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중국과 일본은 역사를 위조하고 본래의 사서(史書)들도 모두 개서(改書), 개조(改造)했다. 중국은 산해경(山海經)만이 개조를 면했을 정도다. 일본은 중국 이상으로 더 심했다. 일본을 꽃피운 8~9세기 712년 고사기(古事記), 720년 일본서기(日本書紀), 752년 만요집(萬葉集), 797년 속일본기(續日本記), 841년 일본후기(日本後記), 869년 속일본후기(續日本後記), 879년 이세모노가다리(伊勢物語), 1000년 겐지모노가다리(源氏物語), 1124년 곤쟈크모노가다리(今昔物語) 등은 모두 일본을 미화하고 있다. 일본이 역사왜곡을 하지 않은 것은 제사(祭祀)에 관한 927년 연희격식(延喜格式)뿐이다.
일본 ‘국사대계’ 권13, 282쪽 엔기시키(延喜式, 卷9 神祗 九 神名 上)를 보면 잘 알 수 있다. 일본은 자기들이 우리와는 다른 단일민족이라 하고 있지만 모두 거짓말이다. 일본 대궐서 제사 지내는 신위(神位)에는 우리나라에서 건너간 신라 신(神) 소노카미(園神) 1위와 백제 신(神) 가라카미(韓神)2위가 모셔져 있다.
서기 859년 일본의 가요를 선집 한 고전 신악가(神樂歌)에도 소노카미(園神)와 가라카미(韓神)를 왕실에서 제사지내며 부르던 축가가 실려 있다. 일본 조상이 모셔져 있는 이세신궁(伊勢神宮)에도 3좌의 신위(神位)와 33위의 신위(神位)가 전부 한국에서 건너간 유민의 신위(神位)다. 일본은 광개토호태왕비(廣開土好太王碑)까지 왜구대궤(倭寇大潰, 왜구가 크게 궤멸됬다)의 구(寇)자를 만(滿)자로, 대(大)자를 왜(倭)자로 고쳐서 ‘왜만왜궤(倭滿倭潰’=성에 가득 찬 왜가 성을 무너뜨렸다)로 조작했는데, 이를 위해 회(灰)를 바르는 천인공노할 역사만행을 눈 하나 깜작하지 않고 범했다.
중국도 철저하게 우리 상·고대사를 조작했다. 이번 칼럼에서 논하려는 예(濊) 등 고대사도 그렇다. 즉, 고대 중국인들은 조선의 한민족을 처음에는 맥(貊)이라고 하다가 후에는 예(濊), 혹은 예맥(濊貊)이라고 했다. 그것은 모두 같은 종족에 대한 여러 가지 표현이다. 맥(貊)이라고 중국 고전에 나타난 것도 오랜 일이다. 고조선과 부여, 고구려 등 고대 우리민족 모두에 대한 공통의 칭호로 중국사기(史記)에도 “예맥 역시 조선에 속하며 그 예맥은 부여·고구려와 삼한 즉, 백제와 신라 등의 시원이다”고 하고 있다. 이는 이들 모두 같은 조상의 후예이며 같은 조선족에 속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같은 사실은 양서(梁書), 남사(南史), 통전, 삼국지, 후한서(後漢書), 당서(唐書), 수서(隨書), 주서(周書), 북사(北史) 등에도 남겨져 있다.
이들의 언어, 습속, 의식주, 예절, 법제 등은 대체로 고구려와 비슷하나 혼인제도에 있어서 예(濊)에는 동성(同姓), 친척 간에 결혼을 피하는 불혼(不婚)의 법이 있었다. 삼국지, 위서, 동이전 제30의 예전(濊傳)에 “문을 닫지 아니하되 도둑이 없다”하는 기록이 있다. 이들의 강성함은 중국의 군현은 물론 한때는 한나라도 통제하지 못할 만큼 위세를 떨쳤다. 이에 “그들의 사는 곳에는 도적이 없고 부녀는 정숙하고 신실했다”고 했다.
