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에 태양의 나라였던 동방대국 ‘백제’

입력 2014-12-27 21:39: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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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 - 중국과 일본 사서(史書)들의 허구
 
백제가 나당연합군에 의해 660년 패망하고 663년에 백제유민이 보낸 선단이 백강 전투에서 패하자 일본은 자신들의 본국이 멸망한데 성묘를 못하게 됐다고 한탄하며 통곡했다. 왜 이들이 백제의 멸망에 통탄을 금치 못했는가. 그것은 백제가 자신들의 본국이었고 일본은 백제의 식민지였기 때문이다. 일본의 고대 역사가 우리 역사라고 하는 것은 일본 스스로 그들의 땅이 백제의 분국이라고 여긴 탓이다. 백제는 원래 한반도만이 아니라 대륙깊이 지금의 중국 요서(遼西), 진평(眞平), 광서지역 남령(베트남 국경에 이르는 곳), 일본까지 광대한 영토를 가진 대국이었다. 서해를 ‘백제 해’(百濟 海)라고 했을 만큼 대 해양제국이었다. 그러나 중국과 일본의 사서(史書)를 보면 백제를 한반도에 한정시키려 하고 있다. 백제는 중국대륙을 호령한 대제국이었다. 백제의 유물과 무령왕릉 같은 능이 아직도 중국에 3백여 기가 널려 있는 것이 이를 증명한다.
 
우리나라 역사는 환국시대부터 배달국 단군시대의 고조선을 거쳐 예맥,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 등 모두 대륙에서 출발해 화하족(華夏族)인 한족(漢族)을 지배하고 지도 해 왔다. 우리 선조들의 강역은 일찍부터 중국대륙에서 동남아 서역까지 광대한 영역이었음이 밝혀지고 있다. 중국이 비록 우리 역사서를 모두 없앴으나 지리지(地理誌)인 산해경(山海經)에 보면 상고시대 우리나라 강역은 동서가 3만리요, 남북이 5만리로 기록돼 전해진다. 인구도 당시 1억8000만명으로 기록돼 있다. 삼성기(三聖記)에도 상고시대 강역은 바이칼호(Baikal)호를 중심으로 시배리아대륙, 만주, 중국, 한반도, 일본열도에 이른다고 기록돼 있다. 그런데 중국은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서(史書) 외에도 한서(漢書), 후한서(後漢書), 위지(魏志), 삼국지(三國志)와 지리지(地理誌) 등에서 중국역사를 말하고 있지만 거의가 허구다. 한서(漢書)는 전한(前漢, 西紀前202~8)의 역사를 1세기 후반 반고(班固)가 편집한 것이고, 후한서(後漢書)는 후한(後漢, 25~220)의 역사를 5세기 초 범엽(笵曄)이 쓴 것이며, 위지(魏志)는 위(魏220~265)의 역사를 3세기말 진수(陳壽)가 편집한 것이다. 이 역사서들은 같은 것을 반복하고 있는데, 후한서(後漢書)의 경우도 사마천(司馬遷)이 쓴 사서(史書)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그대로 옮기고 있다. 그러면서 그들은 후한서(後漢書)보다 위지(魏志)가 사료적 가치가 높다고 하나 이 모두가 왜곡됐다.
 
삼국지(三國志)는 상상력이 뛰어난 나관중(羅貫中)이 6000여명의 인물을 등장시킨 허구의 장편소설이다. 유비의 삼고초려를 비롯해 제갈량(諸葛亮)을 마치 신선처럼 칠성단에서의 동남풍을 불게한 것이나 화살 10만개를 얻는 것 등이 모두 허구다. 또 장비가 엄안을 사로잡은 이야기며 관운장이 오관육장(五關六將)을 참(斬)하고 통관하는 것처럼 한 것도 거짓이다. 이는 모두 독자를 끌기 위한 것이다. 세인들은 “삼국지를 모르면 인생을 논하지 말라”고 하고 있기에 사기극에 빠져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이런 허구의 책을 우리나라에서는 번역해 돈을 버는 수단으로 하고 있으니 안타깝다. 그 과정에서 우리 역사는 더더욱 소홀하게 다루어직 있기 때문이다.
 
