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후국 연맹 왕중의 왕 제왕(帝王)의 나라 고조선

입력 2015-05-02 21:07:22

원문 링크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 - 자원 반식민지(自願 半植民地) 전락
 
고대역사상 세계가 경탄할 ‘인간(人間)사상’, ‘천민(天民)사상’, ‘중물(重物)사상’의 역사를 창조한 우리 한민족의 3대사상을 조선조시대에 말살했다. 그 몇가지를 제시하면 이렇다. 첫째, 주자의 사상을 숭상하고 인간사상을 말살해 인화단결을 이룩하지 못한 채 도리어 사색당쟁에 열중해 분열·반목했다. 둘째, 천민사상을 말살함으로서 자주독립의 정신이 소침되어 중국을 대국 내지 조국으로 받들었다. 셋째, 중물사상을 말살해 서구의 물질문명을 배척했다. 이로 인해 우리는 분열과 반목을 일삼고 이민족에게 예속되는 노예사상을 존중한 채 근대화의 물질문명을 반대해 비탄할 구렁텅에 떨어졌다. 요컨대 고유한 ‘인간사상’ ‘천민사상’ ‘중물사상’을 존중치 않아 비탄할 역사로 타락된 것이다.
 
더욱이 일제의 침략으로 일제식민사관에 의한 ‘열등의식’과 ‘패배의식’이 조장된 결과 우리 한민족이 최초에 문화민족이요, 최초의 강대민족으로 등장한 사실을 망각해 버렸다. 지금 벌어지고 있는 우리의 사회상을 봐도 너무 가관이다. 1년여 동안 세월호 사태에서 보듯 일제에 의해 가치관이 변질된 식민사관을 아직도 치유하지 못하고 해방 70년을 맞고도 변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 우리의 정신적 자화상은 너무 비참할 만큼 제자리를 못 찾고 있다. 우리의 가치관에서 국가공동체의식이나 민족공동체의식이 상실되고 말았다. 올 바른 사관이 바로 서지 못하고 우왕좌왕하는 상황이다. 일제 일본사가(日本史家)의 마약을 먹은 결과인지 아직도 옳고 그름을 분간 못하고 사대사가(事大史家)의 독주(毒酒)에서 깨어나지 못한 채 제정신을 못 차리고 사회혼란만을 자아내고 있다.
 
우리 자아를 발견하지 못한 현실은 우리의 민족적 주체를 확립 못하게 하고 있다. 이는 주체가 없는 공허에 손님이 주인으로 행세하며 춤을 추고 있는 형세다. 천민(天民)으로 자처하던 이 강토 천민지(天民地)가 식민지로 전락한 후폭풍이 지금도 거세다. 인간을 사랑하던 군자국이 자당자파만을 사랑하는 여·야 싸움에 영일이 없는 소인국 소인배가 판을 치는 망국적인 나라로 전락했다. 그 원인이 식민지사관에 졸고, 외래사대사상에 구걸하는 현실이 낳은 결과임을 부정할 수 없다. 조선조의 사대사가(事大史家)의 독주(毒酒)에서 깨어나지 못하고, 또한 일제 36년의 일본사가(日本史家)의 아편 같은 마약을 먹은 결과라고 단정하는데 이의가 있을 수 없는 상태다.
 
우리가 위대한 한민족의 자손이라 말을 할 수 없는 상황이 우리 사회에 만연돼 있다. 지난날의 비탄할 역사에서 재기해 경탄할 역사를 다시 창조할 대책은 우리민족의 고유한 ‘인간사상’, ‘천민사상’, ‘중물사상’을 중흥하는데 있음이 확실하다. 오늘날 한민족이 처한 비탄할 현실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찬란한 역사를 재발견해야만 한다. 위대한 역사를 창조한 한국사상을 다시 발견해야만 외래사상에 구걸하는 현실의 개혁이 가능하다. 즉, 우리 역사를 다시 제대로 복원하고 민족적 자존심이 소생토록 하는 위대한 한국 사상을 다시 발견해야 민족적 자주성이 회복돼 주체를 확립할 수 있다. 그 중에서도 문화사상은 그 민족의 생명력이다. 이 생명력을 발견하고 부흥하는 중흥운동을 전개하는 것이 경탄할 역사를 다시 일으키는 길이다. 민족적 주체가 확립되면 손님이 주인으로 춤을 추는 현실에서 탈피하고 자원반식민지(自願半植民地)로 전락된 구석구석 일제의 잔재를 씻어내 현실을 구출 할 수 있다. 이번 칼럼부터는 제국 고조선의 위대한 역사를 살펴보기로 하고 그 첫 번째로 국가체계 및 조직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수많은 제후국 거느린 제왕(帝王)의 나라 고조선(단군조선) 배달국 이어 ‘아시아 질서자’
 
