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고대 유라시아 대륙에서는 민족의 대이동이 일어났다. 기마민족 흉노(匈奴-훈족)의 서방 이동을 시작으로 돌궐, 오손, 유연, 선비 등 기마민족이 중원을 정복하면서 인도, 로마제국에까지 진출해 로마의 분열을 촉발시켰다. 그 결과 476년에는 로마제국이 멸망하는 고대세계의 해체가 진행됐다. 이어 기마민족에 의해 많은 독립국가가 생겨나고 중앙아시아의 제 민족이 대륙의 동서에서 일어나 활약했다. 이번 칼럼은 징기wm칸을 낳은 부족인 원 몽골 ‘실위’(室韋)가 고조선 제국의 제후국으로 한민족의 한 후예라는 사실에 대한 역사적 실증을 해보고자 한다.
테무친(징기스칸)의 나라…고조선 언어·문화 분유(分有)한 후국(侯國) ‘실위’(室韋, 원 몽골)
실위(室韋, 원 몽골) 또한 고조선의 북방 후국(侯國)족으로 부여와 이웃해 오랫동안 생활해오는 동안 고조선의 언어와 문화를 분유(分有)하게 된 고조선 후국(侯國) 민족이었다. 오늘의 몽골족은 13세기 초 오논강 상류의 몽골부(部)로부터 테무친(Temujin)이 나타나 제 부족(諸部族)을 통일하고 통일국가를 수립했다. 그가 바로 칭기즈칸(1167~1227)이다. 그 이전 까지는 흥안령 동쪽 눈(嫩)강 유역에서 부여의 이웃으로 거주하다가 서방으로 이주해 몽골고원 각 곳에 분산해 살던 부족들이었다. 이 부족들은 모두 각각 추장들을 갖고 유목생활을 하고 있었는데, 이 중에서 몇 개 부족이 고조선시대에 고조선 후국(侯國) 부족들이 되어 문화와 언어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칭기즈칸(汗)을 낳은 부족도 그 중 하나다.
칭기즈칸(汗)이란 원(元) 태조(太祖-건국자)의 몽골이름이다. 어렸을 때의 이름은 테무친(Temujin,-鐵木眞)이라고 했다. 그는 한 유목민 족장에 불과했으나 광활한 초원지대에서 기마(騎馬)를 다루는 기마민족 특유의 기술과 전술 및 정치적으로 매우 뛰어난 재능을 갖고 있었다. 1206년 구리르타이라고 하는 족장회의에서 칸(汗)으로 추대되어 당시 유라시아 각지에서 활동하고 있던 이슬람 상인과 손을 잡고 대제국(大帝國) 몽골을 세웠다.
몽골 조상 시조·기원의 토템신화 ‘구전역사(口傳歷史)…‘밝달족’(고조선족) 유래 드러나
기원 4세기부터 6세기에 걸쳐 유라시아대륙은 민족 대이동이 일어나 중앙아시아의 제민족(諸民族)은 대륙의 동서로 활약한 시대였다. 10세기 이후 유라시아대륙의 내부 몽골고원(高原)은 기마민족인 몽골계(系) 부족이 유목(遊牧)과 수렵생활(狩獵生活)을 하고 있었다. 이 몽골 기마민족이 ‘몽골 비사(秘史)’에는 칭기즈칸(汗)의 가계(家系)를 밝히면서 자랑스럽게 시작되고 있는데, 그 내용에서 그들의 시조와 기원을 신화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즉, 몽골의 조상은 푸른 이리(부르테치노)와 흰 암사슴(코아이 마랄) 내외가 큰 물(탱기스)을 건너 몽골 땅으로 이주해 와서 오논강의 발원인 불칸(Burqan)산에 터를 잡고, 하늘이 점지(點指)하여 태어난 바타치칸이라는 아들을 낳으면서 시작됐다는 것이다.