일본의 경우는 8세기 초에 나온 가장 오랜 사서(史書)로 고사기(古事記)와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있다. 그 외에 풍토기(風土記) 등이 있다. 이들 책의 내용은 모두가 왜곡·변조됐는데, 그 숨기는 수법이 상상을 초월한다. 369년 일본의 첫째왕인 오진왕(應神王)부터 다음의 닌토쿠(仁德王) 등 일본 역사에 등장하는 왕들은 일본인이 아닌 순수 한국인 혈통의 한민족이다. DNA를 일본 학자들이 조사한 결과도 거의 모두 한민족 계통임이 밝혀졌다. 도쿄대(東京大)의 도쿠낭아 가쓰시(德永勝士) 교수와 도토리대학(島取大學)의 이노우에 다카오(井上貴央) 교수 등은 일본인의 인간유전자를 비교 연구한 결과 한국인 및 중국 조선족과 가장 가까운 것을 확인했다. 일본인은 우리와 피를 나눈 같은 조상을 가졌다. 이번 칼럼에서는 백제가 일본을 정복하고 지도한 사실을 살펴보고자 한다.
 
백제가 일본 해상권 장악하고 지배했다
 
사면이 바다인 일본에 있어서 제해권은 생명과 같다. 고대 일본에서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일본을 지배했다. 그런데 구당서 백제 전(舊唐書 百濟傳)에 ‘백제의 세력이 남으로 바다를 건너서 왜에 이르렀다’고 했다. ‘바다를 건너서’라 함은 백제가 일본의 해상권을 장악한 것을 가리킨다. 즉, 일본의 바다를 지배한 세력은 일본이 아니고 해양대국 백제였다. 또한 ‘백제의 세력이 왜에 이르렀다’고 하는 것은 백제가 일본바다의 해상권을 장악하고 그 세력을 일본에 확대한 것을 증거한다.
 
백제는 왕인(王仁), 하직기(阿直岐) 및 오경박사(五經博士)를 일본에 보내 일본 문화를 개척한 것은 주지의 사실이다. 그리고 한자도 우리가 만들었지만 이 한자를 간단한 가나(假名) 문자로 백제인이 만들어 준 것이다. 가나(假名カナ)문자가 일본에서 헤이안(平安)시대에 완성됐는데 백제, 신라의 토(吐)에서 유래했다. 특히 가다가나(片假名)의 다(タ).야(ヤ)는 백제의 토(吐)와 동일하다.(日本と朝鮮の二千年/神話時代90面) 또한 희세(稀世)의 걸작이라고 칭하는 백제관음도 백제인이 만들어 준 것이다. 대불주조(大佛鑄造)의 기술지도자인 국중공마려(國中公磨呂)의 조부가 백제인이었다.(日本と朝鮮の二千年/神話時代~近世114~5面). 그러면 불상 주조(佛鑄造)도 백제인의 기술과 관계있다고 볼 수 있다. 구한말 광무시대(光武時代)에 김기수(金綺秀)가 일본통신사로서 일본을 보고 기록한 해사록(海槎錄)을 보면 ‘백제가 경전(經傳)과 음악을 일본에 준 사실로 인해 오늘날에도 일본인이 백제를 말하더라고 했다’는 내용이 있다. 이 같은 역사적 사실들은 백제가 문화와 기술 등을 일본에 가르쳐 준 것을 실증적으로 뒷받침한다.
 
