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고조선은 단군이 조선이라는 강대한 광역국가를 창건함으로서 큰 나라(고조선)의 제정(帝政, 단군왕조의 군주정)을 시작하게 됐다. 조선은 신화나 전설이 아닌 환국과 배달국을 이은 실존 인간 단군왕검에 의한 역사다. 문제의 신화나 전설은 다만 그 사상과 제도가 전해져 내려온 풍속에 있어서 조선이라는 국가 창건 이전 사회(신시시대)의 것을 고조선이 이어받아 발전시켜서 후대까지 그 전통을 만들어 온 것일 따름이다. 단군신화는 한민족의 본원(本源)인 숙신씨의 전설을 단군의 전설로 둔갑시킨 것이다. 이는 숙신씨(肅愼氏)의 역사에 명기 돼 있다.
4300년 전은 씨족시대, 부족시대다. 우리 한민족은 이 시대에 동서민족이 소부락 생활을 하는데 반해 강대한 광역국가를 세우고 당시 중국에 궁시를 수출한 대 민족으로 등장해 대륙을 지배했다. 최초에 인간주의를 제창한 문화민족이면서 최초에 경이적인 무기를 발견하고 만들어 최초에 무력을 만 여리에 떨친 강대족으로 인류사상 최초에 등장한 역사적 민족이다. 이 당시 고조선 말고 대국이 없었다. 흑룡강지고(黑龍江 志稿 第一, 地理志), 沿革)에 보면 숙신씨(肅愼氏)는 4300년 전에 대국이고, 예맥(銳麥=濊貊)은 3000년 전 구국(舊國)이라고 했다. 단군신화는 숙신씨(肅愼氏)의 실생활을 묘사한 것으로 단군조선 건국기사에서부터는 신화나 설화는 있을 수 없고 다만 역사적 기록과 사화(史話)일 뿐이다. 우리는 고조선의 건국을 기념한다고 10월3일을 개천절(開天節)로 삼고 있는데, 여기서 개천절의 개천(開天)은 개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이번 칼럼은 우리나라 고대사(단군조선)에 나타난 우리 역사의 위대함과 그 강역에 대해 좀 더 깊이 살펴보고자 한다.
우리나라 고대사 누락 된 것 세년가(世年歌)에 모두 나온다
고조선에서는 신과 인간이 같이 즐기는 축제를 행했는데, 그것은 임금과 백성이 함께 즐기는 축제였다. 단군 이래 시월상달의 수리나 부여의 영고제(迎鼓祭), 고구려의 동명과 동맹제(同明, 同盟祭), 동예의 무천제(舞天祭), 신라·고려 이래의 연등대회와 팔관대회 등 국가적 대 제전(祭典)은 모두 같은 의미의 행사다. 그런데 최근(1894년 갑오경장 이후) 민족의식, 민족정신이 고취됨에 따라 이 시월절의 오랜 풍속을 모두 재현시켰다. 이를 통해 단군나라를 세운 개천절을 삼은 것은 오랜 전통에서 비롯된 역사적인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지 않을 수 없다. 1945년 일제가 물러가자 개천절을 우리 민족적 국경일로 삼아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해오다가 정부수립 후에는 10월 3일을 기원절로 정하게 됐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지금은 없어진 ‘고사’와 ‘구 삼국사기’(舊三國史記) 그리고 현재 전해지는 위서(魏書)와는 다른 또 하나의 위서(魏書)의 단군기사에서 인용했음을 밝혔다. 즉, 김부식의 사대주의적인 입장에서 상고사가 중세사가 아닌 ‘삼국사기’(三國史記)를 저술했기 때문에 그 저서의 범위 밖의 고조선 단군사와 고려사는 될 수 있는 대로 의식적으로 피하면서도 여러곳에서 고조선과 단군에 관하여 언급하고 있다. 김부식이 평양을 기자가 근거지로 삼은 장소로 보지 않고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왕검이 옛 도성이다”라고 하고 있다. 여기서 선인(仙人)은 국선(國仙)을 의미한다. 이는 평양이 선인(仙人) 왕검의 도읍지였음은 움직일 수 없는 사실이었기 때문일 것이다. 김부식이 고기(古記)에 인용한 것을 보면 ‘삼국사기’와 ‘지리지’(地理志) 고구려 조에서 고기(古記)에 “주몽이 부여로부터 난을 피해 졸본에 이르렀다”고 했다. 삼국사기 제32권 지(志) 제사조에 “고기(古記)에 이르기를 온조왕 20년 2월에 제단을 설치하고 천지에 제사를 지냈다”고 했다. 권 제일 ‘신라본기’에서는 “시조의 성은 박씨다. 이름은 혁거세다. 