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도 한국땅 아는 일본…독도침략 ‘그들에겐 정의’

입력 2015-04-11 23:3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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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 - 내정실패 후 세력확장 위해 ‘무인도’ 제물삼은 일본
 
1853년 미국 페리제독이 이끄는 미국 함대에 의해 강제로 개항한 일본은 쇄국에서 개방정책으로 전환하면서 180도의 다른 길을 간다. 그것은 바로 세계화로의 전환이었다. 일본은 그 배경으로 명치유신을 내세우고 있지만 내정의 실패를 대외로 눈을 돌린 것이었다. 그래서 일본은 1868년 명치유신을 거치고 나서 사실상 주인이 살지 않아 무주공산인 무인도(無人島)의 중요성을 절실히 깨닫고 그것을 대외 세력확장의 발판전략으로 삼았다. 일본은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남의 땅 영역쟁탈전에 노골적으로 나섰다. 그들은 100여년부터 국제적 시각을 갖고 무인도의 군사적, 경제적 가치를 파악해서 해양영역 확장에 나선 것이었다. 그 결과 지금은 일본 영토의 12배에 가까운 해양영역을 확보했다고 스스로 자평하고 있는 일본이다. 지금도 일본은 국력을 앞세워 해양영역을 넓혀가기 위해 안간 힘을 기울이고 있는 중이다.
 
이번 칼럼은 고대사 역사칼럼을 잠시 쉬고 일본이 왜 세계에서 유례를 찾아 볼 수 없는 영토주권 침해 만행을 다시하고 있는 것인가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우리는 어떻게 대처해야 하느냐에 관해 법학도의 한사람으로서 분명한 견해를 밝히고자 한다. 아울러 독도가 일본 땅이 아니라는 사실을 역사적 관점과 법적 관점에서 적시해 보고자 한다.
 
17세기 전반기 독도영유권을 확보 새빨간 거짓말에도막부·메이지정부 “독도는 한국땅”
 
일본이 최근 들어 우리 영토인 독도에 대해 끝없는 망발과 도발을 아예 작심한 듯 일삼고 있다. 그러나 일본이 독도에 대해 영유권을 주장하는 것은 전혀 근거가 없음을 엄정히 전제한다. 일본이 독도를 알게 된 것은 1695년 12월 에도(江戶)시대에 에도막부(江戶幕府) 정부와 돗토리 번(鳥取 藩)의 교류에서였다. 당시 에도막부(江戶幕府)와 돗토리 번(鳥取藩) 간에 독도에 관한 논의가 있었으나 에도막부(江戶幕府)는 “독도는 일본 령이 아니다”라는 언급을 분명히 했다. 일본이 17세기 전반기에 독도영유권을 확보했다는 것은 따라서 새빨간 거짓이다. 1877년 메이지(明治) 정부도 독도가 어느 나라의 영토인가에 관해 조사한 뒤 “독도는 일본과는 무관한 섬”이라고 했다. 이는 독도가 무주물(無主物)인 때가 없었는데, 독도가 무주물이라고 하며 1905년 독도를 선점해 시마네현(島根縣)에 편입했다는 일본의 주장과 전혀 앞뒤가 맞지 않는 것이다.
 
더구나 일본은 ‘독도는 자기 땅이 아니다’고 하며 당시 벌목과 어업을 목적으로 독도에 들어간 자국어민인 가이쓰야 하찌우에이몬(會津屋八右衛門)을 ‘해금령(海禁令)’령을 어겼다는 이유로 처형까지 시켰다. 이 같은 역사가 있음에도 일본은 다시 제국주의 망령을 끌어들이며 독도를 자기들 땅이라고 주장하는 해괴한 침략행위를 하고 있다. 독도는 또 2차대전 중인 1943년 ‘카이로선언’과 1945년 ‘포스담선언’에 의해 연합국이 “일본의 주권은 본주(本州) 등 4개의 섬과 연합국이 정하는 제소도(諸小島)로 국한 한다”고 한데서도 그 위상이 드러난다. 이후 연합국최고사령관인 맥아더는 1946년 1월 29일 정령677호로 “독도는 일본소유에서 분리되며 한국영토다”고 규정했다. 같은 해 6월 22일 정령1033호 역시 일본 정부에 보낸 각서에서 독도를 일본영역에서 제외시킴으로서 한국영토임을 국제적으로 공인시켜 명확히 했다.
 
