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한민족 제국 부흥사’ 기록에 담긴 제국사

입력 2014-11-22 21:5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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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
 
한민족은 천민사상(天民思想)과 천왕사상(天王思想)을 제창하고 대제국을 건설했다. 천민사상(天民思想)에서 한민족이 인류평화의 맹주가 된다는 홍익인간의 대(大) 이념이 나왔다. 천민사상(天民思想)에서 세계를 지배한다는 천제(天帝), 황제사상(黃帝思想)이 나온 배경이다. 이를 기반으로 우리 선조들은 동양사상 최초로 천제(天帝), 황제(黃帝)의 문물제도를 창조하고 중국, 거란(契丹), 일본 등에게는 우리가 창조한 문물제도를 전수해 주거나 그들이 스스로 모방해 갔다. 한민족은 이렇게 인류사 최초로 천자황제국가(天子黃帝國家)로 당당하게 등장하고 세계를 호령한 제국의 역사를 갖고 있다.
 
이후 한국사는 민족투쟁의 역사이기도 하다. 민족투쟁의 중요한 요소는 민족적 자존심이다. 그럼으로 더욱 천제황제국가로 발전했다. 수당(隨唐)을 격파 할 때에 예속된 후왕(侯王)의 국가로 자처 할 수 없었고 몽골, 거란(契丹), 여진(女眞)과 투쟁할 때에도 그들보다 상위에 있는 천자황제국가(天子黃帝國家)임을 분명히 자처했다. 이 같은 사실은 문서역사 고고학 등을 통해 실증됐다. 그런데 역사왜곡에 의해 한민족은 천자(天子), 황제국가(黃帝國家)를 건설치 못하고 오히려 천자(天子), 황제국가(黃帝國家)에 예속된 후왕(侯王)의 국가로 비하(卑下)되고 말았다. 이는 어디에서 기인했는가. 중국사가(中國史家)는 중국 중심으로 역사를 위조해 한국이 중국에 예속되게 만들었다. 일본사가(日本史家)는 일본 중심의 역사를 위조해 한국이 일본에 예속됐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은 우리의 천왕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인 것에 불과하다는 점을 거듭 강조한다.
 
일본의 예를 봐도 일본은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율령제(律令制)가 거의 완성단계에 오자 천왕을 중심으로 하는 역사서를 만들었다. 일본은 본래 신(하나님)을 조선(祖先)으로 가진 천황(天皇)이 통치했다는 것을 나타낼 필요가 있어 역사서를 작성 했는데, 처음 나온 것이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다. 이 책은 나라(奈良) 도시가 된 후 완성 됐는데, 일본이 우리의 천황사상을 그대로 받아들인 증거다.
 
그런데 김부식(金富軾)을 시조로 한 사대사가(事大史家)가 한국중심으로 역사를 다루지 못하고 고대부터 위조된 중국사와 일본사를 그대로 베껴서 옮겼다. 그런데 위조된 중국사와 일본사를 제대로 베끼지도 못했다. 중국은 자기중심의 역사에도 예맥(銳麥)이 장기간 중국을 정벌한 것을 기록했다. 그런데 김부식(金富軾)의 삼국사기(三國史記)나 승 일연(僧 一然)의 삼국유사(三國遺事)에는 이런 사실이 전혀 없다. 오히려 김부식(金富軾)은 중국에 요공(要功)하느라고 근거도 없이 모년모월(某年某月)의 조공(朝貢)을 일일이 열거해 중국에 예속된 것처럼 과장(誇張)했다. 또한 자기중심의 역사를 위조한 일본 역사에도 고구려가 일본을 정복하고, 신라가 일본을 지배하고, 백제가 일본에 진출한 사실을 전혀 기록하지 않았다. 오히려 일본의 침략을 받은 것만을 일일이 기록했다. 이는 위조된 중국사와 일본사조차 제대로 베끼지 못한 것이니 참으로 한심한 일이다.
 
우리 한민족의 천민사상은 민족적 자존심, 민족적 자주성을 북돋았다. 이에 민족의식이 환기되고 용기와 인내력이 발휘되어 외적의 침략에 저항하고 1만년 불멸의 역사를 창조했다. 그런데 김부식(金富軾)을 시조로 하는 사대사가(事大史家)들이 천민사상(天民思想)을 말살하고 이민족에 예속된 이단적역사(異端的歷史)로 위조했다. 이에 민족의식이 침소(沈消)되고 열등의식(劣等意識), 패배의식(敗北意識)이 조장되어 불멸의 역사가 멸망되고 말았다. 몽골, 거란(契丹), 여진(女眞) 등이 우리를 침략했던 외적이었다면 김부식(金富軾) 등 사대주의자는 내적(內賊)이다. 지금도 우리나라에는 이러한 사대주의의 내적(內賊)인 학노(學奴)들이 활개치고 있다. 이들에 의해 우리 한민족은 외적의 ‘칼’에 망한 것이 아니고 내적(內賊)의 ‘펜’에 스러져 갔다. 그들의 위조된 글들이 한민족의 위대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를 훼손해 왜소(矮小) 소침(消沈)되는 비극을 가져 왔다. 이에 이번 칼럼은 위대한 역사의 부흥운동과 관련된 고려시대 중흥운동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고려 황제국가, 동명왕 태조·국조 받들어 사당 세우고 성대히 제사
 
