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신사의 주신도 궁전의 주인도 ‘고구려인’

입력 2015-01-03 21:26:50

원문 링크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 -신화와 구전을 역사화 한 ‘일본서기’
 
660년 나당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수도가 함락되고 의자왕(義慈王)이 잡혀가면서 백제가 망하자 그 유신(遺臣)들은 일본에 있는 왕제(王弟)를 맞아 백제를 재건하려고 했다. 662년 사이메이(齊明)왕은 아베노이로후(阿倍比羅夫)에게 대군을 주어 백제구원에 나서게 했으나 나당연합군에 몰렸다. 사이메이(齊明)왕 이듬해에도 구원병을 급파했으나 이마저도 663년 백강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 참패를 하자 백제는 결국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다. 이에 일본은 국방력을 키우고 국가기본법전이 되는 율령(律令)에 의해 중앙집권적 정치체제를 강화시켰다. 이를 기반으로 701년 대보율령(大寶律令)을 완성시키고 8세기에 들어서는 국가 체제를 만들어 국사편찬까지 개시한다. 그러나 세이도그다이시(聖德太子)시대부터 수집해 둔 역사초안이 소가씨(蘇我氏)의 난(亂)에 전부 분실되고 남자인지 여지인지 알 수 없는 히에다노아레(稗田阿禮)라는 한 개인의 구전(口傳)에 의한 것을 바탕에 두어 일본역사를 엮어 놓았다. 즉, 히에다노아레(稗田阿禮)에 의해 신화적 역사를 위조하고 정체불명의 데이기(帝紀), 구지(舊辭)의 송습(誦習)된 것이 후에 고사기(古事記)가 되고 아울러 오기가베(刑部親王)들이 정사편집(正史編集)을 한 것이 일본서기(日本書紀)로 나왔다. 이 같이 일본의 역사는 조작·왜곡된 것이 버젓이 역사로 둔갑해서 나타났다. 이처럼 이들 일본의 역사서가 우리 역사를 그대로 적고 모방하거나 아니면 거의가 허구로 채워졌다. 그리고 명치유신 시대에 독일이 위대한 역사를 위조해 국민의 용기를 북돋우는 것을 흉내 내 의식적으로 역사를 위조하는데 주저함이 없었다.
 
그 뿐만 아니라 일본은 가야를 두고 일본인들의 미나마일본부(任那日本府)가 그곳에 있었다고 우기면서 우리역사를 뒤집어 놓으려고 획책했다. 우리나라 삼국이 정립하기 전, 변한(弁韓)지역에 일어났다가 중앙집권국가로 완성·발전되기 전 삼국의 압력을 받아 신라에 병합된 가야국이 있었다. 이 가야(伽倻 혹은 가라(加羅)는 신라보다 약 100년 늦게 낙동강 하류에서 고조선의 후손인 한(韓)의 지배를 받던 변한지역에 세워진 6개 부족국가들이다. 6가야 중에서 지금의 김해지방에 위치한 금관가야(金官伽倻)가 맹주(盟主)가 되어 안으로 결속을 굳게 했다. 그들은 김해 구지봉(龜旨峰)에 나타난 김수로왕(金首露王)을 시조로 받들었다. 금관가야 밑에 아라가야, 성산가야, 고령가야, 소가야, 대가야를 합쳐 6가야가 된 것이다.
 
미나마일본부는 일본인들이 주장하는 것과는 완전히 상반된 것이었다. 가야(伽倻)는 늦게 건국됨으로 당시 서쪽으로부터 백제, 동쪽으로부터 신라의 압력을 받아 어려운 상황에 있었다. 가야는 당시 쇠(鐵)와 농산물이 풍부하기에 이곳에 와서 자주 교역을 하던 왜국에 진출, 그곳에 미나마(任那)라는 작은 분국(分國)을 만들고 그들과 연맹하여 신라, 백제에 대항했다. 미나마(任那)는 우리나라가 왜 땅에 건설한 식민지다. 이후 왜와 가야에 시달린 신라는 고구려에 구원을 청했고 광개토호태왕(廣開土好太王)의 군대가 399년에 가야를 치고 왜를 함락시키는 계기가 된 것이다. 그 후 고구려의 세력이 팽창해 532년에 고구려 장수왕(長壽王)이 남침해 오자 이번에는 가야, 신라, 백제가 연합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후 정세가 변해 532년 신라가 금관가야를 병합하고 백제도 가야의 영토를 쳐서 빼앗았다. 세력이 급격히 약해진 가야는 겨우 명맥을 유지하다가 백제의 도움을 받아 신라를 공격했으나 562년 고령의 대가야마저 신라에 병합됨으로서 6가야는 멸망했다.
 