이 전설은 이리(푸른 빛 이리)를 토템(Totem)으로 부족의 남자와 사슴(흰빛 사슴)을 토템으로 하는 부족의 여자가 혼인 한 후, 큰 강을 건너 이동해 오논강의 발원인 불칸산 부근에 터를 잡은 부족이 몽골족의 기원임을 알리는 ‘구전역사(口傳歷史)’다. 그런데 여기서 사슴은 부여족의 토템이었다. 사슴 앞에 특히 ‘흰 빛’ 사슴을 강조한 것은 고조선계열 부여족을 특징한 것으로 확실시 된다.
또 원 몽골족이 시작한 불칸산은 밝산(밝은 산)이며, 한자(漢字)로 표시하면 백산(白山)을 가리킨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단군조선의 ‘단(檀)’은 ‘밝달족(고조선족)’이라는 의미인데, 이를 감안하면 몽골족이 고조선의 영향 아래에 있었던 후예라는 것을 어렵지 않게 유추할 수 있다. 또한 한민족과 인류문화의 시원인 적산(赤山), 홍산(紅山), 적봉(赤峰)은 모두 ‘북달’의 한자 표기이며 ‘북달’은 ‘밝달’과 호환되는 같은 것이다. ‘밝달’은 ‘백산(白山)’으로 한자 표기됐다.
실위국(室韋國) 본래 위치는 고조선 북변영토 북부여 지역 ‘언어도 고조선 한갈래’
원 몽골족은 푸른 빛 이리를 토템으로 한 부족의 하나와 고조선계 부여족의 하나가 혼인동맹에 의해 결합해 오논강의 발원인 불칸산 기슭에 정착함으로서 기원했다고 볼 수 있다. 실위(室韋, 원 몽골)에 대한 가장 오래된 문헌인 위서(魏書), 실위전(室韋傳)의 기록은 아래와 같이 이를 기록하고 있다.
“실위국(室韋國)은 물길(勿吉)의 서쪽으로 1천리, 위(魏)의 수도 낙양(洛陽)으로부터 6천리 떨어진 곳에 있다. 이 나라에 이르는 길은 화룡(和龍)인 지금의 요녕성(遼寧省) 조양(朝陽)에서 출발해 북쪽으로 10일간을 가면 살수(啜水), 시라무렌 강, 작락(作樂水)에 다다르게 된다. 다시 북쪽으로 3일을 가면 개수(蓋水)가 있다. 다시 북쪽으로 3일을 가면 독료산(犢了山)이 있다. 이산은 높고 커서 주위가 300백리나 된다. 또 북쪽으로 3일을 가면 인수(刃水)에 이른다. 여기서도 북쪽으로 5일을 가면 실위국(室韋國)에 도달한다”
“이 나라에는 대수(大水)가 있으며 북쪽으로 흘러가는데 그 넓이는 4리가 넘는다. 그 이름을 나수(㮈水, 捺水, 那河), 현재의 눈강(嫩江)라고 한다. 국토는 저지대여서 습(濕)하며 언어는 고마해(庫莫奚), 거란(契丹), 두막루(豆莫婁) 등의 나라들과 동일하다. 조, 보리 제(穄-피)가 많았으나 사람들은 단지 멧돼지나 물고기를 먹고 소, 말을 기른다. 일반적으로 양은 치지 않는다. 성(城)에서 살고 겨울에는 수초를 딴다. 또한 초피(貂皮)가 많다. 남자는 색발(索髮)하고 무기는 각궁(角弓)을 사용하는데, 그 화살은 매우 길다. 부녀는 머리를 묶어서 둘로 나누어 상투를 만든다. 이 나라에는 도적이 거의 없는데, 만일 도둑질을 하면 그 3배를 징벌로 징수한다. 그리고 이들의 행형(行刑)에 관한 것을 보면 사람을 죽인 자는 말(馬) 300필로 서 배상하지 않으면 안 된다. 남녀모두 흰 가죽의 윗옷과 바지를 입는다” 이 고문헌(古文獻)은 실위국(室韋國)에 대해 많은 것을 알려 준다.(魏書, 卷100, 列傳, 室韋傳 참조),
그러나 실위국(室韋國) 원래의 위치는 오늘날의 몽골고원이 아니라 그 보다도 훨씬 동쪽 대흥안령을 넘어서 대흥안령 기슭의 눈강(嫩江-송화강의 북쪽 기지)유역 저지대였다. 이곳은 고조선의 북변영토였으며, 부여가 건국했을 때에는 북부여의 영토였음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실위(室韋)의 언어가 고마해(庫莫奚), 거란(契丹), 두막루(豆莫婁)와 동일하다고 하는 것은 몽골어(室韋語)가 ‘고마해’ ‘해’족의 언어와 같고 고조선어의 한 갈래였음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살인한 경우 무려 말 300필로 배상을 하게 했다는 사실은 말과 기마술, 기마문화가 실위(몽골)족의 매우 중요한 문화 산물임을 시사해준다.
