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륙 중원의 주인 한민족에 대항해 온 화하족(華夏族)

입력 2015-07-25 23:49: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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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을형 전 숭실대 법대 교수
 ▲ NGO 환경교육연합 고문
들어가며 - 대륙을 지배한 한민족(韓民族),
 
우리 한민족(韓民族)은 고조선 이전 환국과 배달국 시대부터 중국 중원에 먼저 선주(先住)해 국가를 건설하고 고대문명을 일으킨 선진민족이다. 우리 민족은 살기 좋은 동부의 평야지대를 거점으로 했다. 이로 인해 화하족(華夏族)은 인구가 증가하면서 배달국 시대 우수한 한민족의 인물을 수장(首長)으로 받들고 모셨다. 이를 기반으로 나라를 세우고 우리 한민족과 대결한 역사를 갖고 있다. 배달국 14대 자오지천황(慈烏支天黃)인 치우천황(蚩尤天黃)과 화하족(華夏族)의 수장(首長)을 한민족임에도 불구하고 수락한 헌원(軒轅) 간에 73회의 싸움이 이를 반증해 준다.
 
이 같은 싸움의 원인은 척박한 산악지대보다 살기 좋은 평야지대로의 이동을 하고자 했던 화하족(華夏族)의 염원이 있었기 때문이다. 한민족은 고대부터 산동반도를 거점으로 대륙을 지배했다. 지금 중국은 이런 우리 역사를 뒤집고 엎으며 상식을 초월하는 역사변조를 하고 있다. 이번 칼럼은 대한민국 동이계(東夷系)와 중국 화하계(華夏系)의 상쟁관계(相爭關係)의 고대역사를 살펴보고자 한다.
 
동이계(東夷系) 우리민족 조선(祖先)과 중국 화하계(華夏系) ‘허구의 역사 간직’
 
제왕운기(帝王韻紀), 규원사화(揆園史話), 단군세기(檀君世紀), 번한세기(番韓世紀), 신시본기(神市本紀) 등에 따르면 고조선을 주류로 여러 제후국들이 회합과 동맹, 연합체를 이루었다. 바로 그 무대가 중국 대륙이지 한반도에 국한 된 것이 아니었다. 중국과 일본이 고조선 제후국들의 수준을 낮추어 영역(領域)을 반도 내로 줄이고 그 건국연대를 절단한 것은 중국과의 사대(事大) 관계와 일본제국주의 식민사관의 조작이 낳은 결과다.
 
고조선이 활약한 지역과 관련한 대동강 유역설은 ‘삼국유사’에서만 볼 수 있는데, 그 ‘삼국유사’의 기록을 자세히 읽어보면 지금의 평양지역이 마한(馬韓)에 속했다고 하고 있다. 하지만 삼국유사의 저자 일연(一然)도 고조선의 중심이 대동강 유역으로 보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최태영 선생도 고대사 연구를 통해서 대륙이라고 주장하고 있고 신채호, 정인보, 윤내현, 신용하 교수 외 역사를 제대로 연구한학자들은 고조선의 활동무대가 대동강이 아닌 대륙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고조선이 활약한 지역의 중심도 지금 중국의 요녕(遼寧)이다. 그 수도 평양(平壤)이란 것은 도읍, 즉 서울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 평양(平壤)도 현재 중국 대륙 안에 있었으며 반도에 있지 않았다. 한반도 내의 대동강유역으로 평양이 옮겨지고, 그 곳이 중심지역이 된 것은 고조선시대가 아닌 삼국정립시대(三國鼎立時代)의 고구려, 그것도 고구려후기에 이르러서서야 된 일이다. 이것은 한국과 중국의 역사서가 이를 뒷받침해주고 있다. 지금 중국은 상고사가 없는 나라이기에 동북공정을 하며 우리 역사를 자신들의 중국역사로 옮겨놓으려 하고 있다.
 
이 과정에서 우리 조상을 자신들의 조상이라고 하고 있으니 도무지 상식 이하다. 자기들 조상도 아닌 태호(太昊), 소호(小昊), 전욱(顚頊)도 자기조상이라고 하는데 중국의 저명한 역사학자 부사년(傅斯年) 조차도 그의 논문 이하동서설(夷夏東西說,- 慶祝채(蔡元培先生 六十五歲 論文集,1935)에서 태호(太昊), 소호(小昊), 전욱(顚頊) 이들은 동이(東夷)족이라고 하고 있다.
 