왕건태조(王建太祖)가 고려를 세우며 그 국호(國號)를 고려(高麗)라고 한 것은 고구려를 중흥할 목적이었다. 고려는 고구려 시조 동명왕(東明王)을 크게 숭배했다. 즉, 동명왕을 태조로 칭하고 고구려 옛 땅을 동명구양(東明舊壤), 동명고강(東明故疆)이라고 부르며 동명왕(東明王)에 제사하는 사당(祠堂)을 세웠다. 고려사를 기술한 고려사지(高麗史志, 十七, 禮五, 雜記)에 보면 숙종(肅宗) 10년 8월에 동명성제사(東明聖帝祠)에 제사했다고 했다. 그리고 고려사에는 현종(顯宗) 3년 12월조(條)에 서경(西京)에 목멱사신상(木覓寺神像)을 세웠다고 했다. 목멱(木覓)은 동명왕을 가리킨 것이다. 또 동문선(東文選 卷二, 三都賦)에 보면 고려사절요(節要) 인종(仁宗) 9년8월조(條)에 묘청(妙淸)이 팔성당(八聖堂)에 구려목멱선인(駒麗木覓仙人)을 추대했다고 했다. 구려(駒麗)는 고구려다. 또 동문선(東文選)에는 동명성제(東明聖帝)가 신선(神仙)을 거느리고 다녔다고 했다. 목멱선인(木覓仙人)은 동명성제(東明聖帝)를 가리킨 것이다.
 
고려사에 보면 예종(睿宗) 11년 4월에 서경목면동명사(西京木覓東明祠)에 기우(祈雨)했다고 했으며, 충열왕(忠烈王) 4년 9월에 사신(使臣)을 평양에 보내 태조목멱묘(太祖木覓廟)에 제형(祭亨)했다고 했다.(高麗史志, 十七, 禮五, 雜記) 이를 보면 목멱선인(木覓仙人)은 동명성제(東明聖帝)를 가리킨 것이 분명하다. 고려는 천왕(天王)인 동명성제(東明聖帝)를 크게 숭배해 태조라 칭하고 국조(國祖)로 받들었다. 그리고 지명(地名)에 목멱(木覓)을 부치고 목멱(木覓)땅에 국도를 정하면 세계를 지배한다는 황제국가의 천왕사상을 고취했다. 이는 김위제전(金謂磾傳), 윤해전(尹諧傳), 동국여지승람(東國輿地勝覽) 등에 명백히 기록돼 있다.
 
고려사에 보면 김위제(金謂磾)가 도선기(道詵記)를 인용해 남경에 천도할 것을 주청(奏請)하면서 목멱(木覓)땅이 남경이라 하고 한강 삼각지 등지에 천도 할 것을 주장했다. 그러면 한강 삼각산 등지가 남경이요 목멱(木覓) 땅이다. 그리고 시절을 따라서 남경, 중경, 서경에 천거(遷居)하면 36국을 지배한다하고 도선(道詵)의 답산가(踏山歌)를 인용했다. 다시 말해 한강의 양(陽,음양학)에 국도(國都)를 정하면 사해(四海)가 내조(來朝)한다하고 했다. 또한 삼각산 명당기(三角山明堂記)를 인용해 삼각산(三角山)에 국도를 정하면 사해(四海)가 내조(來朝)한다하고 고려사열전(高麗史列傳), 卷 三十五) 방기(放技) 김위제(金謂磾)에 쓰여져 있다. 또 고려사에 고려말기의 명승(名僧)인 보우(普愚)가 삼각산 중흥사(重興寺)에 거주하면서 국도(國都)를 한양에 정하면 36국을 지배한다고 했다.(高麗史列傳, 卷 十九, 윤해(尹諧)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卷三)에 한성부(漢城府)에 목멱산(木覓山)이 있고, 목멱산정(木覓山頂)에 목멱신사(木覓神祠)가 있다고 했다. 요컨대 한양(漢陽 삼각산(三角山) 등지를 목멱(木覓)이라 칭하고 목멱(木覓) 땅에 국도(國都)를 정하면 세계를 지배한다고 한 것이다. 이는 동명성제(東明聖帝)의 이상(理想)을 중흥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중흥운동을 일으킨 것이다. 고려시대에 이들 중흥운동이 이처럼 활발히 전개됐다. 태조(太祖) 왕건(王建)에서 부터 예종(睿宗), 인종대(仁宗代)의 묘청(妙淸), 명종(明宗), 고종(高宗) 등의 시기에 이 같은 중흥운동이 활발히 이뤄졌다.
 
