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지금 우리나라 국사 교과서는 환국 3301년과 신시배달국 1565년 등 도합 4866년의 긴 세월을 빼고 일제가 왜곡한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이 같이 잘못된 역사는 사극에서도, 일상 대화에서도 드러난다. 하물며 독립기념관에 가 봐도 일제의 왜곡된 테두리를 못 벗어난 상황이니 참으로 한심한 지경이다. 이에 우리 국민들은 올바른 주체성과 주관이 확립돼 있지 않다. 결국 OECD 국가 중에서 아직도 이데올로기(ideology)의 노예가 돼 혼란을 겪고 있다. 지난날 우리와 가장 관계가 깊고 교섭이 잦았던 중국 한족과 일본 민족은 우리에 대해 문화적 욕구보다 위압적 도전과 함께 정치적·경제적 욕구를 갖고 침략적이었던데 반해 우리는 영토보존 노력과 함께 민족문화를 향상시키려는 욕구가 더 많았다. 본래 우리는 상·고대시대부터 이런 민족적 기질을 바탕으로 찬란한 문명을 창조하고 인류문명에 크게 기여했다. 중국과 일본은 우리보다 역사가 일천해 우리의 문화권에서 살아오기도 했다. 그들은 상고사가 없는 나라이기에 우리의 상고사와 고대 역사를 지우기 위해 수많은 사서들을 불사르고 그토록 많은 서물(書物)을 모두 없앤 다음 역사조작을 계속해 왔다. 그러나 남아있는 그루터기의 사료로도 우리 역사가 얼마나 오래이고 위대했음을 알 수 있다.
고조선 단군의 개국을 상고해 봐도 고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운 제왕이 인민의 추대를 받아 임금의 자리에 올랐음을 알 수 있다. 선조들은 조선이라는 강대한 광역국가(廣域國家)를 세워 큰 나라(고조선)의 제정(帝政), 단군왕조의 군주정(君主政)을 실시했다. 고조선 역시 환국과 배달국의 사상과 전통, 제도와 문화 풍속을 이어 받아 발전시켰다. 우리나라의 역사는 환인의 환국을, 환웅의 신시 배달국을 거쳐서 단군이 조선이란 나라를 세우고 유라시아를 지배해 온 민족이다. 그런데 숙신(肅愼) 역시 이 시대에 대국을 이룬 나라였다. 하지만 숙신(肅愼)과 예맥의 역사는 뒤안길에서 빛을 보지 못하고 있다. 중국인들은 우리 한민족을 동이 또는 숙신씨(肅愼氏) 혹은 예(濊), 맥(貊)족이라고 일컬었다. 중국 고전에 나오는 소위 구이(九夷)라는 것도 대체로 한민족을 의미하는 것인데, 이에 대한 역사기록은 찾기 힘들다. 이번 칼럼은 너무 소홀히 다뤄지고 있는 고대에 나오는 숙신씨(肅愼氏)에 대해 살펴보고자 져 한다.
