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일제는 상고시대 환국(桓國)의 ‘국(國)자(字)’를 ‘인(因)자(字)’로 고쳐 신화(神話)로 둔갑시키며 위대한 역사기록 전부를 말살하려 했다. 하지만 일본인들도 한·일 합병 전에는 ‘환국(桓國)’이라고 삼국유사 번역을 통해 분명히 밝혔다. 또 찬란한 인류문명을 일으킨 신시배달국시대의 역사는 세계 문명사에 금자탑을 쌓는 기초를 마련해 주었다. 하지만 환인(환국), 환웅(배달국), 단군(고조선)의 역사를 신화로 한 일제의 망령만을 오늘의 강단사학파들이 따르고 있다.
최태영 선생은 그러나 “일본인들이 환국이라고 한 원본과 일본어로 번역된 문헌을 갖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환웅(桓雄)이 풍백(風伯), 우사(雨師), 운사(雲師), 입약(立約), 시정(施政), 행형(行刑) 등의 담당관리와 곡식, 생명, 질병, 형(넓은 의미의 법), 선악의 판단 등 무릇 인간의 360여 가지의 일을 맡을 관리 등 무리 3000을 거느리고 태백산의 박달나무에 이르렀다. 그들은 백두산 아래 송화강 연안인 지금의 하루빈(하얼빈)을 중심으로 본거지를 정하여 정착했다. 이것이 단군조선역사의 시작이다. 이를 신화할 자는 정신병자가 아닌 자 외에는 없다”고 했다.
송화(松花)는 그 이전 소밀(蘇密), 속말(速沫, 粟末), 소머리 즉 우수(牛首)라고 했다. 이는 모두 소머리라는 뜻이다. 태백산 기슭에서 흰소(白牛)를 잡아서 하늘에 제사를 지낸 데서 비롯됐다고 한다. 이 소머리라는 것이 민족의 이동과 함께 강원도 춘천, 경주의 소시무리 및 일본 각처에 있는 소머리대왕(牛頭大王)의 사당과 절로 전해 졌다. 필자가 일본 유학시절 이 우두대왕(牛頭大王)에 대한 이야기나 지명들이 많음에 새삼 일본민족이 우리 한민족의 유민인 것을 확인시켜 줬다. 이것은 정착생활을 하게 된 우리 고대선조들이 박달나무 아래에서 제단을 만들고 환웅을 수장으로 세운 사실을 보여준다. 당시 선조들은 보본(報本), 경천(敬天), 숭조(崇祖)하는 ‘수두교(蘇塗敎)’를 펴고 법질서를 두루 보호하며 조화롭게 살았다. 이번 칼럼은 위대한 고조선의 실존 역사에 대한 여러 가지 방증 사실에 대해 기술하고자 한다.
실존인간 단군왕검(檀君王儉)과 군주정(君主政)으로 시작한 고조선
배달국은 그들이 오랜 신시대를 지내는 동안에 그 지역의 원주민과 융화, 통혼, 혼합하도록 하기도 하고 아니면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배제하기도 했다. 특히 배달국은 곰을 상징으로 하는 토템으로 한 종족들과 융화하며 통혼했다. 다만 범(호랑이)을 상징으로 하는 종족은 배제했다. 환웅의 종족이 곰을 토템으로 하는 종족과 융화·통혼하여 출생한 남자가 있다. 서기 전 2333년 경에 모든 사람의 추대를 받아 환웅때부터 전해온 표징을 이어 받고 태백산 박달나무 아래 신단(神壇)에서 왕으로 나와 나라를 열었다. 그를 후세 사람들이 환검(桓儉) 혹은 단군왕검, 즉 “단군임금”이라고 했고 그가 세운 나라를 조선이라고 이름했다. 주의 할 것은 단군 개국이전의 신시시대와 단군 개국이후의 고조선 시대는 분명히 구분해 보아야 한다는 것이다. 처음에는 배달민족, 즉 동방의 밝은 아침 해가 솟으면 만물이 고운 나라의 배달임금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모르는 이두(吏讀)에서 한자로 그렇게 음역(音譯)되고, 제정일치시대에서 제정분리시대로 변천하면서 두 가지를 한 몸에 겸한 단군왕검(檀君王儉)이라고 했다. 단군(檀君)은 수두(蘇塗)의 대제사장을 의미하고 왕검(王儉)은 국가를 통치하는 대 군주(大 君主)를 의미한다.