가야는 건국되기 전부터 일본에 건너가서 분국을 세웠으며, 가야의 모든 문화를 전했다. 오늘날 일본이 자랑하는 일본도(日本刀)도 가야의 기술전수에서 나왔다. 가야는 기마민족으로 일본에 말(馬)을 처음 가져갔고 대륙의 문물과 활발한 대륙의 문화전수를 행하여 일본에 가야(かや)라는 지명이 수없이 많이 생기게 했다. 당시 왜의 문화수준은 구석기~신석기시대인 야요이(彌生)시대에 머물러 중앙집권화 된 행정능력이 없었음은 물론이다. 그런데 5세기 야마토조정(大和朝廷)에 산(讚), 진(珍), 세이(濟), 고(興), 부(武)라는 왜5왕이 있어 대송외교(對宋外交)를 했다함은 모두 조작된 것으로 봐야 한다. 자주적 중앙집권화 된 통치능력과 행정능력이 없는 부족수준을 국가라 할 수는 없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도 일본 학자들은 왜5왕(倭五王)은 야마토조정(大和朝廷)의 왕으로 생각해 왔으나 북 규슈(九州)에 왕을 말하는 것이라는 학설도 있다. 우리가 환국시대 12부족이 있었으나 그 부족집단을 부족으로 불렀지 국가라고 하지 않았다. 이번 칼럼은 고구려가 일본을 정벌하고 제압한 내용을 기술하고자 한다.
 
일본 백제왕·백제공은 의자왕·주왕 후손…고구려 정벌 속 송나라에 도움 청한 일본
 
일본인들이 21대 천황이라고 주장하는 유우라쿠천황(雄略天皇, 왜왕무·倭王武)이 478년에 송(宋)나라 순제(順帝)에게 보내는 표문(表文)에 보면 ‘왜(倭), 백제(百濟), 신라(新羅), 임나(任那), 가라(加羅), 진한(秦韓), 모한(慕韓) 칠국제군사(七國諸軍事) 왜국왕(倭國王)’이라는 기록이 있다. 이 표문(表文)에 대해 역사왜곡을 좋아하는 일본 사가들은 왜(倭), 한(韓)연합을 형성하고 왜(倭)가 우리 민족을 지배하였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당시 일본에 가야의 식민지인 미나마(任那)가 있었다. 가야 즉 가라(加羅)를 비롯해 신라, 백제(百濟)가 일본을 지배하고 지도하고 있던 상황이었다. 따라서 일본사의 주장은 일고의 가치도 없다.
 
그리고 진한(秦韓), 모한(慕韓)은 왜왕무(倭王武) 이전에 고구려, 백제, 신라3국이 건국 될 때에 삼국에 흡수되어 이미 멸망되어 없었다. 왜왕 무(倭王 武) 이전에 이미 멸망한 진한(秦韓), 모한(慕韓)을 왜왕 무(倭王 武)가 지배 할 수 없다. 북한의 사가(史家) 김석형(金錫亨)은 ‘왜왕 무(倭王 武)가 열거한 국명은 우리 한민족이 일본 규슈(九州)에 건설한 분국(分國)이라 해석하고 있다. 하지만 이것도 그릇된 것이다. 진한(秦韓), 모한(慕韓)은 삼국 이전의 소 부족으로서 극히 미약했다. 이 같은 부족이 고대 전투형(戰鬪型) 시대에 처해 자체의 생존을 위한 투쟁에 여력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데 일본이 멀리 진출해 분국을 설치하고 통치 할 수 없다. 설령 일본에 건너간 이주민들이 분국을 건설했다고 한다면 본국의 강력한 지원 하에 가능하고, 그러지 않을 경우 이는 부족시대의 원리를 모르는 견해다. 부족시대는 소국가분립시대다. 따라서 동일한 부족이 딴 지역에 이주하면 독립 국가를 세우고 딴 국명을 붙이고 대립 투쟁하는 것이 일반적이었다. 대륙, 반도 안에도 수많은 소국가가 성립해 서로 대립하고 투쟁했다.
 
