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군시대 일본 정벌, 한·일 상고사 역사서 일치

입력 2014-10-25 21:4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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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
 
미국에 사는 김영호 박사가 “일본 고대사서가 ‘백제기’를 인용해서 ‘일본사기’가 쓰여 진 사실을 보고 얼마나 긍지를 갖게 됐는지 모른다”고 필자에게 메일을 보내 왔다. 본 칼럼을 연재하면서 이런 독자들을 적지 않게 접해 왔지만 매번 그럴 때면 상고사를 연구하고 고생한 보람을 느낀다.
 
일본은 상고사가 없기에 그들의 고대사는 우리의 역사를 도용했다. 일본의 가장 오랜 사서는 8세기 처음으로 나온 ‘고사기’와 ‘일본서기’다. 이런 점은 중국도 마찬가지다. 중국의 사서 또한 상고사가 없어 우리의 역사를 사실상 도둑질 하고 있다. 중국 사서의 가장 오랜 사서는 ‘한서’인데, 이 역사서는 전한(前漢 서기전 202~서기8년)의 역사를 1세기 후반 반고(班固)가 편집한 것이다. 후한서는 서기 25~220년의 역사를 5세기 초 범엽(范曄)이 쓴 것이다. 위지(魏志)는 위(魏)(서기220~265)의 역사를 3세기 말 진수(陳壽)가 편집했다.
 
지금 우리교과서로 쓰고 있는 ‘한국사’는 한국고대사 왜곡의 앞잡이 이마니시 류(今西 龍)에 의해 조작된 것이다. 현재도 한국의 그 추종자들은 “한국사는 신라 때부터 시작”이라는 당치도 않은 설을 ‘실증주의 사학’이라고 호도하고 있다. 이들은 그 이전 수천 년의 한국고대사를 못 믿을 것으로 돌려 버렸으나 어떤 것이 진정한 실증주의 역사인지 제대로 바라 봐야 한다. 2천년 역사도 안 되는 일본인들이 1만년 이상 되는 한국사를 질시해서 우리 역사를 조작한 것을 오히려 한국인이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것은 정신병자가 아닌 이상 할 수 없는 망동이다. 그것이 얼마나 한국인들에게 용기를 잃게 했는가를, 일본이 그 때문에 얼마나 덕을 보았는가를 몸서리치게 보아 오지 않았던가.
 
2차 대전 후 현재까지 일본에서는 고사(古史) 고전(古典)의 연구가 크게 증가해 왔다. 그 중에는 상가야 왕조사를 연구하는 저명한 학자들이 많다. 아고 기요히코(吾鄕淸彦) 같은 학자는 우리나라 ‘고조선사’와 일본의 진정한 고대사인 상가야 왕조사가 연접되어 있다는 것을 상세히 연구해 발표하고 있다. 이들은 일제 군부와 신직(神職)이 개입된 역사나 ‘일본서기’와 ‘고사기’는 진정한 역사서가 아니라는 것을 밝히고 있다.
 
지금 일본의 고대사는 이미 전술 한 바와 같이 우리 것을 그대로 옮겨 놓고 있다. 일본의 역사는 1천년을 조작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1988년 일본 후지산(富士山) 아래 지하 서고에서 비서(秘書)인 ‘미야시다 문서’(宮下文書=신황기·神皇紀)를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일본 상고사 연구가들도 이 사실을 주목한다. 일본이 시조라는 진무(神武)의 가계(家系)는 상기(上記)에 명기돼 있는 그대로다. 즉, 일본에 온 단군의 손 73대가 왜 땅에서 통치권을 두고 우리나라 종족끼리 전쟁을 벌여 나라를 세웠다. 이는 상기(上記)와 미야시다 문서 등을 통해 분명해 졌다. 그래서 이를 부정 할 수 없다. 일본은 온전히 우리 한민족이 건너가서 건설한 나라라는 것이다. 일본은 단군 조선도 부정하려 하지만 ‘단군세기’(檀君世紀)는 47대 단군의 세세한 업적을 전한다. 일본이 이를 부정할만한 근거가 전혀 없다. 환단고기(桓檀古記)에 편입된 이 기록은 신라 때의 역사서다.
 
