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00년 전 동북아 대국 숙신씨(氏=왕)도 고조선 후국

입력 2015-06-14 01:01:4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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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중국의 역사서인 사마천(司馬遷)에 의해 편찬된 ‘사서(史書)’는 옛 신화시대부터 전한(前漢)초기인 서기전 2세기말 한무제(漢)武帝)때까지의 역사를 다루고 있다. 또 ‘한서(漢書)’의 경우는 전한(前漢-서기전 202~서기8년)의 역사를 1세기 후반 반고(班固)가 편집했고, ‘후한서(後漢書)’는 후한(後漢-서기25년~220년)의 역사를 5세기 초 범엽(范曄)이 쓴 것이다. ‘위지(魏志)’는 위(魏-서기220년~265년)의 역사를 3세기 말 진수(陳壽)가 편집했다. 일본에서는 중국보다 한 참 뒤에 가장 오래된 사서(史書)로 712년 고사기(古事記)와 720년 일본서기(日本書紀)가 안만려(安萬呂)에 의해 나왔다. 하지만 이같은 사 서들은 모두 허구의 사실을 진실인양 편집하고 있다. 내용의 70~80%는 허구이니 사실상 위서(僞書)인 셈이다.
 
중국과 일본은 우리 사서(史書)들을 모두 불태워 없애버리거나 가져갔기 때문에 부득이 그들의 위서(僞書) 조차 인용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 때문에 이들 사서(史書)의 인용은 반드시 주의를 요한다. 일례로 한(漢)왕조가 시작한 것은 서기전 202년이다. 이후 단한 번도 고조선을 지배한 적이 없음에도 중국은 그것을 왜곡했다. 오히려 우리가 (漢)나라를 지배했음은 이미 수차례 언급한 바와 같다. 우리는 한(漢)왕조가 시작하기 전인 서기전 4000년~2500년 전에 이미 요하문명(홍산문화)을 일으켰다. 이어 이집트, 메소포타미아, 인도, 중국(황하)의 세계 4대문명을 주도한 유구한 역사를 갖고 있음을 유네스코(Unesco)도 인정하고 있다.
 
‘한배달역사천문학회’ 김세환(金世煥) 회장은 지금도 86세의 노구이지만 우리 상고사와 고대사를 바로 잡기 위해 중국을 수차 왕래하며 그들의 역사변조 과정을 일목요연하게 정리하고 있다. 필자는 김 회장과의 대화에서 중국의 동북공정 실패를 확신했다. 그것은 김 선생의 ‘고조선 역사유적지 답사기’의 사진기록이 중국 유적지를 갈 때마다 다시 바꿔 져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는 역사변조의 실증임을 기록해 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번 칼럼은 지난 글에 이어 고조선 후국(侯國)들의 상황에 대해 살펴보고자 한다.
 
한민족 정신·문화 이어받은 고죽국(孤竹國), 옥저(沃沮), 진국(辰國)도 고조선 후국(侯國)
 
상고사나 고대사는 우리의 역사서가 불타거나 중국과 일본이 가져가 근거가 부족한 경우가 많아 필자는 부득이 허구의 중국 사서조차 일부 참고할 수밖에 없는 상황임을 전제한다. 삼국지와 후한서 기록들을 보면 단군고조선의 후국(侯國)인 고죽국(孤竹國) 역시 발해만 연안 난하중류 유역에 설치된 고조선의 직령지로서 대릉하 유역의 조양(朝陽)지방과 함께 고조선중앙정부에서 ‘고추가(古鄒加)’가 파견돼 통치됐다. 이후 중앙정부의 지배력이 약화되자 후국(侯國)이 되면서 고조선의 지방제후국으로 존속했다.
 
서기전 7세기 중엽에 산동반도에 우리민족이 세운 불리지(弗離支, 令地), 고죽(孤竹), 산융(山戎) 등이 있다. 제(齊)나라 환공(桓公)이 북으로 이들을 공격한 일이 있는데, 이 때 대항해 싸운 고죽국 장군이 황화(黃花)다. 그리고 고죽국 군주가 답리가(答里呵-고대발음은 다리가)이다. 고죽국군주 ‘답리가(答里呵)’의 ‘답리(答里)’는 군주 이름이고 ‘가(呵, 加)’는 고조선지방제후(諸侯)의 관명(官名) 호칭이다. 왕족의 ‘가’는 고조선, 부여, 고구려에서 ‘고추가(古鄒加)’로 격상해 불렀다. 이것은 난하 중류에 있던 고죽국이 고조선 왕족의 ‘고추가(古鄒加)’가 파견되어 통치한 고조선의 후국(侯國)이었을 의미한다. 고죽국은 ‘고추가(古鄒加)’가 통치하는 나라의 한자번역소리 표기로 봐서도 고조선 지방후국(侯國)이었음을 알 수 있다. 불리지(弗離支)는 불령지(弗令支) 또는 영지(令支)라고 불리던 고조선이 파견한 장수의 직령지(直領地)였다가 부여(夫餘)가 후국(侯國)이 된 후 고조선 후국(侯國)으로 활동한 매우 용감한 부여계통 후국(侯國)이었다고 신용하 교수는 말하고 있다.(관련 논문 40면)
 