그 당시 일본에 건너간 유민(流民)들은 대부분 본국의 정부에 불평을 품고 정치적으로 망명 또는 도피한 경우가 일반적이다. 이들은 본국에 반역하는 것이었다. 따라서 본국에 예속되는 분국을 건설할을 수 없다. 역사를 되돌아보면 고려시대에 조선공(朝鮮公), 부여공(夫餘公), 낙랑공(樂浪公), 진한공(辰韓公), 신라공(新羅公), 백제공(百濟公)이라는 명예의 봉작(封爵)을 준 일이 있다. 이 제도는 조선조 초기에도 상존했다. 우리 한민족(韓民族)이 명예의 봉작을 받은 왕족이 일본에 진출하니 일본은 그들을 우대해 왜왕과 병칭(竝稱)한 것이다. 일본의 신찬성씨록(新撰姓氏錄)에 의하면 일본에 백제왕(百濟王), 백제공(百濟公) 등이 있다. 백제왕은 백제 의자왕(義慈王)의 후손이요, 백제공(百濟公)은 백제 주왕(酒王)의 후손이라고 한 것이다. 이 기록을 보면 왜왕무(倭王武)가 열거 한 국명은 더욱 일본에 건너간 우리민족의 왕손(王孫)라고 해석 할 수 있다. 왜왕 무(倭王 武)가 우리민족의 왕손을 왜왕과 병칭(竝稱)한 것은 그 왕손을 왜왕과 같이 우대하고 경외 한 것이다. 그 왕손을 우대하고 경외한 원인이 무엇인가? 이는 우리 민족의 국력이 극히 강력한 까닭이라 볼 수 있다. 일본의 5왕이라는 것도 이러한 유형이다. 유우라쿠천황(雄略天皇)이 478년에 송(宋)나라 순제(順帝)에게 보내는 표문(表文)에 ‘고구려가 국경지대에 침입해 혼란을 일으켜서 송나라에 조공(朝貢)하는 것을 막음으로 뜻대로 조공(朝貢)치 못함이다. 신(臣)의 선친이 고구려가 조공(朝貢)하는 길을 막는 것을 통분하여 백만 대병을 일으켜서 고구려에 저항하고자 하다가 사망했다. 송제(宋帝)께옵서 강대한 고구려를 격퇴해 방란(方難)을 평정하여 주심을 바란다’고 했다.
 
고구려의 예속국(隸屬國)에 불과했던 일본 역사 대한 실증적 증거들
 
이 방란(方難)은 전국의 난을 말하는 것이다. 그러면 고구려가 국경의 난을 일으켰는가? 전국의 난을 일으켰는가? 이 표문(表文)은 송(宋)의 구원을 받기위해 애써서 송(宋)에 조공(朝貢)치 못하는 이유를 설명하기 위하여 고구려가 국경을 침범해 국경통행을 막았다는 문구를 사용했다. 다시 말해 송(宋)에 조공하는 것을 막은 것을 설명한 문법이다. 그러나 이 표문(表文)의 내용은 방란(方難) 두자(二字)에 있다. 즉, 고구려가 일본 전국을 정벌하여 전국의 난을 일으킨 것이다. 전국의 난(亂)이라는 의미이므로 100만 대군을 일으켜서 저항하고자 하고, 송(宋)에 구원을 요청한 것이다. 그럼으로 왜왕 무(倭王 武)가 송(宋)나라 순제(順帝)에게 보낸 표문(表文)은 고구려가 일본을 정복한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필자가 일본유학을 할 때 다카마쓰스카(高松塚) 고분벽화가 발견됐다. 이 고분은 고구려의 바탕에서 나왔다고 당시 언급됐다. 특히 북한의 사가(史家)들은 당시 수산리(修山里)에서 발견 된 고구려 고분벽화(古墳壁畵)와 흡사하다고 강조했다. 그러면 고대 고구려와 일본과의 관계를 역사적으로 고찰해 보는 것이 다카마쓰스카(高松塚) 고분벽화를 해석하는데 필요 할 것이다. 앞서 칼럼에서 전술한 바와 같이 일본 오진왕(應神王)22년(291년)에 신라가 일본을 정벌, 오사카(大阪)근처 명석포(明石浦)까지 들어가니 일본이 항복하고 백마를 잡아 맹세했다. 그런데 오진왕(應神王) 28년 9월에 고구려가 일본에 보내는 국서(國書)에 일본을 교(敎)한다고 했다. 교(敎)는 종주국(宗主國)의 제왕(帝王)이 식민지군주(君主)에게 명령하는 문구(文句)다. 신라에 항복한 당시 일본이 고구려를 종주국으로 받든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리고 고구려가 일본을 예속국(隸屬國)으로 간주해 일본 왕을 교(敎)한다는 국서를 보낸 것으로 해석한다.
 
