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오늘(7일)은 제60회 현충일이다. 이 날을 기리며 우리의 한·일관계 역사를 바로잡기 위해 우리가 알아야 할 것을 언급하고 가지 않을 수 없다. ‘세상은 아는 만큼 성장한다’고 했다. 올해 우리는 해방 70년이 되고 일본과 한·일협정을 맺은 지도 50주년을 맞았지만 우리의 역사에 대해서는 일제가 심어놓은 지식수준에서 일보도 낳아진 것이 없다. 교육은 더 후퇴하고 있다. 이에 우물 안 개구리보다도 못한 격으로 종지 안에서 올챙이가 뛰어 노는 격이다. 세계의 학자들은 우리가 위대한 민족임을 주장한다. 그들은 우리의 자랑스러운 역사와 문화사상 및 전통을 가진 문명사를 파헤치며 한민족(韓民族)이 인류의 시원이고, 세계 5대문명의 발원이라고 고증하고 있다.
이런 상고사 역사뿐만 아니라 지금 우리는 일본과의 조약 아닌 늑약을 조약인 양 역사책에 버젓이 기록하고 있다. ‘을사보호조약’이니 ‘합방조약’이라고 아직 까지도 기록하고 있으니 통탄할 지경이다. 우리가 법과 원칙에 입각한 상식으로 떳떳하게 일본과 대화하려면 일본의 침략과 역사왜곡, 일본이 강요한 모든 늑약들과 한·일협정을 비롯해 모든 조약을 국제법의 룰에 따라 폐기통고하고 새로 협상한 뒤 새 협정을 맺어야 한다. 이런 전제가 없이는 일본의 음모에서 벗어날 수 없다. 오늘도 우리 정치권에서는 한·일협정 50주년을 기념한다고 말하고 있기에 언제까지 정신을 차리지 못할 것인지 한심하기 그지없다.
한 예만 들어보자. 한·일협정 제2조를 보면 ‘1910년 8월 22일 이전에 일본과 조약 및 협정은 무효인 것을 확인한다’는 내용이 있다. 구조약이란 무엇을 뜻하는 것인가. 그것은 조약이 아닌 늑약을 말하는 것인데, 국제법에 무지한 우리들이 일본의 꼼수에 넘어간 사실을 모르고 한·일협정 50주년을 말하고 있다. 원래 조약은 그 행위자가 능력자(法主體者)가 아니면 무효(當事者能力)이고, 또 그 행위를 하려고 하는 주체적 의사가 없으면 마찬가지로 효력이 없다. 위법한 행위를 전제로 한 조약은 조약이 아니라는 것이다. 당사자능력이 없는 자가 조약을 체결 할 수 없으며, 상호의 동의가 존재해야 한다. 착오, 사기, 강박, 대표의 부패는 무효 또는 무효의 원인이 된다. 또한 위법하거나 강행법규위반, 대표의 서명날인 등 조약형식을 결여한 것은 조약이 아니다. 1905년의 소위 ‘을사보호조약’이나 1910년의 ‘한일병합조약’이라는 것들은 조약의 구성요소를 결여한 늑약(勒約)인 것이다. 일본은 어업협정도 폐기했는데, 우리는 하자(瑕疵)가 많은 협정들을 고수하며 기념한다고까지 하고 있다. 한·일협정과 신 어업협정을 폐기통고하고 한국의 국가위상을 되찾아야 한다. 이번 칼럼은 현충일을 맞아 이 같은 교훈을 되새기며 단군 고조선의 후국(侯國)들에 대해 계속 살펴보고자 한다.
고조선제후국, 관직명 호칭은 ‘~가’ 부여…왕명호칭은 한(汗)·간(馯)·한(韓)·간(干) 부여
고조선시대에는 통치영역이 넓어지고 다수의 부족이 통치권 안에 들어오자 역대 단군(왕)들은 자기의 직령지(直領地)를 가짐과 동시에 왕(王), 후(候), 거수(居首), 장수(將帥), 두만(Tuman, Tumen, 만호(萬戶)을 파견하거나 또는 임명해 간접통치를 하는 후국제도(侯國制度)를 발전시켰다. 고조선의 후국(侯國)이 중앙정부에서 ‘가’라고 한 것은 지방 제후(諸侯)의 관명호칭이다. ‘가’는 가(加), 가(伽), 가(呵), 가(可) 등의 한자로 소리표기 됐는데, 지방 제후(諸侯) ‘가’가 왕자 또는 왕비의 부형(父兄)에서 임명됐을 경우에는 ‘고추가(古鄒加)’로 호칭해 ‘가’보다 격상된 지위를 부여(賦與)했다.