북사(北史) 실위전(傳)에서는 서기 549년경(東魏 武定 말년)의 실위(室韋)가 남실위(南室韋, 북실위(北室韋), 발실위(鉢韋國), 심말저실위(深末怚室韋), 대실위(大室韋) 등 5부로 나뉘어져 군장없이 돌궐이 파견한 관인(官人)에 의해 지배당하고 있는 상황이 기록돼 있다. 이 때 실위(室韋)의 위치는 대흥안령 서쪽과 남쪽에 분산되어 살고 있었고 수서실위전(隨書 室韋傳)도 거의 같은 상태를 설명하고 있다. 구당서(舊唐書)는 “실위(室韋)는 거란 별종이다. 요월하(猺越河)의 북쪽에 산다. 그 나라는 장안(長安)의 동쪽 7000리에 있고, 동쪽으로는 흑수말갈(黑水靺鞨)에 이르고 서쪽으로는 돌궐에 이르며, 남쪽으로는 거란에 접하고 북쪽으로는 바다에 이른다. 그 나라는 군장이 없고 대수령 17인 있는데, 모두 막하불(莫賀弗)이라고 부르며 세습하여 돌궐에 부속되어 있다”고 기록돼 있다.(신용하 논문p56~7 참조 인용).
몽골고원에 이동해 들어간 실위족 통합명칭 몽와부(蒙瓦部), 몽올실위(蒙兀室韋)
이 실위 17부 중에는 당나라와 교류가 있는 것도 9부가 되는데 이른바 영서실위(嶺西室韋), 산북실위(山北室韋), 황두실위(黃頭室韋), 대여자실위(大如者室韋), 파와실위(婆萵室韋), 눌북실위(訥北室韋), 낙타실위(駱駝室韋) 등을 들었다. 실위족들이 동쪽으로는 흑룡강 이남 송화강 지류인 눈강(嫩江) 유역에서 살뿐 아니라 대흥안령 서쪽에도 거주해 서쪽으로는 돌궐에 이르고 남쪽으로는 거란에 접하게 되었음을 기록하고 있다. 몽골고원에 실위족이 이동해 들어서기 시작한 사실이 영서실위(嶺西室韋) 낙타실위 등의 명칭에도 반영되어 기록되어 있다.
신당서(新唐書) 실위전에 이르면, 실위는 모두 20여부에 달한다고 하면서 영서부((嶺西部), 산북부(山北部), 황두부(黃頭部), 대여자부(大如者部), 소여자부(小如者部), 파와(婆萵部), 눌북(訥北部), 낙단부(駱丹部), 오소고부(烏素固部), 이새몰부(移塞沒部), 새갈지부(塞曷支部), 화해부(和解部), 오나호부(烏羅護部), 나례부(那禮部), 납지지부(納地支部), 대실위(大室韋), 몽와부(蒙瓦部), 낙탄부(落坦部), 동실위(東室韋) 등을 들었다. 여기서 처음으로 후에 실위족 전체의 통합명칭으로 된 ‘몽골’ 부족의 이름이 몽와부(蒙瓦部), 몽올실위(蒙兀室韋)의 명칭으로 나타나고 있다.