이후 일본은 7세기 일본의 대표적 호족인 소가씨(蘇我氏)가 스슝천황(崇峻天皇)을 암살하는 대란을 일으킴으로 일본은 극도로 혼란에 빠졌다. 이때에 동양의 신흥대국인 수(隨)나라를 격파한 고구려가 혜자법사(惠慈法師)를 일본에 보내 대화개신(大化改新)을 지도했다. 이는 고구려가 일본의 혼란을 수습하고 지배하려는 문화정책을 쓴 것으로 해석해야 한다. 소가씨(蘇我氏)는 일본 역사상 첫 대 호족(豪族)으로 등장해 사실상 야마토(大和)정부의 통치권을 장악했다. 그는 한국에서 건너간 가야계(伽倻系)의 인물로 고대 우리 한민족이 일본을 지배·통치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또한 고대 일본은 박견(狛犬)을 존중해 신사(神社), 궁전(宮殿)앞에 수호신(守護神)으로 받들어 세웠다. 이 박견(狛犬)은 고구려의 개다. 이 박견(狛犬)을 일본인들이 가장 신성시하는 신사(神社)와 궁전(宮殿)앞에 세우고 있음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인가? 신성한 신사(神社)와 궁전(宮殿) 앞에 이민족(異民族)의 개를 받들어 세우는 것은 있을 수 없음에도 세울 수 있겠는가. 혈연(血緣)을 가장 존중할 당시 이민족(異民族)의 개를 받들어 세울 수 없고, 국가를 통치하는 기관인 궁전 앞에 더욱이 세울 수 없는 것이다. 일본문화사는 북 규슈(北九州)에 ‘고대 일본은 백제와 동맹해 고구려와 싸웠다고 했다’(日本文化史 第3卷第30章 武家社會の 道德)는 내용이 있다. 이 같이 고대 일본은 고구려와 불화(不和)하고 투쟁관계였다. 그런데 적대하고 투쟁하는 고구려의 개를 가장 신성시하는 신사(神社)와 궁전(宮殿) 앞에 이민족(異民族)의 개를 받들어 세울 수 없음은 더욱 분명한데, 어찌해서 이민족(異民族)의 개를 받들어 세울 수 있었는가. 이것은 그 신사(神社)의 주신(主神)은 고구려의 신이요, 그 궁전(宮殿)의 주인은 고구려인이라 추정 할 수 있다. 이는 고대에 고구려가 일본을 정복하고 통치한 것을 실증하는 것이다.
 
일본 고대·중세·근세 등장한 역사적 인물 대부분 한국계유민 자손들
 
일본 정창원(正倉院)에 있는 태도(太刀)는 교토(京都) 도다이지(東大寺) 헌물장(獻物帳)에 ‘고려사람 칼’(高麗樣太刀)이라고 기록돼 있다. 만요집(萬葉集)에 박검(狛劍)이라고 기록돼 있다. 박검은 고구려의 검을 말한 것이다. 이것도 고구려의 세력이 일본에 크게 작용한 한 면을 보여 주는 것이다. 이러한 모든 사실을 고찰하면 고대 고구려가 일본을 정복·지배했다는 것은 피할 수 없는 진실이다. 일본은 이런 사실을 숨기기 위해 1970년대 다카마쓰 쓰가(高松塚)가 발굴했을 때 피장자(被葬者)가 고구려인이 일본을 정복하고 통치한 자가 분명한데도 당나라 의복과 유사하다고 운운하면서 고구려인이 아니다고 했다. 하물려 고구려의 무덤이 아닌 양으로 하는 태도를 필자는 유학 중이라 분명히 알 수 있었다. 필자 역시 대다수 학자들이 고구려인의 무덤으로 보는 것과 같이 이 다카마쓰 쓰가(高松塚)의 피장자(被葬者)는 고구려인으로 일본을 정복하고 통치한 자로 봤다.
 