이어 1951년 9월 8일 조인된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조인 3일전에 평화회담의 준비위원장인 덜레스는 ‘제출된 연합국의 일본영토 최종안은 6년 전의 연합국 결정에 의거했다’고 9월 5일 설명했다. 이 최종안이 샌프란시스코강화회의에서 그대로 통과됐다. 일본도 이를 받아들여 일본 정부가 1951년 작성하고 일본 국회가 비준한 문서와 지도에 독도의 영유국이 한국임을 밝히고 있다. 이를 통해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이 발효됐다. 일본이 1952년 4월 28일 재독립 후인 5월 25일자에 마이니치(每日) 신문사는 ‘대일본평화조약’이라는 600쪽의 해설서를 간행했다. 그 조약문머리에 게재한 연합국이 승인해 준 일본 영역 지도에도 선명하게 독도를 한국영역에 포함시키고 독도가 한국영토임을 재확인 해주었다.
 
해양자원 확보 전략 일환 19세기부터 무인도를 닥치는 대로 일본령 선포한 침략적 일본
 
일본은 한국과 아세아 국가들이 해양영토라는 개념이 없던 19세기 말부터 일본 주변과 태평양에 있는 무인도를 속속 자국 영으로 편입시키는 원대한 작업을 펴 엄청난 해양자원을 확보하는데 발 벗고 나선 나라다. 그들은 19세기 말에 한국이 쇄국이냐, 개국이냐로 논쟁을 벌이며 쇄국정책을 견지 할 때 필사적으로 무인도를 자기영토에 편입시키는 전략으로 나갔다. 120여 년 전부터 해양영토 확보를 위해 영역을 확장하며 19세기 말~20세기 초 러·일전쟁을 거치면서 독도에 대한 침탈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도 이런 배경이 있다.
 
그들은 명치유신이 실패하자 한국과 태평양으로 눈을 돌려 1875년에는 영국 상선을 군함으로 개조한 운양 호(雲養號)를 강화도에 진입시켜 수심측량을 하며 불법을 자행하고도 오히려 적반하장 격으로 불평등 조약을 체결했다. 1879년에는 1429년 건국된 평화의 나라 류큐(琉球)국을 강제로 병합시키고 오키나와라 개칭했다. 또 청일전쟁에서 이기자 명나라 시대인 1403년부터 중국의 각종 문헌에 나오는 다오이다오(釣魚島)를 센카쿠제도(尖閣諸島)라며 1895년에 일본영토로 편입시켰다. 또한 일본은 강한 국력을 내세워 일본에서 1800Km 떨어진 남태평양의 절해고도인 미나미도리시마(南鳥島)를 1896년에 개척단을 파견하고 1898년에는 자국의 최동단(最東端) 영토라고 선언하고 있다. 표고 9m 면적 1.51㎢(약 46만평)에 불과한 섬이지만 이를 보유함으로 배타적 경제수역을 확보했다. 이 섬에 활주로를 건설하고 자위대까지 주둔시키고 있다. 이것은 영유권 논쟁을 차단하기 위해 실효적 지배를 강화하려는 목적임을 알 수 있다.
 
일본은 그들의 최남단 섬이라고 주장하는 산호초인 오키노도리시마(沖の鳥島)의 경우 1922년 측량선을 보내어 1931년 자국영토 편입을 일방적으로 선언하고 영유권 강화를 목적으로 1939년에 관측시설공사에 들어갔다. 이곳은 만조(滿潮)시 거의 물에 잠기지만 일본은 자기 영토라며 주변 42만㎢에 대해 배타적 경제수역을 선포했고, 그 외부해역도 자국 대륙붕이라고 주장하고 있다. 또한 도쿄에서 1000Km떨어진 오가사와라(小笠原) 제도(諸島)도 1876년 비슷한 경위를 거쳐 일본영토에 편입시키고 있다.
 