왕건 태조부터 예종(睿宗), 묘청(妙淸) 등 고구려 중흥운동 활발
 
동명성제(東明聖帝)의 이상(理想)을 중흥해 세계를 지배하려는 중흥운동은 고려를 세운 왕건 태조(王建太祖)부터 맹렬히 전개됐다. 고구려를 중흥 할 목적으로 나라이름을 고려라 하고, 고구려를 세운 동명제(東明帝)를 태조라 존칭하고 고구려 옛 서울 평양에 중흥사(重興寺)를 세웠다. 그리고 고구려를 중흥하는 방법으로 한민족(韓民族)의 고유한 문화사상(文化思想)을 존중하고 외래사상(外來思想)을 배제했다.
 
고려사에 보면 의종(毅宗) 22년 3월조(條)에 고유한 신선사상(神仙思想)을 신앙했다고 했다. 고려사절요(節要)에는 예종(睿宗) 원년 7월조(條)에 왕건 태조가 중국문화와 북방민족의 풍속을 금하라고 교훈했다(太祖十訓要 제2조)고 했다. 모든 사찰은 도선(道詵)의 지리산악설에 의하여 세우라 한 것이다. 고려사절요(節要)에는 또 문종(文宗) 9년 10월(條)에 태조가 산천위배(山川違背)를 진압키 위해 사찰을 세웠다고 했다. 즉, 고유한 산천사상(山川思想)을 발전시키는 수단으로 불교를 신앙했다고 했다. 이는 민족의 생명력인 문화사상을 중흥하는데 주안(主眼)을 둔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의 광활한 옛 강토를 회복할 목적으로 서역승(西域僧) 말라(襪囉)를 통해 송(宋)과 연합해 거란(契丹)을 정복하고자 했으나 송(宋)이 불응함으로 실패했다. 이 같이 왕건태조(王建太祖)는 고구려의 중흥을 위한 방법으로 고유한 문화 사상과 함께 옛 강토를 수복하려고 노력한 것을 알 수 있다.
 
고려 제16대왕인 예종(睿宗)은 옛날 영랑(永郞), 술랑(述郞), 안상(安詳, 남석행(南石行) 등 사선(四仙)의 자취에 영광을 가하고 국선(國仙)의 도(道)를 행하는 조서(詔書)를 내렸다. 이는 고유한 신선사상, 화랑사상을 중흥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윤관(尹瓘)을 도원수(都元帥)로 17만 대군을 일으켜 여진(女眞)을 정복했다. 다만 여진(女眞)이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긴다는 다짐을 받고 그 정복한 땅을 다시 돌려주었다. 고유한 한국사상을 존중하는 예종(睿宗)이 여진(女眞)을 정복하는 북진정책을 취한 것은 그 본의가 고구려를 중흥하려는데 있다고 평해야 한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제17대 인종(仁宗) 6년 8월조(條)에 걸승(傑僧) 묘청(妙淸)이 서경임원역(西京林原驛)에 국도(國都)를 정하면 천하를 합병하고 36국을 지배한다고 주장하면서 천견군(天遣軍)을 일으켰다고 했다. 서경(西京)은 평양(平壤)이요 평양은 고구려의 국도(國都)다. 묘청(妙淸)의 서경운동((西京運動)은 고구려와 같은 강대국을 다시 중흥(中興)하여 세계를 지배하려고 한 것이다. 그런데 묘청(妙淸)의 작전계획이 졸렬(拙劣)해 애석하게도 사대주의자 김부식(金富軾)에게 패했다. 이 때 묘청(妙淸)의 중흥운동(中興運動)이 성공했더라면 우리 한민족의 역사는 다시 쓰여졌을 것이다.
 
의종(毅宗), 명종(明宗), 고종(高宗), 최영(崔瑩)의 중흥운동
 
제국의 중흥운동은 의종(毅宗), 명종(明宗), 고종(高宗), 최영(崔瑩)에 이르기 까지 전개된다.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제18대 의종(毅宗) 12년 8월조(條)에 유원도(劉元度)가 의종(毅宗)에게 “백주(白州)는 우리나라를 중흥할 땅입니다. 이곳에 궁궐을 세우면 7년 내에 금(金)을 정복하고 만주를 회복한다”고 상주(上奏)했다. 이에 의종(毅宗)이 그 상주(上奏)를 따라 백주(白州)에 중흥전(中興殿)을 건축했다. 이는 의종(毅宗)이 고구려의 옛 땅인 만주를 회복하고 고구려를 중흥하려고 한 것이다.
 