이에 비해 왕 및 지방 소왕(小王)을 의미한 ‘한’은 한(汗), 간(馯), 한(韓), 한(寒), 간(干) 등으로 한자표기 됐다. 이것은 다시 고조선 해체 뒤에 지방 소왕(小王)들이 독립할 무렵부터 ‘가’와 ‘한’이 합쳐져서 ‘가한’이 되어 고조선 문명권에 속해 있던 모든 민족들이 ‘왕(王)’ ‘제왕(帝王)’ ‘가한’(gahan, kahan, khan)으로 호칭하게 됐다. 훗날 몽골제국을 일군 징기즈 칸과 그의 후손들이 일군 제국의 4개 한국인 킵차크한국, 오고타이한국, 일한국, 차카타이한국 등의 명칭에서 칸과 한국이라는 발음과 그 명칭 모두 한(汗)이라는 글자를 쓰는 것 등이 결코 우연이 아니다. 고조선의 지방 통치체제에서 직령지(直領地) 이외의 후국(侯國)은 고조선의 국력이 강대지면서 영역의 확대에 따라 급속하게 증가됐다. 고조선 문헌에서는 가장 큰 부족만을 들어 전통적으로 고조선이 ‘구족’(九族)을 지배했다고 표현했으나 중국문헌에서는 ‘동이구족’(東夷九族) 또는 ‘구이’(九夷)라고 표현했다.
고조선 이어받은 제후국이자 문명국 부여, 천왕(天王)과 황제(皇帝) 국가로 발전·계승
이 후국(侯國)들은 언어도 고조선 어를 많이 사용하고 있을 만큼 중앙정부와의 거리가 가까운 후국들이다. 숙신(肅愼), 맥(貊), 예(濊), 부여(夫餘), 고죽(孤竹), 불리지(弗離支), 옥저(沃沮), 고구려(高句麗), 진(辰), 읍루(挹婁) 등이 이에 해당한다. 숙신(肅愼)은 고조선이 건국한 같은 시기에 개국에 참가했으나 맥(貊)과 예(濊)는 고조선 개국 때에는 참가하지 않았다가 나중에 후국(侯國)으로 참가했다.
부여는 단군조선 개국 후에 단군조선의 맥족(貊族) 일부가 이전 예족(濊族)의 발원지인 북류 송화강(松花江) 일대에 고조선의 후국(侯國)으로 있다가 서기전 14기경에 고조선에서 분립한 후국(侯國)이었다. 부여는 후에 천왕(天王), 황제(皇帝)국가로 발전하여 고려시대까지 황제국가로 발전시켰다. 중국문헌을 보면 ‘부여는 동이(東夷) 중에서 가장 평탄하고 넓은 곳으로 토질은 오곡(五穀)이 자라기에 알맞다. 명마(名馬)와 적옥(赤玉)과 담비, 살쾡이가 생산되됐고 큰 구슬의 크기는 마치 대추와 같았다’는 기록이 있다. 또 ‘목책(木柵)을 둥글게 쌓아 성(城)을 만들고 궁실(宮室)과 창고와 감옥이 있다. 그들은 체격이 크고 굳세며 용감했다. 또한 근엄, 후덕해 다른 나라를 쳐들어가거나 노략질을 하지 않았다. 활, 화살, 칼, 창으로 병기를 삼으며 육축(六畜)의 이름으로 관명(官名)을 지어 마가(馬加), 우가(牛加), 구가(狗加) 등이 있었다. 국가의 읍락은 모두 제가(諸加)에 소속됐다’는 기록도 전해진다.
부여 사람들은 음식을 먹고 마시는 데는 조두(俎豆, 나무로 만든 그릇의 한 종류)를 사용했다. 회합 때에는 배작(拜爵), 세작(洗爵)의 예(禮)가 있었으며 출입 시에는 읍양(揖讓)의 예가 있었다. 12월(臘月)에 지내는 제천(祭天) 행사에는 연일 크게 모여서 마시고 먹으며 노래하고 춤추었는데, 그 이름을 영고(迎鼓)라고 했다. 이때에는 형옥(刑獄)을 중단하고 죄수를 풀어 주었다. 전쟁을 하게 되면 그 때에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서 그 발굽을 가지고 길흉을 점쳤다. 밤낮없이 길에 사람이 다니며 노래하기를 좋아해 노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상의 내용들은 후한서(後漢書 卷85, 東夷列傳 第75, 夫餘國條 參照)에 있는 내용이다.
부여 해모수 이어받은 고구려, 한민족 고조선 제국의 천제국 정신과 뿌리 이어받아
나관중(羅貫中)이 6000여명의 사람을 내세우고 풍부한 상상력을 동원해 쓴 삼국지(三國志)에는 ‘예맥(銳麥=濊貊)은 대군장(大君長)이 없고 후(候), 읍(邑), 군(君), 삼로제(三老制)가 있다고 했다.(三國志 魏志 卷 三十 東夷) 예맥은 황제제도가 없으나 예맥(銳麥=濊貊)은 3000년 전 중국을 주름잡던 강성한 나라임을 앞서 칼럼에서 밝혔기에 생략한다. 중국은 1000년 동안 예맥에 짓눌린 역사를 숨긴 채 밝히지 않고 있다. 한(漢)나라도 예맥에 유린되나 이에 대한 기록을 찾아 볼 수 없다.