일본 EEZ, 일본 국토면적 약 38만㎢의 25배 447만㎢중국 EEZ 보다 훨씬 넓어
 
일본은 이처럼 영토 확장에는 혈안이 되고 있는 나라다. 그런데 왜 일본은 우리가 일본에 침략당하면서 침탈됐다가 확고히 우리땅이 된 독도를 몰염치하게 다시 넘보는 것인가. 그 도발 이유가 무엇일까. 여기서 깊히 생각해야 할 대목이 있다. 일본도 독도가 한국의 영토로, 일본의 영토가 아님을 잘 알고 있다는 점이다. 그런데 어찌해서 거침없이 그리고 끈질기게 도발하는가. 이런 일본의 태도에는 여러 가지 이유가 있지만 해저자원 확보 욕심이 가장 크다고 하겠다. 대륙붕과 고체연료인 하이드레이트의 매장량 등 지하자원과 세계 4대어장이라고 불리는 독도 근해의 어족자원 등은 결정적인 도발 이유라는 것이다. 아울러 또 하나의 결정적인 이유가 있다. 한국은 국제법에 별로 관심이 없고 국제법 무지가 독도에 대한 그들의 구미를 당기는 역할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한마디로 우리의 허술함이 일본의 침략정의를 스스로 분출케 하고 있다는 것이다. 일본은 정치인이나 언론인, 학자, 관료 할 것 없이 국제법은 물론 국제정세를 정확히 보고 분석해 철저히 대비해 일을 마무리 하는데 비해 우리는 대충대충 넘어가는데 경향이 많다.
 
필자는 일본 유학시절 메이지대학 대학원에서 한 학기동안 샌프란시스코 강화조약 시 일본의 조약국장 이었던 니시무라구마오(西村熊雄→국제사법재판소 판사 역임)선생과 국제법 세미나를 한 학기 할 수 있는 행운의 기회가 있었다. 당시 일본 관료의 국제법 수준이 우리나라 대학 교수보다 훨씬 뛰어나면서도 연구도 더 열심히 하고 있음을 그를 통해 확인 할 수 있었다. 세계의 사례며 국제법에 정통함을 직접 보고 놀랐다. 필자는 니시무라(西村) 선생에게서 많은 가르침을 받았다. 이는 우리가 본받고 배워야 할 점이었다. 일본은 법과학생이 많은 나라이며 외교관 등은 반드시 국제법을 제대로 하고 있음을 보았다. 그러나 우리는 아니다. 외교관들의 교육훈련이 일본만 못한 것을 절치부심 시인하고 정말 노력해야 한다.
 
일본은 120여 년 전부터 해양영토 확보를 위하여 발을 벗고 나선 성과로 일본의 배타적 경제수역(EEZ)이 일본의 국토면적 약 38만㎢의 25배인 447만㎢에 달한다. 이는 영토면적이 더 큰 중국의 배타적 경제수역(387만㎢)보다도 훨씬 더 넓다. 일본은 일찍부터 해양에 눈을 뜨고 1세기 전부터 해양영토를 확보하기 위한 전략을 체계적으로 구사해 왔기에 가능했다. 일본은 석유를 대체할 것으로 기대를 모우는 메탄 하이드레이트와 핵탄두 원료가 되는 희토류, 망간 등과 엄청난 해저자원을 확보하려는 욕망이 있다. 거듭 강조하지만 일본이 독도를 탐내는 이유는 이 같은 해저자원의 매장량이 엄청난데다가 독도가 난류와 한류의 교차적 지역이라 어업자원이 넘치는데 있다.
 
열강들과 맺은 불평등조약 통해 국제정세와 국제법 익힌 뒤 ‘강화도조약’ 활용
 
일본이 해양영토를 대폭적으로 늘릴 수 있었던 배경은 또 있다. 1853년~54년 두 번에 걸친 미국 동인도함대사령관 페리제독이 이끄는 미국 함대에 의해 강제로 ‘미일화친조약’을 맺고 일본이 개항을 하고 이어 ‘미일수호통상조약’의 조인이 바로 그것이다. 그런데 이 조약은 (1)5개의 항구(가나가와(神奈川), 하코다데(函館), 낭아사키(長崎), 니가다(新潟, 효고(兵庫)의 개항 (2)외국에 영사재판권 인정(일본이 재판권이 없다) (3)관세자주권이 없다(수입품의 세율을 일본이 결정 할 수 없다) 등의 불평등조약 내용을 담았다. 하지만 일본은 계속해서 네델란드, 러시아, 영국, 프랑스와도 같은 내용의 조약을 맺는다. 이러한 재판권이나 자주권이 없는 ‘남경조약’과 같은 불평등조약으로 일본의 식민지화 위기가 나타나자 일본의 지도자들은 국론을 조정하며 이를 잘 처리해 나갔다.
 