백제가 하사한 칠지도까지 왜곡하는 일본
 
1874년 10월 일본 나라현(奈良縣)에 있는 이시가미진구(石上神宮)에서 백제의 칠지도(七支刀)가 공개됐다. 그 명문표면(銘文表面)에 ‘泰口四年口月 十六日丙午正陽 造百練口七支刀口 辟百兵 宜共侯王’는 내용이 있다. 즉, 태구사년구월십육일(泰口四年口月十六日)에 불상(不詳)의 간흉(姦凶)을 제거하는 백연(百練(金+夷) 칠지도(七支刀)를 만들어 후왕(侯王)에게 주었다고 하는 것이다. 이 명문(銘文) 해석에 대해 일본학계에서 가장 많은 지지를 받은 것이 후쿠야마도시오(福山敏男)의 견해다. 그는 태구4년(泰口四年)은 동진(東晋)의 대화(大和) 4년이라고 해석해 일본서기 신공후(神功后) 52년에 백제가 칠지도(七支刀)를 헌납했다는 기록에 결부시켜 신공후(神功后)가 백제를 지배했다는 것이 금석물(金石物)에 의해 실증됐다고 어불성설의 주장을 했다. 그런데 칠지도(七支刀) 해석의 관건은 후왕(侯王)의 두자(二字)다. 후왕(侯王)은 제왕의 지배를 받는 속국의 왕을 가리키는 말이다. 백제왕이 일본 왜왕을 후왕(侯王)이라고 한 것은 백제왕이 제왕(帝王)으로서 일본 왕을 지배한 것을 실증하는 것이다. 설령 그 일본 왕이 신공후(神功后)라면 신공후(神功后)가 도리어 백제왕에 예속된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후쿠야마도시오(福山敏男)의 황당한 주장은 오히려 칠지도(七支刀)에 의해 백제왕이 후왕(侯王)이 아니고 제왕(帝王)이라는 사실이 판명되게 하는 역할을 했다. 후왕(侯王)은 연호(年號)를 사용치 못하고 제왕(帝王)은 연호(年號)를 사용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제왕(帝王)인 백제왕이 바로 연호(年號)를 사용했다. 칠지도(七支刀)는 백제 고이왕(古爾王) 17년 신공후(神功后)가 부족국 수준의 아마다이국을 정벌하고 부여씨(夫餘氏)의 왜국을 건설하자 이 제후국(諸侯國)의 부강을 원하는 뜻에서 하사됐다. 칠지도에는 태화4년(泰和四年)이라는 고이왕(古爾王)의 연호(年號)가 새겨져 있다. 그럼에도 일본은 이 조차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이는 마치 후한(後漢)시대 위무제 조조(魏武帝 曹操)가 천하를 호령 할 때 역사상 대 제왕(帝王)인 주문왕(周文王)에 자비(自比)해 백연철(百練鐵)로서 불상(不祥), 간흉(姦凶)을 제거하는 백벽도(百辟刀)를 만들어 일본 왕에게 준 것에 비유하나 웃기는 일이다. 일본은 하사품(下賜品)까지도 왜곡하고 있는 것이다.
 
동방의 강국인 대 제왕(大帝王)으로 자처한 백제 고이왕(古爾王)은 태화(泰和)라는 연호(年號)를 썼는데, 일본은 화(和)자를 지우고 왜곡·조작했다. 양심적인 교토대학의 우에다 마사기(上田 マサキ) 교수는 필자가 유학 시 1978년 동경 ‘조선장학회’ 강단에서 칠지도(七支刀)에 관한 일본의 조작이 ‘너무 창피하니 한국에서 지적하는 것 보다 먼저 말을 하는 것이 낳다’고 하며 강연을 하고 필자와도 대화를 나눈 적이 있다. 일본의 역사왜곡은 이처럼 유치하고 상상을 초월한다. 백제 무령왕(武寧王) 지석(誌石)에는 붕(崩)이라고 각명(刻銘) 돼 있다. 제왕(帝王)의 죽음을 붕(崩)이라 하고 후왕(侯王)의 죽음을 훙(薨)이라고 하는데, 무령왕(武寧王)이 붕(崩)이라 함은 제왕(帝王)으로 등극한 것을 입증하는 것이다. 그런데 사대주의자 김부식(金富軾)이 쓴 ‘삼국사기’에 무령왕(武寧王)이 훙(薨)했다고 기록해 후왕(侯王)으로 비하(卑下)했다. 또한 서거정(徐居正)은 삼국사절요(三國史節要) 서문에서 신라왕이 연호를 칭한 것은 참담한 일임으로 이를 삭제했다고 했다. 이 같이 작란(作亂)을 하는 사대사가(事大史家)가 백제왕의 연호 (年號) 태화(泰和)를 태구(泰口)로 날조해 문서역사에 제대로 기록하지 않기까지 했다.
 