고대의 대국 숙신국(肅愼氏), 한민족의 또 다른 뿌리가 됐다
고대는 동서민족(東西民族)이 다신사상(多神思想) 혹은 일신사상(一神思想)에 잠들어 인간을 무시한 시대였다. 그러나 한민족(韓民族)은 4300년 전에 ‘홍익인간’을 제창했다. 인류역사는 신학시대, 철학시대 과학시대, 우주시대로 발전했다. 혹은 석기시대, 청동기시대, 철기시대 전기시대, 원자시대, IT시대로 발전했다. 지금부터 4300년 전은 석기시대다. 이 시대에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돌과 철을 파괴하는 고시(楛矢), 석족(石鏃)과 타민족에 없는 대궁(大弓)을 발견했다. 어느 민족보다 앞선 선진민족이었다. 또한 인류역사는 씨족시대, 부족시대, 부족연합시대, 귀족시대, 군주시대, 민주시대로 발전했는데 4300년 전은 거의가 씨족시대요 부족시대였다. 이 시대에 동서민족 인류가 몇 백리 안에서 꾸물거리는 소부락 생활들을 했지만 우리의 또 한 뿌리인 한민족(숙신씨)은 만 여리에 동떨어진 먼 중국(한민족)에 궁시(弓矢)를 수출한 대민족으로 등장했다. 이상의 사실은 흔치 않은 기록이나 단군신화의 본원(本源)인 숙신씨(肅愼氏)의 역사에 명기(明記)돼 있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우리 한민족이 환국, 신시 배달국(神市 倍達國)의 5대문명을 연 것과 아울러 최초에 인간을 발견한 문화민족이었다는 사실이다. 아울러 최초로 경이적인 무기를 발견하고 최초로 무력으로도 수만 여리에 강역을 떨친 강대한 민족이었다는 점이다. 여기서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은 한국사를 다루는데 숙신씨(肅愼氏)에 대한 것이 너무 소홀하다는 점이다. 우리 역사에서 위대한 숙신씨(肅愼氏)가 우리 한민족의 또 하나 본원(本源)이라는 사실을 발견하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로도 남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한국사에서 숙신씨(肅愼氏)를 간과함은 역사를 연구하는 방향을 모르고 위대한 자아를 발견하지 못하는 것과 같다.
중국고서(中國古書)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삼국지(三國志)와 후한서(後漢書)라고 꼽힌다. 삼국지에 ‘동이유숙신’(東夷有肅愼)이라는 기록(三國志 魏志 卷 三十, 東夷)이 있다. 즉, 숙신씨(肅愼氏)를 동이족(東夷族)이라 기록했고, 후한서 동이전에는 ‘숙신내헌노고시’(肅愼來獻砮楛矢)라고 했다. 즉, 숙신씨(肅愼氏)를 동이족이라고 기록했다. 또한 진서(晋書)에도 숙신씨(肅愼氏)를 동이전(東夷傳)에 기입(晋書 卷九十七, 四夷)했다. 이상의 기록들을 보면 숙신씨(肅愼氏)는 분명한 우리 동이족이다.
고대 부족시대에 동이족도 여러 부족으로 분파·분립한 것은 당연하다. 관자(管子)에 도하(屠何)가 동이의 선(先)이라하고 고죽(孤竹)을 참(斬)하니 구이(九夷)가 항복했다고 했다. 이는 고죽국(孤竹國)이 동이에 속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管子 小匡 第二十). 또한 진서각주(晋書斠注)에 동이가 백여국(百餘國)으로 분립했다고 기록했다.(晋書斠注 卷三, 帝紀第三). 그리고 중국고사(古史)에 읍루(挹婁), 물길(勿吉), 말갈(靺鞨), 여진(女眞), 실위(室韋)도 동이족이라고 기록했다. 이는 동이족이 여러 부족으로 분파·분립한 것을 가리키는 것이다. 그런데 동이족 중 4300년 전에 중국문헌에 나타난 자는 오직 숙신씨(肅愼氏) 뿐이다. 이는 동이족의 시조가 숙신씨(肅愼氏)라는 것이다.
발해국지 장편(渤海國志長編 卷十六, 族俗考, 第三)에 근세인류학자가 “동북민족은 다 숙신(肅愼)에서 나왔다고 한다”고 했다. 이는 또한 동이족의 시조가 숙신씨(肅愼氏)라는 것을 가리킨 것이다. 그런데 숙신씨(肅愼氏)의 분파된 동이족 중 숙신씨(肅愼氏)의 전통을 계승한 자가 바로 우리 한민족이라는 것이다. 흑룡강지고(黑龍江志稿, 卷 一, 地理志)에 보면 ‘상서전맥해동리(尙書傳貊海東夷), 숙신지명·전원문작모 석문작맥(肅愼之命·傳原文作貌 釋文作貊)’이라고 했다. 즉, 예맥은 동이의 해상(海上)에 있다. 여기서 숙신지명(肅愼之命)의 원문에 모(貌)로 기록했는데 전문(篆文), 초문(草文)을 해석하는 석문(釋文)에 맥(貊)이라고 풀이했다고 한 것이다. 숙신지명(肅愼之命)은 중국고서에 편명(篇名)으로 기록됐다. 그런데 오늘 한국에서는 이런 기록을 볼 수 없다. 그럼으로 그 내용이 미상(未詳)이 되고 있다. 그러나 숙신(肅愼)은 엄연히 고대에 대국이었다는 사실이다. 이것도 사료(史料)의 분서(焚書)가 낳은 비극에서 이런 현상이 나왔다.