고조선은 광역국가로 신화나 전설이 아닌 실존 인간인 단군왕검(檀君王儉)이 창건한 광역의 제정(帝政)왕조의 군주정(君主政)으로 시작했다. 아울러 환국과 배달국의 사상과 제도가 전해 내려온 풍속에 있었다. 이전 제국의 것을 고조선이 이어 받아 발전시켜서 후대까지 그 전통을 잇게 했다.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은 지금은 없어진 ‘고기’(古記)와 ‘구삼국사기’ 그리고 현재 전해지는 위서(魏書)와는 또 다른 위서(魏書)를 통해 단군을 인용하고 있다. 김부식의 경우도 사대주의적인 입장에서 상고사나 중세사가 아닌 ‘삼국사기’를 저술했기 때문에 그 저서의 범위 밖의 고조선 단군사와 고려사는 될 수 있는 대로 의식적으로 피했으면서도 여러 곳에서 고조선과 단군에 관해 언급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김부식은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의 옛 도성이다”라는 식으로 언급하고 있다.
역사왜곡 이병도 박사도 “개천절 개천은 개국(건국), 단군은 신화 단정못해” 주장
47대의 걸쳐 이어진 단군 조선은 제후국이었던 같은 한민족인 은(殷)나라 의 연속적인 침략을 받았다. 고조선은 일시 패해 피한적도 있었으나 1천년동안 41대나 존속했다. 이 시기를 전후기로 나누어 합친 단군조선은 서기전 2333년부터~서기전 280년경까지 존속했다. 말기에 이르러 나라의 힘이 쇠약해지고 제후국들이 나누어져 열국시대(列國時代)를 이루었다. 이 열국 전에도 동이족의 나라인 숙신국(肅愼國)과 예맥(銳麥=濊貊)은 건재했다. 숙신국(肅愼國)의 경우는 4300여 년 전에 건재했는데, 중국인들이 숙신국을 대국(大國)이라고 했지만 우리 역사에서는 정작 빠져 있다. 또 3천여 년 전 중국인들이 구국(舊國)이라고 불렀던 예맥도 강력한 국가였음에도 우리는 역사에서 그 기록을 빼고 있다. 열국시대에는 부여의 힘이 강해 부여에서는 부여 왕이 단군이라 일컬어지기도 했다. 이 부여는 고구려로 이어지게 된다.
우리 역사를 왜곡했던 이병도 박사도 말년에 “‘개천절의 개천은 개국(건국)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이병도 박사는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예부터 단군을 국조(國祖)로서 사당(祠堂)을 세우고 최고의 조상으로서 제사를 받들어 왔는데, 그것이 끊어진 것은 일제의 강점때 부터였다. 지금까지도 여러 곳에 그 제단의 유적이 남아있고 또 그 제사의 진설도(陳設圖)와 세년가(世年歌)가 세전돼 오고 있다. 신화나 전설에 지나지 아니 한다면 이처럼 역대 왕조에서 조의(朝議)에 의하여 받들지는 아니 했을 것이다. 실존인간 단군과 영구한 역사를 이어온 고조선에 관해서는 더 연구 할지언정 신화로 단정 할 수 없다”고 했다. 이병도 박사는 이 같이 주장하면서 한국 상고사의 공백을 메기 위한 노력이 시급하다고 밝혔다.
신과 인간 함께 즐기는 축제, 임금과 백성 함께 하는 축제로 지금까지 이어져
김부식(金富軾)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서 단군을 논한 것은 찾아보기 힘들다. 그러나 이병도(李丙燾) 박사는 김부식도 내심 단군을 부인하고 있지 않다고 말하고 있다. 이병도 박사는 “사대사상가 김부식(金富軾)도 신라를 돋보이게 하려고 한 것이요, 단군을 부인한 것은 아니라고 보지 아니 할 수 없다”고 했다. 우리 민족이 많은 국난을 겪으면서도 단군묘(단군사당)에 제사하며 국가 대행사의 축제 때에는 세년가(世年歌)로 단군 등의 사적(공덕)을 이어 온 사실은 너무 명백하다. 이는 조선조에 와서도 확인 할 수 있다. 예컨대, 세종실록에 나온 것을 봐도 알 수 있다. 세종실록 제40권, 세종10년 6월조(條)에 유관의 상서와 세종18년 12월조의 유관의 조카 유사눌의 상서 중에 단군의 사적과 단군묘의 설립지에 관해 세년가(世年歌)로 전해 내려온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일찍이 고조선에서는 신과 인간이 같이 즐기는 축제를 행했는데, 그것이 임금과 백성이 함께 즐기는 축제다. 이 축제는 단군 이래 시월상달의 수리나 부여의 영고제, 신라·고려 이래의 연등대회와 팔관대회 등으로 이어졌다. 그런데 1894년 갑오경장 이후 민족의식, 민족정신이 고취됨에 따라 이 시월절의 오랜 풍속을 다시 재현시켰다. 이를 통해 단군이 나라를 세운 개천절을 삼은 것은 오랜 전통에서 비롯된 역사적인 의의가 있는 것으로 보아야 한다. 1945년 일제가 물러가고 개천절을 우리의 민족적 국경일로 삼아 대대적인 기념행사를 행해 오다가 정부수립 후에는 10월 3일을 기원절로 정하게 됐다.