그러나 그들은 유목민으로 토착하지 못해 집권적인 자주적 국가를 이루지 못하고 서기 1세기에는 완전히 고구려에 소속됐다. 그들의 풍습은 환자나 사망자가 생기면 새 집을 지어 옮겨 사는 기휘(忌諱)와 위생의 풍습이 있었고, 무천(舞天)이라는 공동대축제의 행사가 있었다. 또 경제와 제천의 구역인 산천을 중시했다. 그들은 강직하고 용맹했으며 근후(謹厚), 질박(質朴), 성실하고 전쟁에 능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번 칼럼은 고대사 중 예맥(銳麥=濊貊)과 부여(夫餘)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예맥(銳麥)은 유목민 특성에 성곽과 궁실이 없었지만 강대한 나라였다
오늘날 국가의 기본적 구성 요소(조건)에는 일정의 영역(영토, 영해, 영공)과 국민, 국가권력(주권) 등이 있어야 한다. 특히 주권 행사를 위한 통치조직이 있어야 국가가 성립한다. 고대 예맥(銳麥)은 북방을 대표하는 한민족(韓民族)으로 동주(東周)시대부터 한 무제(漢 武帝)시대까지 1천여 년 간의 장기간에 걸쳐서 기자조선, 위만조선, 한사군 등 남방한족(漢族)을 정벌했었다. 이어 중국 4천년 역사상 가정 강대한 진(秦)나라를 타도 할 만큼 천하에 무위(武威)를 떨쳤다.
유목민인 예맥은 한 지방에 정착하지 않고 이동생활을 하기 때문에 영토를 근거로 결속하지는 못했다. 예맥(銳麥)은 혈연을 존중하고 혈연을 근거로 결속했다. 이를 바탕으로 한 부족제국가(部族制國家), 즉 부족연합제국가(部族聯合制國家)로 발전했다. 때문에 상고시대나 고대의 역사에서 천왕(天王), 천제(天帝), 황제(皇帝)라는 국가건설은 생각하지 못했다. 예맥은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와 같이 천제(天帝), 황제국가(皇帝國家)로 발전하지 못했다.
훈족(匈奴)이나 돌궐족이 황제국가라 칭한 것은 명칭 상 황제국가요, 본질상 황제국가가 아니다. 맹자는 ‘예맥(銳麥)은 성곽과 궁실이 없다’고 했다.(孟子告子章句下). 이는 황제의 영토를 수호하는 성곽과 황제가 거처하는 궁전이 없음을 가리킨 것이다. 또한 삼국지(三國志, 魏志, 卷 三十 東夷)에 보면 예맥(銳麥)은 대 군장(大 君長)이 없고 후(侯), 읍(邑), 군(君), 삼로 제(三老 制)가 있다고 했다. 이는 황제가 없고 삼부족(三部族)의 족장(族長)이 통치하는 것을 가리킨 것이다.
북부여(北夫餘)도 처음에는 부족국가였다. 그런데 북부여는 일정한 영토에 정착하는 생활을 했다. 그리하여 세습제(世襲制), 천제(天帝) 등을 기반으로 한 황제국가(皇帝國家)를 건설했다. 삼국지(三國志, 魏志, 卷 三十 東夷)에서는 부여를 ‘夫餘方可 二千里 戶八萬 其民土着 有宮室 倉庫 牢獄....宜五穀....國有君主’이라고 했다. 즉, 부여는 “지방(地方)이 2천리요 호수(戶數)가 팔만(八萬)이고, 민중(民衆)이 일정한 지방에 토착해 제왕(帝王)의 궁전 및 창고와 감옥이 있고 농업에 종사해 오곡이 풍부하고 제왕이 있다”고 한 것이다. 또한 동서(同書)에 부여를 계승한 자가 위구대(尉仇臺), 간위거(間位居), 마여(麻余)이고 마여(麻余)가 죽은 후에 그 아들 의려(依慮)가 6세의 나이로 왕위를 계승했다. 이는 부여가 비로소 이동하는 유목생활을 탈피하고 일정한 영토에 토착해 농경생활을 함과 동시에 세습제천제(天帝), 황제국가(皇帝國家)를 건설한 것을 가리키고 있다고 하겠다.
예맥(銳麥)이 궁실이 없다고 기록한데 반해 부여는 궁실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또 예맥(銳麥)이 대군장(大君長)이 없다고 기록된데 반해 부여는 군왕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 이는 부여가 바로 천제(天帝), 황제국가를 가리킨 것이다. 부족국가는 세습제군주가 없다. 부여 의려(依慮)가 6세의 나이로서 왕위를 계승했다고 하는 것은 세습제 천제(天帝), 황제제도가 있음을 의미한다. 우리나라는 배달국시대부터 거의 황제국의 명칭을 써왔다.
