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역사에서 배울 점을 꼽으라면 그 나라 국민의 정신상황이 그 나라 운명을 좌우해 왔다는 사사실이다. 지금 우리의 정신상황은 대한제국 말기의 상황과 많이 닮았다. 세계정세는 크게 변화하는데도 19세기 사고방식을 그대로 견지하며 아직도 정치인부터 국민들까지 일본에 의해 심어진 식민사관에서 온전히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날 일본은 외세에 의해 1854년 개국해 옛 탈을 벗었으나 우리는 일본이 개항하고 22년이 지나는 동안 쇄국정책을 그대로 견지하며 세계변화에 무관심 했었다. 변화에 편승하지 못한 다른 아세아제국(諸國)들도 모두 서구열강(西歐列强)의 식민지화(植民地化)로 변했다.
영국의 경우 1819년 싱가폴을, 1824년 마라카를 각각 식민지로 삼았다. 또한 1824~26년, 1852년~53년의 2회에 걸쳐서 영국과 버마(미얀마)전쟁에 의해서 미얀마를 차지했다. 1858년에는 전 인도(印度)를 영국의 식민지로 만들었다. 프랑스도 영국에 이어 베트남에 진출하며 1857~62년의 제1차 프랑스-베트남 전쟁에 의해서 식민지화 시켰다. 이어 1863년에는 캄보디아를 보호령(保護領)으로 했다. 중국은 유럽제국으로 부터 직접 침략은 받지 않고 있었지만 1840~42년의 아편전쟁(阿片戰爭)에서 영국에 패해 열강의 침략을 맞았다. 이후 1842년의 남경조약, 1843년 추가조약(追加條約)에 의해서 향항(香港=홍콩)을 영국에 뺏기고 상해, 광동(廣東) 등의 5개항을 개항하게 됐다. 이러한 개항장(開港場)에 조계(租界)의 설치와 무역 최혜국대우(最惠國待遇)를 인정해 관세자주권(關稅自主權)마저 잃었다. 이러한 열강의 중국침략을 시작으로 1844년에는 미국과 프랑스까지 불평등조약을 중국과 맺었다.
이어 영국과 프랑스의 대 중국침략이 잠시 멎었지만 그것은 크리미아전쟁(1853~56년) 때문이었다. 1856년 크리미아전쟁이 끝나자 다시 중국침략이 재개됐다. 이것이 ‘제2차 아편전쟁(阿片戰爭)’이다. 이 전쟁은 1856년 영국함대의 광동공격(廣東攻擊)으로 시작됐다. 그해 광동성(廣東省)에서 프랑스 선교사가 살해된 것을 중국에 대한 전쟁구실로 삼은 프랑스는 영국과 동맹해 중국을 공격했다. 이 전쟁의 결말은 1858년의 천진조약(天津條約)으로 마무리된다. 이 조약에 의해서 양자강 연안의 진강(鎭江), 구강(九江), 한구(漢口) 및 우장(牛莊=지금의 영구·營口), 등주(登州)의 각시(各市)를 드나들 수 있게 됐다. 그런데 조약비준지문제로 영불연합국은 또 북경에 진격해 1860년 북경협정을 맺으면서 전쟁은 끝났으나 이 협정은 앞의 천진조약(天津條約)을 확인해 천진개항(天津開港)과 구룡반도(九龍半島) 남부의 영국 할양(割讓)을 정한 것이었다.
중국의 이 같은 혼란을 이용한 러시아는 1857년~58년에 중국으로부터 흑룡강 유역과 연해주를 취했다. 이처럼 당시 조선의 종주국 역할을 자임했던 청국(淸國)은 열강의 침략을 받고 있었다. 이 시대에도 우리는 쇄국(鎖國)을 계속했다. 중국에 눈이 쏠린 열강들은 조선에도 눈을 돌리는 것은 당연했다. 처음에는 외국상선이 조선연안에 와서 통상을 요구를 할 정도로 무력에 의한 개국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그것이 1866년부터는 무력에 의한 침입으로 변했다. 최초의 무력에 의한 조선침입은 대원군의 천주교 박해로 중국으로부터 조선에 잠입한 프랑스 선교사를 죽인 것을 구실로 한 프랑스의 보복행위였다. 그러나 이는 실패한다. 이것이 병인양요(丙寅洋擾)다. 병인양요 이후 외국선의 내항이 격렬하게 된다. 해적선을 비롯해 미국기선(汽船) ‘샤만 호’의 대동강 침입 등이 있었다. 그러나 샤만 호는 불타고 승무원들은 모두 죽임을 당한다. 이에 1871년에 미 태평양함대사령관 로저스가 인솔한 함대가 1866년 ‘샤만 호’ 사건의 해결을 요구하며 강화도 포대를 공격했으나 미 함대 역시 격퇴됐다. 이어 일본의 운양호가 강화도 침입을 시작으로 조선의 운명이 일본에 의해 나라를 잃는 국치(國恥)를 맞는다. 조선은 쇄국으로 국제정세를 읽을 수 없었고 국제법에도 무지한 것이 결국 큰 화근을 자초한 것이었다.