숙신(肅愼)은 맥(貊), 하(夏)·은(殷)·주(周) 이전 동북지대 대국 일궈
숙신(肅愼)은 중국의 고서에 편명(篇名)으로 기록됐다 함은 무엇을 의미하는 것인가. 숙신지명(肅愼之命)의 원문에 모(貌)로 기록했다는 것은 숙신(肅愼)을 모(貌)로 기록했다는 뜻이요, 석문(釋文)에 맥(貊)이라고 풀이했다고 것, 숙신(肅愼)을 맥(貊)이라 풀이했다는 것이다. 즉, 숙신(肅愼)이 예맥(銳麥=濊貊)이요 예맥(銳麥=濊貊)이 숙신(肅愼)이라고 가리킨 것이다.
서전여오장(書傳旅獒章, 주(注)에 ‘주 무왕(周 武王) 당시에 숙신씨(肅愼氏)의 화살을 수입했다’ 하고 동서(同書) 무성편(武成篇)에 ‘주 무왕(周 武王) 당시에 예맥(銳麥=濊貊)이 한족(漢族)과 병칭(竝稱)돼 있다’고 했다. 그러면 숙신씨(肅愼氏)의 예맥(銳麥=濊貊)은 동일한 시대에 존재했다. 이 숙신씨(肅愼氏)는 동이족의 시조(始祖)요, 예맥(銳麥=濊貊)은 동이족의 주체(主體)다. 동이족의 시조와 동이족의 주체가 같은 시대에 존재했다는 기록은 숙신(肅愼)이 예맥이요 예맥이 숙신(肅愼)이라는 사실을 더욱 긍정할 수 있다.
그리고 숙신씨(肅愼氏)와 그 지류(支流)가 부여·고구려에 합병되어 완전히 우리 한민족으로 성장했다. 후한서 동이전에 숙신씨(肅愼氏)와 그 지파인 읍루(挹婁)가 한(漢)나라가 흥한 후에 부여(夫餘)에 합병됐다 했다. 진서각주(晋書斠注)에 ‘고구려가 더욱 강성해 숙신(肅愼), 읍루(挹婁)를 합병했다. 589년 수(隋)가 중국을 통일한다. 그 후 수(隋)나라가 안정되자 수양제(隋煬帝)가 고구려를 침략 할 때에 그 24군 우익에 숙신도(肅愼道)가 있는 것을 보면 숙신(肅愼)이 고구려에 합병된지 오래다’(진서각주晋書斠注 卷九十七, 列傳 第六十七, 四夷)]는 내용이 있다. 송서(宋書)에는 ‘고구려가 숙신씨(肅愼氏)의 고시(楛矢), 석족(石鏃)을 수출했다’(宋書(卷九十七)고 했으며,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태조8년 12월조(條)에 ‘대조영이 발해를 건설하고 숙신(肅愼)을 합병했다’고 했다.
주목할 것은 함경도가 본래 고구려 영지였다.(芝峯類說(二卷). 함경남도 북청군 신창읍 토성리(咸南 北靑郡 新昌邑 土城里)에 숙신씨(肅愼氏)의 고도(古都)라는 기념관(記念館) 있는데, 그 명칭이 청해관(靑海館)이다. 이곳에는 고려말기 정몽주(鄭夢周)가 ‘숙신유민차일방’(肅愼遺民此一方)이라고 지은 시(詩)가 게시(揭示) 돼 있다. 즉, 정몽주(鄭夢周)가 이곳은 숙신씨(肅愼氏)가 살던 곳이라는 시(詩)를 읊은 것이다. 이 기념관은 지금 보존돼 있는데, 숙신씨(肅愼氏)가 고구려에 합병됐다는 기록을 입증한다.