부여는 강대한 천제(天帝), 황제국가(皇帝國家)로 일본을 정벌·건국했다
진서열전(晋書列傳, 第六十七, 四夷)에 보면 부여는 강대한 천제(天帝), 황제국가(皇帝國家)라고 했다. 진서(晋書)에 ‘부여는 그 국가가 부강하여 선세(先世)로부터 파괴된 일이 없다’는 내용이 있다. 한서열전(漢書列傳, 第 六十九, 王莽)에 보면 엄우(嚴尤)가 부여의 재기(再起)는 곧 대우(大憂)라 말했다. 삼국지 동이전(東夷傳)에는 한나라 요동태수 공손도(公孫度)의 종여(宗女)를 부여 왕에게 출가시켜 호의를 표시했다는 기록도 있다. 이는 부여가 강대한 국가임을 말해준다.
일본의 이나바 박사(稻葉岩吉博士)가 저술한 만주발달사(滿洲發達史)에 ‘만주 원주인은 부여(夫餘)라는 우량민족(優良民族)의 이주(移住)에 의해 그 생활상이 강열한 영향을 받았다’고 말하고 있다. 어두운 대 산림에 한길(一道)의 일광이 비치는 것과 같이 원시인인 원주인(原住人)은 돌연히 공포를 느꼈을 법 하다. 실제로 만주발달사사(滿洲發達史, 2쪽, 43쪽)에 보면 부여(夫餘)의 이주(移住)는 만주(滿洲)발달사상 신기원(新紀元)을 창조했다고 했다. 이 부여를 건국한 자가 바로 해모수(解慕漱)다. 이 해모수(解慕漱)는 배달국에 이어서 천제황제국가를 건설한 왕이요, 또한 강대하고 위대한 국가 부여(夫餘)를 건국한 역사적 영웅이다. 해모수解慕漱)를 부여의 국민은 천신(天神)과 같이 존중했다. 고기(古記)에 해모수를 천제(天帝)라 칭찬한 사실이 이를 입증한다.
이 부여족은 일본으로 이주해서도 국가 기틀을 놓고 일본에 황제국가(皇帝國家)를 세운다. 컬럼비아대학 개리 레저드(Gari Ledyard) 교수의 연구에 의하면 부여족 상당수가 바다를 건너가 일본을 정벌한 연대가 정확하게 369년으로 제시돼 있다. 이때까지 일본은 원시 석기시대의 삶을 살고 있었다.
일본 나라(奈良)의 가장 오랜 마을 이름이 ‘후루’라고 한다. ‘후루’란 말은 ‘부루’ 또는 ‘부여(夫餘)’를 이르는 말이다. 일본을 제일 먼저 정복한 것은 4세기 부여(夫餘)라는 점이 이를 통해서도 증거된다. 지금 오사카(大阪)와 나라(奈良) 일대에 산재한 떼를 입힌 대형고분(大型古墳)들은 일본을 처음 정복한 부여족의 무덤들이다. 그 대표적인 것이 세계3대 무덤의 하나로 꼽히는 닌도쿠(仁德) 왕릉이다. 일본에서는 16대천황이라고 하는데, 오진(應神)의 아들로 왜왕2대(代)이다. 이미 일본천황과 역사는 1천년 날조로 이를 말할 가치도 없다.
일본은 일본왕의 한국부여족 혈통을 보다 일본적인 화족(和族) 혈통으로 변조한다. 일본은 이에 정당성을 심기 위해 720년 편찬된 관천사서(官纂史書) 일본서기에서 닌도쿠(仁德)왕에 대한 기록을 두고 있다. 일본서기 편찬자들은 그 같은 변조를 뒷받침 하기 위해 부여족이 일본을 정벌해 생긴 왕권교체기에 어느 왕이 몇 백 년씩을 살았다고 조작해 놓았다. 또한 가관인 것은 오진(應神)왕을 ‘진구(神功)’ 왕후가 한국을 정복 한 뒤 10개월이 훨씬 지나 출산 한 아기라고 설명하고 있다. 진구(神功)’ 왕후가 한국을 정복했다는 기록은 완전히 뒤집혀져 날조된 것이다. 실제는 그 정반대다. 부여 기마족(騎馬族)이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가 먼저 규슈(九州)를 정복하고 이어 혼슈(本州)를 점령, 지금의 오사카~나라일대 야마토(大和) 평원에 수도를 건설했다. 부여 기마족(騎馬族)은 월등한 기동력의 전투력으로 신속히 정벌을 이뤄 낼 수 있었다. 상대적으로 석기시대를 살았던 미개한 일본 원주민들은 부여 기마족(騎馬族)을 당해낼 수 없어 쉽게 굴복했다. 이렇게 부여 기마족(騎馬族)은 506년 내부분열로 부여족 왕권이 끊길 때까지 왜를 보다 조직적으로 통합하고 개선된 군사력을 갖춘 국가로 이끌었다.