한·일 역사서에 드러난 일본의 뿌리…우리가 정벌하고 세웠다
 
일본은 우리 민족이 본래 약해 다른 민족을 정벌한 역사가 없다고 왜곡하며 우리 상고사와 고대사를 뭉개버리려 했으나 세계 최초의 강한 고대국가를 건설한 우리 한민족은 중국대륙의 넓은 땅에서 환국과 배달국에 이어 단군 조에도 중국대륙과 일본 열도에 그 세력을 뻗쳤었다.
 
한민족은 세계를 지배하는 천제사상(天帝思想)으로 산악에 까지 천자, 천왕, 천황의 명칭을 붙이고 최초에 천자 황제의 명칭제도를 창조했다. 이처럼 우리 한민족이 천왕 황제국가로 등장함에도 재래의 한국사에는 천황 황제의 국가에 예속된 후왕(侯王)의 국가로 기록됐다. 명백한 위조요 날조다.
 
우리가 한국사를 이해하는데 유의해야 점이 있다. 고구려 계통역사는 비밀에 묻혔고 신라계통은 천지에 널려 있다는 것이다. 우리의 진짜 역사는 박제가 돼 산속으로 들어간 형국이다. 고구려 계통역사를 전하는 사서로는 ‘규원사화’(閨怨史話)]가 있다. 발해에 가 있던 고구려사서를 중국이 다 거두어간 뒤, 남은 것 중에 예·맥국이 한반도로 쫓겨 오면서 보관해 전한 사서를 토대로 쓴 것이 1795년의 ‘규원사화’다.
 
우리가 제대로 알아야 할 것은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를 쓰면서 의도적으로 역사를 축소했다. 그는 단군과 고구려로 이어지는 역사 찾는 파벌을 제거해야만 신라출신인 자신이 살아남을 수 있었다. 때문에 고토를 찾으려는 묘청(妙淸)도 그런 김부식에게 토벌됐다. 이병도 박사도 규원사화를 인정했다. 우리들도 규원사화에서 단군조선에 대한 확신을 얻을 수 있다. 또한 단군의 역사를 기록한 단군세기(檀君世紀)는 단군47대의 세세한 업적을 전하고 있다.
 
단군을 신화로 허망하게 취급해 왔다는 단군대의 이야기는 일본 고대사서 4종을 맞춰보면 중복되면서 확실하게 드러난다. 단군조선과 일본의 상고사가 그렇게 접점을 이루는 것 중하나는 섬승노(陝野奴), 즉 배폐명(裵弊命)과 장수언(長髓彦)의 내란부분이다. 배폐명 이야기는 환단고기 중 단군세기에 나와 있는 기록이고, 장수언의 내란은 ‘상기’(上記, 일본 상고사)에 나와 있다.
 
이들 사서에 기록된 왜를 친 기록들은 다음과 같다. 3대 단군인 가륵(嘉勒)때인 서기전 2173년 “반란을 일으킨 예읍의 추장 소시모리를 참했는데, 그 후손에 섬승노라는 자가 있어 해상으로 도망해 세 섬에 의거한 왕이라고 칭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35대 단군 사벌(沙伐)조에는 서기전 723년 “장수 언파불합(彦波弗哈)을 보내어 규수(九州)의 구마소(熊襲)을 평정했다”는 기록이 전해진다.
 
그리고 36대 단군 매륵(買勒)조에는 서기전 667년 “섬승후(陝野候), 배폐명(裵弊命)이 병선을 몰고 가서 왜인의 반란을 진압하고 왜의 세 섬의 왕을 칭했다” 내용이 있다. 이에 상당하는 일본 상고사(상기·上記)의 기록 중에는 “조선인이 선단 70척에 군대 1000여명을 싣고 왜 규슈(九州)로 쳐들어와 장수언(長髓彦)으로 하여금 내란을 일으키게 하고 임금으로 내세웠다가 수십 년 후 평정됐다”는 내용이 있다. 우리가 직접 왜와 싸운 것이 아니라 규슈(九州)에서 장수언이라는 유력한 세력가를 일으켜 왜왕으로 삼고, 수십 년간 다른 대치세력과 전쟁을 벌인 것이다. 이 때의 왜는 규슈에서 활동하는 집단이었으며, 지금의 일본 본토로 진출한 것은 이로부터 아주 오랜 세월이 흐른 뒤다.
 