전에 조선 유민이 산골사이에 나뉘어 살고 있어서 6촌이 됐다. 이것이 진한의 6부가 됐다”고 했다. 열전(列傳) 김유신 상권에서는 “이것이 본기 선덕여왕 12년에 쓴 것과 같은 일인데 조금 다르고, 또 다 고기(古記)에 전하는 고로 두 가지 다 쓴다”고 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는 본래 삼국의 역사다. 따라서 삼국 이전의 고조선과 숙신국, 예맥, 그 후의 고려사는 그 저서 범위 밖이어서 대체로 자세히 쓰지 않았다. 숙신국, 예맥, 고려사는 역사상 없다. 이렇다면 이 나라들은 없는 나라고 할 수 있겠는가. 엄연히 대국이고 구국이라는 숙신국과 예맥은 우리 역사 속에 자리 메김하고 있음을 제대로 해야 한다. 이병도 박사는 고조선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사대사상가 김부식(金富軾)도 신라를 돋보이게 하려고 한 것이요, 단군을 부인하려고 한 것은 아니라고 보지 아니 할 수 없다”고 밝혔다. 우리 민족이 수많은 국난을 겪으면서도 단군묘(단군사당)에 제사하며 국가의 대행사인 축제 때에는 세년가(世年歌)를 통해 단군 등의 사적(공덕)을 전수해 온 사실은 너무도 명확하다. 세종실록 제40권, 세종 10년 6월조에 유관의 상서와 세종18년 12월조의 유관의 조카 유사눌의 상서 중에는 단군의 사적과 단군묘의 설립지가 세년가(世年歌)에 의해 전해 내려온 것을 확인 할 수 있다. 근세 세종대왕의 대 까지도 단군의 사적을 전하는 세년가(世年歌)가 남아 있어서 축제행사의 노래로 전해졌음을 알 수 있고 최근 까지도 그런 사실을 식자들이 널리 알고 있었다는 것은 사실이다.
이병도 박사는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예부터 단군을 국조(國祖)로서 사당(祠堂)을 세우고 최고의 조상으로 제사를 받들어 왔는데, 그것이 끊어진 것은 일제의 강점 때부터이다. 지금까지도 여러 곳에 그 제단의 유적이 남아 있고 또 그 제사의 진설도(陳設圖)와 세년가가 세전되어 오고 있다. 신화나 전설에 지나지 않는다면 이처럼 역대왕조에서 조의(朝議)에 의하여 받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실존인간 단군과 영구한 역사를 이어온 고조선에 관해서는 더 연구 할지언정 신화로 단정 할 수는 없다”고 했다. 이병도 박사는 이 같이 주장하면서 “한국 상고사의 공백을 매우기 위한 노력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현재 일본의 곡산신궁(玉山神宮), 미다마진자(美玉神社)에는 조일전쟁(임진왜란) 때 가져간 단군의 신상(통돌 1m60cm)이 모셔져 있고 그 제사도 한국어로 이어져 왔다. 단군은 전설이나 신화가 아닌 실제로 군림한 대제국고조선의 제왕(帝王)이었다.
고조선은 얼마나 강대한 제국(帝國)이었나
승(僧) 일연(一然)이 지은 ‘삼국유사’는 그 첫머리에 고조선 왕검조선조에 중국의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수천년전에 단군임금이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열어 국호를 조선이라고 했다. 중국의 요임금 때다. 고기에 이르기를 평양성에 도읍하고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에 옮겼는데, 나라를 다스리기 천오백년이었다. 주나라의 무왕 즉위 기묘에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후에 아사달에 돌아와 숨어서 산신이 되니 나라의 수(壽)가 일천구백팔세였다고 한다”라고 했다. 그런데 ‘삼국유사’와 거의 같은 때(불과 10여년 후)에 이승휴(李承休)가 지은 ‘제왕운기’(帝王韻紀) 하권 첫머리 지리지에는 “요동에 별천지가 있으니 중국과는 아주 구분되며, 삼면은 바다이고 북은 대륙에 이어진 중방(中方)천리 땅이 조선이다. 천하의 명승이고 평화로운 고장, 예의 바른 집으로서 중국인(다른 미개국과는 다른)이 문화국이라고 일컫는 나라다”라는 내용이 있다.