옥저(沃沮) 역시 고조선의 후국(侯國)이다. 옥저는 “대 군왕은 없으며 읍락(邑落)에는 대대로 각각 장수(長帥)가 있고, 그 언어는 구려(句麗)와 대체로 같지만 때때로 다를 때도 있다”는 기록이 있다.(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 東沃沮條 참조) 구려(句麗)는 주몽이 고구려를 세우기 이전에 부여의 별종이었다. 고구려 이전에는 맥족이 고조선 후국이었다. 일찍부터 부여의 한 지파로서 압록강 중류와 혼강 유역에 거주하고 있다가 주몽이 부여에서 망명해 들어와 왕이 된 이후부터 ‘고구려’라는 국호를 사용했다고 하는 기록이 있다.(後漢書 권85, 東夷列傳 高句麗條 句麗條 참조)
 
한반도내에 소국을 세운 진국(辰國)은 한반도 중남부에 세운 고대국가였다. 고조선처럼 강력한 중앙정부조직을 갖추지 못한 채 약 78여개에 달하는 한(韓)족의 소국들이 연맹체 상태에 있었다. 이 진국의 왕은 연맹체의 군장으로서 여러 소국의 거수(渠帥)들을 지배했다. 수도는 월지국(月支國)으로 서기전 4세기~서기전 3세기에 마한(馬韓), 진한(辰韓), 변한(弁韓)의 3한(韓)으로 나뉘게 됐다. 여기서 마한은 54개 소국, 진한과 변한은 각각 12개 소국들로 구성됐다고 삼국지는 언급하고 있다.(三國志 권30 魏書, 東夷傳. 韓條 참조) 하지만 이들 삼국의 진짜 위치는 한반도가 아닌 중국 대륙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는 것이 진실이다.
 
진국(辰國)의 통치는 마한(馬韓) 왕(王)이 곧 진왕과 같은 것이었으며, 진한 왕과 변한 왕을 임명할 수 있었기에 막강한 권력을 갖고 있었다. 진국(辰國)은 고조선의 제후국이다. 이에 진국에는 고조선의 선진 문물이 계속 유입되는 한편 사람들이 살기 좋은 여건으로 잘 조성됐다. 진국은 당시 맥족(貊族)과 함께 고조선에 복속돼 이런 후국으로 있었다.
 
제국의 맹주 제후국 숙신(肅愼氏)…고조선 개국과 함께 출발한 동북아 지배 고대 한민족
 
숙신(肅愼)에 대해서는 여러 차례 다뤘다. 발해국지 장편(渤海國志 長篇卷16, 族俗考, 第3)에 보면 ‘근세 인류학자가 동북민족은 다 숙신(肅愼)에서 나왔다’고 할 만큼 고조선 개국직후에 고조선 후국(侯國)이 돼 역사가 깊다. 중국 고문헌에 발식신(發息愼) 또는 발숙신(發肅愼)으로 나온다. 흑룡강지고(黑龍江 志稿 卷一, 地理志) 중국고사에는 숙신(肅愼), 읍루(挹婁), 물길(勿吉), 말갈(靺鞨), 여진(女眞), 실위(室韋)도 동이족(東夷族)이라고 했다. 그런데 숙신에 대한 기록은 한국에서 많이 볼 수 없다. 이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는 숙신에 대한 내용이 미상(未詳)이다.
 