분명한 것은 이들 태호(太昊), 소호(小昊), 전욱(顚頊)은 우리 한민족의 조상들이고 화하족(華夏族) 조상이 아니다. 이들은 중국학자도 최근 발굴된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의 창조자라고 해석되고 있다. 또한 양동신(楊東晨)은 ‘대문구문화’를 세 시기로 구분하고 있다. 초기 대문구문화는 태호족(太昊族), 중기대문구문화는 소호족(小昊族), 후기 대문구문화는 전욱족(顚頊族)의 문화라고 보았다. 당란(唐蘭)에 따르면 대문구문화를 소호족(小昊族)이 창조한 문화다. 태호(太昊)의 도읍은 진(陳, 현재의 하남성·河南省, 희양·淮陽)이고, 소호(小昊)의 도읍은 산동성 곡부(曲阜)로서 태호와 소호(小昊)가 모두 동이족이지만 소호가 대문구문화를 만들었다고 보고 있다. (唐蘭, 從大汶口文化的(陶器文字看我國最早文化的年代, 大汶口文化討論文集 = 金仁喜 ‘上古史에 있어서 韓中의 文化交流-中國大汶口文化와의 관계를 중심으로’, ‘동아시아 고대학 제2집, 2000. 신용하 앞의 논문 59면)
 
중국 사학자 부사년(傅斯年), “고대사는 동이계 은상(殷商)과 화하계 하주(夏周) 대결사”
 
이처럼 ‘대문구문화(大汶口文化)’가 우리 한민족에 의해 만들어 진 것이다. 중국학자들도 ‘대문구문화’가 동이족이 창조했다고 본다. ‘태호(太昊), 소호(小昊), 전욱(顚頊)’은 번역하면 ‘큰 밝족’ ‘작은 밝족’ ‘고조선’족이다. ‘호(昊- 여름하늘 호)’의 본래의 고문자는 호(皞-휠 호, 밝을 호)이다. 좌전(左傳)에서는 태호(太昊)를 태호(太皞)라고 했다. 호(皞)는 ‘백자(白字)’를 두 개나 합성하여 본래 ‘백족(白族)’ ‘밝은 족’임을 강조하여 밝힌 것이다. ‘태백족(太白族)’ ‘소백족(小白族)’은 모두 ‘밝달족’이고 고조선족이다. 다시 말해 ‘대문구문화’를 창조한 동이(東夷)는 바로 산동반도지방에 이주(移住)한 이주민 ‘밝달족’ ‘조선족’인 것이다.
 
‘대문구문화유적’에서 나온 ‘아사달’모양이 새겨진 11점의 팽이형토기들은 대문구문화의 창조자가 이 지방에 이주해 온 고조선 사람들임이라는 것을 명백하게 증명하는 것이다. 중국은 문헌에서 산동반도지방에 이주한 이주민 ‘밝달족’ ‘조선족’에 속한 민족들이 세운 소국들을 모두 동이(東夷)라는 이름으로 불렀는데, 동이는 고조선문명에 속한 고조선 원민(原民)들을 가리키는 말이다고 했다. (신용하-고조선 아사달 문양이 새겨진 산동대문구문화(山東大汶口文化) 유물, 한국학보-제102집 2001, 신용하-한국원민족형성과 역사적 전통, 나남출판 2005, P63~87 참조)
 
중국의 고문헌들은 하(夏)왕조를 중국계로, 은(殷)과 상(商)왕조를 동이계와 연합한 왕조로, 주(周)왕조를 중국계로 각각 구분하고 있다. 그러나 동이계(東夷系)는 산동(山東), 산서(山西), 하북성(河北省), 발해안 하남성(河南省), 동부 강소성(江蘇省), 북부 안휘성(安徽省), 동북부 각 지방에 소 주민이 많았음을 기록하고 있다. 이들 두 계열(系列)은 주(周)무왕이 은(殷)을 멸하고 왕조를 세운 서기전 1122년 이전까지는 산동, 산서, 하북(河北) 지방에 먼저 선주(先住)한 고조선 계열 주민들과 황하 중상류에서 하류로 점차 내려온 중국계 화하족(華夏族) 사이의 관계를 보여주고 있다. 두 계열의 민족은 오랫동안 평화교류관 계가 형성돼 있었으나 주(周)왕조가 수립된 이후에는 갈등과 충돌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기 시작했다.
 
중국의 사학자 부사년(傅斯年)은 중국 고대사의 구성이 동이계 은상(殷商)과 화하계(華夏系) 하주(夏周) 대결의 역사임을 강조하면서 화하계(華夏系) 하(夏)와 주(周)는 서방에서 동으로 이동해 왔고, 동이계(東夷系) 은(殷)과 상(商)은 원래 동방 또는 동북에서 이동 해온 다른 계통임을 지적했다. 그는 이처럼 중국 역사를 서방의 화하계(華夏系) 일통(一統)으로 서술해온 것은 사실과 다르다고 비판했다. 그는 은상(殷商)의 기원(起源)이 동북에서 온 것이며, 동이와 깊이 결합되어 있다고 지적했다.(傅斯年 夷夏東西說 = 千寬宇, 傅斯年의 夷夏東西說, 韓國學報 제14집 = 신용하 논문 P60 참조)
 