글·노래로 전해오는 단군 조선의 살아 있는 화석 ‘세년가’(世年歌)
 
일본의 시조라는 진무일왕(神武日王)이란 왜(倭)의 지도자는 장수언(長髓彦) 뒤의 대치세력이다. 그는 진무일왕의 선대에 일어난 전쟁에 집안 3대가 나서서 싸운다. 진무(神武)의 두 형이 죽고 진무(神武)대에 가서 가까스로 수습됐다. 이 진무(神武)는 있고 없는 것을 다 전설화 할 뿐 아니라 연대를 조작하고 후일 기년(紀年)을 제대로 알 수 없는 스진(崇神) 왜왕 대에 있었던 업적까지 덧붙여져 신격화됐다.
 
배폐명(裵弊命), 혹은 섬승노(陝野奴)라고 불린 존재의 왜 정벌은 매우 복잡한 역사이기 때문에 일률적으로 말하기는 어렵다고 하더라도 우리는 일본을 고대부터 일본에 가서 왜를 정벌하고 임금을 내세웠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 당시 선단 규모가 70~500척인 것으로 미루어 보면 이 정도의 규모는 국가적 정벌군인 것으로 보고 있다. 또한 우리가 왜를 치러 간 기록은 부여 때도 나온다. 일본의 상고사 연구가들도 이 사실을 주목한다.
 
진무(神武)의 가계는 상기(上記)에 기록돼 있는 바와 같이 단군의 73대 손(73代 孫)이 됨으로 종래는 왜 땅의 통치권을 두고 우리나라 종족끼리 전쟁을 벌인 것이다. 일본학자들은 이를 두고 ‘대리전(代理戰)’이라고 한다. 지금까지도 단군세기에서 배폐명(裵弊命)의 사실을 접하면서도 진척하지 못했던 연구가 상기(上記)와 미야시다 문서 등을 통해 분명해졌다.
 
또한 단군의 사적은 역사기록을 통해서 뿐만 아니라 글로 또는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노래 세년가(世年歌)로도 단군의 존재를 알 수 있게 한다. 그것은 오늘날 까지도 전해지고 있다. 이런 단군을 일제가 말살한 후 단군의 역사를 바로 세우지 못한 채 해방 후에도 일본이 왜곡한 역사를 지금도 그대로 답습하고 있다.
 
우리 역사는 세년가(世年歌)가 전하는 그대로, 노래를 통해 역대의 사적을 엮어가며 입에서 입으로 전해 내려 왔다. 하지만 강대한 활동을 전개한 예맥(銳麥)을 외면·삭제한 조선사편수회 이론의 답습은 아직도 식민지사관을 탈피하지 못한 소치다. 예맥(銳麥)은 북방유목민족을 대표해 남방한족(漢族)을 정벌하고 천하에 무위를 떨친 국가였다. 그러나 내외문헌을 다 없애버린데다가 예맥(銳麥)이 천제(天帝), 황제국가를 건설했다는 기록이 없다. 북부여가 비로소 천제(天帝), 황제국가를 건설했다.
 
삼국유사(三國遺事, 卷一)에 북부여의 시조 해모수(解慕漱)가 천제(天帝)로서 북부여를 건국하고 왕을 칭했다고 했다. 이는 북부여가 천제(天帝), 황제국가(皇帝國家)를 건설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예맥(銳麥)이 천제(天帝), 황제국가를 건설치 못한 것은 유목생활을 했던데 기인한 것이다. 천제(天帝), 황제국가(皇帝國家)는 영토를 근거로 건설한다. 그런데 유목민은 한 지방에 토착치 못하고 이동생활을 함으로 영토를 근거로 결속할 수 없다. 영토를 근거로 결속치 못하는 유목민족은 혈연을 근거로 결속 할 수밖에 없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인간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존 카터 코벨 지음·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고병익 ‘일본의 현대화와 한일관계’, 임길채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한창건 ‘환국·배달·조선사신론’, 한정호 ‘대조선민족사’,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주해 환단고기’, 김부식 ‘삼국사기’,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한창건 ‘한국고대사 발굴’, 강동민 ‘불쌍한 대한민국’,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삼성(三聖)의 역사’, 日本國書 刊行會 ‘神皇紀’,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三省堂 編修所編·永原慶二 監修 ‘中學社會歷史’ ‘各國別:世界史の整理’,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秋山謙藏‘日本の歷史’ 외 다수서책을 참조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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