‘전 조선기’에는 “본기에 이르기를 단군이 개국해 조선의 국토를 차지하고 임금이 됐다. 시라(尸羅), 고례(高禮), 예(濊)와 맥(貊)은 모두 단군의 자손이다. 단군왕조가 1038년간 나라를 다스리다가 아사달에 들어가서 신이 되었다”라고 기록돼 있다. 그 다음 ‘후 조선기’에는 “후기조선이 41대 928년 동안 다스렸다”고 했다. 이어 ‘위만조선기’, ‘한사군’ 및 ‘열국기’, ‘삼국기’, ‘발해기’, ‘후삼국기’, ‘고려기’의 순으로 쓰여져 있다. ‘열국기’에서는 “열국이 모이고 헤어지며 강성하고 쇠퇴하여 삼한이 이루어지고, 주(州)와 현(縣)이 산곡간에 흩어져 각각 나라라 일컬었으며 서로 침략했다. 그 중에 대국은 부여와 비류국(沸流國:송양왕의 나라)이었고, 그 다음은 삼국과 남북 옥저 및 예·맥이었다. 그들의 왕의 조상은 모두 다 단군의 혈통이었다”고 기록됐다.
단군에 대한 연구는 비교적 많이 행해져서 익히 다 아는 사실이지만 고조선은 곧 단군조(檀君朝鮮-고대 한국민족에 의해 설립되고 역대 단군들이 통치한 단군조선)를 말한다. 기자조선이나 위민조선은 중국에서 밀려와 고조선 변방의 한 구석에 있었던 망명집단이다. 다시말해 정치세력으로서 조선조의 작은 지방의 제후 내지 한낮 지방관에 불과했다. 따라서 기자·위민조선은 그 국가의 성격과 강역의 범위, 그 존속한 시대의 장단과 그 맥이 고조선과 아주 판이하게 달랐다. 고조선은 훨씬 오래전에 성립됐고 기자·위만조선이 멸망 한 뒤에도 의연히 존속해 온 강대한 제국(帝國)이었다. 오늘날 사대주의자들은 기자조선이나 위만조선이 고조선을 계승해 그 집단의 맥(脈)이 된 것처럼 왜곡시키고 있다. 이는 사대주의와 일본제국주의, 식민주의, 황통주의 역사관에 의해 왜곡·조작된 것을 그대로 답습한 것이다.
중국은 우리 역사자료를 다 없애고 그나마 남아 있는 그들의 자료에도 고조선의 중심부는 발해의 북쪽에 있었고 그 영역은 중국의 북경 근처에 있는 난하(灤河)로부터 한반도의 대부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을 포함하고 있었다고 했다. 이처럼 고구려와 발해계통의 옛 문헌들의 역사자료를 부분적으로나마 인용해 전해주는 국내외의 기록들이 더러 남아 있다. 최근에 국내학자들의 연구에 의해서 고조선이 존재했던 당시와 그로부터 멀지 않은 시기에 기록된 보다 객관성을 가진 중국의 역사자료들이 남아 있다. 이를 참고해 것을 봐도 강성했던 조선의 위치와 영역을 알 수 있다.
중국 역사자료에서 보는 고조선의 위치…중국 대륙의 주인이었다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의 ‘조선열전’에 의하면 전한(前漢)의 무제(武帝)가 위만조선의 우거왕을 치기 위해서 육해군을 보냈는데, 육군은 요동을 가서 치고 해군은 제(齊)를 출발해 발해를 향하여 위만조선에 도착한 것으로 기록돼 있다. 따라서 원래 고조선의 속령(屬領)이다가 위만조선의 영토가 된 요동이 발해의 북쪽임을 알 수 있다. 제(齊)는 지금의 산동(山東)이고 그 발해가 지금의 발해와 같다. 그렇다면 그 당시의 요동이 어디냐 하는 것이 문제인데, 그 요동이 한반도가 아니다. 위만조선이 발해 북쪽에 위치했기에 고조선도 발해 북쪽에 위치했음이 분명하다. 지금까지의 고찰로서 고대의 요동은 원래 고조선의 영토였으며 지금의 난하(灤河) 동북지역이었다는 사실이 분명해졌다.