고조선은 서기전 30세기~서기전 24세기에 환국과 신시배달국에 이어 단군이 개국한 이후 단군조선을 중심·주류로 하고, 단군왕검을 대 제왕으로 삼아 다수의 대소 분봉(分封) 제후국가(諸侯國家)들을 거느리고 통치했다. 다시 말해 소왕(小王), 부왕(副王), 제후들이 통치하는 연합체였다고 보고 있다. 고조선은 2000여 년 동안 존속하는 동안 숙신(또는 직신), 맥, 예, 부여, 진번, 임둔, 발, 양이, 유, 청구, 고구려 고죽, 옥저, 신라, 진(辰)등 대 부족 연맹체적 성격으로 형성됐다. 그 중에는 고대 양자강 회하지역에 많은 한민족의 제후국들이 건설됐는데, 그 중 서언(徐偃)이 세워 1000년을 누리면서 중국의 36~50여국의 조공을 받은 서(徐)같은 나라가 있었다. 또한 ‘불이지국’ 같은 제후국은(지금의 직예, 산동, 산서) 여러 성을 정복하고 발해란 이름을 주기도 한 나라다.
 
이 같이 고조선이 다수의 제후국들이 나누어 다스렸다는 것은 고기(古記)에 의한 제왕운기(帝王韻紀), 규원사화(閨怨史話), 단군세기, 번한세기 등 여러 고사(古史)에 구체적으로 기록됐다. 단재(丹齋) 신채호(申采浩) 선생, 윤내현(尹乃鉉) 교수, 신용하(愼鏞廈) 교수 등도 이에 대해 명확하고 상세히 설명하고 있다. 전술한 바와 같이 고조선 이전의 ‘환국’, ‘신시배달국’시대부터 우리 한민족은 우수한 민족으로 한족(韓族)들이 수장이 된 여러 부족국가를 세웠다. ‘신시본기’에 기록되어 있는 것으로 보아 상당한 수준에 달한 강대국들이 우리 한민족에 의해 형성됐음을 알 수 있다. 당시 고조선을 주로 한 제후국이 연합체를 이루고 있었음은 명백한 사실이지만 중국과 일본은 우리 역사를 축소· 폄훼하면서 제후국들의 수준을 낮추어 영역을 반도내로 줄이고 그 건국연대를 절반이하로 절단했다. 이는 중국과의 사대관계와 일제의 식민사관이 낳은 산물이다.
 
그러나 이러한 왜곡도 남아있는 여러 역사의 기록에서 진실이 드러나고 있다. 단군의 제후국들이 단군의 주재(主宰) 하에 여러 회합과 동맹·연합하고 있었음이 고증되고 있다. 단군은 단순한 왕이 아니라 처음부터 제후국을 통치한 제왕(帝王)이었다는 점이다. 고조선의 국가구조는 소읍, 대읍 왕검성으로 형성된 읍제 국가, 즉 고대 봉건적 국가의 형태였다. 당시 읍의 거주인들은 혈연의 씨족, 또는 부족 간의 관계를 뜻하는 것이었다. 중국인은 자기들 집단의 수장(首長)에 우리 한민족을 모셔다가 왕으로 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배달국시대부터 그 유래를 찾을 수 있다. 배달국의 헌원은 치우천황과 73회 싸웠는데, 그 수하는 중국의 화하족(華夏族)들이 주종을 이루고 있었다.
 