동방의 강국으로 위세를 떨쳤던 백제
 
일본 천지왕조(天智王朝)는 백제의 병법(兵法) 산성(山城)을 쌓는 기술(技術)을 배웠다고 했다.(日本と朝鮮の二千年/神話時代~近世114~115面). 오늘날 일본 규슈(九州)지방의 조선 산성(朝鮮山城)은 일본인이 신롱석(神籠石) 또는 신호석(神護石)이라고 부른다. 이는 신비한 산성으로 신앙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 산성은 백제인의 지도에 의해 축조됐다. 또한 북사(北史) 백제전(百濟傳)에는 백제를 동방강국이라고 했다. 백제는 진서(晉世)에 북부중국에 진출해 요서(遼西), 진평(晉平)을 점유하고 남부중국에 진출, 월주(越州)까지 이르렀다. 이 같은 동방강국인 백제가 동방소국인 일본을 지배했던 것은 당연했다. 당시 동방의 강국인 백제가 태화(泰和)라는 연호(年號)를 칭하고 당당한 제왕(帝王)의 국가로서 후왕(侯王)인 일본을 오래 동안 지배한 것이다. 일본이 천황제도를 쓰기 시작해 일본인들이 닌도쿠왕을 닌도쿠덴노(仁德天皇)라고 하는데, 그는 일본의 첫째왕인 오진왕(應神王)과 다른 족속이다. 오진왕(應神王)은 기마민족인 가야계통이고 닌토쿠왕(仁德王)은 순수한 백제계다. 일본역사에 등장하는 왕들은 일본인이 아닌 순수 한국인 혈통의 한민족이라는 것을 거듭 강조하고자 한다.
 
일본 왕가의 혈통은 지금까지도 우리 한민족에 의해서 이어지고 있다. 일본의 현 아키히토(明仁)왕이 2002년 월드컵을 앞둔 기자회견(2001년 12월 23일)에서 한·일 양국 국민간의 이해와 신뢰확대를 위해서는 “양국 국민들의 국가가 걸어온 길을 각각 사건에 대해 정확히 알도록 노력해야 하며 개개인이 상대방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하고 자신도 한국인의 피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밝혔다.
 
