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국 흉노족, 사회·문화·호칭 등 고조선과 같았다

입력 2015-07-04 23:26: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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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 - 일본 속 한민족(韓民族) 숨결
 
중국 역사서는 이름만 다를 뿐 내용은 똑 같은 것들이 많다. 사마천(司馬遷)의 사기(史記)와 후한서(後漢書) 두 책의 내용이 똑 같아 글자하나 안 틀린 부분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된다. 또한 일본의 고대사라는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일본이 계획을 세워서 꾸며낸 역사서로 사서(史書)라기보다는 권력사다. 일본서기(日本書紀)는 속편(續編)이 있고 속편의 속편(續編)이 따라 나온다. 이 속편(續編)에서 한국고대사연구에 중요한 단서를 포착하게 된다.
 
최태영 선생은 일본이 수십만권의 책을 모아 불사르고 또 책들을 일본으로 가져가 우리 역사를 말살하려 했으나 그들이 미쳐 지울 수 없는 일본고대역사가 한국역사를 엮은 것임을 잘 밝혀내고 있음을 보았다. 그리고 일본인의 지도층이 다름 아닌 한국계라는 것도 밝히고 있다. 그것은 우리나라에 종묘(宗廟), 제례(祭禮)가 있고 제례법(祭禮法)이 있음과 같이 일본의 제례법(祭禮法)을 보면 일본이 우리나라 유민(流民)인 것을 확인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신위(神位)가 한국에서 건너간 유민이라는 것이다. 이는 일본 국사대계 13편에 잘 나타나 있다. 일본은 궁궐 36신위(神位) 정 가운데에 신라 가야계통의 원신(園神) 1좌와, 백제조상신인 한신(韓神) 2좌를 모시고 제사를 드린다. 필자도 일본유학 시 일본궁궐에서 제사지내는 모습을 직접 보고 제문을 고하는 말도 우리말인 것도 확인 할 수 있었다. 이는 일본 궁궐에 신라·가야·백제에서 간 조상들이 있다는 움직일 수 없는 증거다.
 
발해와 일본은 빈번한 교역을 했는데, 발해사신이 일본 후쿠라 항에 닿으면 제일 먼저 그곳 사당(祠堂)에서 갖고 온 제물을 놓고 도착을 고한 뒤 조정인 미카도로 달려가는 것도 엔기시키(延喜式)에서 확인 할 수 있다. 이는 고구려 유민인 발해와 백제 유민인 일본이 연합해 신라를 쳐서 고구려·백제를 회복 하려다 단념한 정치적 협상에서 나왔다. 다시 말해 발해 사신이 갖고 온 제물을 놓고 도착을 고한 후 정무를 본 것을 이 엔기시키(延喜式)에서 말해주고 있다.
 
일본이 조상신을 모시고 있는 미에겡(삼중현三重縣 미에시三重市)에 있는 이세궁(伊勢宮)의 신위(神位)도 일본 궁궐에서 하는 것과 똑 같은 의식으로 제사지내는 것을 알 수 있다. 이에 최태영 선생은 조선총독부 ‘조선사편수회’가 낸 35권의 한국사는 왜곡된 역사이기 때문에 다 버렸다고 했다. 이번 칼럼도 고조선 후국들의 통치에 대해 중국과 일본이 왜곡한 역사가 아닌 진실된 사실을 다루고자 한다.
 
기마족인 흉노(匈奴)도 고조선 후국(侯國)…흉노 지도자 단씨(檀氏) 성 ‘단자(檀柘)’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秦始皇)이 만리장성을 쌓은 것은 바로 기마족인 흉노를 지칭하며 쌓았다고 사가(史家)들이 말할 정도로 흉노는 기마민족답게 그 기동성을 발휘해 중국과 북방유라시아뿐만 아니라 중동·이집트 등 농경지대에서 정복 왕조를 세웠다. 인류의 역사를 살펴보면 농경은 대하(大河)의 유역에서 발달하고 많은 인구를 키웠다. 또한 농경이나 목축은 태지(台地=steppe-나무가 없는 대초원大草原)에서 발달했다. 구주(歐州), 동부아시아, 서남부 등에서는 대하유역이 아닌데서 지배자가 출현해서 국가가 생겨났다. 농경과 함께 일어난 목축을 토대로 한 기마민족(騎馬民族)은 5대문명과 국가형성에 큰 역할을 했다. 이 기마민족은 유목민과 반 목축(半 牧畜), 반 수렵민(半狩獵民) 중에서 승마를 한 채로 궁시(弓矢)를 쓰는 기마전술을 몸에 익혀 기동력을 높인 민족이다. 이들은 교통로와 교역로(交易路) 즉 산림과 초원 및 비단길, 오아시스의 길 등을 넓혀 문명역사에 큰 업적을 쌓았다.
 