강화도에서 체결한 ‘강화도 조약’에 우리 측 대표는 일본 대표가 말하듯 ‘전혀 국제법 지식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러기에 일본의 일방적 요구를 다 들어주는 결과가 일본으로 하여금 조선을 침략해도 되겠다는 빌미를 제공하게 된다. 현재도 국제법 무지는 여전하다. 내년은 한·일협정 50주년이 되는 해인데, 이 협정 역시 국제법 무지로 일본과 조약이 성립되지 않는 늑약임에도 조약이라고 하고 있다. 나아가 우리와 관계없는 청일 간에 체결된 ‘간도조약’까지 인정하며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고 있지만 지금도 그 시정은 고사하고 한·일협정 50주년을 기념한다고 말하고 있다. 국제법 무지는 여전히 심각하다. 최근 한·일 국장급 회담도 일본은 독도문제를 거론하는 것이 어불성설이었지만 우리가 보여준 국제법의 무지를 간파한 일본의 전략적 행동이었다. 21세기 지식기반 사회인 오늘에 이제 우리도 달라져야 하는데 그 변화가 미흡하다. 이번 칼럼은 최영 장군의 고려 중흥운동과 천병(天兵)의 유래, 근대사에서 보는 동북아 상황, 그리고 금후 우리의 자세 등에 대해 다루고자 한다.
최영(崔瑩)의 중흥운동, 천병(天兵)사상도 천왕사상에서 나왔다
고려를 반석위에 올려놓기 위해 고려말기 만주 정벌을 시도한 최영 장군은 왕건태조(王建太祖), 의종(毅宗), 묘청(妙淸), 명종(明宗), 고종(高宗)의 중흥운동을 계승해 동명성제(東明聖帝)의 이상(理想)을 중흥시켜 고려를 일으켜 세우고 세계를 지배하려는 맥을 계승한 것이었다. 당시 고려는 이 땅 제주도 제주시 애월읍 황파들이 고성(古城)에 남아 있는 몽골군을 다 몰아내기도 했었다. 고려는 고구려 옛 강토, 만주를 회복하고 고구려 같은 강대국을 건설하고자 했다. 그러나 철저한 준비와 상황을 제대로 분석하지 못해 위화도 회군의 빌미를 줘 실패했다. 최영 장군의 중흥운동에 관해 신채호(申采浩) 선생은 묘청(妙淸)의 서경운동이 실패한 후에 자주독립의 사상이 말살되고 외래사대사상이 전성한데서 배경을 찾았다. 신채호 선생은 ‘묘청(妙淸)의 서경운동의 실패를 1천년에 한번 일어날 대사건이라고 논평했다. 그러나 견해에 따라 논평은 그릇된 견해다. 왜냐하면 묘청(妙淸)의 서경운동이 실패한 것은 제17대 인종(仁宗)시대인데 제18대 의종(毅宗), 제19대 명종(明宗), 제23대 고종(高宗)이 역시 중흥운동을 전개했기 때문이다. 제31대 공민왕(恭愍王) 시대에는 현승(賢僧) 보우(普愚)가 36국을 지배한다는 중흥운동을 주장하기도 했다.