일본의 근대사를 보면 일본은 막부(幕府)를 넘어뜨리고 천황중심의 통일국가를 필요로 했다. 이에 도막파(倒幕派)가 실권을 장악해 소위 명치유신을 하고 영국과 손을 잡아 군의 근대화를 진행시켜 1870년대에 와서는 정한론이 나온다. 그러나 국내정치의 정비가 먼저라는 데서 사이고다카모리(西鄕隆盛) 등의 정한론 주장자는 정부에서 사임한다.(1873년) 이후 1875년 영국 상선을 개조한 군함 운양 호(雲養號)를 조선영해에 침입시켜 강화도 부근에서 강을 거슬려 올라가며 측량과 해전연습을 실행한다. 이에 대해 우리의 연안포대가 포를 발사했으나 신식무기로 무장한 운양 호(雲養號)의 화력을 당 할 수가 없어서 우리 조정은 강화도 조약을 체결한다. 이 조약은 일본이 구미열강과 맺은 조약과 같이 일본의 치외법권(治外法權)을 인정하고, 조선의 관세자주권을 인정하지 않는 불평등 조약이었다. 이때 조약에 대좌한 우리 측의 국제 무지는 일본으로 하여금 이제는 조선을 침략해도 된다는 확신을 주게 되고 말았다.
 
이 강화도사건을 계기로 구미제국에서 배운 명치 신정부는 아시아 제국에 침략적인 방침을 세워 침략을 감행한다. 그 첫번째가 대만과 유구(琉球)이고 이어 청·일전쟁과 러·일전쟁 이며 한국 침략이다. 즉, 1902년 울릉도에 일본 경찰관 주재소를 설치하고 1904년 러·일전쟁을 도발 한 뒤 해군망루를 건설해 해군 정박지와 망루를 연결하는 해저전선을 부설한다. 이어 을사늑약이 조약이 아닌데도 조약이라 내세워 우리나라를 강탈하고 외교권을 박탈한 상태에서 우리영토를 제멋대로 빼앗고 유린했다. 또한 일본은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의 침략전쟁에서 막대한 전쟁보상을 받아 침략은 돈을 버는 수단이며 결국 정의가 될 수 있다는 인식을 확고히 갖게 된다. 이를 기반으로 일본의 침략전쟁은 한국과 전 아시아로 그 영역을 넓혀갔다.
 
일본은 이즈음 무인도의 중요성을 깨달으며 영역쟁탈전에 나선 것이었고 그 하나에 독도가 들었다. 그들은 국제적 시각을 갖고 무인도의 군사적, 경제적 가치를 파악해 해양영역확장에 무차별적으로 나서 성공을 거뒀다. 이와는 대조적으로 우리는 19세기 말 까지 우물 안 개구리로 쇄국이냐, 개국이냐 논쟁을 벌였을 뿐이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橫田喜三郞 ‘國際法Ⅱ’, 田岡良一 ‘國際法 Ⅲ’, 田岡良一 ‘改訂 國際法’, 田畑茂二郞 ‘國際法講義 上·下’, 田畑茂二郞 ‘國際法’, 深津榮一 ‘國際法’, 經塚作太郞 ‘現代國際法要論’, 經塚作太郞·山茂雄·宮崎繁樹編 ‘國際法講義’, 波多野里望·小川芳彦 編 ‘國際法講義’, 小田 滋·石本泰雄· 寺澤一 編 ‘現代國際法’, 高梨正夫 ‘新海洋法槪說’, 高林秀雄 ‘海洋開發の國際法’, 小田 滋 ‘海の資源と國際法’, 鷲見一夫·布施 勉·岩間 徹·磯埼博司 共著 ‘深海海底資源と國際法’, 浦野起央·芹田健太郞·中原喜一郞 箸 ‘國際政治と國際法の基本知識’ ‘空域主權の硏究’, 名島 芳 ‘國際法におけゐ權利濫用’, 小田 滋·石本泰雄 編 ‘解說 條約集’ 외 다수 서책을 참고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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