초원의 기마민족 흉노족 역시 문명과 제 국가에 영향을 크게 미쳤다. 당시 문명은 동시에 국가의 형성이었다. 중국과 일본은 역사왜곡을 통하여 고대 우리 한민족과 융합한 흉노족을 폄하하지만 이들은 인류문명에 거대한 업적을 남긴 민족이다. 이 흉노족 지배자들은 우리와 같이 태양을 숭배하고 동시에 달도 숭상했다. 원 흉노족장은 매일아침 해가 뜰 때는 해를 향해 절을 하고 저녁에는 달에게 절을 하는 신앙관습이 있었다.
 
위략(魏略)은 흉노의 대인(大人)이 ‘단자(檀柘)’였다고 기록했다. 흉노의 거수(渠帥, 우두머리)가 단씨(檀氏)였다는 것은 원 흉노의 지배자가 단군조선에서 파견된 고조선 왕족이었거나 왕족으로 봉(封)함을 받은 것임을 시사한다.
 
귀족의 존재, 제천행사, 관직명, 주요 호칭 등 고조선과 동일한 홍노의 문화와 언어
 
한서(漢書)는 흉노의 대인(大人)을 두만(頭曼)이라고 했다. 이 두만(頭曼)은 병사 1만 명을 지휘하는 고조선의 군사령관을 가리키는 것이다. 따라서 원 흉노는 고조선의 후국(侯國)으로서 고조선이 파견한 고조선 왕족의 사령관을 통치자로 한 고조선 후국의 하나로 해석되는 것이다. 이들은 서기전 3세기에 흉노족 두만(頭曼)의 아들 모돈(冒頓, 목특, 목돌)이 부족들이 연합해 흉노제국을 건설하고 제위에 올라 ‘탕리고도 선우(撑犁孤塗檀氏)’라는 단우(單于=Tengrikodo Danwu) 호칭을 사용했다고 한다.(漢書, 卷94, 匈奴傳, 參照) 신용하 교수는 흉노왕의 호칭 ‘단우’가 중국식으로 ‘선우’이나 흉노식으로 ‘단우’로 읽는다고 했다. 아울러 두만(頭曼)의 성씨가 단(檀)과 같아 단(單)은 곧 단(檀)이다. 즉, 흉노족 두만(頭曼)이 단씨(檀氏)임에 주목 할 점이라 했다.
 
우(于)는 ‘왕’을 가리키는 고조선식 용어이고 ‘단(檀)’은 ‘밝달족(고조선족)’의 후예임과 ‘천(天)’의 뜻을 담고 있다고 보고 있다. ‘탱그리(撑犁)’는 ‘천(天)’, 고도(孤塗)는 ‘아들(子)’의 뜻으로 천자(天子)를 의미한다. 이 명칭들은 고조선 조어(祖語)와 일치하고, 현대 몽골어와 일어에도 흔적이 남아 있다.(신용하 논문48면).
 
신채호 선생은 흉노가 고조선 문화와 동일한 문화를 가진데 대해 성(姓)의 귀족이 있음이 신라와 같고, 좌우 현왕(賢王)이 있음이 고(구)려·백제와 같으며, 5월의 제천(祭天)이 마한(馬韓)과 같고 무(茂)·기일(己日)을 숭상함이 고려와 같다고 했다. 또한 왕공(王公)을 ‘한(汗)’이라 함이 삼국의 ‘간(干)’과 같으며, 관명(官名)의 끝 자에 ‘치(鞮)’라는 음이 있음이 고조선과 같고, 왕후를 알씨(閼氏)라고 하는 것이 ‘아씨’의 번역일 것이며, 사람과 가축을 회계하는 곳을 ‘담림(儋林)’ ‘도림(屠林)’이라 하는 것이 ‘살림’의 뜻이고, ‘휴도(休屠)’와 그 내용이 삼한 소도(蘇塗)와 같다고 했다.(申采浩 朝鮮上古史 改訂版 申采浩全集 上卷59面 참조)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 중국에서 맹위 떨친 한민족 선조국 흉노, 예맥, 선비족
 
흉노족은 오아시스의 농경민, 초원의 유목민, 산림의 수렵민(狩獵民) 등과 공존하고 교류했다. 당시 중원(中原)은 우리 한민족이 장악하고 서기전 15세기~12세기 경 각지에서 도시국가(都市國家)가 나오고 그 중 한민족이 세운 은(殷)시대에 우수한 청동도(靑銅刀) 등이 서아시아 북방유라시아의 기마민족에 의해 전해졌다고 하는데, 이들 또한 우리와 무관치 않다. 은왕(殷王)의 묘와 궁전이 발굴돼 은허(殷墟)에서 나오는 유물들 또한 우리와 무관치 않음을 말해준다.
 