해방 후 지금은 진심실천민족연대 이연우 회장이 개천민족회와 연대해 매월 마지막 일요일16시 안국동에서 단군 봉헌제를 지내고 있는데, 전국지자체별 1개 봉헌소를 설치해 일본에 의해서 중단됐던 단군봉헌제를 동 시간에 전국에서 지내게 하고 있다. 이를 통해 단군국조의 홍익세계를 널리 알리고 있다.
고조선 강역, 중국 북경 인근 난하(灤河)부터 한반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
단군의 고조선은 얼마나 강대한 국가였을까. 일연의 ‘삼국유사’ 첫머리에 왕검 조선조에 대한 언급이 나오는데 “중국의 위서(魏書)에 이르기를 수천년 전에 단군임금이 있어 도읍을 아사달에 정하고 나라를 열어 국호를 조선이라고 했는데 중국의 요임금과 같은 때다. 고기에 이르기를 평양성에 도읍하고 또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에 옮겼는데 나라를 다스리기 천오백년이었다. 주나라의 무왕 즉위기묘에 단군은 장당경으로 옮겼다가 1908세였다고 한다”고 했다.
그런데 ‘삼국유사’와 거의 같은 때(10여년 후) 이승휴(李承休)가 지은 ‘제왕운기(帝王韻紀)’하권 첫머리에 지리지에는 “요동 별천지가 있으니 중국과는 아주 구분되며, 삼면은 바다이고 북은 대륙에 이어진 중방(中方) 천리 땅이 조선이다. 천하의 명승이고 평화로운 고장, 예의 바른 집으로서 중국인이(다른 미개국과는 다른) 문화국이라고 일컫는 나라이다”고 했다. 또 ‘전조선기’에는 “본기에 이르기를 단군이 개국해 조선의 국토를 차지하고 임금이 됐다. 시라(尸羅), 고례(高禮), 예(濊)와 맥(貊)은 모두 단군의 자손이다. 단군왕조가 1038년간 나라를 다스리다가 아사달에 들어가서 신이 됐다”는 내용이 있다.
고조선의 중심부는 발해의 북쪽에 있었고, 그 영역은 중국 북경근처에 있는 난하(灤河)로부터 한반도에 이르는 광대한 지역이 포함돼 있었다. 지금까지 고찰(考察)한 바로는 고대의 요동은 원래 고조선의 영토였으며 지금의 난하(灤河) 동북쪽이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는데, 그 지역이 어디인가 하는 점이 중요하다. 그것은 갈석산의 위치를 보면 이해가 된다. 난하(灤河)하류 지역에서는 고조선과 중국의 경계인 갈석산이 있었다. 그러므로 난하(灤河)부터 갈석산까지의 지역은 중국에 속했고 이 지역이 중국의 요동이었다. 환언하면 고대의 요동은 대부분 고조선에 속했고 서남일부가 중국의 영토에 속했던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배운 국사책에는 이 요동을 지금의 요동으로 인식하여 고구려 전성기의 강역을 요하까지로 잡고 있다. 그러나 고구려가 차지한 요동은 고대의 요동으로 난하(灤河) 동북지역이다.
고조선의 활약지역의 중심이 고대 요동지역이었음을 알게 하는 많은 옛 문헌은 중국사기(中國史記)의 조선열전(朝鮮列傳)과 전한서(前漢書)의 지리지(地理志), 후한서(後漢書) 및 산해경(山海經) 등에 기록돼 있다. 따라서 고구려의 강역도 난하(灤河) 유역까지 확대하고 현행 교과서를 고쳐서 바로 가르쳐야 한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신채호 저·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윤내현·박선희·하문식 공저 ‘고조선의 강역을 말한다’, 백원·김백룡 원저 단동 김정일 편저 ‘天符經’, 고조선학회 ‘고조선연구 제1호’, 카터 코벨 지음·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임길채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하’,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강동민 ‘불쌍한 대한민국’, 박찬희 ‘지구촌 인류를 구제할 법칙’,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삼성(三聖)의 역사’, 우창수 ‘아사달, 상·하’, 김부식 ‘삼국사기’,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南帝 ‘命理속의 哲學’, 김진경 ‘만천년 역사의 비밀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 - 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林承國 ‘韓國正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秋山謙藏 ‘日本の歷史’ 외 다수서책을 참조·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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