최영 장군은 선왕들의 중흥운동을 구체적으로 실현하기 위해 만주정벌을 추진했다. 이는 묘청(妙淸)이 실패한 후 자주독립의 사상이 계승된 것이었다. 따라서 최영 장군의 장도(壯圖)가 실패한 것이 우리 역사상 대사건이라고 함이 옳다. 고려시대에 역대제왕(歷代帝王)이 황도(皇都), 황성(皇城), 황후(皇后), 짐(朕), 조(詔), 제(制), 표(表), 계하(階下), 태자(太子) 등 황제의 용어를 사용한 사실을 보면 고려가 고구려의 천왕사상을 계승해 세계를 지배했던 과거 황제국가의 부흥을 꾀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아울러 천병사상(天兵思想) 또한 천민사상을 근간으로 한 천왕, 천자의 사상에서 나왔다. 천병(天兵)은 천자(天子)의 병(兵)을 가리키는 것이다. 후왕(侯王)의 병(兵)은 천병(天兵)이라 칭하지 못한다. 위략집본(魏略輯本, 卷二十一)에 보면 우리 한민족은 부여시대부터 고려 말기 까지 천병사상(天兵思想)이 계승됐다. 후한서(後漢書) 동이전(東夷傳)에 부여(夫餘)는 전쟁이 있으면 하늘(天)에 제사한다고 했고, 고구려는 출전할 때에 하늘(天)에 제사한다 했다. 이는 고려사열전에 나와 있다.(高麗史列傳, 卷 二十六, 鄭地), 즉, 정지(鄭地)가 왜구(倭寇)와 싸울 때에 승리를 위해 천에 절을 하였다고 했다. 하늘(天)에 절을 한 것은 천병(天兵)으로 자처 한 것이다.
고려사(高麗史 太祖十九年九月)에 보면 왕건 태조도 그 군인을 지천군(支天軍), 우천군(祐天軍), 천무군(天武軍), 간천군(杆天軍)이라 칭하고 묘청(妙淸)의 군인을 천견군(天遣軍)이라 이름했다.(高麗史列傳, 卷, 四十, 妙淸). 또한 고종(高宗)이 천병(天兵)의 의식을 거행했다. 그리고 공민왕(恭愍王)18년 9월조(條)에 왕이 7일 동안 천병(天兵)의 의식을 거행했다고 했다. 이 같은 천병사상(天兵思想)은 천자국가(天子國家)에서 나온 것이다. 신증 동국여지승람(新增 東國輿地勝覽) 사묘조(祠廟條)에 보은현(報恩縣)에 대자재 천왕사(大自在 天王詞)가 있고, 봉안현(奉安縣)에 태일전(太一殿=천신전·天神殿)이 있고, 삼척현(三陟縣)에 태백산사(太白山詞)가 있다고 했다. 이를 속인(俗人)이 천왕당(天王堂)이라 칭한다 하고, 협천현(陜川縣)에 정견(正見) 천왕사(天王詞)가 있다고 기록했다. 이들 사묘(詞廟)는 고대, 중세에 천황국가(天皇國家), 황제국가(皇帝國家)로 발전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유네스코 “한민족이 인류의 기원” 인정·발표…위대한 역사·문명 찾아야
A, 헬프스(Arthur Helps)는 “역사란 국민의 노력을 위한, 해도(海圖)요 나침판이다”고 했다. 그런데 우리는 우리 역사를 너무나 잘 모르고 있다. 그리고 세계 역사 등 이웃나라 역사와 그 국민성도 알 필요가 있는데 우리는 너무 단조롭다. 중국은 300년 이상 유지한 나라가 거의 없는데, 그 원인을 보면 중국인은 권력투쟁을 좋아하는 것을 잘 알 수 있다. 고구려가 700여년을 이어가는 동안 중국은 35개 국가가 명멸(明滅)한 것이 이를 증명한다. 예컨대, 진(晋)나라가 14년, 수(隨)나라가 37년에 불과했다. 삼국지에 나오는 초(楚)가 43년, 위(魏)가 46년, 오(吳)가 53년이다. 또 진(秦)은 50년도 못가는 역사를 갖고 있다. 이는 중국의 약점이 되고 있다.