의종(毅宗) 6년6월에 수창궁(壽昌宮)에서 천황(天皇), 대제(大帝), 태일(太一, 天神)에 초제(醮祭)를 거행하고 24년에는 춘정월(春正月)에 대관전(大觀殿)에서 다음과 같은 신료(臣僚)의 하표(賀表)를 친히 지었다. 즉, 전략(前略) 玉帛爭來萬邦預駿奔之列 梯航畢集 四方無後至之人...北史上壽而致辭 日域獻寶而稱帝...仰瞻萬乘之威 趨詣北辰之所(下略) 이는 “세계만방의 군주가 앞을 다투어 와서 굽실거리면서 조공하고 동서남북의 사신이 먼 산을 넘고 넓은 바다를 건너면서 모두 내조(來朝)하여 뒤떨어진 사람이 없다. 거란(契丹), 여진이 대사를 보내어 만수무강을 축복하고 일본이 후왕의 열에 처하여 예물을 바치고 우리를 황제라 존칭한다. 그리하여 천자의 위풍을 우러러 보고 천자의 앞에 달려와서 배알(拜謁)한다”고 한 것이다. 의종(毅宗)이 고구려를 중흥할 운동을 전개하면서 천자(天子)로 자처한 역사적 기록이다.
 
또한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에는 제19대 명종(明宗) 5년 8월조(條)에 명종(明宗)이 순천관(順天館)에 행(幸)하여 천황지진사(天皇地眞祠)에 기복(祈福)했다고 했다. 천황지진사(天皇地眞祠)를 세운 것은 천황사상을 존중한 것이다. 또 20년 12월(條)에 황국(皇國)이라는 항가(巷歌)가 유행했다고 했다. 천황 황제의 국가라는 노래가 향간서민층(鄕間庶民層)에 유행한 것은 그 당시에 천황 황제의 사상을 크게 고취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26년 5월(條)에 최충헌(崔忠獻)이 태조(太祖)의 정법(正法)을 준수해 불교를 믿지 말고 고유한 산악사상을 존중, 중흥의 대업을 이룩하자고 건의하니 명종이 기꺼이 받아 들였다고 했다. 이는 고유한 문화사상을 중흥해 고구려를 다시 회복하고자 한 왕건태조(王建太祖)의 유지(遺志)를 계승한 기록이다.
 
또 고려사(高麗史)에는 제23대 고종(高宗) 14년 10월조(條)에 천황당(天皇堂)에 전승(戰勝)을 기도했다고 했다. 천황당(天皇堂)을 세운 것은 천황사상을 존중한 것이다. 또한 고종(高宗) 10년 10월(條)에 황태후를 태황태후(太王太后)로 추존했다고 하고, 34년 3월에 동진국(東眞國)에 보내는 국서에 제지(帝旨)라고 했다. 제지(帝旨)는 황제의 뜻을 가리키는 문구다. 특히 고종은 그 군인을 천병(天兵)이라고 칭했다. 천병(天兵)은 천자(天子)의 병(兵)을 가리키는 것이다. 이 천병사상(天兵思想)도 천왕, 천자의 사상에서 나왔다. 고려 말의 최영장군 역시 다 기울어져 가는 고려를 일으켜 세우려고 왕건태조(王建太祖), 의종(毅宗), 명종(明宗), 고종(高宗)의 중흥운동을 계승했다. 그는 동명성제(東明聖帝)의 이상(理想)을 중흥해 고려를 일으켜 세우는데서 나아가 세계를 지배하려는 중흥운동을 꾀했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인간 단군을 찾아서’ ‘한국고대사를 생각한다’, 최인 ‘한국학강의’, 존 카터 코벨 지음·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김부식 ‘삼국사기’,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한창건 ‘환국·배달·조선사신론’, 임길채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강동민 ‘불쌍한 대한민국’, 한정호 ‘대조선민족사’, 박찬희 ‘지구촌 인류를 구제할 법칙’,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삼성(三聖)의 역사’, 한창건 ‘한국고대사 발굴’, 우창수 ‘아사달(상, 하)’, 日本國書 刊行會 ‘神皇紀’,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林承國 ‘韓國正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秋山謙藏 ‘日本の歷史’ 津田秀夫 ‘日本史’, 三省堂 編修所編·永原慶二 監修 ‘中學社會歷史’, せいいくど ‘新. 漢民族から大和民族へ’, 坂本泰良 ‘明治維新から現代へ’ 외 다수 서책을 참조하고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이을형 필진페이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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