문명·문물 전한 백제를 태양의 나라로 섬겼다
 
일본은 칠지도(七支刀) 날조 외데도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 비문을 조작·왜곡했다. 또한 5세기 야마토(大和) 조정에 산(讚), 진(珍), 세이(濟), 고(興). 부(武)라는 조작한 왜5왕이 대송외교니 하며 조작됐다. 스다하치만신사(隅田八幡神社)의 인물화상경(人物畵像鏡) 명문(銘文)의 경우도 의미를 조작·부여해 연대를 왜곡해 꿰맞추고 그럴듯하게 역사를 조작했으나 지금에 와서 그 거짓이 밝혀지고 있다. 나아가 일본은 상고사가 없는 나라임에도 허구의 역사를 만들어 내는 마술을 부렸다. 우리가 미개한 일본을 가르치기 위해 5세기 일본 오진왕시대에 왕인박사로 하여금 천자문, 논어 등을 갖고 가서 일본을 깨우쳤다. 이를 거꾸로 백제가 정치적으로 일본에 종속됐다는 유치한 날조를 하고 있다. 6세기 오경박사(五經博士)가 일본지배자 층에 유교를 정치이념으로서 보급시켰음을 망각하고 있는 것이다. 유교는 종교가 아니라 도덕이다. 당시의 호족(豪族)은 정치이념으로, 특히 쇼도쿠다이시(聖德太子)의 정치나 율령국가(律令國家)의 지배원리(支配原理)로 받아들이고 보급했다. 이 당시 일본은 한문을 비롯해서 천문(天文, 역(易), 역(歷), 의학醫學)등 우리나라로부터 많은 문물을 받아들였다. 이에 그들이 스스로 태양같이 섬긴 백제를 지배했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불교 역시 우리나라에 의해서 일본에 전해졌다. 사후의 세계를 생각지 않은 일본인에게 개인의 영혼을 구하는데 까지 깊게 관여한 것이다. 이는 가마쿠라(鎌倉) 이후의 일로 그 때까지는 현세이익을 주는 것으로서 신앙했다. 아울러 고구려 담징(曇徵)스님이 남긴 지(紙), 묵(墨), 회구(繪具) 제법을 전하는 유품과 불화(佛畵)며 사찰의 종(鐘)등이 지금도 우리나라보다 일본에 더 많이 남아 있음은 우리가 선구자임을 분명하게 말해준다. 쇼도쿠다이시(聖德太子)는 대륙문화를 우리나라로부터 받아들여 큰 성과를 거둔다. 그는 특히 문화정책과 밀접하게 관련한 귀족중심의 불교문화를 꽃피웠다. 그는 자신도 유교와 함께 불교도 내정지도(內政指導)에 힘써 사천왕사(四天王寺), 호류지(法隆寺), 중궁사(中宮寺)의 건립에 나서면서 불상과 조각에 많은 관심을 가졌다. 이 시대에 금동상(金銅像)이 많음은 이를 증명한다. 그 유품(遺品)으로 호류지금당석가삼존상(法隆寺金堂釋迦三尊像), 호류지금당약사여래상(法隆寺金堂藥師如來像), 호류지백제관음보살상(法隆寺百濟觀音菩薩像), 호류지몽전구세관음상(法隆寺夢殿救世觀音像), 중궁사(中宮寺彌勒菩薩像), 광륭사미륵보살반사유상(廣隆寺彌勒菩薩半跏思惟像, 백제왕이 하사) 등이 있다. 이들 어느 것 하나도 우리나라 특히 가야, 백제, 고구려 신라, 문화 밖에서는 찾지 못한다. 그럼에도 일본 고유의 것인 양 각색하고 있다. 호류지(法隆寺)도 신라인 진하승(秦河勝)이 지운 절이다. 그런데 일본은 중국진시황성씨진하승(秦河勝)이라고 조작한다. 진시황의 성씨(姓氏)는 가득할 영씨(贏氏)다.
 
지금도 고대 우리나라 유민들이 밀집해 살았던 일본근기지방(近畿地方)인 오사카(大阪), 나라(奈良), 교토(京都)의 부현(府縣) 등지와 동으로 관동(關東), 오우(奧羽)며 남으로 규슈(九州)지방, 기타 산사(山寺) 등에서 많은 유적, 유물들 나온다. 이들은 우리나라 유민들이 일본에 어떻게 영향을 미쳤는가를 잘 보여주고 한민족이 일본을 지배하고 지도한 것을 숨김없이 말해주고 있다. 일본은 우리의 고사(古史), 전기(傳記), 열전(列傳), 충의록(忠義錄) 등 많은 사료(史料) 수십만 권을 소각했지만 이렇듯 진실은 변할 수 없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를 생각한다’ ‘인간 단군을 찾아서’ ‘한국고대사를 생각한다’, 최인 ‘한국학 강의’, 존 카터 코벨 지음 ·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임길채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하’,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강동민 ‘불쌍한 대한민국’, 박찬희 ‘지구촌 인류를 구제할 법칙’,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삼성(三聖)의 역사’, 우창수 ‘아사달 상·하’, 김부식 ‘삼국사기’,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한창건 ‘밝혀진 한민족 고대사’, 남제 ‘命理속의 哲學’,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金正柱 ‘畿內の緣故遺蹟’,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林承國 ‘韓國正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秋山謙藏 ‘日本の歷史’, 津田秀夫 ‘日本史’, 三省堂 編修所編·永原慶二 監修 ‘中學社會歷史’, せいいくど ‘新. 漢民族から大和民族へ’, 坂本泰良‘明治維新から現代へ’, 遠山茂樹山 ‘明治維新と現代’ 외 다수서책을 참조·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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