그런데 삼국지(三國志)에 나와 있는 부여는 ‘그 나라(부여)사람들은 가축을 잘 기르며, 명마(名馬)와 적옥(赤玉), 담비와 유(狖)가죽 및 아름다운 구슬이 산출되는데 크기는 대추만하다. 활, 화살, 칼, 창을 병기로 사용하며 집집마다 자체적으로 갑옷과 무기를 보유했다. 그 나라의 노인들은 자기네들이 옛날에 (다른 곳에서)에서 망명한 사람들이라고 말한다. 성책(城柵)은 모두 둥글게 만들어서 마치 감옥과 같다. 길에 다닐 때는 낮에나 밤에나 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모두 노래를 부르기 때문에 하루 종일 노래가 그치지 않는다. 전쟁을 하게 되면 그 때도 하늘에 제사를 지내고 소를 잡아서 그 발굽을 모아 길흉을 점치는데, 발굽이 갈라지면 흉하고 발굽이 붙으면 길하다고 생각한다. 적군의 침입이 있으면 제가(諸加)들이 몸소 전투를 하고 하호(下戶)는 양식을 져다가 음식을 만들어 준다’는 내용이 기록됐다. 후한서의 내용과 거의 유사한 것을 볼 수 있다. 이 같은 기록들은 서기전 5세기경의 것이나 그 이전의 관행과 풍속도 설명하고 있는 것으로 볼 수 있다고 하겠다.
부여는 고조선의 세습제를 답습했다. 특이한 것은 후국(侯國)이던 부여가 천제(天帝), 황제국가(皇帝國家)를 건설했다는 점이다. 중국과 일본의 부여 역사도 많이 왜곡되고 있으나 황제제도는 북부여시대부터 해모수(解慕漱)가 천제(天帝), 황제국가(皇帝國家)를 창설한 역사적 영웅으로 기록된다.(최인(崔仁) 한국학강의 159면) 상고시대 환인(桓因), 환웅(桓雄)을 천왕(天王)이라하고 배달국14대 치우천황(蚩尤天黃)=慈烏支天黃)을 천왕(天王)이라고도 부르나 황제로 부르지 않았다. 부여시대에 와서는 천제(天帝), 황제(皇帝)로 칭하리만큼 당당한 대국이었다.
북부여를 계승한 고구려도 해모수(解慕漱)를 크게 존중하고 특히 고구려 시조 동명왕(東明王)은 해모수(解慕漱)의 아들이다. 동명왕(東明王)이 항상 천제(天帝)의 자(子)라 칭한 것은 바로 해모수(解慕漱)의 아들이라고 칭한 것이다. 즉, 동명왕(東明王)이 해모수(解慕漱)를 천제(天帝)로 존중 할 만큼 부여(夫餘)는 고조선 후국(侯國) 중에도 고조선을 이어 받을 만큼 통치제도를 갖춘 나라이었다.
부여에 대해 박은식(朴殷植)의 한국통사(韓國痛史), 백암 박은식전집(白巖 朴殷植全集)에서 ‘부여는 단군 뒤에 해부루(해(解扶婁)가 북부여에 나라를 세웠으니 즉, 지금의 봉천 개원(開原)현이다. 그 후 나뉘어 동부여와 졸본부여로 갈라졌으며 북부여는 나라를 누린 것이 가장 오래 되었으니 2000년에 이른다고 했다. 즉, 부여의 지류들은 동부여족에 전해지고 규봉(圭封)족과 합해 졌으며 고구려 족에 전해졌다. 또 백제족, 선비(鮮卑)족에 이어졌다. 선비족도 크게는 부여족의 한 지류라고 본 것은 박은식 견해의 특징이라고 할 수 있다. 선비(鮮卑)족의 지류는 김해로 내려와 가야를 세웠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신채호 저·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의 통치체제’, 고조선학회 ‘고조선 연구 제1호 소수(所收)’,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윤내현·박선희·하문식 공저 ‘고조선의 강역을 말한다’,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백원 김백룡 원저·단동 김정일 편저 ‘天符經’, 카터 코벨 지음·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임길채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하’,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삼성(三聖)의 역사’, 우창수 ‘아사달 상·하’, 김부식 ‘삼국사기’,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김세환 ‘고조선역사답사기’ ‘동남아유적지를 찾아서’ ‘노을속의 메아리’,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南帝 ‘命理속의 哲學’, 김진경 ‘만천년 역사의 비밀’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Joseph Eidelberg 著·中川一夫 譯 ‘大和民族は ユダヤ人だった’, 林承國 ‘韓國正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외 다수서책을 참조하고 본문을 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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