이상의 기록과 건물을 고찰하면 동이족 중 숙신씨(肅愼氏)의 전통을 계승한자가 한민족이요 다시 숙신씨(肅愼氏)가 한민족에 합류되어 완전히 한민족으로 발전한 것을 알 수 있다. 진서각주(晋書斠注, 卷九十七, 列傳 第六十七, 四夷)에 숙신씨(肅愼氏)의 일명(一名)이 읍루(挹婁)요, 백두산에 거주한다고 했다. 또 죽서기년(竹書紀年) 순(舜)의 25년에 숙신씨(肅愼氏)가 궁시(弓矢)를 중국에 수출했다고 했다. 숙신씨(肅愼氏)는 하(夏), 은(殷), 주(周) 3대 이전에 중국과 동 떨어진 동북지대에 대국을 건설해 지금의 길림성 동쪽 모든 지방을 전부 차지했다.
한(漢)나라 시대에 읍루(挹婁)가 옛날 숙신씨(肅愼氏)의 영토에 진출했으나 고구려가 망한 후에 대조영이 읍루의 동모산(東牟山) 오루하(奧婁河)를 점거한 후 오루하(奧婁河)가 읍루로 전음(轉音)됐다. 즉, 읍루라는 명칭은 오루하(奧婁河)라는 명칭의 변화다. 읍루의 본부는 숙신씨(肅愼氏)의 서쪽에 있다. 그런데 숙신씨(肅愼氏)의 일명이 읍루라 함은 그릇된 것이다. 숙신씨(肅愼氏)는 순(舜), 하후씨(夏后氏) 시대부터 이름을 알린 국가다. 읍루의 명칭은 후한서에 비로소 보이고 문화가 발달되지 못해 군주 제도가 없이 부락마다 추장이 있었다. 읍루는 숙신씨(肅愼氏)의 영역에 속한 한 부족이었을 뿐 국가 제도를 갖추지 못했다. 그런데 이 후 읍루(挹婁)의 인구가 늘어 각지에 분포되고 숙신씨(肅愼氏)는 점차 쇠퇴해 읍루를 견제치 못해 읍루가 숙신씨(肅愼氏)의 영토에 진출했다. 이 같은 유래를 모르고 숙신씨(肅愼氏)의 일명이 읍루(挹婁)라 함은 큰 오류(誤謬)다. 진서각주(晋書斠注)는 오사감(吳士鑑)과 유승간(劉承幹) 두 사람이 진서(晉書)에 주해(注解)를 가한 것이다. 진서(晉書)에 숙신의 일명이 읍루(挹婁)라고 기록한 것은 잘못된 것이라 비판한 것이다. 즉, 숙신씨(肅愼氏)는 서기 4300년 전에 이름을 알린 문화국이요, 읍루(挹婁)는 후한(後漢)시대에 비로소 나타나고 문화가 발달되지 못한 민족이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인간 단군을 찾아서’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최인 ‘한국학강의’, 존 카터 코벨 지음·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임길채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하’,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강동민 ‘불쌍한 대한민국’, 박찬희 ‘지구촌 인류를 구제할 법칙’,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삼성(三聖)의 역사’, 우창수 ‘아사달, 상·하’, 김부식 ‘삼국사기’, 임승국 번역·주해 ‘환단고기’, 한창건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南帝 ‘命理속의 哲學’, 김진경 ‘만천년 역사의 비밀’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金正柱 ‘畿內の緣故遺蹟’.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林承國 ‘韓國正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秋山謙藏 ‘日本の歷史’, 津田秀夫 ‘日本史’, 三省堂 編修所編·永原慶二 監修 ‘中學社會歷史’, せいいくど ‘新. 漢民族から大和民族へ’, 坂本泰良 ‘明治維新から現代へ’, 山茂樹山 ‘明治維新と現代’ 외 다수서책을 참조·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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