와 그 땅을 정복하곤 했다. 기마민족은 살기 좋은 곳으로 계속 이동했는데, 이들을 다른 민족들은 ‘기마민족’이라고 부르게 됐다. 그들은 기동성을 발휘해 광활한 대륙을 지배했다.
세계 첫 철기문명에 비단길(Silk road) 연 강대한 제국의 흔적
기마민족은 1~2세기경에도 그 세력이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어 있었고, 이들은 서역 제국에게도 힘이 미쳐 있었다. 때문에 도로가 정비된 것을 계기로 오아시스의 길도 정비되기 시작한다. 이 기마민족에 의해 열려진 길과 도로는 중앙아시아의 오아시스국가를 연결하는 교통로로 후에 비단길(Silk road)이 됐다. 이 길을 통해서 서방으로부터 모직물, 유리기구, 말과 포도 등이 전해지고 중국에서는 비단이 다른 나라로 보내졌다.
로마의 귀부인들은 비단을 매우 진중(珍重)하게 여겼다. 그런데 이 비단길도 기마민족이 아닌 중국이 연 것 같이 조작하고 있으나 아니다. 사마천(司馬遷)은 ‘사기(史記)’에 한 무제(漢 武帝)에게 쓰임을 받은 부(父)의 의지에 따라, 태고 때부터의 중국역사를 마무리한답시고 130권에 달하는 중국역사를 썼으나 이 책은 우리 한민족에 대한 것은 빼고 허구적인 사실로 채워 믿을 수 없도록 했다. 이른바 위한중국휘치(爲漢中國諱恥)의 휘치필법(諱恥筆法)으로 고대부터 우리역사를 왜곡한 것이었다. 때문에 그들의 기록은 참고는 하되 믿을 것은 못된다.
일본 교과서를 보면 철(鐵)이 언제부터 사용됐는가. 터키의 돌궐족이 방랑하며 철의 제조방법을 각지에 넓혔는지도 모르겠다고 얼버무리고 있다. 그러면서 일본 최초의 제철로(製鐵爐)에 대해서는 다다라(高殿)이었는지도 모르겠다고 기술하고 있다. 참으로 가관이다. 그러면서 조선과 중국은 서기전(770~403) 중국의 춘추시대에 철기가 사용돼 예리한 칼이 출현하고 있다고 말하고 있다. 다 거짓말이다. 중국은 몰라도 우리는 상고시대인 배달국시대부터 2천년 앞서 철을 사용했다.
우리가 철을 쓰기 시작한 것은 배달국의 14대 자오지 천황(慈烏支 天皇)의 투구와 갑옷을 묘사한 것으로도 그 사용한 시기를 알 수 있다. 서기전 2707년에 즉위한 치우천황(蚩尤天皇)은 1년 만에 9제후를 정복하고 다시 공상(空桑)을 점령하는 등 12제후의 나라를 합병했다. 그 강력한 힘은 동과 철로 만든 투구와 철에 의해서였다.
우리는 이처럼 세계에서 최초로 철을 사용한 강대국이며 우수한 철 제조기술을 보유한 민족이었다. 선조들은 강한 철을 이용한 군비와 기동력 빠른 기마를 사용했다. 치우천황(蚩尤天皇)이 헌원(軒轅)과의 73회 전투에서 한 번도 패하지 않은 것은 동과 철로 무장한 무기와 지략에 있었다. 중국인들은 치우천황을 구리머리 쇠 이마(銅頭鐵額)를 가진 사람이라 놀라고 있었다. 사마천은 사기에서 “제후가 다 와서 복종하되 치우가 가장 포악해 천하가 능히 치지 못하고 헌원(軒轅)이 섭정하매 치우형제 81인이 있어 짐승의 몸으로 사람의 말을 하며 머리는 구리요 몸은 쇠이고 모래를 먹으며 오구(五丘)의 장대와 칼, 창, 대노(大弩)를 만들어 천하를 흔드니 치우는 천자(天子)의 칭호다”고 했다.
한민족은 세계 최초, 최고의 역사를 창조한 민족이다. 이제 우리는 다시 창대한 역사를 창조한 한민족을 재건해야 한다. 철을 사용한 것도 중국과 일본보다 2천년이 앞선다. 우리의 선조들은 웅대한 기상과 홍익인간의 이념 하에 인류역사에 가장 많은 영향을 끼치며 문화발전에 기여했다. 우리는 이 같은 역사의 진실을 밝혀나가는 과제가 주어져 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존 카터 코벨 지음·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한창건 ‘환국·배달·조선사신론’, 한정호 ‘대 조선민족사’,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주해 환단고기’, 우창수 ‘아사달 상·하’, 김부식 ‘삼국사기’, 이을형 ‘버철학강의’, 日本國書 刊行會 ‘神皇紀’,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三省堂 編修所編·永原慶二 監修 ‘中學社會歷史’ ‘各國別:世界史の整理’,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 ‘世界史史料集’, 秋山謙藏 ‘日本の歷史’, 井上 淸 ‘日本の歷史’ 외 다수서책을 참조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후원하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