고조선의 통치는 군사력과 행정조직을 중심으로 한 정치력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것은 종교적 권위를 배경으로 하고 있었다. 고조선의 통치자는 종교적 최고 권위자인 단군을 겸하고 있었으며, 종교의식인 제천(祭天)을 통해 연맹부족 간의 결합을 꾀했다. 당시 고조선의 임금은 정치적, 종교적 권위를 모두 장악해 신권통치(神權統治)가 가능했던 것이다. 고조선은 이러한 국가구조와 통치조직을 갖고 동북아시아의 질서자로 군림했다. 그러나 고조선 말기에 와서는 중국 화하족(華夏族)이 살기 좋은 고조선 영역으로 이주해와 인구가 증가함에 따라 여러 차례의 전이도 있었다. 예컨대, 서기전 280년 연(燕)의 장수 진개에 의해 2000리에 이르는 지역을 침략받았으나 이후 국경이 난하부근 만번한으로 정해진 것으로 보아 고조선이 잃었던 2000리 지역과 그 이상을 되찾았음을 알 수 있다. 이러한 사실은 고조선 왕국이 중국의 전국시대에도 중국보다 강한 군사력을 가진 강대한 국가였음을 말해준다.
 
고대 중국인들은 2000년 동안 우리와 빈번하게 교역도 했다. 그들은 고시(楛矢), 석족(石鏃), 산삼(山蔘)등을 수입하며 이를 ‘보물’이라고 했다. 우리는 이를 감안하면 사방 원시민족을 정복하고 대국으로 성장한 것을 볼 수 있다. 인류사상 최초의 대제국으로 등장한 우리 한민족은 천신의 피를 받았다는 ‘천민사상’을 발견하고 인류의 대표로 자처했다.
 
‘밝달’(배달)족서 유래한 ‘단군’‘단’은 ‘아사(아침)’ 한자번역 ‘밝달조선(아사달) 임금’
 
고조선이 개국하기 전 ‘신시시대’부터 한민족은 여러 부족구가로 나뉘어 성립돼 있었다는 것은 ‘신시본기’에 기록된 것으로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고대 우리 한민족은 상당한 수준에 달한 강대국으로 발전한 것을 알 수 있다. 단군조선 역시 군주세습제 고대국가였다. 삼국유사에 고조선의 건국제왕을 ‘단군왕검’으로 기록한 것을 비롯해 ‘선인왕검’(仙人王儉)이라고 호칭했다. 군(君), 왕검(王儉) 등은 바로 군주제의 호칭이다. 이를 보면 고조선의 통치체제가 ‘군주제’였음을 증명해 준다.
 
고조선을 건국한 ‘단군’은 후대의 개념을 적용한다면 강대한 제왕(帝王)이었다. 고조선의 제왕단군(帝王檀君)은 행정권, 재판권, 칙령제정권(입법권), 군사통수권, 국가제사주재권(國家祭祀主宰權) 등을 한 몸에 가진 군주였다. 오늘날의 눈으로 보면 전제군주제(專制君主制)였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고조선 제왕의 전제군주권은 제후국과 부족장, 씨족장을 배려한 제한도 있었다고 추정된다. 그것은 후국(侯國)과 부족장(部族長), 씨족장에게 권력을 분배하고 간접통치를 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고조선 초기의 제약이 있을 수 있겠으나 이러한 제약에도 불구하고 고조선의 군주제는 강력한 전제군주였음을 짐작하게 한다. 그것은 신시배달국시대부터 체제가 고도로 정비된 것이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이렇다. 첫째, 조선왕조시대 학자들의 견해와 같이 단군은 ‘밝달임금’의 번역이라고 볼 수 있다. 고조선의 박달산 아래 아사달에서 건국돼 고조선 민족을 ‘밝달’(또는 배달)족이라고 별칭했음으로 단군은 ‘박달임금’을 한자 번역한 것이라고 보는 것이다. 둘째, ‘단군’의 ‘단(壇)’은 ‘한(韓)’과 동일한 것이고 ‘천(天)’을 의미하는 것이며, ‘단군’은 천왕(天王)과 동일한 의미라고 보는 것이다. ‘단군(고기)’에서는 환웅을 환웅천왕(天王)이라고 기록했다.(삼국유사 권1 고조선 조(條) 참조) 셋째, 단군의 ‘단’을 ‘아사(아침)’의 한자번역으로 볼 수 있다. 고조선 말로 고조선의 나라이름이 ‘아사달’ ‘아사달나’였고, 이것은 한자로는 아침 ‘단(旦)’으로 번역 할 수 있다. ‘단(旦)’과 ‘단(檀)’은 통한 것이다. 실제로 조선을 나타내는 ‘진단(震檀)’을 진단(震旦)으로 표기하기도 했다. 즉, ‘단군’은 ‘조선 임금’의 뜻이면서 ‘밝달 조선(아사달) 임금’의 뜻이 되는 것이다.
 