동이계 초(楚)의 항우(項羽)와 화하계 한(漢)의 유방(劉邦) 싸움도 승리 기록 의문
 
이 시기의 동이계(東夷系)는 은(殷), 상(商), 회이(淮夷), 한(韓), 위(魏), 조(趙), 제(齊), 초(楚), 연(燕), 진공(陳貢-진말(秦末의 봉기세력) 등이다. 화하계(華夏系)는 하(夏), 귀방(鬼方), 주(周), 진(秦), 한(漢)이다. 이들은 서로 치열한 상쟁관계(相爭關係)에 있었다. 동이계(東夷系)와 화하계(華夏系)가 서로 밀고 밀리는 상황으로 상고시대는 동이족이 지배해 왔고, 고조선후기에 와서는 서로 상쟁관계(相爭關係)로 발전해 동이가 하후씨(夏后氏)를 멸하나 하(夏)도 수차 동이를 이겼다. 다만 동이의 영역을 모두 차지하지는 못했다. 은(殷), 상(商)시대에는 동이가 이기고 회이(淮夷)는 두 차례나 주(周)를 위기에 몰아넣었으나 마침내는 실패했다.
 
특히 주(周)왕조를 세운 무왕(武王)이 죽고 어린 성왕(成王)이 대를 이은 후에는 고조선계열 소국들이 반란을 일으키고 또 주(周)왕조 계열들도 제후들이 독립을 더욱 추구하여 갈등은 격화되었다. 이 갈등이 600년 동안의 춘추전국시대로 직결되어 춘추전국시대를 맞이하게 된 것이다. 이 시대를 마감케 한 것은 진시황(秦始皇)의 전국통일이었다. 그러나 진(秦)은 중국을 통일했으나 폭정으로 진공(陳貢) 등 동이계가 제기하여 진(秦)을 멸했다. 이후 동이계 초(楚)의 항우(項羽)와 화하계의 한(漢)의 유방(劉邦)의 싸움에서 유방이 이기는 상쟁관계가 계속된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고서들은 휘치필법으로 화하계열(華夏系列)이 승리한 경우를 중심으로 과장해서 기록해 믿을 수 없는 사서가 되고 있다.
 
이 갈등의 시기에 산동과 그 지방주변에 있었던 고조선계열 소국들로는 산동지방에 엄(奄), 서(書), 수(遂), 래(萊), 거(莒), 근(根), 서(舒), 서(徐) 등이 중국문헌에 기록되어 있고 북쪽으로 북평현 부근에 산융(山戎), 불령지(弗令支), 고죽(孤)竹) 등이 역시 중국문헌에 기록되어 있다. 또한 산동지방과 북평현 지방에서 활약한 주왕조(周 王朝)계 소국들로는 제(齊), 노(魯), 진(晋), 채(蔡), 위(衛), 연(燕) 등이 있다. 이들 중국 측 고문헌의 기록에 의하면 비록 주 왕조(周 王朝)가 있기는 해도 제후가 실세를 이루어 통치하는 봉건제도가 지배했음으로 고대 중국계 소국들은 고조선계열 소국들을 제압하지 못하고 도리어 고조선계열이 우세했었음을 시사(示唆)하는 기록을 남겼다. (신용하 앞의 논문 P58~62 인용) (다음에 계속)
 
<본 칼럼은 최태영 ‘한국고대사’ ‘한국고대사를 생각 한다’ ‘단군을 찾아서’ 최인 ‘한국학강의’, 신채호 저·박기봉 옮김 ‘조선상고사’, 신용하 ‘고조선의 통치체제’, 고조선학회 ‘고조선 연구 제1호’, 윤내현 ‘한국열국사연구’, 윤내현·박선희·하문식 공저 ‘고조선의 강역을 말한다’, 서희건 편저 ‘잃어버린 역사를 찾아서1’, 박종원 ‘한국인 자부심 문화열차’, 김순진 ‘아리랑 수리랑’, 송부웅 ‘한민족의 대륙역사’, 김부식 ‘삼국사기’, 임승국 번역 주해 ‘환단고기’, 김세환 ‘고조선역사답사기’ ‘동남아유적지를 찾아서’ ‘노을속의 메아리’, 韓昌建 ‘밝혀진 韓민족고대사’, 南帝 ‘命理속의 哲學’. 日本 國書刊行會 ‘神皇紀>-天皇家七千年の歷史’, 李進熙 ‘好太王碑の謎’, 張曉 ‘韓國の民族と その步み’, Joseph Eidelberg 著·中川一夫 譯 ‘大和民族はユダヤ人だった’,酒井忠夫·高橋幸八郞 編 ‘詳解. 世界史史料集’, 洪以燮 ‘朝鮮民族史觀と日本帝國主義の植民政策’ 외 다수 서책을 참조·인용했음을 밝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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