또한 신당서(新唐書)에서는 “그 나라에는 군장이 없고 오직 대수장(大首長)은 모두 막하돌(莫賀咄, 마하돌, 모돌)이라고 부르며 부족을 관할해 돌궐에 부예(附隸)한다. 소부(小部)는 1천호, 대부(大部)는 수천호인데 산골짜기에 분산해 살며 물과 풀을 쫓아서 생활한다. 징세는 없다. 수렵은 다수가 모여서 행하고 끝나면 모두 분산하여 산다. 상호간에 신속(臣屬)하는 일이 없다”고 했다. 따라서 “부족사람들은 기마민족 답게 매우 용맹하고 전투를 즐기지만 결국 강국이 되지는 못하여....토지는 금과 철이 많이 나는데 많이 고구려에 자재를 바친다. 무기는 각궁(角弓), 고시(楛矢)가 있으며 사람들은 궁사(弓射)를 잘 한다”고 기록되어 있다.(新唐書, 卷219, 列傳, 北狄, 室韋傳 參照)
한민족 뿌리 실위국(室韋國) 몽골, 13세기 후 역사상 최대 동서양 아우른 제국건설
원 몽골 실위는 고조선 후국족으로서 부여와 깊은 관계에 있었다. 이 실위부족들은 흉노, 유연, 돌궐, 고구려의 지배를 받기도 하다가 13세기에 와서 20여개 분산된 몽골부족들이 테무진(칭기즈칸)에 의해 대 통일을 했다. 그 후 기마민족 몽골족은 사상 최대의 제국(帝國)을 세우고 세계 최강국으로 부상한다.
고조선 해체 후 그리고 부여멸망 후 부여족의 일부는 몽올실위(蒙兀室韋) 일부를 이끌고 시베리아지방에 들어가 정착하기도 하였다. 이들을 ‘부리야트(Bur yat)’족이라고 말하고 있다. ‘부리야트(Buryat)’는 ‘불+이야트’의 합성어로서 ‘불’은 부여족의 명칭이고 ‘야트’는 몽골어 어미이다. 부리야트(Buryat)의 개국설화는 북부여 개국설화와 거의 동일하다고 한다.
우리 고대역사는 지금까지 연구가 미흡 미진하고 등한시되어 왔으나 국내외 학자들의 연구진전으로 고조선의 위상을 짐작하게 하는 후국들의 실체를 그나마 알게 되었다. 고조선은 동북아시아에서 그 어느 민족들보다도 강대한 최초의 제국(帝國)을 세우고 많은 후국(侯國)들을 거느리고 그들을 직·간접으로 통치했다. 고조선인들이 진출한 곳에서는 고조선문화를 공유하고 분유(分有)하여 고조선 문명권을 형성하며 각 민족문화 등의 상위에 있는 공통의 상징적 문화유형의 총화(總和)를 이뤄갔음을 볼 수 있다. (신용하 ‘고조선의 통치체제’와 고조선학회, ‘고조선 연구 제1호 소수(所收)’ P53~58 참조 인용)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신채호 저·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의 통치체제’, 고조선학회 ‘고조선 연구 제1호 소수(所收)’,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윤내현·박선희·하문식 공저 ‘고조선의 강역을 말한다’,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이강민 ‘대한국고대사’, 백원 김백룡 원저·단동 김정일 편저 ‘天符經’, 카터 코벨 지음·김유경 편역 ‘부여기마민족과 왜(倭)’ ‘일본에 남은 한국미술’, 임길채 ‘일본고대국가의 형성과 칠지도의 비밀 상·하’,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김부식 ‘삼국사기’,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김세환 ‘고조선역사답사기’ ‘동남아유적지를 찾아서’ ‘노을속의 메아리’,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南帝 ‘命理속의 哲學’, 김진경 ‘만천년 역사의 비밀’ ‘태백과 압록’. 日本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Joseph Eidelberg 著·中川一夫 譯, ‘大和民族はユダヤ人だった’, 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世界史史料集’, 永原慶二 監修 ‘絶對 中學社會歷史’,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외 다수서책을 참조·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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