이들 결점은 중국의 근대화를 막는 큰 요소가 되면서 섬나라 일본에게도 청일전쟁에서 패하는 결과를 가져왔다. 권력투쟁을 좋아하는 것은 중국역사 속에서 여러 개의 형태로 나타나고 있음을 본다. 이것은 중국의 나쁜 국민성 중 하나다. 중국 역사를 보면 중국 역대의 왕조 속에서 권력투쟁이 끊일 날이 없었다. 이는 근대에 있어서도 변하지 않았다. 예컨대, 중국에는 청조말기(淸朝末期) 유럽이나 일본 등 해외열강으로 부터의 외압이 높아져 침략의 위기에 처했음에도 불구하고 내부에서는 동이족인 만주족(滿洲族)과 한족(漢族)이 대립 항쟁했다. 손문(孫文)이 이끄는 중화민국혁명후도 신정부는 내분과 분열을 거듭해 대(對) 일본과 전쟁 중에도 국민당과 공산당이 대립해서 피를 흘리는 내전을 계속했다. 일본과 싸우는 중에도 장개석(蔣介石)의 국민당(國民黨)과 모택동(毛澤東)의 공산당(共産黨)간에는 권력투쟁이 계속됐다. 왜 중국에서는 이러한 권력투쟁이 끊이지 않는 것인가. 그것은 중국역사 4천년 이래 유럽이나 미국 등의 문화권으로부터 격절(隔絶)하여 극동에 있어서 고대부터 우리 한민족에 지배를 받던 중국 한족(漢族)이 한민족이 대륙에서 밀려나자 유일 최대의 문명국으로 자처하며 다른 세계와 관계없이 살아왔기 때문이다. 즉, 중국 자신이 하나의 세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중국인의 중화사상도 여기서부터 나왔다. 근세중국의 한족은 오랜 기간 자기들이 천하의 중앙에 있어서 꽃과 같은 문화를 꽃피우고 있는 나라이며 주위의 이민족(異民族)은 야만이나 이적(夷狄)에 불과하다는 잘못된 우월감을 갖고 있다. 이러한 자만에서 외부와의 관계가 없기 때문에 결국 컵 속의 바람이 돼 내부에서 권력을 둘러 싼 싸움이 반복되는 것이 됐다. 물론 권력을 둘러 싼 싸움은 어디든지 있고 우리도 예외는 아니다. 하지만 그 수준이 문제다.
일본의 경우 옛 부터 이웃 조선이라는 문명이 앞선 나라가 있어서 문화적으로 끊임없는 영향력 하에 있었다. 일본을 꽃피우게 한 나라는 바로 우리 한국이다. 그러나 일본은 언제나 우리에게 은혜를 원수로 갚는 일만을 해왔다. 왜구(倭寇)를 비롯해서 도요도미 히데요시(豊臣秀吉)때는 조선침략을 했다. 막부(幕府) 시대에는 12회나 통신사를 통해 교류하다가 미 극동함대 폐리제독의 시모다(下田) 개항 이후 국민적으로 공통의 위기감이 높아지자 하나로 뭉치는 국민성을 보여주었다. 더욱이 명치유신 이후 입본의 지도자나 국민은 소(小)를 버리고 대(大)를 위해 대동단결해 나갔다. 이를 통해 국난을 용수철처럼 일거에 이겨내고 근대화와 부국강병(富國强兵)의 나라로 발전시켰다. 이러한 국민성은 극심한 변화를 가져왔다. 명치유신 후 노골적인 조선침략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이제 우리나라는 역사를 바로 세워가는 것이 시급한 과제다. 우리의 위대함은 ‘위대한 역사와 찬란한 문화가 있음’을 명심해야 하는 것인데 변화 없이 제자리걸음이다. 깊은 잠에서 깨어나야 한다. 유네스코(Unesco)가 “인류의 기원은 한국인이다”고 인정하며 발표하는 상황임에도 여기에 토를 다는 자 누구인가. 반성을 모르는 것은 죄악이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인간 단군을 찾아서’ ‘한국고대사를 생각한다’, 최인 ‘한국학강의’, 존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김부식 ‘삼국사기’,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한창건 ‘환국·배달·조선사신론’, 임길채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 강동민 ‘불쌍한 대한민국’, 한정호 ‘대조선민족사’, 박찬희 ‘지구촌 인류를 구제할 법칙’,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삼성(三聖)의 역사’, 한창건 ‘한국고대사 발굴’, 우창수 ‘아사달(상, 하)’, 日本國書 刊行會 ‘神皇紀’,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林承國 ‘韓國正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秋山謙藏 ‘日本の歷史’, 津田秀夫 ‘日本史’, 三省堂 編修所編, 永原慶二 監修 ‘中學社會歷史’, せいいくど ‘新. 漢民族から大和民族へ’, 坂本泰良 ‘明治維新から現代へ’, 山邊健太郞 ‘日韓倂合小史’ 외 다수 서책을 참조하고 많은 인용을 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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