그런데 중국은 이 숙신(肅愼)을 예(貎)로 기록해 맥(貊)이라고 풀이했다. 주무왕(周武王) 당시에 숙신씨(肅愼氏)의 화살을 수입할 때는 예맥(銳麥=濊貊)이 한족(漢族)과 병칭(竝稱)되어있었다. 그러면 숙신씨와 예맥은 동일한 시대에 존재했음을 말하고 있다. 이것은 숙신이 예맥이요, 예맥이 숙신이라는 사실을 더욱 긍정 할 수 있다. 후에 숙신씨와 그 지파가 부여, 고구려에 합병되어 완전히 한(韓)민족으로 성장했다.(씨(氏)는 왕을 말한다.) 후한서 동이전에 ‘숙신씨(肅愼氏)의 분파(分派)인 읍루(挹婁)가 한(漢)나라가 흥한 후에 부여(夫餘)에 합병 됐다’고 했다. 진서(晋書)에는 ‘고구려가 더욱 강성해 숙신(肅愼), 읍루(挹婁)를 합했다’고 했다.(晋書斠注卷97, 列傳67, 四夷 참조)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는 태조(太祖) 8년 12월조(條)에 대조영(大祚榮)이 발해(渤海)를 건설하고 숙신(肅愼)을 합병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또 진서각주(晋書斠注)에 숙신씨의 일명(一名)이 읍루(挹婁)이고 백두산에 거주한다고 했다. 죽서기년(竹書紀年) 순(舜)의 25년에 숙신씨가 궁시(弓矢)를 중국에 수출했다고 했다. 숙신(肅愼)은 중국 고대국가인 하(夏), 은(殷), 주(周) 3대 이전에 중국 동북지대에 대국을 건설해 지금의 길림성(吉林省) 동쪽 모든 지방을 모두 차지했다. 동이족 중 4300년 전에 중국문헌에 나타난 자는 오직 숙신씨(肅愼氏) 뿐이다.
 
고대 한족(漢族)이 자민족에 씨(氏)라는 존칭을 붙이고 타민족에 씨(氏)라는 존칭을 붙인 것이 없다. 그 원인이 어디에 있는가. 그것은 한(韓)민족이 최초에 문화민족으로 등장하고 최초의 강대족(强大(族)이라는 표시다. 읍루(挹婁)는 서기전 3세기 숙신씨의 영토에 진출했으나 읍루의 본부는 숙신씨의 서쪽에 있다. 고구려가 망한 후에 대조영(大祚榮)이 읍루(挹婁)의 동모산(東牟山) 옥루하(玉婁河)를 점거한 후 그 옥루하가 읍루로 전음(轉音)됐다. 즉, 읍루(挹婁)라는 명칭은 옥루하(玉婁河)라는 명칭의 변화다. 따라서 숙신씨(肅愼氏)의 일명(一名)이 읍루(挹婁)라 함은 그릇된 것이다.
 
숙신씨(肅愼氏)는 고조선, 순(舜), 하후씨(夏后氏) 시대부터 명성을 떨친 국가였다. 읍루(挹婁)의 명칭은 후한서(後漢書)와 삼국지(三國志)에 비로소 보이고 문화가 발달하지 못해 군주의 제도가 없고 부락마다 추장(酋長)이 있었다. 읍루(挹婁)는 숙신씨(肅愼氏)의 영역에 속한 부족이었다. 숙신씨는 국가 제도를 갖추지 못하였다가 읍루 인구가 번식(繁殖)해 각지에 분포되고 숙신씨는 점차 쇠퇴하면서 읍루를 견제치 못하자 숙신씨 영토에 진출했다. 이 같은 유래를 모르고 숙신씨(肅愼氏)의 일명(一名)이 읍루(挹婁)라 함은 큰 오류(誤謬)다. 삼국지의 기록도 왕은 없고 읍락마다 대인(大人)이 있다고 기록돼 있다.(三國志 卷30, 魏書, 東夷傳. 挹婁條 參照)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신채호 저·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의 통치체제’, 고조선학회 ‘고조선 연구 제1호 소수(所收)’,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윤내현·박선희·하문식 공저 ‘고조선의 강역을 말한다’,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백원 김백룡 원저·단동 김정일 편저 ‘天符經’, 카터 코벨 지음·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임길채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하’,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삼성(三聖)의 역사’, 우창수 ‘아사달 상·하’, 김부식 ‘삼국사기’,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김세환 ‘고조선역사답사기’ ‘동남아유적지를 찾아서’ ‘노을속의 메아리’,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南帝 ‘命理속의 哲學’, 김진경 ‘만천년 역사의 비밀’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Joseph Eidelberg 著·中川一夫 譯 ‘大和民族は ユダヤ人だった’, 林承國 ‘韓國正史’,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외 다수서책을 참조·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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