흉노족은 매년 5월과 가을 추수 후 부족들이 모여 큰 축제를 열었다. 아울러 부족의 일들을 의논하는 축제행사도 한, 예, 맥의 관습과 같은 것은 무엇을 말하는 것인가. 이들은 고조선시대부터 전해온 소도(蘇塗) 문화가 흉노에도 전해 들어간 것을 말해준다. 이는 신채호 선생도 말하고 있다.(申采浩 朝鮮上古史> 改訂版 申采浩全集 上卷83面 참조). 또한 흉노에서는 왕의 후비를 알씨(閼氏(알씨, 아씨)라고 부르는 특권 씨족이었는데 신라에도 ‘김알씨(金閼氏)가 특권씨족으로 등장해 왕족이 된 것과 연관된다. 그런 점에서 신라가 대륙에서 한반도로 오기 전 흉노와의 교류도 연구과제다. 흉노, 예맥, 선비족은 함께 기마민족으로 메소포타미아, 이집트, 인도, 중국에서 맹위를 떨친 민족이다.
 
서기전 11세기경 은(殷)이 서방에서 일어난 주(周)에게 넘어지고 주왕(周王)은 그 일족과 공신(功臣)을 각지에 파견하여 제후(諸侯)로 해 봉건제도를 확립했으나 서기전 8세기 춘추전국시대 기마민족에 의해 주왕(周王)의 힘이 약해지자 제후들이 각지에서 나라를 세웠다.
 
서쪽 이동 훈(Hun)족 오늘의 ‘헝가리’…고조선 후국 돌궐도 한민족(韓民族)과 융합민족
 
나라를 세운 제후(諸侯)들은 기마민족의 기마전술과 철제무기를 적극적으로 도입했다. 이 때 중국은 철제 농구(農具)가 보급되고 농업과 상업이 융성(隆盛)하게 된다. 거의 600년간 계속된 춘추전국시대(春秋戰國時代)를 진(秦)이 제국(諸國)으로 통일하지만 진(秦)이 41년 만에 망하고 한고조 유방(劉邦)이 한(漢)나라를 세웠으나 한고조도 흉노에게는 칭신(稱臣)까지 하며 외교했을 정도로 흉노는 강성했다. 한(漢)나라가 고조선을 넘어뜨렸다고 하는 것은 고대 중국과 일본이 당나라시대부터 짜고 왜곡한 역사로 허구일 뿐이다.
 
역사는 서에 로마제국, 동에 한제국(漢帝國=후한後漢)이라고 왜곡하고 있지만 당시 기마민족인 흉노는 중앙아시아에 큰 세력을 펼쳐 동서를 잇는 교통로가 번창했다고 진실된 역사가들은 증거한다. 흉노는 그 후 서쪽으로 이동해 훈(Hun)족이란 호칭으로 유럽의 대 민족이동을 일으키는 활동을 했는데, 지금의 ‘항가리’가 이 훈(Hun)족의 자손이다.
 
지금 ‘터키인’ 철륵(鐵勒)도 원 돌궐족으로 단군의 후국(侯國)이었다. 돌궐족의 통치자 역시 두만(頭曼=거수渠帥, 군사령관)인 ‘아사나(阿史那)’씨로서 고조선에서 파견된 거수(渠帥)였다. 이 돌궐족도 우리 한민족과 융합한 민족으로 오늘날 터키가 우리를 만나면 ‘형제’라는 것이 우연이 아니다. 그들 역사가 1만년이라는 것도 사실이다. 우리 한민족의 역사는 1만1천년에 이른다. 식민사관에 절여진 역사를 배운 이들은 이를 시인하려 하지 않으나 역사의 진실은 숨길 수 없다.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신채호 저·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의 통치체제’, 고조선학회 ‘고조선 연구 제1호 소수(所收)’,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윤내현· 박선희·하문식 공저 ‘고조선의 강역을 말한다’,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백원 김백룡 원저·단동 김정일 편저 ‘天符經’, 카터 코벨 지음·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임길채 ‘일본 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하’,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김부식 ‘삼국사기’,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김세환 ‘고조선역사답사기’ ‘동남아유적지를 찾아서’ ‘노을속의 메아리’,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南帝 ‘命理속의 哲學’, 김진경 ‘만천년 역사의 비밀’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Joseph Eidelberg 著·中川一夫 譯,‘大和民族はユダヤ人だった’,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永原慶二 監修 ‘絶對 中學社會歷史’,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외 다수 서책을 참조·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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