‘단군’은 ‘천왕(天王)’ ‘제왕(帝王)’ 보통명사강력한 전제군주제에 일찌감치 세습군주제
 
고조선의 군주(君主)는 모두 ‘단군’으로 불렸다. 이 때의 ‘단군’은 고조선 제왕(帝王)을 일컫는 보통명사가 됐다. 따라서 단군의 호칭에는 고유명사와 보통명사의 양면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고유명사로서의 ‘단군’은 고조선을 개국한 개국시조 ‘단군’을 가리킨다. 제2대 ‘부루(夫婁) 이후의 고조선 제왕들은 어미용어로 ‘단군’을 사용해 이 경우의 ‘단군’은 ‘천왕(天王)’ ‘제왕(帝王)’을 나타내는 보통명사가 됐다.
 
삼국유사 권1, 고조선(왕검조선)조(條) <고기>에 단군의 수명이 1908년에 달한다고 전하고 있는데, 여기의 ‘단군’은 보통명사로서의 ‘단군’을 모두 합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규원사화(揆園史話)는 17세기 북애자(北崖子)가 쓴 책으로 발해시대의 책인 조대기(朝代記)와 고려시대 청평산인(靑平山人)의 진역유기(震域遺記 -23권)를 대본으로 해서 저술된 책이다. 이 책은 17세기 도가계통(道家系統)의 고조선 역사책으로서 민간에 비전된 기록들을 참조해 저술했다고 하는데, 이는 세년가(世年歌)를 통해서도 잘 전해져 온 내용들이다.
 
규원사화(揆園史話)의 왕계(王系)는 47대로 기록되어 있다. 규원사화에 기록된 단군조선 47대 왕계(王系)를 보면 25대 솔나(率那), 30대 나휴(奈休), 38대 다물(多勿) 등 3차례만 아우에게 왕위가 계승된 것 이외에는 모두 아들에게 왕위가 계승됐다. 따라서 고조선의 군주제는 ‘세습군주제’라고 말할 수 있다. 그 세습한 왕자가 장자(長子)였는지의 여부는 현재의 자료로는 확인할 수 없다. 그러나 거의가 장자로 보는 것이 옳다고 사료된다. 이 세습제도는 숙신국(肅愼國), 예맥, 부여, 고구려 백제, 신라, 발해, 고려, 조선으로 이어지면서 한민족의 왕계는 거의가 왕자에게 이어져 왔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신채호 저·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의 통치체제’, 고조선학회 ‘고조선 연구 제1호 소수(所收)’,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윤내현·박선희·하문식 공저 ‘고조선의 강역을 말한다’,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백원 김백룡 원저·단동 김정일 편저 ‘天符經’, 카터 코벨 지음·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임길채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하’,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강동민 ‘불쌍한 대한민국’, 박찬희, ‘지구촌 인류를 구제할 법칙’,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삼성(三聖)의 역사’, 우창수 ‘아사달 상·하’, 김부식 ‘삼국사기’,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南帝 ‘命理속의 哲學’, 김진경 ‘만천년 역사의 비밀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 - 天皇家 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林承國 ‘韓國正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吉川幸次郞 ‘漢の武帝’, 貝塚茂樹 ‘中國の歷史’, 秋山謙藏 ‘日本の歷史’ 외 다수서책을 참조·인용했음을 밝힙니다>
이을형 필진페이지 +
후원하기
이 기사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추천해요
0
좋아요
0
감동이에요
0
화나요
0
슬퍼요
0
댓글 :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