천제, 황제국가 이어받은 부여, 고구려, 고려의 관등의례(觀燈儀禮)
이들 부여족은 고구려에 인접한 한반도 북방계 부족으로 한민족의 낙랑이 망한 뒤 남쪽으로 이동해 왔다. 그 중 일부는 선비족에게 정복됐다. 부여 세력이 절정에 이르렀을 때는 한강까지 접했는데, 이들 부족 일부는 백제와 합치고 일부는 가야를 거쳐 김해와 부산으로 이주해 정착했다.
일본의 ‘만세일계(萬世一系)’ 혈통의 첫 왕으로 떠받드는 진무(神武)왕에게는 규슈(九州)에서 동쪽의 나라로 동정(東征)했다는 이야기가 따른다. 이 사실은 바로 부여족의 왜 정벌을 말하는 것이다. 8세기에 와서 기록에 나선 일본은 사가들에게 일본에 문자가 등장하기 이전 일본 역사란 보잘 것이 없었다. 때문에 이들은 진무(神武)왕의 동정(東征)을 서기전 660년의 일로 1천년을 조작한다. 일본은 우리나라 한민족이 가서 세운나라이고 그 주체가 처음에는 부여족이었다. 이를 숨길 수 없다.
북부여(北夫餘)를 계승한 고구려도 해모수(解慕漱)를 크게 존중했다. 동명성왕이 항상 천제(天帝)의 자(子)라 칭한 것은 바로 해모수(解慕漱)를 존중한 데서 나온 것이다. 고구려가 해모수를 존중한 것은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비문(碑文)에서도 입증된다.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비문(碑文) 첫머리에 해모수를 천제(天帝)라 칭하고 동명성왕(東明聖王)이 해모수를 황천(皇天)으로 받들었다고 기록했다. 그리고 고구려를 회복할 것을 국시(國是)로 하고 동명성왕(東明聖王)을 태조(太祖)라고 칭한 훗날의 고려(高麗)가 고구려의 전통을 계승해 해모수를 존중함은 물론이다. 다물(多勿)은 옛 땅을 회복한다는 뜻이다.
이상과 같이 천제 황제국가를 세운 해모수를 하늘같이 존중하는 부여, 고구려, 고려가 해모수의 생일인 4월8일에 거창한 기념행사를 거행했다. 옛날에는 천신(天神), 조상의 신, 위인(偉人)의 탄생, 성도(成道)를 위하는 거창한 행사를 밤에 거행하는 풍속이 유행했다. 해모수는 천제(天帝), 황제국가(皇帝國家)인 부여를 건설한 장본인(張本人)이다. 이처럼 황제국을 건설한 해모수(解慕漱)를 존중하는 부여, 고구려, 고려가 해모수의 생일에 같은 관등(觀燈)를 크게 열었다. 이 행사는 천제(天帝), 황제국가(皇帝國家)를 건설한 해모수의 위대함을 기념하기 위해서였다. 오늘날 우리들은 단군이 10월3일에 탄생했다고 해서 그날을 개천절로 하고 있다. 지금의 개천절은 단군조선을 우리 역사의 기점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우리 한민족이 환국과 배달국의 위대한 천제(天帝), 황제국가(皇帝國家)를 건설한 역사를 제대로 고증해 개천절을 다시 정해야 한다. 지금의 개천절은 일제의 역사왜곡을 그대로 인정하는 것이기에 수정에 나서야 한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인간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존 카터 코벨 지음·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임길채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주해 환단고기’, 김부식 ‘삼국사기’,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한창건 ‘환국·배달· 조선사신론’, 한정호 ‘대조선민족사’,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삼성(三聖)의 역사’, 한창건 ‘한국고대사 발굴’, 강동민 ‘불쌍한 대한민국’, 고병익 ‘일본의 현대화와 한일관계’, 우창수 ‘아사달(상,하)’, 日本國書 刊行會 ‘神皇紀’,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三省堂 編修所編·永原慶二 監修 ‘中學社會歷史’ ‘各國別:世界史の整理’,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秋山謙藏 ‘日本の歷史’, 津田秀夫 ‘日本史’ 외 다수 서책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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