한민족은 고대부터 중세까지 일본을 지도·지배하고 근세에도 일본이 한국을 존중한 사실이 판명되고 있음은 세계 역사가들도 아는 사실이다. 일본 고대사에 등장하는 역사인물들은 한국 유민들이다. 이를 증명하는 것으로 일본의 대형신사(大型神社)를 비롯해 일본인이 자기조상이 모셔져 있다는 이세신궁(伊勢神宮)의 신위(神位)가 있다. 이곳에는 일본인이 아닌 한국에서 건너간 유민 신위들이 있다. 필자가 6~70년대 유학시절 연말 12월 31일 NHK에서 홍백(紅白) 두 팀으로 나눠서 가수들이 노래경연을 하는데, 필자가 본 가수 거의가 다 한국계임을 확인 할 수 있었다. 미소라히바리(美空ひぱり), 미야고하루미(都春美), 모리신이치(森進一), 이스키히로시(五木ひろ), 후시아키라(布施明), 사이조히데기, 와다아키고(和田明子). 닉크 미네, 후랑크낭아이(ふらんく永井), 고바야시 아키라(小林 旭) 등 90%가 한국계였다. 그러나 일본사람들은 아니라고 한다. 그러나 진실은 변할 수 없다.
 
역사에 있어서도 고대에서 근세까지도 일본을 이끌고 있는 지도자는 거의 다 한국계임에도 한국에서 유민의 한을 품고 사는 일본인들은 이를 숨기려 한다. 그러나 일본을 이끈 지도자는 815년 당시 일본에서 높은 벼슬아치들의 명단을 적은 신성찬록(新姓撰錄)을 보면 알수 있는데, 3분의1이 이주선인(移住先人)들이고 고대 및 근·현대에도 일본을 이끄는 고위층들은 거의가 한국계다. 근대에 와서도 정한론을 제기한 사이고다가모리(西鄕隆盛), 이토히로후미(伊藤博文)를 비롯해서 러일전쟁의 영웅 노기말레스키(乃木まれつき)와 도고헤이하치로(東鄕平八郞), 태평양 전쟁을 일으킨 도죠히데기(東條英機)를 위시한 저명한 인물들은 모두 한국계다. 한마디로 이세신궁(伊勢神宮)에 모셔 있는 신위(神位)가 모두 자기들의 조상이 된다는 일본인은 누구나가 다 한국계다.
 
일본역사서(日本歷史書)도 안만려(安萬呂)를 비롯해 조선에서 건너간 유민의 지도와 그 영향 하에 발행됐다. 육국사(六國史)라는 일본서기(日本書紀) 30권, 속 일본기(續 日本紀) 40권, 일본후기(日本後記) 20권, 문덕실록(文德實錄) 10권, 삼대실록(三代實錄) 50권을 비롯해 황실계보 및 역대천황에 관한 설화(說話)가 기술돼 있다는 고사기(古事記) 3권 등의 내용이 실제와 다른 것은 이 역사서들이 모두 일본의 국가의식을 높이기 위해 조작된 위서(僞書)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 내용도 허위 허구라는 것도 밝혀지고 있다. 또한 나라시대(奈羅時代) 후반에 나왔다는 만요집(萬葉集)은 와가(和歌) 약 4500수(首)를 수록(收錄)하고 있는데, 일본인들이 모르는 우리나라 고어(古語)가 곳곳에 그대로 실려 있어 우리가 일본을 지배한 사실을 잘 말해준다. 지금 일본에서는 이러한 잘못을 밝혀주는 환단고기(桓檀古記)를 우리보다 더 연구하며 그 실체를 밝히고자 하고 있다. 반면 우리나라 사대주의자인 식민사관의 학노(學奴)들은 환단고기(桓檀古記)마저 위서(僞書)라고 몰고 있으니 참으로 통탄 할 일이 아닐 수 없다. 칼라일은 “역사는 사가(史家)가 현명한 만큼 그리고 안목(眼目)과 기백(氣魄)을 타고난 만큼 완전하다”고 했다. 우리 사학계가 새해를 맞이해 마음으로 다짐해야 할 일이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인간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존 카터 코벨 지음·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임길채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하’,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강동민 ‘불쌍한 대한민국’, 박찬희 ‘지구촌 인류를 구제할 법칙’,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삼성(三聖)의 역사’, 우창수 ‘아사달, 상·하’, 김부식 ‘삼국사기’,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한창건 ‘밝혀진 韓민족 고대사’, 南帝 ‘命理속의 哲學’, 김진경 ‘만천년 역사의 비밀’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金正柱 ‘畿內の緣故遺蹟’,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林承國 ‘韓國正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秋山謙藏 ‘日本の歷史’, 津田秀夫 ‘日本史’, 三省堂 編修所編·永原慶二 監修 ‘中學社會歷史’, せいいくど ‘新.漢民族から大和民族へ’, 坂本泰良 ‘明治維新から現代へ’, 山茂樹山 ‘明治維新と現代’, Jacques Droz著 橡川一郞譯 ‘ドイツ史’ 외 다수서책을 참조·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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