여기서 확인해야 할 것이 있는데 그것은 중국문헌에는 중국에도 요동이라는 지역이 있었던 것으로 기록돼 있다는 점이다. 그 지역이 어디일까. 중국은 우리 역사를 왜곡하기 위해 지명이며 지도와 국명까지도 임의로 조작하기 때문인데 여기서 중국의 요동은 ‘갈석산’의 위치를 보면 이해된다고 한다. 즉, 난하(灤河)지역에서는 고조선과 중국의 경계는 갈석산이었다. 그럼으로 난하(灤河)부터 갈석산 까지의 지역은 중국에 속했고 이 지역이 중국의 요동이었다는 것이다. 다시말해 고대의 요동은 대부분 고조선에 속해 있었고 서남부 일부가 중국의 영토 속에 있었다는 것이다. 유의 할 것은 고구려는 한 때 요동지역을 차지했던 것으로 기록돼 있는데, 현행 국사책에는 이 요동을 지금의 요동으로 인식해 고구려 전성기의 강역을 요하까지로 잡고 있다. 이것은 무지의 소치이다. 고구려가 차지한 요동은 고대의 요동으로 난하(灤河) 동북지역이었다. 따라서 고구려의 강역은 난하(灤河) 유역까지 확대해 인식해야 한다.
단재 신채호(丹齋 申采浩)선생은 ‘한국사 연구초’(韓國史 硏究草), 전삼한(前三韓), 삼조선(三朝鮮)의 전말(顚末)에서 “동국총목(東國總目)의 단군강역(삼조선의 영역)이 북으로는 흑룡강에 이르고 남으로는 조령(鳥嶺)에 이른다고 한 것이 대개 근리(近理)하다”고 했다. 고조선의 중심지역이 고요동(古遼東)이었음을 알려면 전·후기의 고조선은 물론이요, 고조선을 계승한 열국 중에 부여, 고구려와 고구려의 후임국으로 자임한 발해, 그리고 고조선의 변경에 위치했던 여러 제후국 중에 하나였던 위만조선 등의 지역을 살펴보는 것이 빠르다고 최태영 선생은 언급했다. 고조선 활약지역의 중심이 고요동(古遼東)이었음을 알게 하는 많은 문헌 중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예는 중국이 우리역사를 축소 왜곡한 사마천(司馬遷) 사기(史記)의 조선열전과 전한서(前漢書)의 지리지(地理志)가 있다. 지리지(地理志)에 “고구려에서 요산, 요수가 생겨 나왔다”는 구절이 있다. 그리고 중국의 가장 오랜 지리책인 산해경(山海經)에도 고조선이 옛 요동을 포함한 넓은 영토를 차지한 선진 우수 민족국가였다고 여러 곳에 거듭 기록돼 있다.
후한서(後漢書)23 군국지(君國志)의 유주조(幽州租)에 “요동군에 안시성(安市城)이 있다”고 하고, 사기(史記)를 인용하면서 “험독(險瀆)은 위만의 도읍으로서 요동에 속했다”고 했다. 위에서 기술한 중국의 사기와 전한서, 후한서 및 산해경에 고조선이 활약한 지역의 중심 대륙이 옛 요동이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 후의 문헌인 위서, 晋書, 宋書, 南齊書, 梁書, 周書, 隨書, 南史, 北史, 舊唐書, 唐書, 通典, 通鑑, 기타 중국의 여러 사료의 朝鮮傳, 고구려전, 백제전, 신라전, 韓傳, 東夷傳, 異域傳, 邊方, 지리지, 음악지, 예악지 등에도 고조선 내지 한족(韓族)의 선진성과 국력이 강대함을 언급하는 내용이 있다. 동시에 그 강성한 시절의 강역이 광대했음을 알게 하는 기록이 중국은 다 없애려 했으나 남아 있는 자료로도 허다해 증명이 된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최인 ‘한국학강의’, 신채호 저 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윤내현·박선희·하문식 공저 ‘고조선의 강역을 말한다’, 백원·김백룡 원저 단동 김정일 편저 ‘天符經’, 고조선학회 ‘고조선연구’ 제1호, 카터 코벨 지음·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임길채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하’.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강동민 ‘불쌍한 대한민국’, 박찬희 ‘지구촌 인류를 구제할 법칙’,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삼성(三聖)의 역사’, 우창수 ‘아사달 상·하’, 김부식 ‘삼국사기’,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南帝 ‘命理속의 哲學’, 김진경 ‘만천년 역사의 비밀’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金正柱 ‘畿內の緣故遺蹟’,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林承國 ‘韓國正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秋山謙藏 ‘日本の歷史’, 津田秀夫 ‘日本史’, 三省堂 編修所編·永原慶二 監修 ‘中學社會歷史’, せいいくど‘新. 漢民族から大和民族へ’, 坂本泰良‘明治維新から現代へ’, 山茂樹山 ‘明治維新と現代’ 외 다수서책을 참조·인용을 하였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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